136화
중간 타임에는 앨범깡이라 불리는 소개 등을 이어 갔다. 간단한 게임을 통해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진 멤버는 소소한 벌칙도 받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태연자약하게 폭풍 애교를 부리고 있는 권혜성을 응시했다. 구겨진 표정의 윤명은 보이지도 않는지 뻔뻔하기 그지없다.
아, 쟤도 저런 면이 있었지. 부끄러움은 나와 강태오가 대리로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사전 공개한 하이라이트 메들리를 들으며 멤버들의 설명도 이어졌다. 여긴 각 곡의 센터였던 권혜성과 윤명이 이어 갔다. 어딘가 조금은 어설펐지만 나름 귀여운 맛은 있어 보였다.
팬들은 뭐가 됐든 좋다는 듯이 환호하고 응원해 줬다. 새삼 이게 사랑받는다는 건가, 싶은 기분에 잠겨 있었다. 미션과 시스템 그리고 이벤트는 잠시 잊기로 한 상황이었다.
"다음으론, 그걸 소개해 드려야겠죠? 이 부분은 저보다 정원 씨와 해신 씨가 설명해 드린다고 하는데요. 그럼 두 분, 부탁드리겠습니다."
MC의 유도로 나와 이정원이 마이크를 들었다. 원래부터 정해진 파트로, 공식 1기 팬 클럽 모집에 대한 소식이었다.
"지금부터 저와 정원이가 해 드릴 이야기는, 바로 하이사인의 팬 클럽 하이눈 공식 1기 모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꺄아악!"
다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공식 1기에 대한 화면이 뜨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왠지, 팬 서비스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것도 책임감의 하나라고 봐야 하는 건가. 직장 생활을 하며 업무를 하던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자세한 사항은 공식 팬 카페와 SNS 등의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실 수 있으시며, 가입 경로는 엘론 티켓을 통해 진행됩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으로 하이눈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가장 오랫동안 기다려 줬을 하이눈, 모두 고맙습니다. 이 응원과 사랑에 보답해서 더욱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주고받듯이 대화하며 주변을 다독인 우리였다. 다른 멤버들도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꼬리를 당기곤 손을 휘휘 내저으니, 관객석에선 큰 응원이 쏟아졌다. 얼마 남지 않은 쇼케이스를 생각하며 다음 차례인 타이틀곡을 하러 들어갔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며 각종 VCR과 비하인드 영상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걸 한번 확인하고선, 해야 할 일들을 하러 사라졌다. 타이틀곡… 남은 퍼센테이지는 반드시 이 안에서 채워야만 했다.
* * *
핸드폰 액정 너머로 보이는 영상이었다. 팬덤명 당첨으로 계 탔다고 쇼케이스 추첨에선 떨어진 건가. 사실 얼마 전 메이터스 엔터테인먼트 측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건 바로 고심해서 낸 내 이름이 당첨됐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지은 이름이 불리며 공식 팬 클럽 모집도 설명 들었다. 근데 왜 난 저기에 못 간 거야.
오늘도 권소현과 함께 만나 케이라이브를 보고 덕질을 하던 중이었다. 모든 운은 팬클럽명 공모에서 전부 써 버렸는지 광탈한 쇼케이스였다.
하이사인을 파다 보면 피켓팅을 해야 할 것 같긴 했지만, 왜 벌써부터 이선좌를 만난 기분이 들지? 이 정도면 거의 유사 포도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풀린 비하인드와 응원법 영상을 훑어보고 있었다. 권소현은 애들이 사라지자 제 머리를 헤집고 있는 중이었다.
"타이틀 아가명 센터, 타이틀 아가명 센터."
"아주 염불을 외워라."
"유인아, 난 지금 무슨 소리를 들어도 행복하다. 그러니 마음껏 하거라."
"응, 첫 팬싸도 광탈."
"야, 신유인, 그건 선 넘었지."
"그런가. 그럼 취소."
입으로는 투닥거리면서 눈은 화면에 고정된 우리였다. 풀리지 않은 콘텐츠들이 케이앱 너머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신이는 단 1초도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영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온갖 정보가 가득했다. 저 장면 찍을 땐 저런 일이 있었구나. 왁자지껄한 멤버들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해신이도 목격된다.
…귀여워. 이젠 정말 나도 중증인 것 같네. 기지개를 켜는 모습도, 권혜성과 이유준의 등쌀에 휩쓸리는 얼굴도 그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잘생긴 것보다 귀여워 보이면 답이 없다고들 하더니. 그래, 덕후는 어쩔 수 없지. 난 평이눈이야. 얘들아, 짱이사인 하자.
이따가 올릴 영업 멘트를 떠올리는데 그와 동시에 뮤직비디오에서 본 것과 흡사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어두운 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 있는 메인 화면이었다.
시야가 돌아가자 새까만 배경 속에서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놀이 기구들이었다. 이내 7개 구간이 하나로 이어지며 커다란 별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건 또 봐도 예쁘네. 하늘에서 본 광경으로 별자리를 만들 줄이야. 메이터스, 당신들 변태라서 아주 마음에 들어."
돌아가는 오르골 소리를 끝으로 멤버들이 다시 무대 위에 나타났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상이었는데 메인 복장인 뮤비에서 본 그 옷이었다. 미친아, 저건 실물로 봐야지.
양쪽이 다른 소매에 핏되지만, 벨크로 장식이 많은 착장이었다. 기장이 길진 않아서 팔을 들어 올리면 허리가 살짝 보이곤 했다.
메이터스, 이 변태들아! Light와 다를 바 없이 온통 흰색이었음에도 캐주얼하던 아까보단 패턴이 잡힌 차림이었다. 센터에 선 윤명을 보곤 권소현이 나를 흔들어 댔다.
"으악! 너무 좋아 어떡해. 명아!"
"야, 화면 안 보여."
흔들리는 몸을 멈추자 인트로가 흘러 나왔다. 배경에는 여전히 몽환적인 이펙트가 나오고 있었는데 팔을 들어 올린 동작을 시작으로 각이 잡힌 안무가 진행됐다.
- wish the night
이 밤 달빛에 비쳐 오는
너와 나의 emotion
잔잔하지만 힘이 있는 도입부의 윤명이었다. 신비로운 멜로디와 어쿠스틱 악기의 조합이다. 센터에 선 윤명을 기점으로 여섯 멤버가 동시에 팔을 뻗었다. 귓가에서 팔랑거리는 손짓이 마치 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평온한 표정을 짓는데, 그와 달리 움직이는 어깨와 다리는 칼 각이었다. 점점 웅장해지는 사운드를 기반으로 나머지 파트가 이어졌다.
-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어
- 눈 감으면 나타나
아른거리는 감정 속 설렘
댄서인 권혜성과 강태오 두 명이 앞으로 나와 서로를 등졌다.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보는데 반대되는 분위기가 대조됐다. 그 와중에도 뒤에 있던 멤버들은 시시각각 대형을 이동하고 있었다.
동선이 복잡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완곡을 보니 더 깊게 다가온다. 대혜자 엔터 취소, 하드 트레이닝 엔터임을 확정지었다.
- 날 깨우는 melody
별빛에 따라 발걸음을 내디뎌
운명이 여섯 번 반짝일 때
깨달은 일곱 번째 작은 희망
곧 해신이가 파트에 들어가고, 가운데 선 해신이를 기점으로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으며 라이브를 하는 모습이었다. 낮게 앉은 애들은 다리를 움직여 상체를 돌렸다.
미친아, 우리 애들 척추 지켜. 이 부분의 안무는 뮤직비디오에 나오지 않아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리 낮지 않은 음정이었음에도 안정적이고 특이한 미성이 돋보인다. 예쁜 가사와 어우러져 부드러움이 물씬 풍겼는데 거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 목소리였지만 소화력이 좋았다.
어느덧 대각선으로 서서 길게 나열된 구조의 하이사인이었다. 그 사이사이를 지나가며 멤버들의 어깨를 터치했다. 그렇게 이정원의 순서에 다다랐을 땐 다음 타자로 넘어간 뒤였다.
- night 한 밤의 동화
그 여름 환상 속 새로운 감동이 밀려들어
모든 게 궁금해 In your dreams
윤명과 양손을 교차하며 어긋난 엑스자를 그린 이정원이었다. 골반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뒤 어깨를 내리곤 뒤로 사라졌다. 달궈진 순간에 맞춰선 래퍼가 앞으로 나타났다. 가장 빠른 파트가 이어진 구간이기도 했다.
여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랩을 하면서도 안무를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빠르게 엇갈리는 발동작에서도 헐떡거리지 않는 이유준이었다. 저음과 묵직한 딕션이 노래의 무게감을 주는 멤버였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빠르게 흘러가는 구절이다. 박자감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박에만 들어간 랩이 놀라웠다.
- For you to shining
중요한 건 보이지 않아
- 비밀을 알려 줄게
You look happy
I will tell you
이제야 안 나의 깨달음
간주가 끝난 뒤에는 다음 타자인 멤버들이 노래했다. 1절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루틴이 다른 안무를 췄다. 팔랑거리는 옷자락과 눈길이 가는 밝은 머리의 센터인 윤명이 도드라진다.
말간 얼굴의 또렷한 눈빛이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다. 마치 재밌는 걸 발견한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교가 강한 스타일이 아니어서 담담하게 들렸지만, 목소리만큼은 참 깊이감 있었다.
그대로 뒤를 이어 강태오와 권혜성도 곡의 고조를 도와 올렸다. 힘이 있고 각이 산 춤선의 강태오와 날렵하며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권혜성이 잘 어울린다. 페어로 맞춰 움직이는 동작은 손가락 끝과 상하체의 각도 하나까지 맞춰져 있었다.
- 길었던 시간 간절한 동경
더는 외롭지 않아 Come with me
영원히 함께야
- 흔적을 쫓아 담아 보내는 작은 염원
- 희망의 빛 속 그렇게 춤을 출게
멤버 전원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빠르게 흩어졌다. 다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는데 이번엔 다른 래핑으로 인지도를 얻은 문채민이었다. 이유준보단 음이 높은 미성이었지만 꽉 조이는 발성과 악센트가 귀에 때리듯이 들어오는 실력자였다. 과하지 않게 조절하는 기술이 아주 능숙한 인물이기도 했다.
- 모든 건 운명이야
세상이 환희로 들어차
In the fantasy
- 눈부시게 빛나
이게 바로 우리의 평행선
Really destiny
턴을 돌아 온 차례는 해신이로, 높은 음역대의 파트가 곡이 하이라이트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스텝을 찍는 발걸음이 앞보단 훨씬 경쾌하다. 이제는 악기들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노래였다. 점차 올라가는 입꼬리는 이내 환한 미소로 변모해 있었다.
함박웃음에 가까운 얼굴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진주 피어싱이 클로즈업되어 감탄사만 내뱉던 찰나였다.
- 날 깨우는 melody
별빛에 따라 발걸음을 내디뎌
운명이 여섯 번 반짝일 때
- 깨달은 일곱 번째 작은 희망
이제야 알았어 Night
드디어 만났어
이정원의 고음이 연쇄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깔끔하게 올라가는 미성이 쇼케이스장을 가득 메운다. 성량 무슨 일이야.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은 태연한 표정으로 하이 톤을 찍었다.
그 뒤를 이어 해신이가 윤명과 합을 맞춰 화음을 냈다. 완벽하게 각자의 영역에서 통합된 음색을 선보인다. 격해진 드럼 비트와 신디사이저가 유쾌하게 튀어오르는데, 밀고 당기는 변주와 중첩된 소리가 풍성한 곡이었다. 탄탄한 보컬과 퍼포먼스까지 어디 하나 틈이 보이지 않는 무대다.
- 그 여름 환상 속 새로운 감동이 밀려들어
한밤의 동화 그리고 빛나는 우리의 Night
스크린 위로는 환해진 놀이동산이 나왔다. 그 가운데로는 회전목마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주변을 휩쓰는 빛무리에 일곱 멤버들이 비치는데, 센터에는 신비로운 이미지의 윤명이 홀로 서 있었다.
하늘에선 별이 쏟아질 듯 아름답게 빛나고, 새까만 어둠에 파란 물감을 한 방울 떨어트린 듯 아스라이 퍼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렇게 단체 파트를 마지막으로 타이틀곡이 완료됐다. 영상에서 본 별자리처럼 제각기 몸을 돌린 채로 서 있는 대형이었다.
시작은 펼치고 있었지만, 이제는 움켜쥔 손이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의미처럼 다가왔다. 쿵, 쿵, 화면 너머로 본 세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