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타이틀곡까지 완료하며 무사히 끝낸 쇼케이스였다. 그나저나 결과는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두 번째 공연까지 끝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카운트가 이상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애써 괜찮은 척 나머지 진행에 집중했는데 사방에선 아쉬워하는 팬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데뷔를 향한 첫걸음에 멤버들은 모두 들떠 있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도 흐르는 땀을 무시한 채 손을 흔들기 바쁜 상황이었다.
"해신아! 사랑해!"
"유준아! 아악!"
"태오야~! 오늘 너무 멋졌어!"
"하이사인! 얘들아, 고마워!"
마지막까지 웃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그러고는 발맞춰 백스테이지를 지나 대기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분주한 스태프들에겐 고개를 숙이는데 빨간 글씨와 함께 점멸하는 상태 창이 나타났다. 또 갑자기 찾아왔어. 자세한 내용은 못 봤음에도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아, 조금만 더 기다리지. 주변에 있는 멤버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우와, 짱이었다. 그치, 명아!"
"응, 재밌었어. 그리고 엄청 좋았어."
"진짜 데뷔했다는 기분이 드네."
"유준이 너, 태평한 척하더니 이제 솔직하게 말하는구나."
"정원이 형, 그런 건 좀 넘겨 줘."
[미션에 실패하셨습니다.]
[미션]
'데뷔는 성대하게' - 부속 미션 그 첫 번째
라이브 + 안무 퀄리티 98% 달성
성공 시 - 보상: 500 코인 + 블랙 쿠폰 1매 + !HIT! 어드밴티지 찬스
실패 시 - 페널티: 축적 피로도 오픈 (대미지 크리티컬 1단계 - 자세한 내용은 비공개)
[무대 퀄리티]
현재: 97.5% (final)
…망했다. 0.5%가 모자라 실패했다는 알림이 울려 온다. 아니, 솔직히 이건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좀 정도껏 봐주겠지 싶은 심경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진짜 이렇게 냉정하게 카운트할 줄이야.
모로 봐도 이건 내 실패를 바라며 넣은 미션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나 아파야 하는 건가? 걸음은 멈추지 않았지만, 시스템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보상이 제거되었습니다.]
[미션 실패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DAMAGE TIMER]
1단계: 00 : 60 : 00
[TIMER START!]
[DAMAGE TIMER]
1단계: 00 : 59 : 59
강렬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당황하며 눈을 굴리자 타이머가 움직였다. 그래서 도대체 1단계란 게 뭔데! 지레 겁먹기가 무섭게 욱신, 위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통증이 아니잖아. 평소 입버릇처럼 속이 쓰리다거나 하는 지경이 아니었다. 경련이 난 것처럼 누군가가 장기를 꽉 쥐어짜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이게 1단계라니, 걸음을 내딛는 와중에 속이 뒤틀린 것처럼 메스꺼워졌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수 있는 기분이란 게 뭔지 잘 알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멤버들을 쫓아가는데 옆에 있던 문채민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차마 답변해 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너무 힘든 상태였다.
"형,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그냥, 좀 긴장했던 것 같아. 별 건 아니야."
"그래? 하긴, 형 원래 많이 떨었지."
"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 나 조금 생각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얘들이랑 얘기하고 있을래?"
"어? 어… 그래. 알았어."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 말을 따라 주는 문채민이었다. 일단 핑계껏 빠져나오긴 했는데, 페널티인지 뭔지가 엄청나게 아프다. 위경련이 났을 때보다 고통이 심한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을 상태였다. 그래서, 이 통증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건데. 간절한 마음으로 타이머를 지켜봤지만 3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 보인다. 속은 점점 메스꺼워지고, 이제는 눈앞까지 흐릿한 느낌이었다.
…망할, 데뷔 쇼케이스에서 쓰러졌다는 구설수는 만들 수 없어. 아득바득 턱관절에 힘을 주며 멤버들의 뒤를 쫓아 대기실에 입성했다.
적당히 마무리 지은 이후 화장실부터 달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문을 열어 본 방은 온통 깜깜한 광경이었다. 당황하기도 잠시 '펑' 하는 폭죽 소리가 이어졌다.
"하이사인 첫 공식 데뷔 쇼케이스를 축하합니다!"
"모두 잘했어요. 무대 멋지던데요?"
불이 켜지며 그와 동시에 여러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가장 앞선 이정원은 먼저 상황 파악을 완료한 것 같았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은 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친다.
…이정원, 제발 누르지 마. 차마 말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던 과정이었다. 사방에선 고생했다는 박수가 쏟아지며 언제 준비한 것인지 모를 케이크가 내밀어진다. 고마운데, 진짜 좋은데 이건 타이밍이 너무 나쁘다. 윽… 진짜 토할 것 같아.
"어? 와~ 이게 다 뭐예요."
"이런 것도 준비해 주신 거예요? 너무 감사합니다."
깜짝 서프라이즈에 놀란 권혜성과 문채민이 케이크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점잖은 척하면서도 상기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애들이었다. 무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미묘하게 달아오른 얼굴들이다. 그나저나 제발 얼른 마무리 지어 줘. 이를 앙다물며 버티고 있었다.
"얼른 초 불어 주세요."
박재민과 오병은의 재촉에 멤버 모두가 모여들었다. 작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둥글게 서서 서로를 마주 보는 중이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주자 후, 하는 바람과 동시에 깔끔하게 꺼진 불꽃이었다. 이젠 얼추 마무리 지어진 거겠지. 힘겹게 몸을 물리며 무리 속에서 빠져나갔다.
"다시 한번 하이사인의 정식 데뷔, 축하드립니다."
"짱이사인 최고~"
"혜빈 씨, 오늘 본 것 중에 목소리가 제일 크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길 한참이었다. 좋은 사람들임을 확신했는데 특이해서 그렇지, 이런 소속사가 흔치 않긴 했다.
"…우선, 이렇게 챙겨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곳에서, 좋은 곡으로, 멋진 무대 할 수 있었던 건 팀장님을 비롯한 회사분들 덕분이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프라이즈 진짜 깜짝 놀랐어요!"
리더인 입장에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각오를 다지곤 심호흡을 한 뒤 생각해둔 멘트를 내뱉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꺼내는 와중에 고통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식도를 따라 위액이라도 역류하는 듯이 메슥거리는 기운이 솟구친다. 티가 날까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 그런 내 뒤로 권혜성과 윤명이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포커스가 저리로 넘어가며 간신히 물러선 시점이다.
조용하던 이유준과 강태오도 기쁜 기색이 엿보인다. 다들 티를 내는 법이 달라서 그렇지, 얘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누구 또 올 사람이 있었나? 진짜 타이밍 나쁘다.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부디 빨리 끝내 주길 바랐다. 이제는 속이 쏠리는 것도 점점 심해지는 듯했다. 어째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한껏 게워 내고 싶어진다.
"어? 한 실장님, 오셨어요?"
"이런, 한발 늦었네요."
"실장님, 왕지각이에요."
"어쩔 수 없네요. 오늘 무대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이건 대표님께서 주신 특별 선물입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건네는 한지헌이었다. 이정원이 받아 드니 안경을 치켜올린 한지헌이 알려 줬다.
"특별 회식이라고 전달하셨습니다. 음식점은 이미 예약해 놓으셨고, 결제는 이걸로 하시면 된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럼 오 팀장님, 오늘 픽업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이사인 여러분도 앞으로의 활동, 힘내 주세요."
이걸로 본론은 끝났다는 듯이 쿨하게 사라지는 한지헌이었다. 등을 돌려 대기실을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는데 나를 한번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하다. 회식 소식은 우리를 제외한 전 직원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평소 공과 사가 확실하던 김영하가 쾌재를 부른다.
…지금 이 상태로 회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 아니, 타이머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무리다. 어지간히 아픈 건 넘기는 사람인데 이건 도를 지나쳤다.
"아, 여러분은 식사만 끝내시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오병은이 사전 고지를 하며 다음 일정을 설명해 왔다. 활동에 앞서 오랜 시간을 잡아 두는 건 힘들겠다고 생각한 배려였다. 강태오의 대답을 끝으로 정리에 들어갔는데 드디어 나도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멤버들 사이에서 옆에 있던 이유준에게 말을 걸었다. 얼핏 본 거울 너머론 희다 못해 백지장처럼 물든 내 얼굴이 비쳤다. 아무리 참는다고 하더라도 이 눈치 좋은 애들 사이에선 오래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힘을 너무 준 탓이었는지 턱관절이 시큰거린다.
"…유준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형, 안색이……."
"…화장실을 오래 참아서 그래. 금방 다녀올게."
"어, 그래. 혹시 몸 안 좋은 건 아니지?"
"그냥 화장실이라니까. 나 찾으면 말 좀 해 줘."
이유준의 눈길이 내 등 뒤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일단 느긋한 태도로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척했다. 그러곤 오전 중에 발견해 놓은 구석의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모여 있을 장소에서 멀어지자 느긋하던 발길이 점차 빨라진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 장소를 발견하고서야 입가를 틀어막으며 들어간 화장실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칸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제일 안까지 몸을 끌었다. 쾅! 하는 큰 소음과 함께 젖히듯 문을 열곤 변기 커버를 열어 허리를 수그렸다.
그와 동시에 참고 있던 고통이 물밀리듯 들이치는 중이었다. 소리고 뭐고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역류하는 위액만 게워 내길 한참이었다. 먹은 게 적어 토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차마 숙인 허리를 펼 순 없었다.
변기 위 칸을 잡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데 오죽하면 생리적인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다. 운 게 10년도 전의 일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우웩, 무슨 일이야… 시스템, 이 망할……."
아픔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그래도 참지는 않았다고 아까보단 조금 덜한 기분이었다.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 휴지를 뜯어 내곤 입가를 틀어막듯 조용히 읊조렸다.
저당금이고 파산이고 뭐라 할 때도 욕은 안 했는데, 이번엔 정말로 비속어가 목 끝까지 차오른다. 더는 게워 낼 것도 없을 것 같아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린 다음 밖으로 나섰다.
고통스러움은 여전해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문 같았다. 그래도 매무새는 정리해야 한다고, 간신히 몸을 이끌어 세면대에 다다랐다.
"…회식 갈 수 있을까. 이거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거야……."
1단계라더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수치다. 앞으론 이것보다 더한 것도 있단 얘기잖아. 밀려오는 공포에 팔을 뻗어 물을 틀었다. 맞은편에는 사람의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