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용케도 다른 애들에게 안 들켰다 싶은 정도네. 내 성격을 알아서 긴장했나 싶어 하며 넘겨준 듯하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곤 입가를 헹구려고 휴지를 떼어낸 참이었다. 툭, 투둑.
"어?"
코안이 뜨거워지며 불타는 것 같더니 이내 무언가 뚝 하고 흘러내린다. 당황스러움에 휴지를 다시 대어보자 눈앞에는 빨간 선혈이 나타났다. 야, 진짜 하나만 해라…….
"…코피."
위통으로 숙인 허리는 펴지도 못한 채 아래를 내려보길 한참이었다. 뚝, 뚝 다급하게 틀어막았지만 붉게 물든 휴지 너머로 빠져나간 피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아픈 것도 깜빡했을 정도였다. 이게 진짜 1단계라고?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문제가 발생한 의상을 발견했다.
"망했다."
기습적인 출혈 덕분인지 상의 앞판에 핏방울이 물든 게 드러났다. 이거 우리 메인 의상인데, 심지어 새하얘서 숨길 수도 없어 보인다. 얼굴이 엉망인 건 둘째 치고 이것부터 숨겨야겠단 생각이 밀려들었다.
인근에 있는 휴지를 더 뜯어, 코는 꽉 눌러 놓고 세면대의 온수를 틀어 닦았다. 축축한 걸 떠나 이것만큼은 숨겨야 해. 꾸준히 이어지는 통증과 달리 코피는 조금씩 멎을 기미가 보이긴 한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잖아.
여전히 위는 욱씬거리고 장기를 꼬는 듯한 아픔도 이어졌다. 하지만 쏟아 내듯 헛구역질을 한 뒤 조금은 잊힌 듯이 감춰졌다.
놀란 심장에 맥박 소리가 귓가까지 둥둥 울리고 있었다. 그저 조급한 마음으로 의상의 핏물을 빼고 있을 뿐이었다. 타이머는 여전히 째깍거리니, 서둘러 저게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당장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보인다.
* * *
"형, 왜 이렇게 물에 쫄딱 젖었어?"
"으악, 진짜네! 해신이 형 옷이 다 젖었는데?"
"어, 그 세면대 물이 안 나와서 누르다가 튀는 바람에."
"하여간에, 형도 은근히 덜렁거린다니까."
어떻게든 숨겨야겠단 마음으로 간신히 돌아온 대기실이었다. 물이 들기 직전에 서둘러 빤 덕분인지, 그럭저럭 원래의 색을 되찾은 의상이었다.
물론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대충은 정리한 이후였으니 모두 잘 속아 주는 듯하다. 코피도 멎었고, 희게 질린 안색도 뺨을 때려 가며 붉은 기가 올라오게 만들었다.
여전히 숨을 쉬기 힘든 것 같은 아픔이 따르고 있었으나, 줄어들어 가는 타이머를 보며 꾹 참고 있길 반복했다.
권혜성과 윤명에게는 적당히 대꾸하며 탈의하려고 준비하는데, 어디선가 지긋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유준이나, 이정원은 아니겠지? 눈치 100단 둘에게 들키는 게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불길함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딘가 놀란 듯한 얼굴의 강태오와 마주쳤다.
쟤가 왜?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봤는데 사방으로 잘게 흔들리는 동공을 목격했다. 영문을 모르겠는 와중에도 위가 아파 미간을 찡그렸다. 소리 죽여 입 모양으로 물어보니 당황한 듯 천천히 대꾸해준다.
'왜……?'
'…벨트.'
손짓으로나마 제 허리에 손을 올려 보이는 강태오였다. 벨트라니?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숙이다가 벌어진 장식 틈으로 보이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아, 이런. 디테일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여기도 피가 묻어 있었던 듯하다.
이동하며 벨크로 장식이 몸판과 분리됐고, 그러면서 그게 강태오의 눈에 걸린 모양이었다. …이거 큰일인데. 물감이나 페인트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여기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 게다가 너무 뚜렷한 검붉은색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혈액이란 걸 모를 수가 없겠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을 들어 허리춤부터 가려 버렸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나마 연기했다.
"…맞다, 화장실에 뭘 좀 놓고 온 것 같은데. 잠시 다녀올게요."
아픈 것도 잊은 채 달려 나가듯 몸을 움직였다. 속은 여전히 뒤틀리듯 아프고, 째깍이는 타이머가 신경 줄을 갉아먹는다.
그래도 당장은 이것보다 급한 게 없는 듯했다. 아까의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피가 굳기 전에 얼른 지워야 해.
손이 델 정도의 뜨거운 물을 틀곤 의상을 헤집어 물에 끌어들이는데 입구에서 여기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멈칫, 그에 놀란 내 몸도 고장이 난 것처럼 굳어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어, 태오야."
아까와 달리 흔들리는 두 눈을 갈무리한 강태오가 나타났다. 들켰을 때부터 뒷일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뒤쫓아왔을 줄은 몰랐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난감한 이 상황도 묻히기만을 기도했다. 물론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거 피 맞지."
"그러니까. 그, 화장실 문에 날카로운 게 있어서 거기에 찔렸거든. …의상에 묻은 것도 몰랐었네. 고마워. 네 덕분에 팀장님한텐 안 혼나겠다. 얼른 빨면 지워질 테니까."
차마 저쪽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 의상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좀 물어봐. 그럴듯하게 대꾸했음에도 걱정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거울 너머로 비쳐 오는 강태오의 시선이 매섭다. 항상 남들에겐 져 주는 인물이었으면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도 위는 계속 아프다. 희게 질린 내 안색을 목격해서였을까, 이내 강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봐주려는 건가.
안도감에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던 무렵이었다. 코안이 다시 뜨거워지며 뚝 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아."
"……!"
쏟아지는 세면대의 물속으로 핏방울이 떨어지며 분홍빛을 만들어 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다시 시작된 코피다.
한 손은 의상은 잡은 채 다른 한 손을 뻗어 휴지를 찾아냈다. 더듬거리며 당황한 뉘앙스를 풍기자 척척 다가온 강태오가 내 코를 틀어막았다. 놀란 기색이 가득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등을 내리누른다.
"고개 들지 마."
"…어."
"일단 휴지부터 꽉 잡고 있어."
내 두 손은 코를 막은 휴지를 잡게 하고선 주변을 정리하는 강태오였다. 눈치를 보며 돌아보니 미묘하게 미간이 찡그려져 있었다.
속도 여전히 메스꺼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데 물에 젖은 휴지까지 내다 버린 뒤 날 돌아본 강태오였다.
"…데뷔에 가까워진다고 좀 무리했나 봐."
"그나마 나한테 들킨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유준이나 정원이 형이었으면 이 정도 선에서 안 끝났어."
"……어, 알지."
"그것 말고는? 당장 활동 들어갈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 그냥 단순한 코피야."
사실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았다. 나오는 건 없지만 위가 쥐어짜인 듯 아프기까지 했다. 거기에 쟤한테 들켰다는 생각으로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흐르는 땀은 괜찮은 척 무마하며 강태오와 대치하길 한참이었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의상을 입고 희게 질려 있는 이 상태가 믿기지 않았다. 시스템, 이 망할 자식아.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 * *
"정말 두 분은 안 드셔도 괜찮으세요?"
"네, 전 좀 긴장했었는지 안 들어갈 것 같아서요. 태오, 넌 가서 같이 먹다가 오지 그래, 그래도 첫 쇼케이스 뒤풀이인데."
"아니야. 매니저님, 참석 못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때문에 두 번이나 왕복하게 돼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럼 이따 다른 멤버분들 모셔다드리면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우리를 돌아본 박재민을 마중해 주곤 소파에 앉아 탈력감에 몸을 늘어뜨렸다. 화장실에서 한참을 대치한 끝에 코피가 완전히 멎은 것을 발견했다.
30여 분 남아 있던 타이머로 인해 위통은 계속 있었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이번에도 져 준 강태오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둘 다 난처한 상황에 엉망인 꼴이었지만 반쯤 소품을 분리하며 들어가서인지 그럴듯하게 빠져나갈 수 있던 상황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멤버들의 물음에도 아무 말을 못 하는 나 대신 핑계를 대 준 강태오였다. 그 덕분에 무사히 쇼케이스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DAMAGE TIMER]
1단계: 00 : 00 : 00
[DAMAGE TIMER 완료]
[대미지 크리티컬 1단계 해지]
그 무렵에는 타이머도 끝이 나며 붉게 물든 시스템 창도 사라졌다. 거짓말같이 멀쩡해진 상태에 내 안색도 서서히 돌아왔다.
하지만 아까 겪었던 통증 탓일까, 도무지 회식 자리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위기를 초 치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가만히 있던 강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팀장님, 매니저님, 너무 죄송한데 먼저 숙소로 좀 가 있을 수 있을까요?'
'네? 태오 씨,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러게, 태오 너 얼굴이 좀 질린 것 같다.'
'아픈 건 아닌데,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런지 밥이 안 들어갈 것 같아.'
'네, 정 그러시면 강제는 아니니까 숙소로 먼저 모셔다드릴게요. 재민 씨, 어떡할래, 내가 숙소에 들렀다 갈까?'
'아니요, 팀장님. 제가 모셔다드린 후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나보다 먼저 나서선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강태오였다. 어쩐지 저기도 희게 질려 있었는데, 아까의 과정을 목격한 걸 떠올리니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별말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여길 돌아보며 추가로 이야기했다.
'저기, 그리고.'
'네?'
'해신이 형도 아까 화장실에서 말하더라고요. 지금 먹으면 속이 좀 부대낄 것 같다고. 그랬지?'
'어? 어…….'
너……. 이제 보니까 내 상태가 별로인 걸 알아, 데리고 빠지려는 모양새였다. 어째 리더가 되어 멤버에게 도움만 받는 기분인데. 적당히 응대하며 넘기려 들자 아쉬워하는 권혜성이 보였다.
'형도 회식 안 가? 에이, 뭐야. 아쉽게.'
'어디 안 좋아? 아까부터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나도 잠을 좀 설쳐서 그래. 긴장을 많이 했었나 봐. 얘들아, 너희끼리 먹고 올래? 나랑 태오는 먼저 숙소로 좀 가 있을게. 정원아, 갑자기 자리 빠져서 미안한데 애들 좀 부탁할게.'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야. 가서 먼저 쉬고 있어.'
걱정하는 다른 멤버들을 뒤로하고, 이정원에겐 부탁까지 남기며 먼저 돌아온 숙소였다. 땀에 전 몸부터 씻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사이 본인의 방에 들어가서 짐을 내려놓은 강태오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래, 일단 얘 입부터 막아야지. 당장 내일 있을 스케줄을 떠올리니 새어 나갈 소문부터 신경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