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태오야, 아까."
"…넘어가 줄게."
"그래 줄 수 있겠어?"
"성격 뻔히 아는데 굳이 밝힐 마음은 없어. 그래서 먼저 빠진 거기도 하고."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도 회식 못 갔잖아."
"됐어, 애초에 그런 자리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 형식상 가려던 거라 상관없어. 일단 피곤할 테니까 먼저 씻고 자."
"애들 오는 것만 보면 바로 잘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됐다니까, 같은 말 반복하게 하네. 정 미안하면 얼른 씻고 나오든가."
"그래."
그렇게 나를 한 번 돌아본 강태오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고요하고 적막에 빠진 거실에 남아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시스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강태오가 사라진 이후에야 떨고 있던 내 손을 볼 수 있었다.
* * *
"윽, 배불러."
"그러게, 혜성이 형 과식한다 싶었지."
"명이 먹는 것 따라가다가 이렇게 됐어. 아, 소화 안 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혜성이 너 되게 나약하다."
"네 위가 대단한 거야."
"이제 활동 시작인데 조절했어야지. 혜성이 넌 얼굴 안 붓게 꼭 소화시키고 자. 알았지?"
식사만 끝냈는지 일찍 돌아온 멤버들이었다. 권혜성은 소파 위로 짐을 던지곤 늘어졌는데, 그 뒤에서 이정원이 팩트를 날렸다.
"…넵."
권혜성이 반성한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대답에선 시무룩한 척했지만 저건 순전히 위트였다. 쟤도 안 그런 척하면서 기가 세단 말이야.
"다들 잘 먹고 왔나 보네."
"응, 근데 형이랑 태오가 없어서 아쉬웠지."
"미안, 다음엔 우리도 참석할게."
그 뒤론 아쉽다는 행색의 문채민과 이유준이 말을 걸었다. 대충은 그럭저럭 넘어간 것 같아서 안도하던 참이다.
"자, 소화제 마셔."
"유준이 형, 고마워. 근데 나 이거 들어갈 배가 없어."
"응, 우리 혜성이, 직접 먹여 달라고? 그래, 알겠어."
"우욱, 사람 살려."
"형들, 지금 뭐 해?"
"채민아, 넌 저런 거 배우지 마라."
"얘들아, 다음 타자 누구야?"
대거리를 하는 애들을 지켜보다 씻고 나온 사람을 목격했다. 저들끼리 밴 안에서 순서라도 정해 놓은 모양인지 다음 차례가 욕실로 향했다. 목에 수건을 두른 이정원이 거실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까부터 무슨 작당이라도 꾸미는지 옹기종이 모여 있는 그림이었다.
얘네는 진짜 힘들지도 않나 보네. 이제는 이런 일에도 적응이 되어 있었다.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가장 신기했다.
"형! 여기 앉아!"
가만히 떨어져서 구경하자, 권혜성이 제 옆자리를 팡팡 내리친다. 소파가 푹 꺼졌다 올라오며 반대편에 있던 윤명이 드러누웠다.
"누워 버리면 해신이 형이 못 앉잖아."
"네가 소파 눌러서 그런 거잖아."
"괜찮아. 명아, 계속 누워 있어. 나 바닥에 앉으면 돼."
투닥이는 둘을 놓아둔 채 이유준의 옆으로 다가갔다. 역시 눈치 하난 끝내준다니까. 주저앉기가 무섭게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줬다. 현관 근처의 복도에는 멤버들을 확인하러 나온 강태오도 서 있었다.
"아, 우리 티위터에 오늘 감사했다는 인사 올리자고 말이 나와서. 아까 했지만 단체로 한 번 더 올릴까 싶더라고. 한 실장님께는 정원이 형이 미리 컨펌 받아 놨어. 형이랑 태오 쟤만 사진 고르면 되는데 이것 좀 봐 줄래?"
"어, 그래."
"알았어."
우리가 없는 사이 뒷마무리까지 고민을 해 놓은 듯했다. 쇼케이스가 끝난 이후 멤버스 티위터에 게시 글을 올렸지. 각자의 이름을 걸어 놓은 채 셀카와 함께 여러 인사를 한 것이다.
오늘 날짜로 올라간 8개의 티윗이 나타났다. 저 위로는 단체 인사를 한 번 더 게시할 예정으로, 아까 찍은 단체 컷을 보여 주며 멤버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강태오도 무리에 합류한다.
여전히 강태오는 나를 신경 쓰는 듯 눈치를 봤지만, 애써 못 본 척 사진 고르기에 집중했다. 일단은 무사히 넘어간 하루에 그저 감사한 기분이었다.
* * *
데뷔 쇼케이스는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기에 진입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새벽같이 들른 숍이 그 증거였다.
비몽사몽한 애들을 깨우곤 공식 스케줄을 위한 준비를 했다. 처음으로 보이는 출근길이기에 사복까지 꼼꼼하게 피드백을 받아 입은 상황이다. 이러면 사복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아무튼 코디 전담의 김윤하 팀장을 비롯하여 매니징 팀의 케어 속에서 밴에 올라탔다. 한숨 돌리려고 하니, 그제야 뭔가 안도감이 밀려든다.
어제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찍 누운 반면에 악몽을 꾸며 설쳤다는 게 정답이었다. 꿈속에서까지 아플 줄은 몰랐지, 끔찍했어. 난생처음 겪는 이중 고통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자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가는 길에는 운전 중인 오병은과 조수석의 박재민에게서 성적 보고를 들었다. 그 순간에 정신이 확 들었는데, 이건 이벤트와도 연관성이 깊은 주제였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뭐든 받아들이자고 생각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저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실패하면 파산인데 이판사판이지, 뭐.
"음원 차트 진입 축하드립니다."
"…네?"
"어제 앨범 공개 18시를 기준으로 멜로우와 플리 모두 TOP 100 차트 인 하였습니다. 실시간 급상승 중으로, 모니터링 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 사이로 가볍게 웃은 박재민이 종이를 넘겨 댔다. 다들 회식이니 뭐니 하면서 들떠 있길래 빠른 일 처리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모든 정리가 완료되었는지 보고서를 보여준다. 그 사람들 집에는 가기는 하나? 월급을 얼마 받는 걸까 궁금해진다.
주변을 돌아보니 차트 인이란 단어에 놀란 듯한 멤버들이었다. 특히나 윤명과 권혜성은 기상 때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멜로우는 어제 20시 이후 40위권대에 진입했습니다. 자정에는 15위까지 올라갔으며 현재 시점 최신 1위입니다. TOP 차트는 23위 유지 중입니다."
"헉. 대박."
"플리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어제 20시 이후 30위권대에 진입, 자정에는 13위였으며 현재 시점 최신 2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중입니다. TOP 차트는 30위 유지 중으로 확인됩니다."
"…진짜요?"
"예, 축하드립니다."
방송 업계에 있었다지만 이런 분야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멤버들의 반응으로 충분한 듯하다.
이정원이 생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살짝 벌어진 입과 크게 뜨인 눈이 그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문채민과 강태오, 이유준도 놀랐는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윤명 역시 머리를 긁적이는 게, 엄청나단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까 회귀 전에도 아이돌이 데뷔부터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업계 밥그릇 싸움이 치열해진 만큼 대중의 반응도 냉담했기 때문이었다. 퀄리티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 상태라지만, 리스너들의 충족도를 채우지 못하면 커트 쳐지는 게 이 판이라고 말했지.
게다가 시국이나 흐름까지 잘 타야 하는데 뭐 하나 어그러지면 올라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서바이벌을 통해 인지도를 얻은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떠올리니 지금 저 성적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듯했다. 아니야, 나는 이제 시작인 입장으로, 항상 마음을 다잡고 있어야 한다.
괜히 들뜬 감정 하나에 모든 판이 어그러질 수도 있는 게 방송업계였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스태프였던 내가 가장 많이 보고 들었다.
"우선, 늦은 시간부터 새벽까지 체크해 주셨을 모니터링 팀원분들께 감사 인사 전달 부탁드릴게요. 매니저님과 팀장님, 감사합니다. 애들이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오늘부터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희야 감사드리죠."
이건 굳이 따지자면 앞으로의 내 각오이자 멤버들을 향한 조언이기도 했다. 여기서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걸 알아들은 몇이 표정을 가다듬는다. 서바이벌 때는 힘든 점이었는데, 같은 팀이 되니 편한 것 같았다.
"방송국 진입합니다."
운전석 사이의 룸미러로 우릴 본 오병은이 핸들을 돌렸다.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할 첫 음악 방송이다.
N.net 서바이벌의 프로젝트성 그룹인 탓인지, 오늘 출연하는 곳은 같은 방송국의 '뮤직어카운트'로 확정 지어졌다. 공중파 3사의 음악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겠지만, 역시 연결 고리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타이틀과 커플링 두 곡만 활동할 예정으로, 타이틀은 사전 녹화를 통해 진행한다고 알려 줬다. 별도 세트장을 지으려면 이런 스케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 얼떨떨하긴 한데… 드라이 리허설 전까지 몸 다 풀어야겠다. 대기실 들어가자마자 스트레칭부터 더 해야지."
"그래, 새벽이라 관절 굳어 있을 텐데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난 목부터 풀어야겠는걸."
"…밖에 팬분들 엄청 많다."
"어? 진짜네! 헉, 엄청 이른 시간인데."
"하긴, 우리 사녹 시간이 새벽 타임이긴 했지."
"이따가 인사 열심히 해야 해."
푸르스름한 하늘임에도 새벽같이 나와 준 팬들이 보였다. 긴장한 마음으로 멤버들이 내리는 걸 지켜보니 차량 안에 있던 나에게까지 들리는 웅성거림이다.
"미친, 애들 왔다!"
"얘들아!"
"잘 잤어? 오늘 사녹 파이팅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릴 향해 외쳐 오는 사람들이었다. 커다란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 들고 있는 모습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단 걸 알게 한다. 오병은과 박재민의 인도하에 몸을 움직이면서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밥 꼭 챙겨 먹고, 이따 뵐게요."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기!"
"무리하지 말고 꼭 중간중간에는 쉬세요."
"오늘 와 줘서 고맙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인파가 몰린 곳을 바라보며 움직이는데 오병은이 넘어지지 않게 몸 쪽을 잡아 준다. 그 와중에 찰칵이는 셔터음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여기서 김윤하의 선견지명이 통했음을 깨달았다.
뮤직어카운트는 방송 특성상 별다른 출근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습적인 촬영이 있을 수도 있는 편이었다. 심지어 삼각대를 세워 둔 채 서 있는 저 구석의 무리는 누가 봐도 연예부의 기자들이다. 그쪽을 향해서도 꾸벅 인사를 하곤 이정원과 이유준의 등을 감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고로 사건 사고나 회피의 시작은 바른 인성과 됨됨이를 보여 주는 것부터다. 최대한 얽히지 말고, 평화롭게 해결하자. 나는 유어돌 때의 마인드를 어떻게든 이어 볼 계획이었다. 전쟁 통 속에서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