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다시 와도 익숙하지만 어색한 기분의 장소였다. 일하러 왔다는 건 매한가지인데 왜 이렇게 색다른 기분이지. 물론 전에는 스태프로 백업하느라 정신없었단 게 큰 차이다. 큰 틀을 비교하면 같을 텐데 참 특이하다. 대기실에 입성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제작진의 손길이 닿은 곳들이 보인다.
이것도 다 직업병이라고, 문에 붙은 이름표부터 내부의 스케줄 타임 테이블표나 셋업 등을 확인하게 됐다. 엔터 스태프들은 먼저 와서 준비 중이었는데, 무대 의상이 세팅된 행거를 보다가 차례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이사인, 스탠바이 하실게요!"
그렇게 간략한 드라이 리허설 이후 본녹화에 들어갔다. 이미 한번 올라간 무대면서 모두의 얼굴이 굳어진다.
나 역시도 뛰는 심장은 어쩔 수 없었는데, 오죽하면 복도를 걷는 내내 사방이 뿌옇게 보일 지경이었다. 카메라 감독들을 비롯하여 주변을 향해 인사했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단 듯이 날아다니는 애들이다.
"얘들아,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이상으로 하이사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별 제작된 세트장을 내려가며 여기저기 흐르는 땀을 닦아 내기 바빴다. 사전 녹화에 와 준 팬들에게는 고맙다는 의미의 리액션을 취해 주곤 나중에 보자는 말까지 남긴 채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일단 큰 실수는 없었던 것 같지. 잠깐의 휴식을 끝으로 다음 스케줄을 하면 된다. 본방송까지는 중간 텀이 있어 외부로 빠졌다가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좀 괜찮은가 봐."
"어?"
다시 원래의 대기실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멤버 중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이런… 하필이면 강태오다. 어제의 사건으로 아직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선 내게 말 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까 새벽부터 음방 준비로 얘와는 말을 틀 일이 없던 편이었다. 걸음의 속도를 줄이며 뒤로 빠지자 목소리를 낮추는 게 제법 노련하다.
뭐라고 얘기해 줘야 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괜찮다는 뉘앙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무거운 애답게 다른 멤버들에겐 티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피곤해서 그랬던 거라니까. 일단 고맙다, 태오야."
"그럼 됐어."
사실 내게는 아직 페널티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직접적으로 몸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후유증이었다.
첫 번째로는 시스템 창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바로 옆에서 말을 건 강태오였다. 어떻게 대화를 열어야 할까 계속 고민했었지. 이것도 이어지면 불화설이 돌까 봐 걱정했는데, 그럭저럭 잘 무마된 듯하다.
어색하게나마 모면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무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시선이 느껴진다. 뭐지? 이상함에 고개를 돌려 보니 화려하게 입은 그룹 하나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대를 보면 저기도 사녹을 하러 온 가수인 듯했다. 일단은 인사부터 할까 싶어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뭐가 됐든 저긴 선배 그룹일 테니까 말이다.
"……?"
"왜 그래?"
"…아니야."
그런데 상대방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룹 전체는 아니고, 멤버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허리를 숙이기 무섭게 표정을 싹 굳힌다. …나 뭐 잘못했나. 괜히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연예계 지식은 공백이 있는 편이어서 어느 회사의 어떤 그룹인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보이는 저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의……?
의아함에 눈만 깜빡거리니 이제는 아예 시선까지 틀며 제 무리에 섞여 멀어지는 사람이었다. 뭔가 이유 없이 미움받은 느낌인데, 화가 난다거나 기분 나빠 할 것까진 없었으니 머쓱함에 머리만 긁적거렸다.
안 그래도 요란한 광경을 보인 상태에서 이런 것까지 알려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었다.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은 넘기기로 다짐했다.
* * *
지금은 중간 스케줄인 보이는 라디오의 대기실이었다. 이른 점심시간 겸 짧은 텀을 받고 식사를 끝내자마자 정보부터 체크했다.
아까 그 사람, 왠지 모르겠지만 영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괜히 방심했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지나가면서 들었던 그룹명을 검색해보니 바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스턴즈의 조승화? 뭔가 익숙한 것 같은데. 아는 낯은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분명 회귀 전이겠지 싶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진짜 어디서 들었더라. 소문이 많은 업계라 찾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우와, 우리 쇼케이스 보신 분 엄청 많으신가 봐."
"케이앱에서 같이 진행됐잖아. 좋아해 주셔서 기쁘다."
"아, 혜성이 형 여기 벌칙 장면도 클립으로 돌아다니는데."
"왜, 뭐, 난 당당해."
"보는 내가 더 벌칙 같았어."
"명이 너 진짜 보면 볼수록 독설가다."
다른 애들은 SNS 트렌드를 확인하느라 바빠 보여서 거기에 탑승한 척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도무지 이거다 싶은 게 안 떠올라 인터넷상의 정보를 확인하니, 우리보다 4개월 정도 앞서 데뷔한 신인 그룹의 메인 보컬이다.
소속사도 아이돌 명가라 불리며 선배 그룹들을 배출한 곳이었고, 푸시도 받으며 좋은 양상을 띠는 듯했는데 도무지 아까의 적의가 이해 가지 않는다.
혹시 내가 지나가다가 발이라도 밟았나? 그랬다면 사과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강태오와 대화하며 움직였던 상황을 더듬었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사람과는 옷자락조차 스치지 않았다. 뭐지? 계속되는 의아함에 고개만 갸웃거리길 한참이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너무 조용하자 이정원까지 물어보는 듯하다. 괜히 구설수의 싹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핸드폰을 닫아 버렸다. 슬슬 녹화도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 흐트러진 세팅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애들의 컨디션은 괜찮아 보이는데. 이것도 전부 리더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니 부지런하게 움직이게 됐다.
방패는 내가 할게, 너희는 제발 넘어지지만 말아라. 멘탈과는 상관없이 사회생활 선배는 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변하긴 한 것 같았다. 이게 파산의 힘인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 * *
라디오임에도 사방에 깔린 카메라가 신기했다. 회귀 전 보직 특성상 라디오 팀에는 방문할 일은 없었는데. 능숙한 디제이들의 진행에 실수만 하지 않길 바라며 떠는 중이었다.
짧은 타이틀곡 무대를 선보이자 광고 타임이 넘어간다. 그 사이로 호스트인 디제이 둘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색하게나마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니 긴장하지 말라며 애써 다독여 줬다. 곧이어 ON AIR의 불이 들어오고 라디오의 본방이 시작됐음을 알려 준다.
"안녕하세요~ 디레스트의 보이는 라디오! 디보라의 민D 도민."
"환D 환준입니다."
"어우, 아침부터 아주 숙소에서 떨려서 난리가 났었잖아요. 지금만 해도 보세요. 아주 텐션이 최고조죠? 오늘! 드디어, 디보라에서 이분들을 모셨습니다. 우리 팬분들이라면 다 아시는 저 민디가 엄~청 애청하던 프로그램, 유어돌 시즌 2 take off에서 대활약을 펼쳐 주신 일곱 분입니다. 밤하늘에 떠오른 아름다운 별자리, 그 이름하야 하이~사인!"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역시, 신인의 패기란 정말 멋있네요. 환디, 제 가슴에 손 좀 얹어 보실래요? 환준이 형, 나 떨려."
"하하, 여러분 오늘 민디가 저래도 이해해 주세요. 사실 저도 많이 신났습니다. 어, 다 티가 난다고요? 같이 애청했던 시청자로서 이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아니, 환준이 형이 웬일이지? 저건 찐텐이라 좀 당황스럽네요. 호스트가 게스트보다 더 떨고 있는 오늘의 디보라, 아무래도 레전드 방송이 나올 것 같지 않나요."
능숙하다 못해 능청을 떠는 이 둘은 6년 차 선배 아이돌 그룹 디레스트의 멤버인 도민과 김환준이었다. 대기실에 찾아갔을 때부터 걱정하지 말라며 조언해 준 게 떠오른다. 시간 관계상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딘가 묘한 분위기였다.
'어제 데뷔 쇼케이스 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나도 짧게 봤는데, 잘하던데요?'
'도민 선배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글귀가 담긴 CD를 건네며 찾아간 대기실이었다. 앉아 있는 둘에게선 경력직의 포스가 느껴졌다. 리더인 이상 적당히 나서야 하는 구간임이 확실해 보였다. 애들을 통제하곤 겸허하게 받아치니 아까부터 말이 없던 김환준이 여길 바라봤다.
'드디어 실물을 보네요?'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따 잘해 봐요.'
라디오 디제이치곤 차분한 어조에 말수가 적단 건 확실해 보였다. 어딘가 묘한 사람이었지. 대기실을 빠져나가는데 마지막까지 등 뒤에선 김환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슬쩍 돌아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머쓱하게 웃어야 했던 게 떠올랐다.
왜 내 주변엔 저렇게 미스터리한 인물밖에 없는 걸까. 우리 대표도 특이한데, 저 인간은 더 희한한 듯했다. 되도록이면 엮이고 싶지 않은 스타일 중 하나로 보였지. 액땜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선은 당장의 방송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김환준도 우리의 팬이라는 식으로 언질하는데, 아까와는 분위기부터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역시 프로 방송인, 어른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적당히 유쾌한 어조의 멘트를 칠 줄 안다.
사실 저 사람이라면 연예인 정보가 적은 나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팀 내 리더로 카리스마 래퍼면서 다수의 타이틀곡을 제작한 올 라운더형 아이돌이었다.
무대 위에선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서 당신의 아이돌 측에서도 몇 번이고 일일 트레이너로 데려오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전부 거절하지 않았었나? 여기서 만난 것이 참 신기한 우연이었다.
"디보라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좋은 기회로 디보라에 참여하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선배님들께서 환대해 주셔서 정말 영광이고,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좋은 모습 보여 드리고 가겠습니다."
"아~ 역시 해신 씨, 너무 멋있다. 환디, 말 좀 해 봐요."
"저도 지금 팬의 입장으로 지켜보고 있거든요. 민디, 저 집중한 거 느껴지죠?"
"환준이 형, 오늘 주접을 나보다 잘 부리는데? 디보라 시청자분들도 아시겠지만, 저와 환디 모두 하이사인의 짱팬이잖아요? 하하, 방송에서 사심 채우지 말라고요? 일단 한번 힘내 보겠습니다."
"아, 시청자분들께서 지금 저보고 직업 만족도 최상 같다고 하시네요. 전 항상 최상이었습니다."
"그럼 일단 멤버분들 소개부터 시작해 볼까요?"
진짜인지 대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분위기를 띄워 주는 모양새였다. 보이는 라디오다 보니 표정 관리를 했지만, 당황한 낌새는 감출 수 없었던 듯하다.
멤버 중 옆에 앉은 권혜성이 나를 보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멤버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호명된다. 인사를 할 타이밍이 찾아와서 나도 장단에 맞춰 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