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41화 (141/328)

141화

"자, 첫 번째 멤버는~ 우리 하이사인에서 리더를 맡고 있으며 대반전미가 모든 이의 마음을 훔치는 아이돌계의 괴도, 해신 씨!"

…괴도? 처음 듣는 명칭에 두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안 돼, 정신 차려. 일반 라디오가 아닌 화면이 송출되는 보이는 라디오다. 게다가 난 리더야. 굳어 버린 입을 열며 애써 능숙한 척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어, 음… 일단 오늘만큼은 괴도 하겠습니다. 하이사인의 리더, 해신입니다."

"큽."

"웃지 마."

"유준 씨도 이런 리더의 모습이 어색한가 본데요?"

"네, 해신이 형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어서요. 얼굴에 써 있는 게 너무 재밌네요."

반대편에 앉아 있던 이유준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정신 차리라며 허벅지를 때리다가 카메라와 아이 콘택트 하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민은 뭐가 됐든 재밌는 광경이 나왔다는 듯이 멘트를 치며 다음 순서를 호명했다.

"나 지금 느낀 건데, 솔직히 말해도 되나? 하이사인분들 왜 이렇게 능숙해요? 특히 혜성 씨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내가 5초 안에 3단 애교는 봤어도 한 15단 애교는 처음 본 것 같단 말이에요."

"열심히 연습했는데, 기쁩니다."

"연습까지 했어요? 이거 점점 더 좋은데요? 우리 디보라 시청자분들을 위해 그만큼 노력하셨단 거잖아요. 난 이런 열정이 너무 좋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핑퐁을 지켜봤다. 역시 환기 캐릭터이자 타고난 재주꾼인 권혜성이었다. 쇼케이스에서 벌칙으로 보였던 애교였는데 예삿일이 아니라는 듯이 다시 행하는 뻔뻔한 애였다.

윤명이 내 친구의 비즈니스를 보고 힘겨워했지만, 그마저도 묶어 가며 예능적인 면모를 이끌어 낸다. 도민이란 저 사람도 어지간한 인간이 아니다. 속에 능구렁이가 다섯 마리는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전 이 조합도 너무 재밌네요. 데뷔 1일 차! 벌써부터 팬분들에겐 여러분의 별칭이 많이 불리고 있어요. 우리… 막내즈? 어라, 이상하다. 제가 알기론 채민 씨가 제일 막내 아니었나요? 하하, 디보라 시청자분들께서 우리 채민 씨를 찐막내 그리고 명 씨를 짭막내, 마지막 혜성 씨를 성격막내라고 하시네요."

"아, 이렇게 막내즈였구나. 이런 조합은 처음 봐서 신기하네요. 7인조에 막내가 3명? 형 라인이 잘 챙겨 줘야겠는데요."

"채민이는 정말 저희보다도 어른스러운 친구라 전혀 그럴 게 없습니다. 워낙에 똑 부러지다 보니 오히려 저희가 더 보살핌받고 있거든요."

"정원이 형, 나는?"

"맞아, 명이 쟨 그렇다 치는데, 난?"

"여기 두 명의 대답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하하! 도토리 키 재기란 말인가요? 이거 아주 관계성이 또렷하네요."

계속 진행된 녹화 속에서 특유의 캐릭터들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멤버들이었다. 과묵한 편인 강태오는 천적 이유준과 묶이는 듯했다. 디제이들에게 외모로 칭찬을 들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장면을 뽑아냈다.

지독한 독기의 이정원 역시 도민에게 예사롭지 않다는 멘트를 따내곤, 개인 보컬 한 소절까지 불러가며 자신의 분량을 차지했다. 걱정할 필요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순탄한 스케줄 속에서 안심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 디보라의 가장 인기 있는 코너죠? 둘 중 하나만 선택?! 밸런스 게임 오브 하이사인~!"

이거라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구간이었다. 저 오브란 멘트 뒤엔 항상 게스트 그룹의 이름을 넣어 주곤 했지. 연출부 선배 중에 디레스트의 팬이 있어서 시간이 비면 들을 일이 있던 라디오였다.

일렬로 서선 사전부터 팬들에게 받은 리서치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이었다. 빠르게 돌고 난 이후론 토크를 진행하는 스타일인데 그렇게 하드코어한 난이도는 아닐 듯하다.

이제 와서 떠올린 거지만, 매니지먼트실이 좋은 스케줄을 잡은 느낌이었다. 역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자, 모두 대형 정비 완료되었죠? 아, 재밌겠다. 환디, 귀 활짝 열고 있어요. 여기서 하이사인 여러분의 모든 취향과 tmi가 다 밝혀질 예정이잖아요?"

"찐덕이라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죠."

"오늘 이 형, 되게 이상한데. 그럼 환디가 2절까지 하기 전에 먼저 시작해 보겠습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

"밸런스 게임 오브 하이사인."

앉아 있던 도민과 김환준의 신호에 맞춰 화면 위로 글귀가 떠올랐다. 시작인가. 리더인 나를 제외하면 나이순으로 서 있는 차례였다.

[혜성 5명] VS [혜성 5살]

"…어."

"아, 해신 씨,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단 얼굴인데요."

"뭐야, 형 왜 고민해. 내가 5명이면 5배로 재밌는 거 아니야?"

"해신이 형, 왜 고민해. 정답은 5살이잖아."

"채민이 너도 너무하다."

저도 모르게 주춤하고 멈춰 버린 발걸음이다. 할 말을 잃은 상태로 고민하니, 뒤에 있던 권혜성이 항의해 온다. 쟤 하나도 버거운데 5명이라니, 택도 없는 소리였다. 문채민의 말대로 선택지가 좁혀지는 마법의 게임이었다. 물론 뭐라고 외쳐 오는 권혜성은 흘려 넘긴 상황이다.

[나는 막내를 하고 싶다.] VS [나는 맏형을 하고 싶다.]

"맏형은 지금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체질에 잘 맞아서요."

다음 타자인 이정원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맏형 포지션을 선택했다. 아까부터 굳건한 모습을 보여서 도민이 호응을 보내 준다. 벌써 확고한 캐릭터가 잡힌 것 같은데, 서바이벌 때부터 참 일관된 행동이었다.

[정원과 팔씨름] VS [해신과 한 팀으로 고요 속의 외침]

"우와, 이건 박빙이다."

"난 둘 다 하기 싫어."

"이 선택지면 뭘 해도 지는 거 아니에요?"

"아~ 멤버분들의 리더에 대한 평가가 박한 걸요? 우리 팀이랑 너무 달라서 신기하다."

"너희, 왜 해 보지도 않고 다 진다는 건데."

이건 당신의 아이돌에서 게임 구간 때 보인 걸로 잡은 문제 같았다. 이정원과의 팔씨름이야 어지간해선 이기기 힘들테니 그렇다 치지만, 나랑 한 팀으로 저 게임하는 건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

"1%도 승률은 승률이니까 해신이 형으로 택하겠습니다."

쟤가 제일 너무하네.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 이유준은 그나마 확률이 조금 더 있다며 나와의 게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과 1시간 무소음 독대] VS [채민에게 1시간 랩 강의 듣기]

"……."

"환디, 저거 봐. 태오 씨 할 말을 잃었어."

"왜지? 저라면 랩 강의를 선택하겠습니다."

"그건 환디가 래퍼니까 그런 거고."

"태오 형, 나랑 있는 거 싫어?"

"형, 강의 듣고 싶어? 내가 해 줄까?"

"둘 다 안 끌려서."

점점 더 난해해져 가는 질문 속에서 강태오가 할 말을 잃은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윤명과 아무 말 없이 1시간을 버티느냐, 팩트 폭력 하는 기질이 있는 문채민에게 강의를 듣느냐의 질문이다.

어떻게 이런 것만 골라 온 거지? 일단 내 문제가 아니어서 상관없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코너 속에서 무사히 마무리 지은 라디오 스케줄이었다.

얼추 끝이 난 상황으로, 사방을 향해 인사했다. 모두 바쁜 와중에 라디오의 호스트였던 도민과 김환준이 다가온다. 수고했다며 안부를 전해 주는데, 연차가 있어서 그랬던 걸까. 큰 견제라든지 불편한 상황은 일절 만들지 않는다.

하긴, 갓 데뷔한 신인들 괴롭혀서 뭐 해. 저게 진정한 경력직이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유어돌 일일 트레이너를 왜 거절했는지 모르겠을 정도의 능숙함이다.

"음, 오늘 잘하던데요? 캐릭터들이 확고해서 예능 블루칩으로 자주 불릴 것 같던데. 다음에 또 봐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데뷔 1일 차답지 않았어요. 나도 편하고 재밌게 라디오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환준이 형, 형도 한마디 해야지."

"어, 오늘 일부러 좀 오버했는데 잘 받아 줘서 고마웠습니다."

역시 라디오에서 보인 행동들은 적당히 양념을 친 거였구나. 어딘가 살짝 풀어진 것처럼 굴던 김환준이었다. 부스의 불이 꺼지자 내가 알던 원래의 모습대로 무겁고 진중한 얼굴이다. 방송하는 사람들이 다 이렇지, 뭐.

"그래도 환준이 형이 나랑 유어돌 같이 본 건 진짜예요. 오늘 좀 유별나게 굴긴 했지만 말이죠. 사전에 말도 안 하고 그렇게 나와서 당황했잖아."

도민 역시 프로 방송인으로 그런 김환준에 맞장구를 쳐 준 게 틀림없었다. 경력이란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 같은데, 별도의 사전 고지는 없었던 듯하다. 같은 멤버에게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

"넌 얘기 안 해 줘도 알아서 잘 맞추니까 그랬지. 뮤직어카운트 사녹 하다 왔으면 이젠 본방 들어가겠네요.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도민과 김환준을 뒤로하고, 다음 스케줄로 이동했다.

그나저나 경력직이라서 그런 건가, 뮤직어카운트 사녹을 하다 왔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우리 얘기는 안 해 줬는데 척척 맞히는 게 신기하다. 하여간에 여간내기들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도 상대하기 힘든 기운이 맴돌았다. 기왕이면 마주치지 말아야지. 어딘가 찜찜한 느낌이 든다.

* * *

다시 오게 된 뮤직어카운트 현장이었다. 본방송 직전이라 그런 건지, 조금 더 급박하게 흐르는 게 느껴진다. 잠시 뒤엔 인터뷰를 비롯하여 여러 일정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대기실이 멀지 않은 탓에 동선이 겹친 건지, 다시 마주친 조승화가 떠오른다. 제 그룹 멤버들과 함께 있었는데 집요할 정도로 내게 따라붙는 시선이었다. 얼마나 진득했는지 이번에는 이정원과 이유준도 알아챘을 정도였다.

'…해신아, 아까부터 저분이 널 엄청 쳐다보는 것 같은데.'

'어, 나도 알고 있는데, 일단은 조용히 넘어가자.'

'형,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그래서 나도 민망해.'

문으로 차단된 공간에 들어서기까지 이 둘의 추궁이 이어진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할 지경으로, 그냥 지인과 닮아 보여 그런 것 같다고 둘러댔다. 내가 왜 생판 모르는 적의를 감싸 줘야 하는 거지. 바보이긴 하지만, 이런 쪽의 호구는 아닌데.

일단 조심하라는 이정원의 의견엔 백번 공감하며 알겠다고 대답해 줬다. 그 뒤론 이유준까지 물리며 혼자 앉아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 찾아봤다. 이유를 알아야 대처라도 하지, 아까부터 기시감이 느껴졌다. 우습게 넘겼다간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야."

그러다가 아까는 발견하지 못한 다른 정보를 캐치 했다. 그 사람이 속한 그룹 스턴즈는 우리가 하고 온 라디오의 진행자, 도민과 김환준이 소속된 그룹 디레스트의 후배 그룹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애들끼리 죄다 같은 회사니, 우연이라고 보기엔 조금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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