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그렇게 다시 나머지 대기실들을 돌며 인사했다. 다음 순서인 방을 들어가기 직전에 이유준과 이정원이 나를 돌아봤다. 이유는 문 앞에 붙어 있는 출연진의 이름 때문이었다.
아, 이런. 운이 따른 것 같다는 건 전면 취소다.
[뮤직어카운트 출연자 대기실]
[스턴즈]
그래, 뇌에 힘주자. 4개월 선배도 선배지. 이유 없이 내게 악의를 불태우고 있는 선배지만 말이다. 이제 보니까 강태오도 이유준과 이정원에 이어 알아챈 것 같은데, 3명에게는 그럭저럭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 뒤 노크하여 방에 들어갔다. 조승화도 보는 눈들이 있는데 앞에선 대놓고 시비는 못 걸겠지 싶었다.
"그래요? 거기다 놓고 가세요."
"야, 야… 승화야."
"왜, 내가 뭐."
…시비, 걸 수 있구나. 얼어붙은 분위기에 내 손만 뻘쭘해진 상황이었다. CD를 건네주려던 모션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조승화가 턱짓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하하, 이정원의 표정이 굳으려는 게 느껴져서 강태오에게 SOS 신호를 보냈다. 얼른 쟤 안 가리고 뭐 하냐. 얕게 한숨을 삼켜 낸 강태오가 조용히 발을 내디뎌 이정원의 앞으로 나서 보인다.
맞아, 이정원 쟤, 눈치는 비상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봐주는 타입이 아니었지. 저기도 완전히 믿을 건 못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권혜성과 이유준도 웃고는 있었지만 미묘하게 살벌한 분위기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그나마 윤명이 포커페이스인 게 불행 중 다행인 듯하다.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것 같지도 않고 빠르게 발을 빼기로 했다.
"바쁘신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죄송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 승화가 지금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요."
여기가 스턴즈의 리더인가 보네. 온화한 분위기의 멤버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처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까칠한 애들만 뭉친 그룹은 아닌 듯하지, 한 둘셋만 고전하는 기색이 강하다.
순한 멤버들이 고생하겠어. 뻘쭘한 건 매한가지였으나 왠지 모를 가여움에 그럭저럭 넘어가 주기로 했다. MXP의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는 상태에서 괜한 분란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하이사인분들, 멋진 무대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 인사하러 와 주셔서 감사드렸습니다."
"…감사는 무슨."
"야, 야. 너 진짜 왜 그래? 미쳤어?"
멤버 중 정상인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한 명이 빠르게 속삭이며 조승화의 막말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다 들린 상태다. 리더로서 나와 대화하던 애는 거의 울 것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저런, 못 들은 척해 준 건 내 성격 탓도 있지만 쟤가 안쓰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나도 멤버들이나 다독여서 여길 벗어날까 싶었는데 어라, 이유준의 표정도 심상치 않은 듯하다. 웃고 있긴 하지만 어째 기운이 살벌했다.
데뷔 첫 음방부터 이게 무슨 일이냐. 쓸데없는 루머는 피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채민에게 눈짓을 보냈다. 채민아, 이유준은 네가 맡아라. 어차피 저 시비 상대는 전부 나일 테니까 말이다. 억울하긴 했지만 다른 애들은 빼내는 게 낫다는 걸 잘 알았다.
"형, 가자. 우리도 스탠바이 해야지."
"…그래."
"정원이 형, 형부터 나가."
"가자~ 가자~ 그럼 안녕히 계세요."
"권혜성, 같이 가."
이유준을 먼저 내보낸 문채민을 시작으로 나머지 애들이 문밖으로 나섰다. 권혜성은 그나마 먼저 이성을 챙긴 것 같았는데 인사를 하는 말투를 제외해도 얌전한 미소를 띤 얼굴이 낯설다.
저기도 열받았나 보군. 마지막으로 남은 내가 뻘쭘하게 문을 나서려 하자 리더인 스턴즈 멤버가 거의 울먹거리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고생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쟤한테 성내서 뭐 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봐준다고 했지, 잊는다곤 안 했다. 나중에 갚아 주긴 해야겠어. 내 몫이라기보단 꾹 참고 있는 멤버들 때문이었다. 리더인 쟤에겐 억하심정은 없지만, 이러다 애들이 화병 걸릴 것 같아서 안 되겠다. 호구로 보이면 계속 저렇게 나올 텐데, 나 혼자면 또 몰라, 우린 그룹이니까 만만하게 보이는 건 1절 이상 받지 않을 예정이다.
문을 닫고 나니 여전히 싸늘한 인상의 이정원이 보였다. 애써 등을 토닥이곤 우리의 대기실로 향하던 찰나였다.
"조금만 표정 관리 하자. 여기 복도잖아."
"나도 알아."
"너, 화났구나. 혹시 무대에도 그러고 올라갈 건 아니지?"
"…넌 진짜 성격도 좋다."
"좋은 편이 아니라서 넘어간 거야. 이럴 때는 입 열수록 손해잖아. 애매하게 반박하면 역풍만 맞아."
"그래, 네 말이 정답이겠지."
주변에 들릴까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중이다. 근처에 있던 이유준도 내 말을 들었는지, 표정을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리더란 직책을 이용하여 애들에게 참으라고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결은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대 맞았으면 두 대로 갚아야지. 내가 바보여도 지나가다 얻어맞은 일엔 화낼 줄 안다.
"나중에 갚아 줄게."
"어?"
"말뜻 그대로야. 그럼 이만 들어갈까."
조용히 내뱉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이자 이유준과 이정원 둘이 놀란 듯이 나를 바라봤다. 문채민도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갸웃거리는데, 쟤네도 참 어지간하다.
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권혜성과 윤명이 합류하며 장난을 쳤다.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문채민과 강태오에겐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본방송의 스탠바이에 들어갔다.
* * *
"안녕하세요. 생방송 뮤직~ 어카운트! MC를 맡은 형진."
"여울입니다~ 이번에 인사드려 볼 분들은요. 데뷔와 동시에 많은 케이팝 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룹이죠?"
"밤하늘에 떠오른 빛나는 일곱 개의 별, 하이사인입니다!"
"어서오세요~!"
"네, 인사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본방송을 위해 첫 데뷔 인터뷰를 하는 자리였다. 우릴 찍고 있는 카메라 앞에 서서 뮤직어카운트의 MC들과 함께 합을 맞췄다.
양쪽 모두 인지도가 있는 보이 그룹과 걸 그룹의 멤버들이었는데, 능숙하게 분배해 주는 상황이었다. 내 구호를 시작으로 우렁차게 인사하는 애들과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와, 반갑습니다!"
"데뷔 1일 차! 너무나도 떨리실 상황인데, 무대를 앞두고 첫 소감과 팬분들에게 인사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음악 방송으론 첫 무대라 너무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인데요. 열심히 준비한 만큼 멋진 무대를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론 벌써부터 팬분들의 귀를 사로잡은 음원이죠? 타이틀곡 'Night(한밤의 동화)'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이틀곡 'Night(한밤의 동화)'는 꿈을 꾸는 이들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앞서 나아가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숨겨져 있던 잠재력을 깨우치고 펼치는 모습을 몽환적이고 신비롭게 다룬 댄스 팝 장르의 곡입니다. 저희 하이사인 멤버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도전인 만큼 주저하지 않겠다는 포부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중간 인터뷰는 다른 멤버들이 도맡아 줬지만, 곡 소개는 돌고 돌아 리더인 내 몫으로 배정받았다. 덕분에 예상 질문 리스트를 받은 이후 달달 외웠던 일화가 스쳐 지나간다. 리더 포지션, 생각보다 외울 게 너무 많네. 후회하기엔 늦기도 했고 내가 안 하기엔 불안한 감도 강했으니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그럼 타이틀곡의 포인트 안무도 한번 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가능하실까요?"
"네! 물론 가능합니다! 그럼 저와 태오 형이 함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활기차게 대답한 권혜성과 묵묵한 얼굴의 강태오가 한 발 앞서 나가 싸비의 안무를 췄다. 뒤에 있던 이정원과 윤명이 입을 열어 박자를 타 주니 칼박으로 움직이는 동작들이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MC 둘이 따라 하면서 대단하단 제스처를 취해 줬다.
"와! 정말 멋진 안무들이네요. 여울 씨, 눈이 아주 휘둥그레지지 않나요?"
"그러게요! 너무 멋진 동작들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하이사인의 핫 데뷔 무대는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요? 그보다 먼저 오늘도 한껏 다크해진 다섯 남자, 얼티밋 나인과."
"익스트림한 매력의 소유주, 스턴즈의 컴백 무대가 있겠습니다. 생방송 뮤직~ 어카운트!"
간단한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의 시점이 꺼지는 걸 알아챘다. 그제야 굳은 몸에 힘이 풀리니 수고했다는 MC들의 인사가 들려온다. 허리를 숙여 현장을 벗어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형, 리더 한다고 한동안 굳센 모습 보이더니 다시 원상 복구 됐어."
"…성격은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잘하던데? 수고했어."
"다행이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본방송의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먼저 하는 가수들을 지켜보며 백스테이지에서 기다렸다. 연차 순이었던 걸까, 아직은 긴장된 낯의 인물들이 많아 보인다.
케이팝이 활발해지는 계절 탓이었는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인 그룹이 적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경쟁자가 엄청나다는 뜻이겠지. 신인상 등의 말도 안 되는 이벤트는 없어서 다행이다.
스태프의 스탠바이 소식하에 무대 위로 올라가 커플링곡을 진행했다. 쇼케이스에서 해 본 적 있는 만큼 팬들도 중간중간 호응해 준다. 아직 정식 응원법은 없었지만, 팬덤 내부에서 급조라도 했는지 합이 꽤 좋다.
심지어 공식 응원봉이 안 나온 탓에 손에 쥘 수 있는 게 없었을 예정인데,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흰 띠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거 500원 정도 하는 야광 팔찌 아닌가? 무기 같은 공식 봉을 들고 있는 관객들 사이여서 오히려 눈에 띄는 조합인 듯했다. 한눈에 하이눈임을 알아챘는데, 팔에 두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렇게 본무대가 완료되고, 사녹으로 촬영한 타이틀곡이 방영되기까지 잠깐의 텀이 남아 팬들과 교류하던 시간이었다. 여기서도 짧게나마 타이틀을 쳐 주니 스태프의 수신호가 떨어진다. 다음 대기자와 교체해야 할 타이밍이 온 듯하다.
"얘들아!"
"고마워요, 다음에 또 만나요!"
"안녕~"
손을 흔들고 무대에서 내려가는데 뒤 차례인 선배 그룹과는 짧은 아이 콘택트를 통해 인사를 주고받았다. 백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관객석을 돌아보며 팬들을 지켜봤다.
* * *
음악 방송 스케줄 이후로도 인터뷰와 다른 라디오가 하나 더 잡혀 그걸 끝마친 뒤 돌아온 숙소였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긴장을 했던 걸까, 멤버들이 제법 지쳐 보인다.
하긴 새벽같이 나갔다가 한밤중에서야 귀가했는데 여즉 팔팔하다면 이상할 일이다. 권혜성 쟤 빼고 말이야. 확률 어쩌고 트리가 오늘도 빛을 발하는 인물로, 담담한 표정의 강태오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나는 씻어 볼까 싶어서 몸을 이끌어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스케줄은 뭐길래 말을 안 해 준 거지."
오병은과 박재민에겐 내일 다른 스케줄에 들어갈 거라고 전달받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어떤 일정인지 두루뭉술하게 설명해 준 것이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내일도 스케줄이 있긴 한데, 비공식이라 자세한 건 당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침에 저와 박 매니저가 픽업을 갈 예정이니 우선은 푹 쉬고 계세요.'
비공식 스케줄이라니. 그런 건 보통 팬들에게나 비밀이지 않나? 촬영을 가야 하는 당사자들에게까지 말을 안 해 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제법 체계적인 구조의 회사였으니 다 생각이 있겠다 싶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기엔, 당장 내게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낮에 만난 요란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