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단."
"어?"
"뭐야, 뭐가 더 있어? 명이 너 중간 텀이 너무 긴 거 아니야?"
"여러분에게는 미션이 있을 예정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제한 시간 내에 준비를 끝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긴급 미션은 훌륭하게 성공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이사인 여러분께는 보상으로 14만 원이 주어집니다. 글램핑장 인근의 마트에 들러 저녁 식사로 먹을 멋진 바비큐 파티를 준비해 주세요. 가위바위보를 통해 '이긴 사람' 3인이 장을 보겠습니다."
"어?"
"해신이 네가 아침에 말해 준 보상이란 게 이거였나 본데."
"그러게, 나도 듣는 건 처음이라서."
우리의 대화가 막바지를 보이자 운전석에 앉은 오병은이 시동을 걸었다. 갑자기 이렇게 진행해도 되는 건가, 리얼리티라곤 했지만 과할 정도로 날것에 가까운 연출이다. 차량 안에도 카메라가 설치된 게 보였는데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다. 일단 나는 그렇게 웃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형이 먼저 일어나 있어서 다행이다. 저기 둘이었어 봐. 절대로 실패했을걸."
"우와, 유준이 형. 독설 짱. 명아, 네가 생각해도 우리 취급 너무하지 않아?"
"뭐, 대충 맞는 말 아니야?"
"야, 이럴 땐 우리 둘이라도 편 먹어야지. 안 되겠다. 문채민, 너도 합류해. 형들에게 대적하려면 3명은 돼야 한다."
"굳이 나까지 껴야 해? 그리고 팀 먹을 거면 나도 저기로 가고 싶은데. 결과가 뻔하잖아."
"야, 너까지……!"
시끌시끌한 밴 내부에서 강태오가 몸을 틀었다. 복잡한 얼굴은 대충 갈무리한 느낌이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쳤는데 계속 피하긴 뭐해서 눈인사를 건넸다.
카메라 쪽도 곁눈질하곤 대강의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엊그젠 미안했고, 어젠 덮어 줘서 고마운데 지금은 촬영 중이니까 우리 티만 내지 말자.
얘도 생각을 모르겠어서 그렇지, 따지자면 어른스러운 축의 인물이었다. 알아들었단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대충 해결은 된 건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찰나, 분위기를 이끌려는 듯한 이유준이 능청을 떨어 온다.
"그나저나 강태오, 넌 아까부터 혼자 태연하다?"
"갑자기 뭐가."
"흐음, 아침에도 화보처럼 일어났다며?"
"누가 그래."
"음, 글쎄 누가 그랬을까?"
…여기 보지 마. 이유준의 고갯짓에 강태오의 눈길이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반대편으로 돌려 버리니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듯하다. 어색한 것 풀려고 일부러 주절거린 멘트였는데, 하여간에 이유준, 쟤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지나가면서 흘린 한마디 가지고 사람 놀리는 데 장사다.
그리고 내가 언제 화보처럼 일어났다고 그랬어. 그냥 깨우는데, 일어나는 것도 잘생겼다고 했을 뿐이지……. 쟤를 믿은 내가 바보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학습 효과가 없는 듯하다.
"저기, 거기 한가롭고 여유로운 형들? 우리 이제 가위바위보 해야 하는데."
"치사하다. 넷만 완전 우아하게 앉아서."
"혜성아, 지금 내 차림새를 보고도 그런 단어가 나와?"
복닥거리는 애들과는 손을 뻗어 가위바위보 할 준비를 했다. 이거 이긴 사람이 장 본댔지.
…왜? 누가 봐도 일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 이런 건 빠르게 빠지는 게 이득이었다. 잠깐만, 스톱 좀 해 봐! 스킬 끄게 해 줘! 서둘러 상태 창을 돌아보는데,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권혜성이 입을 연다. 저기가 바로 내 두 번째 원수였다.
"안 내면 장 보기! 가위, 바위, 보!"
"……."
저도 모르게 내 버린 주먹으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모든 멤버들의 손을 확인하는데, 사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해신이, 너 진짜 가위바위보 잘하는구나."
"형 또 바로 이겼네."
단번에 승리해 버린 비운의 능력 때문이었다. 어째 이 스킬은 쓸 때마다 손해만 보는 듯한데, 시간이 나는 즉시 꺼 버리자고 다짐하면서도 언젠가 써야 할 걸 떠올리면 속만 쓰렸다. 왠지 끄면 끈 대로 손해를 볼 것 같다.
"해신이 형의 장 보기를 축하합니다!"
"장 보는 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왜 이긴 사람이 가야 하는 거야?"
"그건 제작진분들한테 물어보고. 일단 나머지 둘 마저 뽑자."
"아자! 절대로 진다!"
"저런 애들이 꼭 걸리던데."
"그럼 한 명만 더 뽑으면 되겠네?"
"윤명, 문채민, 승부는 아직 모르는 거거든? 그리고 아까부터 아주 그냥 저주를 해라!"
가장 먼저 일어나서 미션을 진행한 것도 서러웠다. 그런데 이따가 둘이나 데리고 장까지 보게 생겼다. 아, 쥐고 있던 주먹을 바라보다 올라오는 한숨을 삼켜 냈다.
능력은 능력인데, 괜히 서글픈 기분까지 든다. 그래, 그래도 코피 흘리고 시비 걸리는 것보단 낫겠지.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긍정적인 회로를 돌려 봤다. 사실 나는 뒤끝이 긴 편이었다.
* * *
"얘들아,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 구성이 아닐까?"
인적이 드문 마트의 주차장이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위치인데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양옆의 인물들을 돌아봤다. 열린 문안으론 고개를 내민 멤버들이 우릴 보고 웃고 있었다.
강태오는 좀 걱정되는 듯한 모습인 게, 연달아 이어진 사건으로 불쌍한 형이라고 찍힌 듯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회귀한 이후로는 내 인권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뽑히네?"
"해신이 형,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야."
"형, 난 깻잎파야. 상추보단 깻잎으로 부탁할게. 태오 형은 뭐 안 부탁해? 잘 마시는 음료 있잖아. 그거라도 사 달라고 해 봐."
"비타민 티 말하는 거야? 있으면 먹긴 하지만 굳이. 그리고 숙소에서 좀 챙겨 왔어."
…이 배신자들아, 본인들의 저녁 식사는 우리 손에 달린 걸 모르는 건가. 허망하게 남은 애들을 바라보니, 함께 가게 된 두 명이 말해 온다.
"…다들 되게 주문이 많네."
"그러게. 이거 영 얄미운걸?"
윤명과 이유준이다. 하필 왜 이 둘인 거지. 숙소에 입실한 이후 줄곧 함께 생활한 우리였다. 그래서 대충의 성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는데, 우선 전자인 이유준은 입이 과하게 짧았다. 그걸 먹고 저 체격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안 먹는 음식이 많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요리할 줄 알겠냐고. 아까 전에 밥은 뭘 먹고 싶냐는 물음에 딸기라고 대답한 애였다. 저녁밥 물어봤는데 그게 왜 나와.
"그래도 난 좋아. 먹고 싶은 거 다 담아야지."
"명아, 우리 14만 원밖에 없어. 네 위 채우려면 이것도 아슬아슬하다."
나머지 하나는 나름 의욕적으로 보이는 윤명이었다. 후자인 얘는 이유준과는 극단적인 식사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짧게 말하자면 더럽게 많이 먹는단 소리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촬영하며 잘 먹는 걸론 권혜성을 꼽았었지. 고등학생의 패기로 두 그릇은 가뿐히 해치우곤 하는 애였는데 설마 그룹 내에서 걔보다 양이 많은 인물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입소 다음 날 점심의 일로 기억하는데, 숙소에 있는 재료가 없어 간단하게 배달 음식을 시켰다. 어플을 보는 이정원의 옆에서 권혜성이 조잘거렸다. 먹고 싶은 게 많아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더니 그런 애들 뒤로 윤명이 합류했다.
'혜성이 너 두 개나 먹을 수 있겠어?'
'응, 나 완전 배고파. 아침도 조금 밖에 안 먹었거든.'
'정원아, 혜성이 쟤 원래 잘 먹어. 서바이벌 때도 항상 두 그릇씩 먹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럼 이제 명이만 고르면 되네. 명아, 넌 뭐 먹을 거야?'
'음… 일단.'
'…일단?'
'이거랑, 이거랑, 어, 이것도. 아, 유준이 형… 아까 음식 남을 것 같다고 했지. 형 남기는 거 나 줘. 그럼 이건 안 시키게. 음, 이것도 먹고 싶은데.'
'어?'
'헷갈리면 내가 눌러 줄게. 이거 하나랑, 이거 하나랑, 이건 유준이 형이 남긴 거 먹을 거고. 아, 이것까지. 점심이니까 이렇게만 먹어야겠다.'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놀란 얼굴의 권혜성이 윤명을 바라봤다. 저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자신보다 더한 사람을 봐서 기겁한 듯하다.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강태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윤명의 배를 한번 보더니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식에 가까운 소식러 이유준도 혀를 내둘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니 윤명을 잘 아는 문채민만 머리를 긁적거렸다.
'정원이 형, 그냥 시켜 줘. 명이 형 그거 다 먹어.'
'방송 때도 잘 먹는다고 생각은 했는데, 나름 자중한 거였나 보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먹는다고 매일 배고팠어.'
'그때 그렇게 먹고 배가 고팠다고?'
'명아, 너 체한 적은 있냐?'
'아, 5살 때.'
'나 원래도 네가 신기했는데, 더 신기해졌어.'
'혜성이 너도 만만치 않게 이상해.'
'야! 어떻게 신기하다랑 이상하다가 같은 거야.'
정말 윤명은 그 뒤로 배달 온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아주 우아하고 깔끔한 동작으로 빠르게 해치운 제 몫이었지. 현란한 진기명기 쇼 속에서 문채민을 제외한 모두가 말을 잃었던 게 기억난다. 마지막으론 이유준이 남긴 음식까지 처리하며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해 왔다.
아직도 다시 생각하면 조금은 아찔한 일화였다. 가리는 거 많은 편식쟁이랑 끊임없이 들어가는 음식 주머니 둘을 데리고 함께 먹을 저녁 식사 재료를 사야 한다.
이거 밸런스 붕괴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앉아 있는 쟤네는 자기가 빠졌단 생각에 꽃밭인 것 같았다. 현실 좀 깨달아 보라며 한마디 건네줬다.
"제대로 요리할 줄 아는 태오나 혜성이 하나는 쫓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정말 우리 믿을 수 있겠어?"
"…그러게. 그건 좀 문제네."
"맞다! 유준이 형, 요리 못하지! 명이 쟨."
"요리보단 먹는 쪽이잖아."
"채민이 너, 너무해."
"그나마 희망이라면 해신인가."
"미안한데, 정원아 나도 얘네 둘 데리고는 감당이 안 된다."
"우와, 망했다. 저희 이거 바꾸면 안 되죠? 체인지, 체인지!"
"네, 안 됩니다~ 참, 메뉴와 모든 장 보기는 전적으로 저 세 분이 담당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턴 뭘 사 와 달라고 부탁하지 마세요."
단호한 제작진의 거절에 고개를 내저으며 모두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에 강태오와 눈이 마주치는데 입 모양으로나마 뭐라고 말해 온다.
'…괜찮겠어?'
'…….'
아, 완전 허약한 리더로 찍힌 모양이네. 대꾸할 답변조차 찾지 못해 흐린 눈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물론 그저께에는 지나치게 아프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1시간 정도라고. 이제는 완전 평소의 컨디션이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려 드니 그게 답변이라도 된 듯 강태오의 시선이 떨어진다. 양옆의 둘은 별 고민이 없어 보이는데, 이상할 정도로 부담감이 막중한 상황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절망 어린 얼굴의 권혜성이 앉아 있었다. 이정원도 웃고 있었지만 이게 맞는 건가 싶어 보인다. 강태오는 한숨을 내쉬기 바빴고, 문채민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포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게 내 말 좀 듣지 그랬어. 보이는 마트 입구에서 얘네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모르겠다. 굶진 않겠지. 참고로 말하자면 나도 요리는 자신 없었다. 부엌에선 재앙이라고 불리는 이 둘과 함께 있어 나아 보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