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마트에 입장한 장 보기 담당 세 분은 각자 카트를 나눠 음식 재료를 담아와 주세요. 여기서도 다시 특정 재료를 말하며 지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손에 들린 새로운 미션지를 읽었다. 우리 셋에게는 카트가 하나씩 주어졌다. 이래서 이긴 사람이 장을 보는 거였구나. 전적으로 자기 먹을 건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는 의미다.
아니, 그럼 밥은 어떡하라고? 재료를 꾸리는 것도 금지시켰다. 얘네가 제대로 고를 리 없는데, 그걸 정확하게 간파한 제작진이다. 기프트라며, 이거 즐거운 추억 맞나.
"재료만 이야기 안 하면 되는 거죠?"
"메뉴도 금지입니다."
"아, 저런. 형, 우리 어떡해? 다 막혔네."
"잠깐만, 머리 좀 굴려 보자."
"나 배고파."
"명아, 이거 당장 먹을 거 사는 거 아니야. 잊으면 안 돼."
나를 바라보는 이유준과 넋을 놓고 있는 윤명 사이에서 홀로 생각하길 한참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네. 한숨을 쉰 뒤 한 명씩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유준이 넌… 네가 먹을 수 있는 걸 사. 안 먹는 거 사서 굶지 말고."
"알겠어. 근데 진짜 그거면 돼?"
"일단은. 괜히 이상한 거 사서 돈만 축낼라. 그리고 명이 넌……."
제 이름에 빼꼼 고개를 내미는 윤명이었다. 덩치는 큰 게 얼굴만큼은 참 풋풋하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표정이다. 괜히 부담스러워서 주춤 발을 물렸는데 그래도 냉정할 건 냉정해야 했다.
"넌 제발 적당히 사. 재료만 말 안하면 된댔죠? 5만 원……. 네 카트는 절대 5만 원을 넘기지 말 것."
"5만 원?"
"그래, 5만 원 안에서 네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저녁밥'을 사야 해. 알았지? 넘으면 진짜 안 된다?"
"일단 알았어."
"준비되셨죠? 출발하겠습니다. 장 보기, 스타트!"
제작진의 신호하에 각자 흩어진 셋이었다. 뭘 잘 먹지 않는 이유준에겐 자기 먹을 것만 고르라고 설명했다. 윤명도 비슷한 맥락이었으나 예산 초과를 생각하여 제한을 걸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애들 몫은 그나마 멀쩡한 식습관인 내가 골라야 한다.
자신은 없었으나 방법은 이것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론 또 덤터기 썼다. 예전 회식 자리를 떠올리며 음식을 선택했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자리였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도움이 된다.
희태 선배, 강제로 회식에 끌고 가 줘서 고마워요. 물론 그 당시에는 안 고마웠다. 다 지금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소리다.
"일단, 밥이랑 고기 샀고. 채소는 아, 채민이가 깻잎 사 달랬지. 고추장이랑 쌈장. 태오 얘는 비타민 음료수 사 달라고 했던가. 근데… 그게 뭐야? 그거 마시면 잘생겨지나?"
혼잣말을 하며 마트를 돌아다녔다. 카트에는 셀프 캠이 달려 있었는데 까만 렌즈 위로 초탈한 내가 반사되어 온다. 터덜터덜 카트를 끌며 그대로 장을 보니 예능을 떠나 일단은 무사히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형은 이것저것 많이 담았네?"
옆 블록에서 나타난 이유준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는데 느긋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평소와 똑같다. 그래도 쟤한테는 확실히 추억이 된 모양이다. 어제의 감정도 잘 삭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카트가 휑하기 그지없는데 미리 분업하길 잘한 듯하다. 자신의 선견지명과 촉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길 한참으로, 하마터면 14만 원 놔두고 쫄쫄 굶을 뻔했다.
"넌 텅 비었네. 고기 같은 것도 조금 먹다 말잖아. 이걸로 되겠어?"
"음, 지금은 딱히 당기는 게 없는걸."
"지금 말고 저녁에 먹을 걸 사라니까. 아니면 그냥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좀 담든가."
"형도 안 그런 척하면서 규칙 진짜 잘 지킨다."
"…왠지 나만 바보 된 기분인데."
"이래서 형이 재밌다니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져서 몸을 돌려 보니 이것저것 담고 있는 윤명이 보인다. 쟤도 저럴 줄 알았지. 그 와중에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 싶어 살펴보니 계산기를 켜고 있었던 듯하다. 캐릭터들이 특이해서 그렇지, 말은 참 잘 듣는다.
"와, 명아, 이게 다 네 저녁밥이야?"
"그것도 있고, 그래도 형들이랑 채민이 것도 사야 할 것 같아서 내 것 좀 뺐어."
"장하다, 윤명. 비용은 안 넘었고?"
"응, 지금 딱 1,700원 남아서. 해신이 형, 나 과자 하나 사도 돼? 이거 1,650원인데."
"그래, 사. 먹고 싶으면 사야지."
순간 반짝 빛이 난 윤명의 눈이었다. 그렇게 굶긴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이상한 내용물의 카트 이인방을 데리고 계산대로 다가갔다. 제대로 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최선을 다한 무렵이다.
정 안 되겠으면 다이어트 좀 하는 거지. 얘들아, 우린 아이돌이다. 바로 이틀 전에 아팠는데 영양 보충도 제대로 못 하게 생겼다.
* *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글램핑장이었다. 탈력감에 몸부터 누이니 여기저기서 위로의 말이 쏟아진다.
"고생했어, 해신아. 네 덕분에 굶진 않겠다."
"그러게. 형, 잘 나눴네. 유준이 형이랑 명이 형이 고른 거 보고 나 잠깐 어지러웠잖아."
"으악, 다행이다. 요리할 건 있어! 태오 형, 형이 봐도 괜찮지."
"어, 일단 이유준 장바구니는 그대로 아이스박스에 넣어 버려. 저긴 별거 없어서 쓰지도 못하겠다. 얌전히 이유준 밥으로 주고, 윤명 얘 거는… 여기도 과자나 군것질거리 빼고 순 재료는 얘 혼자 먹을 양이라 이따 분리해야겠어."
"와, 명이 너 진짜 군것질 엄청 하는구나~ 형이 분명 저녁밥 사라고 말해 주지 않았어?"
"간식도 식사의 일종인데."
"형들, 명이 쟤는 진짜 어떻게 키 큰 걸까?"
"혜성이 형, 그런 걸로 치면 유준이 형이 제일 신기하지 않아? 명이 형은 잘 먹기라도 하지."
"하하, 나 지금 너무 재밌다. 그나저나 태오 너, 내 거는 그대로 넣으라니 너무하다."
"과일이랑 채소 약간 고른 걸 어디다 써. 너희 둘은 진짜 형한테 고마워해라."
권혜성, 강태오. 놀랍게도 이 구성 안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건 쟤네였다. 생긴 거나 성격만 봐선 동떨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스스로 나서서 거의 모든 요리 당번을 자처했다. 덕분에 숙소에서도 꽤 좋은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나서지 않으면 본인들도 쫄쫄 굶어야 할 판이라 해 준 것 같았다. 자취 요리 정도나 가능한 나와 이정원에, 뭔가 엉성한 칼질의 문채민이었다. 이유준과 윤명은 할 말이 없고, 그나마 쟤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추억이고 뭐고 일단 조금만 쉬자. 미션을 넣었다지만,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자체 콘텐츠라 과한 제재는 받지 않았다. 잠시 뒤엔 무슨 게임이 있을지 모르니까 아주 약간은 휴식 시간이 주어질 듯하다.
기프트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많이 힘들었다. 서도경은 무슨 생각 중인 걸까. 그 인간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 * *
"해신이 형, 우리 이제 촬영한대!"
권혜성의 부름에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니 열린 텐트 너머로 스태프들이 보인다. 세팅이 다 됐는지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름 구색은 갖춘 듯한 느낌이었다. 기지개를 켜곤 마당으로 걸어 나갔는데 여기저기서 각자 쉬고 있던 애들이었다.
잠깐 사이에 그럴듯하게 정리가 된 풍경으로 아이스박스와 간이 테이블이 꾸려진 광경이다. 머쓱하게 제작진들을 보고 고개를 숙이니 인자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준다. 역시 자체 콘텐츠라 이건가. 대외적인 방송이 아니라서 가능한 스케줄이었다.
갑작스럽게 놀래키긴 했지만, 실질적으론 모두 우리끼리 하는 예능이었다. 긴장이 풀린 것 같다며 정해진 위치에 자리했다.
아침부터 프리하다 못해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하루 종일 생얼에 가깝게 유지한 얼굴이 떠오른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돌아보니 야생인에 범접한 권혜성을 발견했다.
입고 왔던 남방은 허리에 질끈 둘러 묶고 있는 채 바지는 발목까지 동동 접은 상태였다. 반팔 차림에 캡 모자를 뒤집어쓴 것까지, 나 정도면 양반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무사히 도착한 하이사인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긴 경기도에 위치한 공기 좋고 물 맑은 ○○ 글램핑장입니다."
"와아~!"
"새소리 들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장까지 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을 위해 여러 가지 스페셜한 게임을 준비해 놨습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거죠? 1박 2일을 보내시는 만큼, 반드시 정해야 하는 룸메이트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준비한 텐트는 2곳입니다. 지금부터 3인과 4인으로 숙소를 편성해 보겠습니다."
메인 감독의 설명하에 뒤를 돌아 텐트를 살펴봤다. 제법 넓기는 했으나 거구의 청년 7인이 몰려 자기에는 좁아 보인다. 3인과 4인이라, 큰 덩치의 윤명과 강태오가 동시에 묶일 걸 생각하면 코앞에 붙어 취침할 판이었다.
무조건 얌전한 애랑 같은 곳을 써야지. 아무래도 전원이 비슷한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엔 반드시 해신이 형!"
"나?"
"왜, 숙소 룸메이트도 정원이 형한테 빼앗겼잖아!"
"도대체 왜 이렇게 나랑 같은 곳을 쓰고 싶어 하는 건데."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불태우는 권혜성이었다. 처음에는 잘 따라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이제는 거의 오기라고 보는 게 정답이다. 맞아, 쟤, 하고 싶은 거 못 하면 앓아눕는 애였지.
내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서바이벌 내에서 맞은편 침대를 썼을 때도 험난한 잠꼬대를 보이곤 했다. 근데 그런 권혜성이랑 옆에 붙어서 잠을 자라고? 자다가 옆구리 안 차이면 다행인 이야기다. 그냥 밤새 하늘이나 보며 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우선 배고파서 움직일 힘이 없다는 윤명의 의견하에 도시락을 배부받았다. 하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대충 식사는 해야 했다. 입맛이 있진 않았지만, 적당히 먹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오늘도 도시락 2개인 권혜성과 4개를 빠른 속도로 해치우고 있는 윤명이었다. 저렇게 먹고 게임 할 수 있는 거야? 앞으로 숙소 식비가 장난 아니겠는데. 일단 내 일은 아니라며 무시했다.
뒷정리를 끝내고 준비된 곳으로 이동하니 사전에 준비해 놓은 세팅들이 발견된다.
"지금부터 텐트 룸메이트 선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정 방법은 바로 탁구입니다. 하이사인 여러분은 대진표를 통해 탁구 게임을 진행합니다. 1등부터 7등까지 순서를 정한 뒤 같은 곳을 쓰고 싶어 하는 멤버들을 호명해 주세요. 1등이 2등을 부르고, 2등이 3등을 부르면 나머지 4, 5, 6, 7등은 자동으로 한곳에 배정받습니다."
"그러니까 즉, 이겨서 원하는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대진표는 저희 제작진이 사전에 준비해 놨습니다. 일곱 분이어서 오늘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나 고생해 주신 신해신 씨가 부전승으로 올라갑니다."
"아, 감사합니다."
"우와, 부럽다."
"형, 좋겠네~"
애들의 부러움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나였다. 얘들아, 그렇게 좋을 게 없는 것 같아. 그 이유는…….
"나, 탁구 쳐 본 적 없어."
"어, 진짜?"
"형, 부전승으로 올라가도 4등이겠는데."
문채민의 팩트 폭력에는 나도 당한 찰나였다. 직업 때문에 손으로 하는 건 대충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으나, 스포츠는 완전히 별도의 장르였다.
채도 들어 본 적 없는 사람한테, 누군가를 이겨 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몇 명을 돌아보며 미래를 예측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권혜성에게 옆구리를 차여야 할 팔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