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렇게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짓고 돌아온 서울이었다. 권혜성에게 차여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고 몇 날 며칠 바쁜 스케줄이 이어졌다.
박재민에겐 매일같이 초동 보고를 들었는데 놀랍게도 이벤트의 성공 확률이 높아지고 있었다. 음악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한다며, 잘하면 2주 안엔 1위 후보로 거론될 수 있다고 알려 줬다.
…우리가? 처음에는 믿기지는 않았지만, 아직 한참 서바이벌에 대한 화력이 남아 있을 무렵이었다. 그럴 만하다며 활동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이유도 모르고 이정원과 불려 나온 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한지헌의 얼굴에 머쓱하게 대기했다.
"7월 17일, 내일은 태오 씨 생일입니다."
"아, 네. 네……?"
이 사람들아, 본론이 급해도 순서가 있잖아. 놀란 마음에 소리치니 옆의 이정원 역시 이제야 알았단 표정을 짓는다. 강태오, 본인 이야기를 안 하는 애라곤 생각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얘도 진짜 지독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진짜였군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모르시는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른 건데."
"…네, 그,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한지헌도 제법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상황을 살펴보는데 우리가 계속 모르는 것 같으니까 급하게 알려 주려고 부른 듯하다.
"뭐, 저희는 프로필도 늦게 올라간 편이니까요. 일단 사전 고지 해 드리고자 두 분을 먼저 모셨습니다. 내일 단독 생일 케이앱을 해 드릴 예정인데, 오늘 밤 자정부턴 멤버분들께서 티위터를 통해 생일 축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어떡하죠? 저희가 아직 선물이라고 할 만할 걸 준비하지 못해서요."
"태오, 얘 아무 말 없이 넘어가려고 했었나 본데. 이건 나도 놀랍다."
천하의 이정원도 혀를 내두르는 게 과연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강태오 얘한테는 빚진 것도 있으니, 얼렁뚱땅 넘어가긴 좀 그런 입장이었다. 스케줄이 비었을 시간을 계산하며 뭘 사야 할지 고민해 봤다. 이에 맞춰 한지헌이 여러가지 대책들을 꺼내 온다.
"멤버분들께는 저희가 돌아가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정 무렵에는 해신 씨의 지도하에 공식 SNS를 통해 축하 말을 남겨 주세요. 케이앱은 초반엔 단독으로 시작하고, 후반부엔 깜짝 파티처럼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상세한 점은 오 팀장님과 박 매니저님이 지휘해 주실 겁니다."
"예… 일단 알겠습니다."
이정원도 뭔가는 해 줘야겠다며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지금의 사태가 어이없어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강태오 얘 몰래 여섯 멤버만 골머리를 썩이게 생긴 상황이다.
스케줄 때문에 여유가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나 역시도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을 구하는 중이었다. 나름 강태오를 간파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던 모양이었다.
* * *
"형, 태오 형 선물은 어떡할 거야?"
"몰라, 사러 갈 시간은 있을까. 지금 방송 녹화 끝나면 다음 텀까지 1시간 정도 비지. 그때 박 매니저님께 부탁해서 쇼핑 타운이라도 갔다 올까 봐."
"와, 태오 형. 과묵하다곤 생각했는데 자기 생일까지 과묵할 줄은 몰랐지."
"쉿, 목소리 크다."
옆에 있는 건 권혜성으로, 매니징 팀과 한지헌의 양동작전하에 멤버 전원에게 사실이 전해졌다. 조용히 움직인다곤 말했지만, 표정들이 절망적이다. 하나같이 모두 당황한 모습이다.
촘촘한 스케줄로 인해 별다른 방법은 찾지도 못한 채 넘어와야 했던 다음 일정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스탠바이를 기다리니 강태오를 제외한 멤버들에게서 초조한 기색을 발견했다.
"형, 만약 그렇게 빠질 거면 나도 데리고 가. 알았지, 꼭이야?"
"어, 그럴게. 내가 봐서 물어보고 확인되면 알려 줄 테니까 기다려."
그렇게 스탠바이를 알려 오며 다음 녹화 장소로 이동했다. 가는 길엔 몰래 한 걸음 물러서서 박재민에게 우리의 계획을 물어봤다. 아까부터 불안해하던 나를 알고 있었는지, 흔쾌히 동행해 주겠다며 오케이 사인을 해 준다. 이걸로 한숨은 돌린 것 같은데, 틈이 나면 핸드폰을 통해 인근 상가와 살 만한 물건을 찾아 둬야겠다.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저희 하이사인이 댄싱 마피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와아아아!"
커다란 스튜디오 안, 우리를 찍는 카메라를 느끼며 멤버들과 촬영을 이어 나갔다. 여기는 아이돌이라면 빠지지 않는 예능 중 하나 '댄싱 마피아'의 녹화 현장이었다. 촬영을 진행해 주는 MC가 없는 만큼 주도적으로 좋은 장면을 뽑아야 했다.
[마피아는 총 2명으로 시민들 몰래 다른 노래에 맞춰 춤을 춥니다. 시민들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마피아를 검거해야 하는데 진 팀에게는 무서운 벌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혜성이가 정말 오래 기다린 프로그램입니다. 며칠 전부터 선배님들 영상을 엄청 찾아보더라고요."
"뽑아만 주십시오! 시민? 모범 시민이 되어 바로 마피아를 검거하겠습니다! 마피아? 바로 시민을 죽이겠습니다!"
"…혜성이가 원래 의욕이 넘쳐 나서요. 이해 좀 부탁드릴게요."
지나치게 흥분한 권혜성을 잠재우며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얌전히 좀 있어. 하지만 물 만난 물고기는 어쩔 수 없다고, 보통 힘이 센 게 아니었다. 센터에 있던 나도 같이 들썩거리는데 멤버 몇 명이 자신 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형들은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과연 어떨까요?"
"채민아, 그거 플래그 아니야?"
그렇게 모두 주저앉아 허리를 숙인 채 선택을 기다렸다. 제발 시민, 제발 시민, 그 어떤 보직도 원하지 않아. 뭐든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간 떨리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난 아직 댄스 스탯이 A-였다. 삐끗하면 바로 티 날 어색한 연기의 소유주이기까지 하다. 등 뒤로 오가는 막대기의 존재감을 느끼며 간절히 기원하고 있길 한참이었다. 아, 쿡 하고 찔러 오는 손가락에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마피아… 해 보겠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 주세요.]
체념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멀찍이서 아는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이런, 하필이면 권혜성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군분투하고 있는 자신이 보이는 듯했다.
[이상으로 모든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해 주세요.]
"아자!"
"혜성이 쟤 벌써 수상하다."
이것 봐. 망했다. 이유준의 귀신 같은 멘트에 지레 찔린 나였다.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니 느슨하게 모두를 훑는 문채민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멤버들을 살피는 이정원이 보인다. 저 3인방에게 들키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한 게임 같았다.
"음, 난 태오 형도 좀 이상한데."
"갑자기 난 왜."
"너무 조용해서 말 좀 하라고 짚어 본 거야."
"……."
윤명에게 농락당한 강태오를 뒤로하고 귀마개를 낀 채 대형에 자리했다. 괜히 다른 멤버들을 의식해서 권혜성을 보는데, 마냥 해맑은 얼굴에 어깨가 무거운 걸 느끼고 있었다.
춤이야 잘 추는 애라지만 실수 한 번 하면 리스크가 큰 포지션이다. 자체 콘텐츠에 이은 두 번째 밸런스 붕괴였다.
"해신이 형, 형도 뭔가 너무 조용하다?"
"나? 아니야. 귀마개 끼느라 그런 건데."
과연 야생동물 윤명, 쟤도 하고 싶은 대로 해서 그렇지, 눈치론 빠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방이 절벽인 언덕에 서서 언제 떨어질까 대기하는 듯한 기분이다.
"해신이 형이면 파트 넘어갈 때 걸릴 테니까 바로 들키지 않을까. 거기 형 혼자 뒤돈 상태잖아."
"유준이 너는 내 편 들어 주는 거야, 아닌 거야."
"반반이지."
"그건 유준이 형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형 랩 파트 도입부에서 혼자 앞으로 나가는 부분 타이밍 맞추기 힘든 구간이었잖아."
"그러게, 나도 위험하네."
오가는 신경전 속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음악을 기다렸다. 센터는 윤명이었으니까 초장은 어떻게 눈치껏 맞출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이유준이 말한 저 파트인데. 곁눈질도 정도껏이라고 거기 타이밍을 재는 게 난관이었다. 일단 몰라, 부딪쳐 보자. 그것도 이내 들리는 음악에 기함했다.
[한 눈에 쿵! 체릿빛 두 뺨에! 널 보는 난! 심장이 콩닥콩닥!]
여기 제작진들도 제정신이 아니야. 이건 현직으로 활동 중인 걸 그룹 내 이벤트성 유닛곡이었다. 과도한 컨셉 몰이로 유명세를 탔는데,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박자가 다른 건 둘째 치고 가사가 도무지 집중되지 않는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잠재운 채 동선에 맞춰 권혜성을 돌아봤다. 쟤도 쉼 없이 동공이 떨리는 중이었다. ……혜성아, 우리 어떡하냐.
침착하자, 추고 있는 안무를 기점으로 속으로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지만 나는 느낄 수… 사랑에 빠져 버린 LOVE & BOOM!' 의식의 흐름으로 자꾸만 넘어가 버리는 미친 중독성이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죽을 맛이었는데 사방에선 멤버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 정원이 형, 방금 유준이 형이랑 부딪혔지."
"아니야, 애들 관찰하다가 엇갈린 거야."
"태오 넌,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수상해."
"난 또 왜."
저거 자기들끼리 알아서 자멸 중인 건가. 권혜성의 파트에서 뒤를 돌아 넘어가는데 이정원과 이유준이 어깨를 부딪쳤다. 당황한 탓이었는지 2초 정도 버벅거리니 그게 바로 문채민의 눈에 걸린 듯하다. 이유준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였을까, 가만 있던 강태오까지 제 무리에 끌어들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개판이다. 나랑 권혜성만 노난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은데?
"뭐야, 뭐야~ 형들, 나도 봤어. 유준이 형이랑 정원이 형인가 보다."
권혜성은 그래도 메인 댄서라고,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백업으로 해 주는 리액션까지 넣으며 나를 향해 윙크해 온다. …징그러워. 그래도 잘했다, 혜성아.
"…해신이 형이 너무 조용한데?"
"그러고 보니까 형,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아니야, 나 지금 말하려고 했어!"
"수상해~"
"여기서 실수 안 했는데 왜 수상해!"
정신없는 사이에 걱정하던 파트도 이를 꽉 깨물곤 통과했다. 물론 윤명과 문채민의 날카로운 눈길이 쏟아졌지만,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다. 여기서 타이밍을 맞췄는데 무슨 증거로 의심을 해. 이정원도 그게 걸렸는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살핀다.
[시민 회의를 시작해 주세요.]
"유준이 형, 아니면 정원이 형 둘 중 하나다에 한 표."
"난 태오 형, 너무 완벽했어."
"오히려 이렇게 몰아가는 애들이 더 수상한 거 알지. 문채민 너 좀 이상하다?"
눈치는 있지만 핀트가 돌면 거기에 집중하는 이상한 멤버들이었다. 권혜성은 직접 문채민의 뒤에서 간신처럼 언질을 주며 이유준과 이정원을 유인했다.
맞아, 쟤 저런 면이 있었지. 그리고 얘들아, 실수해 줘서 고맙다. 윤명은 아까부터 강태오에게 꽂힌 모양이다. 지긋하게 바라보길 한참이다.
이제 알았는데 문채민은 은근히 똥촉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마피아인 둘만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모두를 이간질하는 간신배 권혜성이 대활약을 펼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