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활동 시기에 접어든 지는 어느덧 2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나가는 거였구나.”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여론을 체크했는데, MXP에서 우리를 건들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레스트’를 이용하여 ‘스턴즈’를 우리와 경쟁하는 구도로 밀어 넣은 것이다.
어쩐지 라디오에서 띄워 준다 했네. 디레스트가 우리 팬이란 식으로 언급해 놓고 태세 전환을 한 것이 문제가 됐다. 여길 비춰 주는 척하면서 저기로 조명을 돌리는 작전이었다. 도민과 김환준에게는 한 방 먹은 참이다.
[환쥰이랑 두밍이 ㅅㅌㅈ 노래 취향이었나 봄]
[굥형이 케이앱에서 ㅅㅌㅈ언급]
[올해 남돌 괜찮은 애들 ㅎㅇㅅㅇ이랑 ㅅㅌㅈ인가]
[추천해줘서 들어봤는데 괜찮음]
굳이 따지자면 김환준 쪽의 작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멘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환준이 형이 나랑 유어돌 같이 본 건 진짜예요. 오늘 좀 유별나게 굴긴 했지만 말이죠. 사전에 말도 안 하고 그렇게 나와서 당황했잖아.’
도민은 라디오 대본과 김환준의 장단에 맞춰 움직인 것 같았다. 김환준 그 사람, 첫 만남부터 찜찜하더라니. 어쩐지 되게 피곤한 느낌이다.
동일 소속사 선배 그룹의 후배 그룹 언급이라. 초반에는 친목질이라면서 욕을 먹을 수 있는 소재였다. 하지만 그것도 수위를 조절한 채 여지 정도만 남겨 주면 관심으로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쟤네는 세대까지 차이 나잖아. 그게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었다.
[친목질 오지네]
[근데 좃목 느낌은 안나 ㅋㅋㅋ]
[쥰이가 애기들 챙겨주는 거 너무 귀엽지 않음?]
[ㅅㅌㅈ 좀 비호감이었는데 요즘 귀여워 보임]
이용당했군. 국내에선 인지도가 있는 그룹이 광푸시를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붙이려고 들 텐데, 이쪽도 비슷한 대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도 아군이 필요하단 소리였다.
“채민아, 너 혹시 N년도에 데뷔한 아이돌이 몇 그룹인지 알아?”
“갑자기? 아니, 뭐 알기는 하는데.”
늦은 시각, 문채민과 이유준의 방에 찾아갔다. 이유준은 씻으러 간 모양인지 혼자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나야 워낙 이쪽 지식이 부족하니까 틈틈이 공부라도 해 놓을까 싶어서 그렇지. 너랑 유준이가 이런 건 잘 알잖아.”
“뭐, 그렇다면야. N년도라면…. 아! 라디오에서 디레스트 선배님들 봤지? 거기가 그때 데뷔했었을 거야. 그리고 또…….”
이런 쪽으로 박학다식한 애답게 알고 있는 그룹들을 알려 줬다. 내 목표는 디레스트와 비슷한 규모의 라이벌 그룹을 캐내는 것이었다. 괜찮은 선배 그룹과 연을 만들어 놓자.
메이터스가 일은 잘했지만, 신생이라는 딱지는 뗄 수 없었다. 선배 아티스트도 없는 상황에서 업계 내 입지는 다지지 못한 초입이었다. 이 소리는 곧 외부에서 인맥을 끌어와야 가능한 작전이란 뜻이었다.
“○○그룹이랑 ○○○그룹이랑…….”
생각보다 많네. 하지만 여기다 싶은 곳이 없었다. 일단 인지도가 엇비슷해야 한다는 조건이 컸다. 게다가 이유도 없이 대뜸 친해지는 것도 난감했다.
무언가의 연결 고리가 있어야만 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밑밥을 깔기 위함이다.
“N년도면 거길 빼면 안 되지.”
“어?”
그때 방문이 열리며 이유준이 들어왔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애였다.
“왜, 형도 잘 알고 있는 곳인데?”
“아, 맞다. 해신이 형, N년도를 대표하는 선배 보이 그룹 하면 보통 두 군데라고 얘기하거든. 한 곳이 아까 말해 준 디레스트 선배님들이고 나머지 한 곳이…….”
“…진짜?”
“응.”
이거 왠지 행운이 찾아온 것 같은데. MXP, 그 방법, 우리도 잘 쓸게.
* * *
“여기가 맞나.”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모자부터 깊이 눌러썼다. 사생이 붙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주변을 몇 번이고 둘러본 뒤에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어느 주택가의 한적한 골목길, 정면에 보이는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이러니까 마치 불법이라도 저지르는 기분이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넣자 문이 열렸다.
“구석이었는데 잘 찾아왔네. 그나저나 주변에 사람은 없었지? 사생은 안 붙었고?”
“네. 일단 잘 살펴보고 왔어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뭘 또 이렇게 예의를 차려~ 일단 얼른 들어와. 문부터 닫자.”
허름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잘 꾸며져 있는 작업실이었다. 녹음 부스를 살펴보다가 안내해 주는 소파에 앉았다.
“너 커피 마시지? 기다려.”
“네.”
익숙하다는 듯이 움직이는 사람을 바라봤다. 저 인간과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제자님께선 무슨 목적으로 내게 연락을 넣었을까? 내 촉이 말하거늘 단순한 건 아니란 말이야.”
“뭐, 일단은요.”
눈앞에 앉아 있는 건 유어돌에서 보컬 멘토로 활약했던 아이돌 그룹 인클루의 리더 원겸이었다. 나도 몰랐지. 디레스트랑 꾸준히 경쟁 구도로 붙어 왔던 게 여기란 것 말이다.
‘한 곳이 아까 말해 준 디레스트 선배님들이고 나머지 한 곳이 원겸 멘토님이랑 공태서 멘토님이 계신 인클루야.’
문채민과 이유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유들거리는 얼굴을 바라봤다. 이 사람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돌리지 않고 직구를 던졌다. 이에 무언가 흥미가 생겼다는 듯이 다리를 꼬는 원겸이다.
“하여간에 재밌다니까. 그런 식으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거든.”
“…죄송합니다. 방법이 없어서요.”
래퍼 멘토였던 공태서는 연습생 몇 명에게 연락처를 알려 줬다. 그중 하나가 이유준이란 사실이 천운이었다. 이유준이 공태서에게 내가 원겸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 인간 성격상 호기심으로라도 받아들일 걸 알아 부딪친 거였다.
예상대로 원겸은 오케이 사인을 해 줬고, 팀 내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는 멤버 김가온의 개인 작업실로 나를 불러들였다. 주인은 잠시 쫓아냈는지 여길 독식한 상황이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성깔이 장난 아니네. 아무래도 어르고 달래는 게 관건일 듯하다.
“뭐, 그런 건 됐다 치자. 그래서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멘토님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하하, 신해신. 너 돌직구다? 유어돌 때는 순하게 봤는데 아니었나?”
“하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난감한 사람들이 좀 있거든요.”
“음, 그거 MXP 말하는 거지?”
“어? 알고 계시네요?”
“뻔히 보여. 그리고 제자 그룹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서 찾아본 것도 있지.”
“아, 네…….”
떨떠름해하는 날 두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싱글거리는 원겸이었다. 다시 상대해도 피곤한 타입이다. 그나저나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어투였다.
“스턴즈 맞지? 너희한테 붙이려고 드는 애들 말이야. 힘들게 됐어. 한 놈만 쳐 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인데, 디레스트 그 자식들까지 붙였더라?”
“그럼 혹시 뭐 때문에 왔는지도 아세요?”
“디레스트 역할, 그거 부탁하려는 거 아니야?”
이 사람, 진짜 다 알고 있네? 보이는 정세만 파악한 줄 알았는데 내가 부탁하려던 용건까지 캐치 한 원겸이었다. 유어돌 때도 눈치가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거 보통 머리 회전이 아니다. 하긴 그러니까 이 살벌한 판에서 1, 2군 언저리를 지키고 있던 거겠지.
프로그램에서 멘토와 연습생으로 만난 전적이 있었다. 심지어 3차에선 멤버 4명이 인클루에게 받은 노래로 경연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랬던 과거 연을 이어 가며 언급해 주는 건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라고 생각했다. 뭐, 그것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
“너 지금 표정 되게 바보 같다~ 그나저나 여러 가지로 의외야. 네가 리더 한다는 소식 들었을 때는 떠밀린 건가 싶었거든. 근데 하는 걸 보니까 자처한 느낌인데? 참 나, 이런 머리까지 굴릴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일단 저도 열심히 해야죠.”
“못 본 사이에 독해진 거야, 아니면 원래 독한 놈이었는데 내가 못 알아본 거야.”
“음, 반반으로 해 주세요.”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상대해 주길 한참이었다. 원겸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살벌한걸. 저러니까 인상이 완전 달라 보인다.
“허, 이거 아주 배짱이 두둑해. 어떻게 보면 뒷거래인 건 알지? 그것도 6년이나 선배한테 제의까지 하고.”
“네. 알고 있어요.”
역시 흔쾌히 들어줄 만한 사항은 아니란 건가. 아, 이 방법만큼은 쓰기 싫었는데. 바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는 농담이고.”
“…네?”
“해 줄게, 디레스트 그 자식들 역할.”
…이렇게 순순히 허락해 준다고? 놀란 마음에 원겸을 바라보자 의자에 몸을 파묻곤 팔짱을 낀다.
“네 목적 알았을 때부터 해 줄 마음은 있었어. 사실 우리도 MXP한테 당한 게 좀 있거든. 참 다사다난했단 말이야. 덕분에 우리 대표 양반이 MXP라면 질색해. 아,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가? 뭐, 편먹기로 했는데 거리낄 것도 없지. 나야 김환준 그 새끼한테 억하심정도 좀 있고.”
“진짜요?”
사실 이건 사전 조사로 알고 있던 정보였다. 원겸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엔 여기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거절당하는 건 둘째 치고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디레스트와 인클루가 경쟁 그룹처럼 다뤄진 건 유명한 일이었던 듯했다. 검색 몇 번만으로도 그때의 불판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공식 기사를 보면 인클루가 고행길을 걸은 것 같았다. 특히 지라시와 악성 루머 유포, 이쪽 방면으로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게다가 원겸 이 사람, 김환준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대충 성향만 봐도 극과 극처럼 느껴지긴 한다. 재수 없으면 둘 사이에 끼는 거 아니야……?
그걸로 새로 알게 된 점도 하나 있었다. 김환준이 유어돌의 일일 트레이너를 거절했던 것에 대한 이유였다.
소속사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시즌 2에서 원겸과 공태서에게 먼저 멘토 제의가 갔다. 자존심 때문에 안 내보낸 거였어. 쉽게 말하자면 앞 순서가 아니었으니 하지 않겠단 소리였다.
“너 사람 되게 못 믿는구나. 난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이거 받아.”
“엇!”
그때 원겸이 제 주머니를 뒤적여 물건 하나를 던져 줬다. 이건…….
“초소형 녹음기야. 이 판에선 입 다물고 눈 감고 못 들은 척하라곤 하지만, 억울한 일이 생기면 반론은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 증거 수집은 필수고. 내 말 알아들었지?”
손톱만 한 사이즈의 녹음기를 바라봤다. 흔쾌히 응해 준 것도 놀라운데, 제 나름의 노하우까지 알려 주는 사람이었다. 음, 저기도 무언의 목적이 있는 것 같군. 그나저나 난 이거 필요 없는데.
“저기, 멘토님.”
“왜? 이제 오니까 무서워졌어? 무르고 싶으면 말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 줄게.”
“아니, 그게 아니고요.”
사람이 말하면 끝까지 좀 들어 봐. 원겸이 준 녹음기를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곤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저… 이거 이미 있는데요.”
그것도 댁이 준 거랑 똑같은 모델이야. 참고로 녹음기는 아까부터 켜진 상태였다. 불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원겸도 전부 알아챘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대화를 전부 녹음했단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디레스트랑 MXP 질색팔색하던 멘트도 전부 담겼다고.
“신해신, 너…….”
내가 바보도 아니고, 무식하게 굴었을 리 없잖아. 이게 원겸이 주절거려도 적당히 뭉개며 대답만 한 이유였다. 미안, 근데 여기도 살고 봐야지.
정 안 될 것 같으면 정중한 어투로 회유하려고 했었다. 아, 이런 건 협박이라고 해야 하나? 사이는 나빠질지언정 입막음할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했다.
“녹음한 파일은 똑같이 보내 드릴게요.”
“하하, 그러니까 지금 서로 약점 잡고 입단속 하자 이거지? 이게 터지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와~ 살벌하네~”
그쪽도 구두 계약은 효력이 없단 거 알잖아. 그래서 생각한 게 서로의 목숨 줄을 쥔 채 맺는 동맹이었다.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 있어서 내 약점을 쥐여 줬다.
뭐, 타격은 한낱 신인인 이쪽보단 이미 자리 잡은 저쪽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화났으려나? 애초에 그걸 감내하고 찾아온 거기도 했다. 성질 부리는 건 받아 주자.
“화나신 거 다 이해…….”
“재밌다?”
“네?”
“하하, 이런 재밌는 놈을 순둥이로만 보고 있었어.”
대수롭지 않다는 양 시원하게 웃는 원겸이었다. 뭐지……? 너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날아 들어올 욕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녹음 파일은 핸드폰으로 보내 놔. 조만간 상황 봐서 너희 언급해 줄게.”
“멘토님은 괜찮으세요?”
“뭐가? 나 지금 완전 흥미진진한데? 이런 식의 계약은 처음이거든. MXP보다 네가 낫다, 야. 이 정도는 돼야 상대했을 때 유쾌하지.”
이걸로 확실해졌다. 지원겸은 또라이였다. 아무래도 아군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여기 말고 공태서로 부를걸. 리더가 낫겠다는 편협한 사고가 날 시궁창으로 끌어들인 듯하다. 식은 눈으로 원겸을 바라보니 뭐가 그리 좋은지 시시덕거리길 한참이다.
“음, 호칭은 팬들 봐서라도 멘토님으로 유지하자. 적당히 선은 긋되, 딱 관계성만 보여야지. 나도 괜히 욕먹긴 싫거든. 친목질도 잘못하면 독이 되는 건 알지? 팬덤이 아주 질색해~”
“어… 네, 뭐. 저도 그게 좋다고는 생각해요.”
저기도 뭔가 목적은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사건 방지하겠다고 더 큰 놈을 건든 게 아닌가 싶었다. 벌집을 쑤셔 버렸어. 그것도 장수말벌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정이 없어 보이긴 하다. 흐음, 나중에 연차 좀 쌓이면 그때 바꾸자. 그건 괜찮겠지 뭐.”
“…….”
이 사람아, 괜찮지가 아니잖아. 참고로 나는 싫었다. 협력 이 선만 지키면 된다는 취지였다.
“하아, 아직 스물일곱인데 멘토님이라고 불려야 한다니……. 꼰대 이미지는 별로인데 말이야, 쯧. 아무튼 우리 잘해 보자, 신해신.”
“…네.”
“대답이 영 시원찮다?”
“예에…….”
지원겸, 유어돌 때는 나름 멘토 체면 살려서 행동한 거였나 보다. 이 인간, 생각보다 더 껄렁껄렁한 타입이었다. 속 시커먼 놈 상대하려다가 더 시커먼 놈과 한 팀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서도경한테 맡길걸. 지 팔자 지가 꼰다는 건 내 얘기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