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사생에게 연락처를 들키는 일은 제법 비일비재했다. 아이돌 세계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점이기도 했다.
다른 그룹의 멤버들도 라이브를 하다가 표정을 굳히곤 했던 게 떠오른다. 사생들에게 전화가 와서 난처해하던 모습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쪽은 너무 빠르지 않나. 연차라고 할 게 없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었다.
인기를 실감하는 척도였으나 그렇게 반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한 명이야? 아니면 뿌려진 것 같아?”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 되냐는 것이다.
“…음, 하나는 아닌 것 같아. 거기에 유독 심한 사람도 한 명 있어.”
후자군. 윤명의 번호는 이미 사생 판에 뿌려진 것 같았다. 심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그간 꽤 시달린 모양이었다.
“…혹시 너 새벽에 깨던 것도 그것 때문이야?”
“으응, 무음으로 돌려 놓긴 했는데 신경 쓰여서. 아예 꺼 놓기는 불가능할 것 같고.”
근래 반응 속도가 빨라진 것 같긴 했지. 아무래도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었나 보다. 아까 밴 안에서도 주변 시선에 민감하게 구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 또한 이게 원인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전형적인 노이로제 증상이네. 눈앞이 아찔한 기분이었다.
“핸드폰,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을까.”
“…응.”
윤명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자마자 화면 위로 착신 화면이 떠올랐다. 윤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양 쳐다보는데,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010-XXXX-XXXX
대한민국
심지어 이 사람은 엄청 끈질기기까지 한 것 같았다. 먼저 끊을 생각은 없는 듯해서 강제로 거절해버렸다. …뭐야, 쉬지 않고 전화하잖아. 몇 초 되지 않아서 다시 같은 연락처가 떠올랐다.
“명아, 혹시 차단은 왜 안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이미 했어. 근데 번호를 바꾸는 건지 다른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와서…….”
너무 질기니까 중간부턴 포기한 거군. 언제 어디서든 마이 페이스던 윤명 같지 않아서 놀라웠다.
“바뀐 번호랑 이전 번호랑 같은 사람이란 건 어떻게 알았고?”
“메시지 말투가 똑같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 봤나 보네. 이 정도면 보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럼, 번호는 왜 안 바꾼 거야? 말했으면 바로 교체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묻고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놀랐을 애를 생각해서 꾹 참고 있었다. 뭔가 원인이 있는 것 같지. 말하기를 주저하는 윤명을 보니까 무언의 사연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냥, 조금만 더 버티려고 했어.”
“어?”
“우리 활동 곧 끝나니까, 비활동기에 조용히 바꾸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점점 더 심해져서…….”
일단 연락처를 못 바꿀 이유는 없단 거네. 그럼 굳이 그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지금 이것도 민폐겠지.”
“뭐?”
“스케줄이 바쁘잖아. 그래서 모두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았어. 좀만 더 버티려고 했던 건데……. 형, 미안해.”
얘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왜 미안한 일인 거지? 내 사고론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자, 잠깐만. 너 혹시 지금까지 말 안 하고 버틴 게 우리한테 피해 줄까 봐 그런 거였어?”
“…….”
이런,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무릎에 턱을 괸 윤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던 애가 이제 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어…. 일단 여기부터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명아, 절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혹시 형이 너한테 눈치 줬니? 그렇다면 사과할게.”
“으응, 아니야. 다들 잘해 주는걸. 그냥… 유어돌 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거기였냐. 이거라면 나도 본 적 있는 반응이었다. 이민석 팬덤이랑 자주 부딪치면서 욕을 심하게 먹은 사건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윤명은 견제 혹은 이유 없는 비난의 대상이 자주 되곤 했다. 상위권을 차지한 무서운 상승세의 인물이란 게 주된 원인이었다.
‘염굥 오구오구라이팅 질림 컨셉충인거 알겠는데 정도껏 해야지 응~ 울애기 아직 어려서 그래~ ㅅㅂ 얘 19살이야 정신차려 ㅋㅋㅋㅋㄱㅋㅋㅋ’
‘염 얘 빠순이들이 좋아할 거 ㅈㄴ잘아는 것 같아서 정떨어짐 난 가오씹충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극혐함’
‘리얼 염굥 얘 맨날 팀에 민폐만 끼치지 않았음??? 근데 운빨 개같이 타서 올라간 거 얼척없음 내가 밍이면 정병루트탔다 ㅋㅋㅋㅋ 케이팝 존ㄴ아 빡세요~’
‘염굥판에 정병러들 많잖아 끼리끼리 이즈 사이언스 근데 지들끼린 멀쩡한 척 지림 ㅈ같으니까 제발 연생들한테 똥물 튀기지 마 ㅜㅜ’
다 봤나 보네. 알려 주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그런 수고가 전혀 소용이 없었나 보다. 얘를 어떡하면 좋냐.
“명아, 솔직하게 얘기할게. 난 너한테 피해받았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유어돌 때도 그리고 그룹으로 활동하는 지금도.”
뭐, 물론 파이널에서 리더로 몰이당한 건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지. 나도 어느 정돈 받아 줄 수 있는 수위였다고.
“…….”
“후, 그러니까… 그, 뭐냐. 대충 말하자면 그런 걸로 고민할 필요는 없단 뜻이야.”
아, 닭살 돋아. 머리를 벅벅 털며 이야기하자 윤명이 여길 빤히 바라봤다. 티가 날랑 말랑했지만 나름 웃는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어색하게나마 윤명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페이크다, 이 녀석아. 그대로 헤드록을 걸듯이 체중을 실어 눌렀다.
“어쭈, 웃는 거 보니까 기분 좀 풀렸나 보다?”
“윽, 형, 무거워… 누르지 마…….”
“네가 매일 하는 거거든. 너도 한번 당해 봐.”
신파 찍는 성격들도 아니고, 괜히 우중충하게 대해 주는 것보단 이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도움을 구하는 건 절대로 피해 끼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억지로 버티지 마. 알겠지?”
“…응.”
“그럼, 당장 스케줄 비는 대로 연락처부터 바꾸러 가는 거다? 멤버들한텐 내가 적당히 둘러대 줄게. 한 실장님에겐 이야기해야겠지만 말이야. 그건 나랑 같이 가자.”
“응. 고마워, 형……. 으악… 머린 헤집지 마……!”
“싫은데?”
아까보단 커진 목소리의 윤명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힘만 주면 빠져나갈 수 있으면서. 말만 그렇지, 기분이 제법 괜찮아진 모양이다.
확률 성장 트리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이 녀석부터 어떻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 다 끝났어?
“얼추 그런 것 같은데. 애들은?”
- 다 같이 있어. 걱정되는지 나만 바라보는데? 태오야, 핸드폰 뚫어지겠다. (…내가 언제 그랬어.)
이정원과 통화하던 중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린다.
아침이 밝자마자 윤명은 멤버들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다. 쯧, 기껏 좋게 둘러대 주려고 했더니. 이런 것까지는 속이고 싶지 않다는 애였다.
‘뭐? 사생? 그걸 왜 말 안 한 거야! 윤명, 이 멍청아!’
‘혜성아, 명이도 마음고생했을 텐데 너무 뭐라고 하진 ㅁ…….’
‘씨이, 사생? 번호 딱 대! 내가 뭐라고 해 줄 테니까!’
‘어?’
‘…뭐라는 거야, 권혜성 이 바보가. 너도 털리려고?’
‘아, 맞다.’
권혜성은 안 그런 척 약은 구석이 있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런 애가 이성적이지 못한 멘트를 외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정도로 정이 들었단 얘긴가? 윤명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나 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근데 정말 너랑 명이만 가도 되겠어?’
‘다 같이 가서 뭐 해. 조용히 바꾸고 올게. 이것만 하면 해결될 일인걸.’
그렇게 멤버들의 인사를 받으며 윤명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 한지헌에게는 간단한 사정을 설명한 뒤 정보 관리가 철저한 업체를 통해 윤명의 연락처를 변경했다.
어지간히도 독종이 붙어 있었나 본대. 켜자마자 엄청난 수의 메시지가 와 있는 걸 목격했다. 도대체 얼마나 참은 거야. 여러모로 윤명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 그럼 바로 숙소로 올 거지?
“아마도?”
- (해신이 형, 명이는?! 걔 좀 괜찮아?) 권혜성, 시끄러워, 좀 떨어져! (아잇, 궁금한 걸 어떡해! 하여간에 윤명, 얘는 잘하는 것 같다가도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너희 둘 다 똑같거든.”
내가 보기엔 도토리 키 재기야. 전화기 너머로 울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타이밍 좋게 미팅 룸에선 윤명과 한지헌이 나오고 있었다.
“어? 명이 나왔다. 나 그만 끊는다? 금방 봐.”
- 그래, 조심해서 오고. (형! 얼른 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한지헌이 내게 다가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간략한 사정 청취만 한 것 같았다.
“해신 씨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법적 처벌을 내리기엔 수위가 애매모호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번호 변경 말곤 별다른 제재를 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아이돌에게 사생 문제는 쉬운 듯 어려운 부분이었나 보다. 아무튼 이 문제는 좀 더 머리를 써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랬군요. 그래도 감사드려요.”
“예,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서류철을 든 한지헌이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주차장에서 박재민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인 이후였다. 일단 큰 건 틀어막은 셈인가?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형, 그.”
문 앞에 서 있던 윤명이 주춤거리며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한 상황이었다.
“고맙단 소린 됐어. 아침부터 귀에 딱지 얹게 들었다. 그리고 내가 뭘 했다고…….”
실제로 먼저 눈치챈 것도 내가 아닌 이정원이었다. 말했잖아. 난 숙면했다니까. 뭐, 뭔가 이상하단 건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윤명의 등짝을 툭 치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내 말에 침묵하는 것 같더니 이내 쪼르르 따라붙는다. 권혜성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하는 짓도 비슷해진 것 같지? 실제로 둘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말이었다.
“큰마음 먹었다. 형이 점심 쏜다. 대신 적당히 시켜? 지갑에 구멍 나면 두고두고 복수할 거야. 나 뒤끝 긴 거 알지?”
“…응.”
“그리고 혜성이 상대는 네가 해라.”
“그건 좀 귀찮은데…….”
“말하는 거 보니까 회복했네.”
하여간에 미워할 수 없는 애라니까.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본 뒤 가볍게 웃어 줬다. 눈이 마주치자 뭐가 그리 좋은지 마주 미소 짓는 윤명이었다.
* * *
그래, 해피 엔딩일 리가 없지. 이 판에서 평화란 불가능한 이야기였나 보다. 보이는 화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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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SL24tJZwl8PAlx · 8분 전
(사진) (사진)
명아 데뷔하니까 좋았지?? ㅋㅋㅋ
외제차 끌고 다니는 연상 누님 만나도
빠순이들이 우쭈쭈해줘서 행복했어??
#하이사인 #윤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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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그, 채민아? 명이 좀 불러 줄래……?”
“…응.”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무래도 윤명에게 큰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나 불렀어?”
“야! 윤명! 내 아이스크림 훔쳐 먹고, 어딜 도망가!”
방문을 열고 윤명이 등장했다. 등 뒤로는 바락바락 소리치는 권혜성을 달고 있었다.
“혜성이 형! 지금 들어가지 말라니까!”
“왜, 뭐가 문제인데, 문채민 너 아까부터 되게 이상ㅎ…….”
눈치 없이 굴던 권혜성도 방 안의 풍경을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야, 윤명, 너 뭐 잘못했냐? 해신이 형, 표정이 왜 저래.”
“…몰라, 나도.”
속삭이던 둘에겐 조용히 말했다. 일단 당사자의 확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혜성아, 내가 명이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문 좀 닫고 나가 줄래?”
“으, 으응.”
둘만 남은 방 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저번에 봤던 그 광경이네.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이런 상황과 마주했다.
“자, 명아, 일단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응.”
“……너 혹시 연애하니?”
나도 믿기지 않아서 그래.
문채민에게 전달받은 화면을 윤명에게 보여 줬다. 거기엔 적나라한 멘트와 함께 두 장의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이건 윤명으로 보이는 남자와 긴 웨이브 머리의 여자가 함께 있는 투샷이었다.
윤명이 열애설이라고? 이게 말이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