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모든 스케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밴 안은 어두운 분위기로 가라앉아 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침에 발견한 글을 떠올렸다.
[현 서바이벌 그룹 멤버 한 명의 소속사 특혜를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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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그룹 출신 멤버 한 명과 같은 소속사의 연습생으로 있었습니다.
해당 멤버는 소속사 내 온갖 특혜를 받아 왔으며, 그 덕분에
현재 소속된 그룹이 나온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여 데뷔 조에 있던 연습생 한 명이
소속사를 나가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그 연습생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
개인 소속으로 출연한 걸 목격한 상황입니다. 저는 그 부조리한 모습을
보다 못해 회사를 옮긴 상태입니다만, 대중 매체를 통해 해당 인물을
계속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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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민. 같은 소속사 출신의 개인 신분을 단 연습생이 있다고 했다. 그건 이유준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 조건에 부합하는 멤버는 문채민, 바로 쟤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특혜를 받아 왔다니, 내가 아는 문채민은 그런 걸 받을 만한 애가 아니었다.
1차에서 떠맡긴 리더 포지션까지 불만 하나 없이 해내 준 녀석이었다. 소속사에서 이런 걸 제의했어도 거절했을 만한 성실한 성정이었다.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 난감한 건 쟤뿐만이 아니었다. 이유준……. 한 명만 건드린 줄 알았더니 아예 둘을 묶어서 전시해 버린 상황이었다.
“…….”
“…….”
같은 그룹에서 하나는 피해자로, 나머지 하나는 가해자로 엮인 사건이다. 뭔가 사연이 있는 건 분명한데, 본인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채민아, 나랑 얘기 좀 하자.”
“…어. 그래.”
살벌하네. 숙소로 돌아온 이후, 표정을 굳힌 이유준이 문채민을 향해 손짓했다. 문채민은 바닥만 바라본 채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유준이 형, 왜 저래……? 해신이 형, 형은 뭐 좀 알아?”
“아니, 나도 몰라.”
“이러다 둘이 싸우는 거 아니야?!”
“설마… 넌 진짜 채민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분위기가 너무 안 좋으니까…….”
둘의 방문이 닫혀 버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권혜성과 함께 사태의 심각성을 논했다. 큰 소리는 나는 것 같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방 앞을 서성거렸다.
“우리 여론 엄청 안 좋은 것 같은데…….”
“으악! 미치겠네! 유준이 형도 그렇고, 채민이 쟤도 왜 저러는 거야! 이러니까 점점 더 무섭잖아!”
핸드폰을 들이미는 윤명에 권혜성은 제 머리만 탈탈 털어 댔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배가 아파서 흠잡는 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 억까 아님? 증거도 없잖아 게다가 피해자도 본인이 아니라며 걍 끌어 내리려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 다른 게 분탕이냐 이게 분탕이지
- 자기는 데뷔도 못하고 연생도 때려쳤는데 누군 데뷔 성공해서 잘 나가고 있으니까 배 아팠던 거지
- 응 열폭~ 얘들아 먹금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판이 커지며 불만 어린 의견이 속출했다. 추측성 여론이 그룹 전체 이미지까지 뒤흔드는 규모로 발전한 것이다.
논란이 제기된 이후로는 좋지 못한 양상을 띠는 상태였다.
문채민이 평소 바르고 성실한 행실을 보여서 더 큰 문제가 된 듯하다. 원래 인성 영업은 하는 게 아니랬는데, 오해가 분명할 사건으로 덤터기를 썼다.
- 그래도 이 판에서 특혜는 적폐 세력 아니냐? 나 서바출신이 저런 특혜받는 거 개극혐함 으;;
- 소속사에서 밀어준 거면 분량도 먹고 간 거 아님? 솔직히 문채민 분량 적진 않았잖아 1차 때 리더 서사 퍼먹인 거 기억나는데 얘 그때 화력 많이 탔지?
- ㅋㅋㅋㅋㅋ 피해자는 빼박 이유준이네; 아니 그럼 한 그룹에 소속사 특혜 피해자랑 가해자가 같이 있는 거야??? 미친 존나 소름 돋아 내가 이유준이었으면 정병온다
- 헐 그럼 얘네 사이도 안 좋겠네? 비즈니스야??
- 원래 서바 그룹이 비즈니스성 띄긴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보이진 않지 나 쟤네 서사 좋아했던 거 후회됨 탈빠해야겠다 제대로 잡았다고 좋아한 내가 멍청했음
- 둘이 저런 문제 있어서 등급 평가때 표정 구렸던 것 아니냐
- 악편이 아니었어? 헐……
- 문채민 맨날 교육자 집안이라고 언플 오지더니 싸패랑 뭐가 다름 학폭 가해자랑 다를 바 없어 보여;
“이건 두고 보면 안 돼. 사실 확인이라도 해야지. 너희가 못 하겠으면 내가 갈게.”
“잠깐만, 정원이 형! 잘못하면 더 입 닫으려고 할 수도 있어. 알잖아, 이유준 성격. 방법이 있었으면 먼저 나서서 말했을 거야!”
당장이라도 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이정원이었다. 강태오는 그런 이정원을 뜯어말리느라 바빠 보였다.
맞는 말이야. 얼마나 똑 부러진 애들인데 정리됐으면 우리에겐 먼저 설명해 줬을 것이다.
지이잉-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와중에,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이런, 서도경이다. 저기보다 여기를 먼저 상대해야 할 것 같았다.
“…여보세요.”
- 문채민 씨, 이유준 씨. 회사로 보내세요.
“그, 대표님! 제가 먼저 가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해결 방법은 있을 겁니다!”
- …좋아요. 한번 들어 보죠. 그럼 신해신 씨 먼저 오세요.
뚝 하고 끊겨 버린 전화에 허탈하게 핸드폰을 바라봤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저 둘을 보내면 될걸. 정리도 안 된 애들에게 혼란을 줄까 봐 나서 버린 상황이었다.
신해신 이 멍청아, 너 해결 방법은 아냐? 그걸 알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나를 돌아보는 멤버들 사이에서 홀로 이마를 짚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 눈앞이 깜깜하다.
“해신이 너…….”
“아, 얘들아, 내가 시간 좀 끌어 볼게. 여길 부탁해. 그리고 저 둘은 얘기가 끝나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말 좀 해 줘.”
이후론 나를 데리러 온 박재민과 함께 밴에 탑승했다. 룸미러 너머로 눈이 마주쳤는데 시선을 피하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핸드폰이라도 보는 시늉 하자. 음, 괜히 봤네. 차선책으로 살핀 여론은 점점 더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 근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존나 치사하다 데뷔한 건 지 실력이라 치자 그래도 기회가 없었으면 못했을 거잖아; 특혜 받은 걸로 나간거면 뺏긴 사람도 있겠지
- 그럼 폭로자가 그 피해자인가? 자기 신상 때문에 말 안 한 거고? 헐… 노답이다. 왜 문채민 까나 했더니 그럼 인정이지
- 야야 이거 얘네 출연했던 방송인데 문채민이 이유준 손 치는 거 보임? 이유준도 웃곤 있는데 그 뒤엔 좀 싸함
- 진짜 비즈니스였나 보네 아니 비즈니스보다 더 안 좋은 듯; 티 엄청 내고 다녔구나.
원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렇지 않았던 행동까지 매도하면서 욕을 하고 있었다.
손을 쳤다는 저 장면은 타이밍상 그냥 엇갈렸던 순간이었다.
이유준 역시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고 문채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마저 대화를 이어 갔다.
그 뒤에 표정이 싸했다는 것도 억지에 가까운 캡처 같았다. 다음 코너로 넘어가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던 장면일 뿐이다.
뭔가 방법이 필요한데. 시스템은 이런 걸 도와줄 수 없는 건가?
잠깐, 시스템이라고? 밴이 방지 턱을 넘는 순간, 번쩍하고 과거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박스 상점! 바쁜 스케줄로 잊고 있었던 상점이 떠오른다. 별의별 물건을 다 팔았었는데, 잘만 뒤지면 뭔가 하나쯤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스 상점 열어 줘! 오랜만에 보는 창이 나타나고 서둘러 프리미엄 탭을 클릭했다. 박재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스크롤을 내리길 한참.
거창한 것까진 필요 없으니까 변론이라도 할 수 있는 힌트를 받고 싶었다.
그때, 내 말이 시스템에게 닿은 건지 아이템 하나가 눈에 보였다.
[(프리미엄)메모리 서칭 엔진 – 다회성 아이템]
버프: 타인의 기억을 검색해 드립니다. (횟수: 3회)
이거다! 다른 건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2,500 코인을 내고 구매를 확정 지은 후 아이템을 장착했다.
[‘(프리미엄)메모리 서칭 엔진’을 구입합니다.]
[아이템 보관함에 ‘(프리미엄)메모리 서칭 엔진’이 저장되었습니다.]
[현재 코인]
4,275 코인
메모리 서칭 엔진 사용할게. 이유준과 문채민이 소속사에서 겪은 일.
[메모리 서칭 엔진]
사용 가능 횟수: ☆☆
[‘이유준과 문채민이 소속사에서 겪은 일’을 검색합니다.]
그 멘트를 끝으로 사방이 번쩍거렸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운전하고 있는 박재민이었다.
* * *
여긴 어디야.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연습실로 보이는 실내인데 누군가 벽에 기대앉아 있다.
문채민……? 아니야, 저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훌쩍이길 한참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연습실의 문을 박차고 문채민이 뛰어 들어왔다.
‘준희 형! 괜찮아?!’
‘…채민아.’
‘석 실장님한테 불려 갔단 소리 들어서 와 봤는데, 혹시… 오늘도 그랬어?’
‘채민아, 나, 그만하고 싶어. 석 실장님한테 찍혔는데 계속 버티는 게 의미가 있을까.’
‘…형.’
‘정환이는 프로그램 출연 건으로 여기 벗어났고, 유준이 형도 데뷔조에 들어가서 안전한데. 너랑 나는 석 실장님이 관리하는 반에 남아 있잖아……. 희망이 없는 거 아니야? 나 진짜 너무 힘들어.’
미간을 찡그린 문채민이 울고 있던 준희란 남자의 어깨를 다독였다.
석 실장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유어돌 당시 인터넷 게시글에서 목격했었지. 트레픽의 아티스트 관리를 맡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감시꾼이니 뭐니 하며 팬들이 언급했던 게 기억난다.
근데 그 사람이 위험하다니? 고개를 갸웃거리기가 무섭게 세상이 뒤집혔다.
라커 룸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유준. 지금보단 앳된 인상이었지만 저건 분명 이유준이었다. 캐비닛의 문을 닫으려던 찰나, 문채민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굳어진다.
‘뭐? 그게 진짜야?’
‘어, 나도 전담반으로 들어가고 알았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주도해서 괴롭혔었대. 이번엔 준희 형이 걸린 모양인데. 유준이 형… 이거 어떡해야 하는 거야? 나 너무 무서워.’
‘채민이 넌, 넌 괜찮은 거야?!’
‘…….’
‘아니구나. 너도 무슨 일 있는 거지.’
심각한 얼굴의 이유준이 문채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천천히 흔드는데 손을 든 문채민이 제 눈가를 가렸다.
‘형한테 찾아오기 전에 영진이 형한테 먼저 상담했어. 준희 형이 괴롭힘당하는 것 같은데 방법이 없겠냐고. 근데 영진이 형이 석 실장님이랑 한편이었어. 준희 형 괴롭힌 연습생 주모자가 영진이 형이야……!’
‘김영진이 박준희를 괴롭힌다고? 그럼 너도 지금…….’
‘아직 석 실장님한텐 말 안 한 것 같은데, 영진이 형이 나도 괴롭히려고 하는 것 같아. 형, 이거 어떡해?’
사내 정치질. 이건 분명 그거였다.
처음에 본 준희란 남자가 주된 타깃이었던 것 같았다. 그걸 알게 된 문채민은 같은 반의 김영진이란 남자에게 조언을 구하러 간 것이고.
근데 하필이면 그놈이 가해자 중 하나였다. 동료를 구하려던 문채민까지 타깃이 될 상태에 놓인 것이다.
문채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 속에서 의지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그게 이유준이었구나.
이유준이 데뷔조까지 들어갔단 건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이걸 다 포기하고 개인 신분으로 나온 거였어……. 첫 만남에서 봤던 녀석의 쓴웃음이 떠오른다.
‘정환이는, 혹시 정환이도 이거 알고 있어?’
‘아, 아니… 걔도 형처럼 다른 곳에 들어가 있으니까 일단은 안전할 것 같아서.’
‘…채민아, 잘 들어. 이거 정환이한텐 말하지 마.’
‘형, 그럼…….’
‘너도, 너도 아무것도 하지 마. 형이 알아서 할게.’
‘형……! 안 돼, 형 데뷔조잖아! 그러다가 큰일 나면 어떡해!’
‘문채민, 여기 석 실장님이 맡는 반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형, 진짜 하지 말라니까! 나 형한테 이런 것 부탁하러 온 거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채민이 너 아직 애였구나?’
펑펑 우는 문채민을 앞에 두고 이유준이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문채민이 고개 숙인 틈을 타 씁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세상이 뒤집히며 중년의 남성과 대치 중인 이유준이 나타났다.
‘너…….’
‘준희한테 다 들었어요, 김영진 통해서 괴롭힘 주도한 거. 이외에도 폭력이 있었다면서요. 여기 진단섭니다.’
‘그래서? 네 목적이 뭔데.’
‘다시는 애들 괴롭히지 마세요. 때리지도 마시고요. 그리고 채민이랑 준희는 다른 반으로 옮겨 주세요. 적어도 석 실장님이 터치하실 수 없는 그런 연습생 반이요.’
‘…그래. 그건 들어주마. 대신 이유준, 넌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데뷔조까지 들어가 놓고 이렇게 나와? 이거 원,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이미 각오했던 일이에요.’
이유준에게서 진단서를 빼앗듯이 받아 간 남자였다.
저, 저……! 이유준 이 귀신같은 녀석이, 왜 저기선 당하고만 있는 거야! 대신 분통을 터뜨리며 남자를 노려봤다.
방 밖으로 나간 이유준은 벽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본다.
‘…잘한 거 맞겠지.’
그러고는 조용히 팔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이유준…….
마지막으로 보인 장면은 캐비닛에 있던 개인 짐을 큰 가방으로 욱여넣고 있던 문채민이었다. 그 옆으론 우정환이 서 있었는데, 문채민에게서 가방을 뺏어 들곤 소리친다.
‘야! 정신 차려!’
‘우정환! 가방 내놔!’
‘문채민, 너 미쳤어?!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그럼!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유준이 형은 나 때문에 회사까지 나갔어! 준희 형도 더는 데뷔하고 싶지 않대! 나만, 나만 남았는데, 내가 여기서 뭘 더 해야 해!’
우정환은 그런 문채민의 어깨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그러곤 빨개진 얼굴로 연신 눈물을 쏟아 냈다. 문채민은 이를 악문 채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우정환만을 노려봤다.
‘너까지 나가면 유준이 형은! 형은 뭘 한 게 되는데!’
‘…….’
‘그리고 나는! 나도 있잖아……. 멍청아. 나랑 같이 유어돌에 나가자. 그리고 거기서 이름을 알려서, 다시는 널 건들 수 없게 만들자.’
‘그게 가능한 거냐고…….’
‘유준이 형이 나가기 전에 나한테 그랬단 말이야! 우리… 꼭 방송국에서 만나자고.’
‘……!’
이야기를 들은 문채민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러곤 이내 아이처럼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채민아……. 어딘가 비상식적으로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한 애였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다른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겁이 많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 아직은 어린 십 대 남자애다.
이제 전부 알겠어. 특혜? 그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문채민이 유어돌에 나가게 된 것은 이유준의 희생과 문채민의 각오로 이뤄 냈던 결과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프로그램의 첫 등급 평가의 자리가 떠올랐다. 아, 맞아. 분명 그랬어. 정신이 없던 터라 잘못 봤다고 생각한 장면이었다.
나와 이유준이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문채민과 우정환은 여길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아서 이유준을 보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갑다는 듯이, 그리고 응원하겠다는 듯이 활짝 말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흰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의식을 차렸을 땐 밴으로 돌아온 이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바보같이. 문채민도, 이유준도 우리 멤버들은 전부 바보였다. 이런 사연 정도는 그냥 말해 줘도 괜찮잖아…….
* * *
여기서 도망가고 싶어. 서도경과 대면하고 있는 미팅 룸이었다. 사연만 알았지, 해결 방법은 전무하단 걸 잊고 있었다. 그래서? 저걸 어떻게 해야 하는데?
숨이 막히도록 불편한 상황에 눈동자만 굴리길 한참이다.
“오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치곤, 말이 없네요?”
“어, 그러니까…….”
호언장담까진 안 했는데요. 차마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막다른 골목길에 내몰렸다고 생각하던 중, 미팅 룸의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지헌인가? 한지헌이면 뭐 해……. 난 여전히 여기 갇혀 있는데.
“해신이 형! 우리 왔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부 해명하겠습니다.”
문채민? 이유준? 문을 열어 준 한지헌의 너머로 문채민과 이유준이 나타났다. 그 뒤엔 다른 애들도 함께 있었는데, 나를 향해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야, 지금 이 상황.
“…확실하겠죠?”
“네.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의자를 꺼내 앉은 이유준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에 헛웃음을 짓자 문채민 역시 고개를 숙이곤 쿡쿡거렸다.
채민아, 어른스럽게 굴어도 네 속마음은 다 알고 있어. 숙소에 돌아가는 그 즉시 머리를 잔뜩 헤집어 줄 계획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엄중한 서도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한번 들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