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서도경과의 만남이 있고 그다음 날, 잡혀 있는 스케줄을 위해 방송국에 출근했다.
MBS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건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표였다. 오늘 나오게 된 이 방송은 월간 아이돌이라는 팬덤용 콘텐츠다.
[게스트 출연진]
하이사인 / 스턴즈
스턴즈가 컴백하고 바로 함께 불리다니, 이것도 악연이라면 악연인 듯했다. 첫 번째 타이틀에선 단독으로 출연했었는데, 이번엔 다른 기획 의도를 갖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우리랑 쟤네 팬덤이 사이가 나쁜 걸 눈치챘군. 이건 분명 어그로를 끌려는 목적이었다. 욕먹는 건 감수하고 시청률을 챙기겠단 놀부 심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늘 괜찮을까?”
“당연하지. 권혜성, 네 몫이 크다. 준비 잘해 둬.”
“롸져!”
그럼 한번 돌아 볼까. 대강 정리가 끝나자마자 고정 MC인 개그맨들의 대기실을 찾아갔다. 출연진이 소규모인 방송인 만큼 눈도장을 찍을 곳은 정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오, 나 처음 봤어~ 우리 조카가 엄청 팬이거든요. 만나서 반가워요. 괜찮으면 사인 하나만 해 주고 갈 수 있어요?”
“네. 물론이죠. 영광입니다!”
유쾌하게 받아들여 주는 듯했으나 난처하단 기색이 엿보인다. 오늘 진행에 있어서 고비가 많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날고 긴다 하는 예능인들이라지만, 방송국 놈들의 어그로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나 보다.
“내 주변에서 해신 씨는 직장인들한테 인기가 참 많단 말이야.”
“하하, 그런가요?”
“어어, 괜히 막 동질감이 샘솟는데! 그것도 재능이야. 감사히 여겨~”
“네, 그러겠습니다!”
시시콜콜한 수다를 얼마나 떨었을까, 슬슬 여기도 벗어나기로 했다. 이 타이밍이라면 거기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오늘 방송도 잘해 보자고?”
“네, 선배님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뭐냐. 아, 아니다. 그건 잘될 거야~”
“쓰읍~! 넌 입방정 좀 그만 떨어.”
방을 나서기 전 MC들은 문채민과 이유준을 향해 진득한 눈길을 보내 왔다. 여기도 논란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네. 제대로 해결이 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불쌍하단 기색이었다.
“…어?”
그렇게 대기실로 돌아가려던 찰나, 스턴즈 녀석들과 마주쳤다. 에이, 좀 더 빨리 지나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좋게 보자. 어차피 쟤네한테도 찾아가야만 했다.
대기실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마주칠 바에야 어느 정도 시선이 있는 복도가 나을 수도 있었다. 조승화도 정신머리가 있는데, 여기선 안 긁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게 누구야.”
…너 정말 내 상상을 뛰어넘는 애였구나? 매니저가 옆에 있었음에도 조승화의 태도는 여전해 보인다. 반응해 주기도 애매해서 난처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그나마 멀쩡한 놈이 있어서 대충 대화는 이어 갈 수 있었다. 오늘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으려나.
간략한 안부를 주고받는데 여길 쳐다보는 조승화의 눈빛이 찜찜하다. 평소처럼 화를 담은 얼굴은 아니지만, 묘하게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설마.
“오늘 방송에서 스포트라이트는 확실히 받겠네……. 아, 아니다. 좋은 게 아니라서 말 못 하겠구나.”
혼잣말 정도는 안 들리게 해 줄래. 이쯤 되면 화가 나는 것도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거 아니야?
걱정스레 돌아본 이정원은 강태오가 잘 막고 있었다. 그럼 남은 건 당사자 둘인데, 쟤네는 괜찮으려나.
“스포트라이트는 전부 받아야죠. 신인 대전이라는 코너잖아요? 그치, 채민아?”
“와. 너. 무. 좋. 은. 기. 회. 다. 유. 준. 이. 형. 오. 늘. 힘. 내. 보. 자.”
응……? 문채민,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들유들하게 받아친 이유준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문채민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감정 하나 없는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대사를 읊조렸다. 아니, 대사라고 하기도 뭐한 스타카토식 어조였다.
하필이면 포지션도 래퍼라서 발음까지 완벽하다. 저걸 딕션이라고 해야 하나. 헛웃음을 내뱉었다.
“푸흡! 큽.”
“야아, 권혜성, 웃지 마……. 채민이는 진지해.”
“크흡, 진지하다니까 더 웃겨.”
문채민을 바라보던 권혜성이 대놓고 터졌다. 제 나름 참는다고 애를 쓰는 것 같은데, 그게 더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고개까지 숙이며 들썩이는 어깨에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감을 인지했다. 설마 지금 일부러 그런 거야?
이렇게 되면 조승화는 화를 낼 수도, 답을 할 수도 없었다. 상대방의 할 말은 빼앗아 버리고, 유쾌한 방향으로 이끈 작전이었다.
로봇 같은 얼굴의 문채민이 마지막까지 딱딱한 표정을 고수했다. 그러곤 여길 돌아보는데 이만 마무리 지으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사 가시는 길이셨죠?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어어……. 네, 그, 나중에 봬요.”
리더 녀석이 내 흐름에 이끌려 대답해 줬다. 그걸 마지막으로 우리가 먼저 장소를 벗어났다.
“채. 민. 아……. 와, 이거 딕션 연습에 도움되겠는데?”
“크헙!”
이유준 너까지 그러기냐. 스턴즈 녀석들과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여기서 이유준이 비슷한 어조를 구사하며 저놈들에게는 빅엿을 선사했다. 뒤에 이어지는 권혜성의 코 먹는 소리까지 완벽한 대환장이다.
나는 쟤네랑 척지지 말아야지. 근래 얌전해서 잊고 있었다. 우리 팀의 트레픽 출신 이인방은 머리로 빠지지 않는 브레인들이었다. 거기에 기까지 강했어.
아무래도 내가 얘네를 과보호하고 있었나 보다.
* * *
“저희 월간 아이돌에도 新기획이 생겼습니다! 그 이름하야~ ‘신인 대전!’”
“핫한 루키들만 모으고 모아서 그들의 모든 걸 낱낱이 보여 드립니다!”
“신인 대전 그 첫 번째 주인공은요? 존재만으로도 감동 그 자체인 스턴즈와 하늘에 떠오른 아름다운 별자리, 하이사인입니다!”
“Turn into a star! 안녕하세요! 스턴즈입니다!”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우리의 인사에 격한 반응을 보내 주는 MC 둘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끝으로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갔다. 미묘하게 경쟁을 부추긴 포맷이 이어진 거다.
쟤네한텐 질 수 없지.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건 저기의 몫이 아주 컸다. 그래서 오늘은 확실하게 스턴즈의 분량까지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시작은 바로 랜덤 플레이 댄스 대결~!”
즉흥으로 재생된 음악에 맞춰 스테이지를 장악하면 끝인 게임이다. 음, 우리 팀에는 이런 걸로 타고난 인재가 하나 있었다.
“우후~! 혜성이, 뭐야! 뭐야!”
그건 바로 권혜성이다. 전주가 나온 지 1초 만에 의자에서 발사되어 튀어 나간 애였다. 무슨 노래인지 알아챈 것도 놀라울 따름인데, 모든 안무를 외워서 추고 있었다.
“너를 보면~ 눈이 부셔! 하! 유얼 마 썬! 샤인!”
“아이고~ 잘한다~!”
스턴즈의 멤버 몇도 참가했으나 표정까지 해당 곡과 동기화되는 권혜성을 이기기는 힘들 일이었다.
걸 그룹의 노래도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본인 춤선에 맞춰 기가 막히게 소화해 낸다. 쟤는 도대체 몇 곡을 알고 있는 거지? 멤버들도 어리둥절해져선 서로를 돌아봤다.
MC 하나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관람 모드에 들어가선 바닥에 주저앉아 박수를 쳤다. 처음엔 콘서트인가 싶었는데 추임새가 바뀌니 경로당 대잔치 같아진다. 그럼 권혜성은 동네 똥강아지인가. 편집할 때 들어갈 CG가 예상됐다.
“아니, 아니 잠깐, 스톱~! 저기요, 하이사인? 그, 혹시 얘 훈련시켜? 랜플 댄스 전용 선수, 뭐 이런 건가?”
이성을 차린 나머지 MC 하나가 크게 엑스자를 그리며 음악을 정지시켰다. 그러곤 우리를 향해 기습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이 부분은 예능적인 장면을 연결해 준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걸 받아 낸 건 바로 윤명이었다.
권혜성이 던지고 간 재킷을 주워 들고 바닥에 있던 물병을 따서 권혜성에 건네준다. 그 뒤 어깨를 주무르며 매니저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선수보단, 스타죠. 자, 혜성아… 물 마셔.”
“우우, 윤명 매니저님. 혹시 옥수수차 있나ㅇ…….”
“그냥 주는 대로 먹어.”
“크헙! 스타라며! 스타라며!”
강제로 물을 주입당한 권혜성이 윤명에게 항의했다. 그런 권혜성을 앞에 두고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양 구는 윤명이었다.
MC 하나는 둘의 역할극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보냈다.
“…이야~ 명이 너, 생각보다 잘 받아치는데?”
“그러게. 인재다. 형 얘 콩트 할 때 섭외할까? 표정이 되게 매력 있어. 막~ 빨려들어 갈 것 같네?”
“…감사합니다.”
흐름을 잡았군. 반대편에 앉아 있던 스턴즈가 초조하단 기색으로 여길 돌아봤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아니, 사실 얘넨 원래 이런 애들이었다. 현타가 온 표정으로 녀석들을 구경하는데 그런 날 목격한 MC가 타깃을 돌렸다.
“해신 엄마, 원래 자식들 키우는 게 쉽지 않아.”
“예?”
엄마? 내가?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는 거지. 대답을 고르는 사이에 옆에 있던 이정원이 치고 들어왔다.
“여보, 내가 많이 도울게.”
얜 또 뭐라는 거야. 너랑 내가 부부냐? 이게 무슨 막장 가족극이지.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니 MC들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짤막한 상황극을 끝으로 다시 원래의 코너에 들어갔다. 초반 승기를 빼앗긴 탓이었을까, 스턴즈 녀석들이 뭐라도 하려고 악을 쓴다. 하지만 초조할수록 티가 나는 법.
춤은 열심히 췄지만 억지로 짜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예능적인 면모는 크게 보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훗, 이겼군.
…근데 이걸로 이겨서 얻는 게 뭐지. 일단 그런 건 무시하기로 했다.
* * *
그렇게 모든 녹화가 종료되고 MC 둘과는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이야, 오늘 괜찮았는데요? 잘 받아쳐서 놀랐잖아요.”
“감사합니다!”
“스턴즈분들도 고생 많았어요. 컴백한 지 얼마 안 돼서 바쁠 텐데, 힘내요.”
“네, 그러겠습니다!”
녹화장을 떠나선 대기실로 돌아가는데 사용하는 공간이 근처인 탓인지 스턴즈와 마주쳤다. 음, 모르는 척 빠르게 지나가자. 또 재앙의 주둥이를 열 수 있으니 그냥 피할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뻔뻔하네…….”
움찔. 조승화의 말 한마디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입 밖으로 꺼내면 다인 건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사납게 구겨진다.
“한 대 치겠어.”
“야, 조승화. 너, 그만해.”
스턴즈의 리더가 조승화를 뜯어말리자 다른 멤버들이 여길 주목했다.
이유준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해신이 형.”
알아, 나도. 이럴 필요 없다는 거. 근데 이건 아니잖아. 입을 다물고 한숨을 삼키는데 그에 조승화가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아, 얘 설마……. 일부러 날 도발하는 건가? 보는 눈이 적다고 한들, 여긴 방송국의 복도였다. 초반 대화가 어찌 됐든 간에 화를 낸 사람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잔머리 쓴 거였네. 분하지만 참는 게 정답이다.
그때, 박재민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이야기였다.
“여러분! 글 올라갔습니다! 조작 루머 반론 글이요!”
그와 동시에 스턴즈 멤버들이 모두 여길 돌아봤다. 생각보다 뻔뻔하다고? 이유준과 문채민은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 * *
전날 회사에 도착한 이유준과 문채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석병권 씨라면 저도 들어 봐서 압니다. 트레픽 첫 번째 아이돌 그룹 배출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했었죠. 트레픽 대표님이 이쪽 업계 출신이 아니라서 거기에 많은 걸 맡기고 있던 모양인데, 그게 오히려 화를 불렀던 모양이군요. 내부에서 이 정도 규모의 트러블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네, 대표님께선 방임주의에 가까우셨으니까요. 아마도 모르고 계셨을 겁니다. 제가 나간 이후에 폭력 건은 사그라들었다고 들었는데…….’
‘연습생을 그만둔 유준이 형이 외부에 발설할까 봐 사린 거예요. 저나 정환이도 유어돌 출연 팀으로 빠지면서 간섭하지 못했거든요.’
‘그럼 이번 일은 전부 가짜란 말이네요. 특혜는 받은 적이 없으며, 그로 인한 피해자 발생도 조작된 루머고요.’
서도경의 질문에 문채민이 주저했다. 그러고는 이유준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준이 형이 관둔 건 저 때문인 게 맞긴 해요…….’
‘아니야. 네가 아니었어도 곧 나갔을 거야. 사실 그때 당시 데뷔조, 말이 많았거든. 멤버 중에 사고 친 녀석이 있어서 엎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걔네도 데뷔 못 했잖아. 채민아,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너를 핑계 삼아 거기서 도망간 거야.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형.’
‘흐음, 두 분 고해성사는 거기까지로 하고.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란 게 뭐죠.’
서도경의 지시하에 이유준과 문채민이 알고 있던 내용들을 밝혔다.
‘이걸 올린 사람이 누구일까 고민해 봤어요.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교묘하게 편집해서 공론화한 사람 말이에요. 저희가 겪은 일들에 대해 전부 안다는 어투인데, 그런 인물은 드물거든요.’
‘일단 정환이와 석 실장님은 제외한 뒤…….’
석 실장이라는 그 인간도 이 사건의 범인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했던 짓들을 굳이 수면 위로 끌어 올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걸 알고 있는 나머지 둘을 떠올려 봤어요. 괴롭힘을 당하던 준희 형과 괴롭힘을 주도하던 영진이 형이요.’
‘준희 쪽은 아닌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유준이 아까부터 쥐고 있던 핸드폰을 보여 주는데 거기엔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박준희]
유준아, 채민아. 나 때문에 미안하다.
이거 김영진 그 자식 짓인 것 같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날 돌아본 문채민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행동이었다.
‘해신이 형,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누가 범인인지 추려 볼 시간이 필요했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을 굳히고 방에 들어간 이유가 그거였구나. 공론화가 터진 이후에는 박준희에게 연락을 넣어 보느라 바빴던 모양이다. 하긴, 그 사람도 간신히 여길 벗어난 걸 텐데, 용기를 내기까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때 당시 사건 관계자는 박준희와 김영진 둘뿐이었어요. 준희와는 종종 연락하던 사이라 범인에 대해 특정할 수도 있었고요. 정환이에게 물어봤는데, 김영진이 다른 회사로 이적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회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까?’
‘네. 어딘지도 확인은 했는데…….’
‘그거, MXP 관련된 곳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MXP 산하에 있는 작은 레이블이랬어요.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대요.’
이제야 모든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김영진이라는 놈의 이적에는 이런 계약이 걸려 있던 것이다. 흠잡기 좋은 미끼를 낚았다고 생각한 거겠지.
김영진 그 녀석도 자신이 주무르던 이유준과 문채민이 데뷔에 성공해서 잘나가는 걸 가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본인이 쓸모가 없어지면 잘려 나갈 꼬리란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준희가 저희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어요. 본인 신분까진 밝히지 못하더라도 그때 있던 일들은 공론화해 주겠대요.’
‘알겠습니다. 남은 뒷일은 저희가 맡죠.’
글이 올라옴과 동시에 큰 파장이 발생할 예정이었다.
가장 먼저 뒤집히는 건 트레픽 내부겠지. 방임주의 대표라고 하더라도 이 일에 대해선 쉽게 넘어가지 못할 상황이니까.
그럼 여론은 우리 편으로 돌아올 일이었다.
준희란 그 사람도 이번 일에 대해선 제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올라온 글은 전적으로 과거의 문채민과 이유준을 옹호하고 있었다.
[서바이벌 그룹 소속사 특혜 공론화 글에 대한 진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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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논란이 된 글의 주인공들과 같이 연습생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해당 멤버들은 글에 적힌 모든 사건과 전혀 무고하단 걸 밝힙니다.
우선 이걸 이야기하기 전에 제가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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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관리자인 실장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 왔고, 이 이면에는 주도하던 연습생이 있었단 이야기였다.
거기서 도움을 준 게 문채민과 이유준이었으며, 문채민은 자신처럼 고난을 겪었지, 특혜와는 거리가 멀었단 걸 설명했다.
또한 이유준 역시 문채민에 의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덧붙여 줬다. 그저 당시 자신에게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폭행의 증거로도 볼 수 있는 서류를 올린 게 큰 힘이 되었다. 처음엔 헷갈려 하던 사람들조차 편을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치였다.
- 미친아 이게 뭐냐 폭행? 사내 괴롭힘? 시발 현실이 영화고 영화가 현실이다…. 개무서워
- 그럼 문채민은 소속사 특혜받은 적도 없다는 거네?? 이유준도 문채민 때문에 피해 본 게 아니라 사내 왕따 막으려다 자진 퇴사한 거고?
-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 둘 사이 되게 좋아 보였는데… 유어돌 하는 내내 목격담 엄청 많이 떴잖아 처음부터 이상하더라니;;
- 진짜 그 글대로였으면 원수가 따로 없었을 텐데 밖에서 만났겠냐 ㅠ
- 빛채민 빛유준 당신들은 도대체…….
- 특혜는 무슨 오히려 다 뒤집어쓴 거 같은데 ㅠㅜㅠㅜㅠ 그 상황 속에 데뷔까지 성공한 거라고 ㅠㅜㅠㅜㅠ 얘들아 진짜 너넨….
- 뭐야 이유준 뭐야 문채민 둘 다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ㅠㅠㅠㅠㅜㅠㅜㅠㅜㅠ
- 본업도 쩌는데 인성은 더 쩔었구나…. 인성 영업하는 건 아니랬지만 얘넨 진짜 해도 된다
“준희 형…….”
“큰일 해 주셨네.”
그리고 이 글은 곧 모든 논란을 가라앉혔다. 당사자가 증거까지 내밀면서 강하게 나오니 루머를 퍼뜨린 주인공이 글을 삭제한 것이다.
- 야 원글자 튐 이 새끼 구라충 맞아
- 아 ㅅㅂ!!! 제대로 당했네 어쩐지 주절주절 말만 많더라
- 내가 팩트 없는 글은 믿지 말랬지 우리 애들이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ㅠㅜㅠㅠ
- 와 슈스라고 온갖 해충들이 다 달라붙네; 미친 근데 이 새끼는 도대체 누구야?
- 반론글에 있던 가해자 아님?? 연습생 하나가 관리자한테 싸바싸바하느라 주도해서 애들 괴롭혔다고 했잖아
- 소름;; 진짜 개야???? 근데 그 관리자는 누구고? 혹시 아직도 트레픽에 있어???? 남아 있는 연생들은?????
- 헐……. 정환이 트레픽에 있지 않나 미친아
- #트레픽폭행관계자공개해 #트레픽_논란_해명해 #트레픽불매
이 일은 곧 트레픽의 내부 개편까지 불러들였다. 팬들이 해당 글에 나오는 관계자가 석 실장이란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니란 식으로 돌려서 말하던 트레픽이었는데 그것도 이내 그를 감싸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새로운 공지글이 올라오며 모든 판도가 뒤집혔다.
[당사와 관련된 연습생 폭행 논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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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관계자를 해고 처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사와의 사건에서 피해를 본 피해자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전달드립니다.
이 일에 대한 모든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추후 해결까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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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진짜 석 실장이었음; 공지글 올라간 이후에 ○○○그룹에 석 실장 안 붙음;;
- 공지 싸가지 레전드 우리 애들도 지금까지 괴롭힘 받은 거 아니냐? 토씨 하나 빠지지 말고 다 얘기해 얼른
- 내가 말했지 감시꾼 새끼 관상 존나 싸하다고!! 팬들 하대할 때부터 알아봤어 뻑하면 밀치고 욕하고 시발롬아 내가 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감시꾼 예전엔 연생도 맡았었음??? 난 데뷔 조나 런칭 그룹만 한 줄 알았는데 ㅅㅂ 이미 활동 중인 애들 옆에서도 저 ㅈㄹ이었으면 연생들한텐 얼마나 심했을까
- 짬이 있어서 원래 잘 안 하는데 가끔 비활 들어가면 연생 쪽도 했다고 함 근데 싸이코였던 게 문제지 진짜 고생했겠네
트레픽 쪽 일이 마무리된 이후론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김영진의 신상도 밝혀졌다.
소문에 민감한 업계에서 이번 사건은 엄청난 꼬리표지. 팬들의 비난과 욕설을 떠나 회사에서 이 녀석을 안고 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 ㄱㅇㅈ 얘 맞는 듯 석 실장이 맡았던 반 연생이었는데 얼마 전에 ㅇㅇㅅㅍ 산하 레이블 ㅅㅇㄹㅅ로 이적했음. 관상 보니까 성격 드러울 거 같네
- 그러니까 그런 구라를 싸질렀지 진짜 존나 못 된 거 같아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게 꼬아놓냐
- 일반인들은 쉽게 생각하지도 못할 사고다 이 정도면 정병이랑 억까들이 한 수 접어야 할듯
그 뒤로 김영진의 말로도 들을 수 있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다가도 사과하기를 반복하며 빌고 있다나 뭐라나.
박준희에게 연락했다가 협박 건으로 고소당했다고 전달받은 게 얼마 전이다.
- 채민이랑 유준이 형은 괜찮아?
“어, 걱정했는데 생각보단 괜찮아 보여. 정환이 넌?”
- 나야 방송 출연한 이후로 석 실장이 못 건드렸지~ 게다가 그 인간 맡고 있던 선배들 따로 있었거든. 비활동기에만 넘어왔던 거라 요즘은 마주칠 일도 없었어. 그래도 좀 꼴 뵈긴 싫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오랜만에 통화하는 우정환은 예전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방임주의이던 대표도 뒤통수를 맞은 게 열받았는지 석 실장을 고소하겠다며 날뛰고 있다고 말해 줬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괜히 우리 일에 연루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 에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건 당시에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희희낙락한 죄인 거지. 그리고 형! 이건 둘한텐 비밀인데, 나도 내년엔 데뷔할 것 같다?
“진짜? 잘됐다. 채민이랑 유준이가 좋아하겠어.”
- 응! 서프라이즈 하려고 기다리고 있지~ 우리 대표님 성격상 지금 일 때문에 데뷔조를 엎을 것 같진 않거든. 별 탈이 없으면 내년 초엔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목 닦고 기다리고 있어~
“출사표가 너무 공격적인 거 아니냐.”
- 큭큭, 이 정돈 돼야 긴장하고 있지. 준희 형도 하고 싶던 일 찾아서 잘 사는 것 같고~ 아, 협박 건 고소는 형네 회사가 도와줬다며?
“…뭐?”
그런데 여기서 뜬끔없는 소식을 들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래.
- 어? 모르고 있었어? 준희 형이 그랬는데? 메이터스의 한지헌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대. 법적 관련 자문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물론 들키면 복잡해지니까 입단속 해 달라고 말하더라. 나야 형들하고만 이야기하는 거 알아서 얘기해 준 거고.
한지헌……. 실장인 그 사람이 혼자 나섰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서도경의 지시란 뜻이었다.
도대체 그 사람 얼마나 손이 빠른 거야. 소름이 돋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겐 너무 살벌한 해피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