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자정이 훌쩍 지난 새벽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조용히 거실로 나갔다가 식탁에 앉아 있는 이유준과 문채민을 발견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 형, 깼어?”
“아니, 너희 이러고 있을 거 같아서 나왔어.”
식탁 의자를 빼고 녀석들의 옆에 자리했다.
“마음고생들 했다.”
둘의 이성적인 판단이 이번 논란을 잠재웠다. 마냥 불안하다고만 생각한 애들이었는데, 꽤 대견하게 느껴지는 바이다.
“…고마워.”
“내가 뭘 했다고. 너희가 빠르게 처신해서 잘 해결할 수 있었던 거지. 리더 된 입장에서 아무것도 못 해 줘서 미안하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애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틀었다.
“유어돌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해결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과거를 떠올리는 문채민은 제법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걸 들은 이유준 역시 그때 당시를 언급한다.
“맞아. 석 실장님 눈에 띌까 봐 조심했었던 게 엊그제 같지.”
“아, 그래서…….”
식당에서 고개를 돌린 거였구나. 이건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상대방을 걱정하여 피한 거였다. 뒤에 가서 친분을 표현했던 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석 실장인지 뭔지 하는 그 사람도 눈치는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채민이 너, 파이널 소감에서 유준이 언급 안 했던 것도 그거 때문이야?”
“응! 사실 그것도 말을 맞춰 둔 거였지?”
“와~ 진짜 옛날처럼 느껴지네. 실제론 반년 정도밖에 안 지난 일인데.”
같은 난관을 헤쳐 나간 탓일까, 얘네의 유대는 내 생각 이상으로 깊은 것 같았다. 나보단 월등히 어린 애들이라고 봤는데, 하는 행동들을 봐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듯하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길 한참, 이유준과 문채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갸웃거리니 그런 날 본 둘이 키득거렸다.
“나 사실 처음에 형 좀 무서웠다?”
“참 나, 뭐래.”
“왜, 1차에서 같은 팀 됐을 때 가만히 웃고만 있었잖아. 속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유준이 형 페어였으니까 괜히 긴장되더라고.”
“그런 것치곤, 너 엄청 똑 부러졌거든. 채민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그때 너한테 많이 떠맡겼다?”
“뭐야, 그게~!”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인데 진짜야. 김찬규도 그렇고, 많이 맡긴 건 사실이었다.
그때의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는지 쉼 없이 조잘거리는 문채민이다. 고등학생 같은 풋풋한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저게 뭐지? 그때 갑자기 녀석의 상태 창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제 나름의 표정 관리를 하며 지켜보기를 한참. 스탯 하단에 낯익은 멘트가 떠올랐다.
[확률 성장 트리]
미개화: ??? ???(??)
…문채민도 확률 성장 트리가 있었어? 물음표로 이루어진 단어들이 스르륵 변화했다.
[13… 37… 58… 79… 94… 100%]
[확률 성장 트리 개화]
[확률 성장 트리]
개화: 마인드 컨트롤 (심화)
언제 어디서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 –60%
하하, 진짜 본인이랑 잘 어울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네. 몇 번 해 봐서 그런 걸까, 거부감은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대견한 느낌이랄까.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는데, 옆에 있던 이유준의 상태 창에서도 이상한 기운이 감지된다.
[확률 성장 트리]
개화: 리드미컬 스테이지(기본)
자신의 플로우를 유지합니다. 박자감 +35%
[확률 성장 트리가 업데이트됩니다.]
[확률 성장 트리]
개화: 리드미컬 스테이지(심화)
자신의 플로우를 유지합니다. 박자감 +70%
…업데이트? 이유준의 확률 성장 트리가 기본에서 심화로 바뀌어 버렸다. 실질적인 내용은 같았으나, 그 수치가 두 배 이상 뛰어 버린 상황이었다. 이게 뭐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 날 본 이유준은 소리 내서 웃기 바쁘다.
“하하! 형, 얼굴이 왜 그래!”
“넌, 이런 상황에 잘도 웃는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젠 남이라는 생각도 잘 안 드는 애들이었다. 턱을 괴곤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던지자 웃음을 갈무리한 이유준이 고개를 들었다.
천장을 바라본 상태에서 곁눈질만 하며 여길 돌아본다.
“형.”
“왜.”
“…고마워, 항상.”
…뭐라는 거야. 알 수 없는 마음에 덤덤히 대답해 줬다.
“오냐.”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 * *
[개화에 성공하셨습니다.]
[플레이어님께 업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업적 코인 ‘1,000’코인 + 블랙 쿠폰 1매
기상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방으로 돌아온 이후엔 업적 보상이 주어졌다. 보상은 문채민만 해당하는 건가? 이젠 이것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진짜 이 녀석 정체가 뭐지. 남들의 기억까지 볼 수 있게 해 준 게 놀라웠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걸 못 써 봤네. 저번에 이벤트를 성공하면서 받은 보상 중 하나가 떠오른다.
“기억 키워드라고 했지.”
[키워드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2회
몽환: 100%
감성: 100%
이건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거야. 기억 키워드 열어 줘? 우스갯소리로 던져 본 말이었다.
……어라? 그런데 그 멘트를 시작으로 주변이 변화했다.
[‘몽환’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합니다.]
‘뭐야.’
진짜 이렇게 적용된다고? 방금 전까지는 내 방 침대 위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어색한 마음에 손바닥을 들자 반쯤은 투명해진 상태가 확인된다. 일단 주변부터 살펴보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밤인지 새벽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어두운 거리.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가다가 낯이 익은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소망 보육원]
‘…여긴.’
나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소망 보육원, 과거 은사님이 근무하시고, 내가 자라난 시설이다.
왜 여기로 오게 된 거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두리번거리는데, 그런 내 앞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나타났다. 건물 입구 앞에 모여 놀랐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 가는 모습이었다.
‘어머! 어떡해!’
‘원장님!’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ㄱ……. 사람들 근처로 다가가자 한 명이 안고 있는 물체가 보였다. 두툼한 원단에 감싸져 있었는데 얼핏 보이는 살결이 어린 아기임을 알려 줬다.
‘옷! 옷 좀 줘요! 빨리요!’
‘…은사님?’
중앙에 서서 소리치고 있는 저 사람은 바로 은사님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은사님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둘렀다. 체온을 연신 체크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니 한숨을 내쉰다.
‘으아앙~!’
‘하아, 다행이다. 밖에 오래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갑시다!’
‘네!’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지금 이 상황에 대해 파악했다.
아직은 봄이라고 할 수 없는 추운 계절, 보육원 입구에 버려진 작은 아기였다.
‘…….’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도 저건 어린 시절의 나일 것이다.
눈에 익은 복도에 서서 사람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출생 신고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대요.’
‘어머! 보통 간단한 인적 사항 정도는 적혀서 들어오는데……. 얘는 이름도 몰라서 어떡해요.’
‘저희 시설로 배정될 것 같다던데요? 벌써 이름도 지어 줬대요.’
‘진짜요? 남자애였었죠? 그래서 이름이 뭐래요?’
‘해신이요. 함께 해(偕) 자에 새벽 신(晨) 자 써서 해신이랬어요. 새벽에 만나서 함께하게 됐다고 이렇게 정했다던데요. 성은 관례대로 원장님 성인 신씨로 하고요.’
‘해신이라~ 이 선생님이 엄청 신경 써서 돌보고 있는 것 같던데.’
‘이 선생님이 제일 먼저 발견했잖아요. 아무래도 마음이 가겠죠.’
…나 맞네. 들리는 대화에 고개를 끄덕이곤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직 어린 아기들이 모여 있는 방이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한번 은사님을 볼 수 있었다.
잠이 든 내 위로 이불을 덮어 준 뒤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광경이다.
‘안녕, 과거의 나.’
아직 돌도 안 된 것 같은데. 분주한 은사님을 뒤로한 채 어린 나를 내려다봤다.
참 나… 슬프고 뭐고 할 것도 없잖아. 지금은 그저 어이없다는 마음뿐이었다.
‘으응~’
‘어, 해신아? 얘가 왜 벌써 깼지?’
‘신해신, 인마. 너 왜 울어. 울지 마.’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묘하게 기구한 팔자란 말이야. 잠투정을 부리니까 은사님이 나를 안아 든다.
‘왜 은사님 힘들게 그러냐. 얌전히 잠이나 자라.’
옆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는데 녀석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혹시 내가 보이나? 헛웃음을 지으며 지금 사태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파지직- 그때 어린 내 위로 스파크 같은 게 튀어 올랐다. 어? 저게 뭐지. 순식간에 사라지긴 했으나 뭔가 나타났던 건 틀림없었다.
놀란 마음에 손을 뻗으려 하니 다시 한번 정전기 같은 게 튀어 올랐다. 그러곤 그걸 기점으로 내 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으아앙!’
‘어, 어~ 울지 마, 해신아.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연신 날 달래고 있는 은사님이었다. 등을 돌리며 어린 나를 감싸 안는데 그때 내 위에 붉은색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걸 목격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상황에 당황하여 소리쳤다.
시스템 넌 뭘 보여 줄 거면 확실하게 보여 주든가!
이내 눈앞이 깜깜해지며 새까만 어둠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먼 과거 속의 나를 둔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아! …신아!”
“……?”
“신해신! 야!”
“으윽.”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건 이정원의 목소리다. 뭐야, 머리 울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이정원이 팔짱을 낀 포즈로 나를 내려보고 있다.
“너 대체 몇 시에 잤어? 오늘 왜 이렇게 못 일어나?”
“뭐?”
내가 언제 잠이 들었더라. 어제 새벽에 그 둘과 대화를 나눴고, 방에 들어와선 업적 보상을 받았지. 그 뒤론 기억 키워드를……. 맞다! 과거의 나!
놀란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긴 숙소의 내 방 침대 위였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는데 방문이 열리고 이유준이 나타난다.
“정원이 형, 해신이 형 일어났어?”
“어, 근데 아직 잠이 덜 깬 거 같아. 너희 도대체 몇 시에 잔 거야?”
“흐음, 그렇게 늦게는 아니었는데…….”
꿈이었나. 꿈이라도 하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뺨을 비틀어 꼬집자 그런 날 본 둘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프네?”
“…너 혹시 어디 안 좋아? 이유준, 쟤 왜 저래.”
“어제 그렇게 늦게 재웠던가……. 해신이 형, 많이 피곤해?”
쟤네가 저러는 걸 보니 현실이 맞군.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다가 어제 띄워 놓은 상태 창을 발견했다.
[첫 번째 키워드의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
[첫 번째 키워드의 전환 보상으로 세 번째 키워드가 오픈됩니다.]
[키워드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1회
감성: 100%
강렬함: 0%
응……? 몽환이 사라졌다? 그런데 강렬함은 또 뭐야? 거기에 새로운 키워드가 하나 더 오픈됐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건 시스템이 주는 힌트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하나씩이라도 밝혀 가는 게 낫겠지. 둘의 어깨를 토닥인 뒤 천천히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엣취!”
“권혜성, 더러워…….”
“킁, 추운 걸 어떡해. 윤명 넌 감기도 안 걸리냐.”
“…나 그런 거 잘 안 걸려.”
“우와~ 쟨 진짜 어떻게 돼먹은 몸뚱인 거야.”
“혜성이 네가 약골인 거지…….”
“뭐!”
“아, 형들. 그만 좀 해! 태오 형! 여기 좀 말려 줘!”
“알아서 해라.”
오늘도 난리법석이군. 중간에 낀 문채민이 강태오에게 SOS 신청을 했다. 야멸차게 거절하는 녀석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날이 영 흐리네. 비가 올 것 같은데.”
행사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내려온 스케줄이었다. 날씨가 영 심상치 않지? 공연을 떠올리면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다.
늦은 밤이 돼서야 시작하는 일정이라 대기실에 들어가서 경과를 살폈다.
“우리 순서는 꽤 뒤였는데.”
먼저 시작한 앞 팀의 리허설을 모니터링하다가 벽에 붙은 출연자 리스트로 시선을 돌렸다.
아, 하필이면 여기에 다 있냐. 서울에서 하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이름 있는 지역의 콘서트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명세 있는 그룹들이 라인 업으로 포진해 있는 걸 발견했다.
[하이사인]
[이터널리즈]
[인클루]
[디레스트]
[유수아]
[킬라잇]
[스턴즈]
.
.
.
“진짜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
“뭐가? 아, 너도 이거 봤구나.”
“우리 공연만 잘하고 가자.”
“당연히 그래야지.”
…괜히 불안한데? 날이 선 눈빛으로 스턴즈와 디레스트가 적힌 부분을 노려본 이정원이었다. 쟤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군. 이유준과 문채민이 겪은 일은 MXP와 관련 있었다는 점 말이다.
김영진인지 김영신인지 그 녀석이 MXP 산하 레이블에 들어갔다는 소식서부터 모두가 그곳을 견제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에휴, 언젠가 알게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 타이밍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뭐, 별 탈은 없겠지.
그리고 정확하게 그 생각은 2시간 만에 철회됐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외부 리허설을 끝내고 난 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멤버들과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커피 쏘기 내기를 했다.
‘이긴 사람이 가는 거라고 말 안 했잖아!’
‘…했는데? 아주 작게…….’
‘맞아~ 형이 못 들은 거지~’
‘해신이 형, 미안해. 난 따듯한 카페라떼.’
‘문채민, 네가 제일 나빠.’
‘난 아메리카노. 따듯한 걸로 부탁해?’
‘어? 나도~’
‘이런…….’
밀려드는 주문 속에서 체념한 상태로 핸드폰에 메뉴를 받아 적었다. 대신 가 주겠다는 오병은과 박재민에겐 괜찮다고 거절을 한 이후였다.
멤버들과 스태프들 몫까지 음료수를 결제한 뒤 대기실로 배달해 주겠다는 말을 듣곤 이동했다. 다른 연예인들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위기였던 터라 문제는 없겠거니 싶어 방심하던 상황이었다.
복도의 코너를 도는 순간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쳤다. 얼마나 튼튼한 인간인지, 내가 절로 물러서게 되는 묵직함이었다.
‘악!’
알싸한 통증에 가슴팍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어 사과를 던졌다.
‘어, 죄송합ㄴ…….’
‘오랜만이네요?’
눈앞에 서 있는 건 바로 디레스트의 김환준이었다. 그쪽이 왜 여기서 나와. 멤버들은 어디다 버려 뒀는지 혼자만 있어서 더 최악이다.
“신해신 씨?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건 알겠는데요. 슬슬 대답 좀 해 주지 않을래요? 뻘쭘하거든요.”
“깜짝이야! 네, 네…….”
김환준이 고개를 기울이다가 내 반응을 보곤 피식 웃었다. 누군가와 통화라도 하던 중이었는지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강제로 종료해 버렸나 보다. 까맣게 물든 액정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틀어 놈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특이하네.”
“네?”
내가 무슨 멸종 위기종이냐. 할 말 없으면 각자 갈 길 가자. 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태도까지 두루뭉술해서 더 난처했다.
“음, 좀 어색하죠? 보통 이럴 땐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녀석의 말에 김환준의 눈을 바라봤다.
“별 이유도 없이 3번이나 마주쳤으니까, 이것도 인연이다 싶잖아요. 우리, 번호 교환할래요?”
“…네?”
싫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싫어.”
뭐지? 내가 마음의 소리를 내뱉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대신 답해 줄게. 싫어. 그러니까 곱게 가라, 김환준.”
“…멘토님?”
“오냐, 제자야. 구원투수 등장이다.”
나타난 건 바로 지원겸이었다.
미친놈들아, 지옥의 삼자대면이냐. 구원투수는 개뿔이, 이게 더 안 좋은 상황 같았다. 둘 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한숨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