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원겸의 눈빛이 날카롭다 못해 매섭다. 왜 내 핸드폰 가지고 니들이 난리인데.
연락처를 주기 싫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적당히 변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말씀은 감사드리는데 저희가 아직 신인이라서요. 회사에서 연락처 교환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거든요.”
“하하, 남자도요?”
사실이겠냐? 당연히 거짓말이다.
여자 연예인은 우리가 알아서 피하고 있었지만 남자 연예인 한정으론 제법 자유롭게 풀어 줬다.
하지만 굳이 그걸 김환준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 어떻게 하겠냐는 심정이었다.
“흐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쉽네요. 그럼 그쪽 멘토님도 모르겠어요?”
“네?”
그 와중에 지원겸은 김환준을 보며 성을 내기 바쁘다.
“몰라, 모른다고. 그러니까 당장 꺼져. 왜 사람 길 가는데 막고 난리야.”
그건 좀 억지스럽잖아.
아직 복도에는 세 사람이 이동해도 될 만한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시비 건 것도 저쪽이었다.
같이 편이라고 한들, 도움 주긴 힘든 행동이다. 남들이 봤다면 지원겸의 인성을 의심해 봤을 만한 멘트였다.
그때 지원겸이 온 방향에서 낯선 얼굴이 등장했다.
“형! 거기서 뭐… 어, 이런.”
화려한 인상의 남자로 지원겸과 김환준의 대치를 보곤 눈알을 굴리기 바빠 보인다.
저 사람도 묘하게 낯이 익은걸. ……혹시 인클루 멤버인가?
가만히 살펴본다는 게 그만 눈이 마주쳐 버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입을 뻐끔거리면서 내게 무언의 의사 표현을 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예?’
‘에잇, 원겸이 형 빼내야 하는데, 저, 저기! 나 좀 도와줘요!’
나 허락 안 했는데. 아직 내 동의가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제멋대로 어색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룹 리더나 멤버나 똑같은 놈들만 뭉쳤나 보다.
“하, 하핫! 아니, 이게 누구야? 말로만 듣던, 하이사인의 해신 씨 아니야?”
“…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는 맞겠지? 하는 짓을 봐선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이쪽으로 지원겸과 김환준의 시선이 돌아왔다.
“아, 김환준 선배님도 안녕하세요. 매니저 형이 겸이 형 불러서 그러는데, 저흰 이만 가 봐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그럼 신해신 씨는 나랑 얘기 좀…….”
뭐야. 지원겸만 빼내는 거였냐. 그럼 나는?
이어지는 김환준의 말에 당황스러워하던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댔다. 확인해 보니 나를 찾으러 나온 듯한 모습의 권혜성이었다.
“해신이 형! 커피 사러 어디까지 갔던 거야~ 배달이 먼저 도착했잖아!”
헐레벌떡 달려온 권혜성이 놀랐다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녀석을 오래 본 난 알 수 있었다.
전부 눈치챘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선 급히 나를 빼내려고 하는 듯하다.
권혜성, 이 약아 빠지고 예뻐 죽겠는 놈. 내게는 진짜 구원투수의 등장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하이사인의 권혜성이라고 합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이름 많이 들어 봤습니다.”
발 연기를 뽐내는 인클루의 이름 모를 멤버를 앞에 두고 권혜성이 온갖 능청을 떨어 댔다. 김환준과 지원겸의 기 싸움을 목격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평이한 어조였다.
내게 시선을 돌린 뒤에는 그럴듯한 변명까지 덧붙여 온다. 아무래도 여길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형, 커피도 커피인데, 의상 세팅 때문에 빨리 와 달래. 죄송한데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권혜성에게 끌려가는 척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에 있던 발 연기 멤버가 연신 입 모양으로 헬프를 외쳐 댔다.
‘저, 저기요! 나는! 우리는!’
너도 나 버리려고 했잖아. 못 알아들은 척 어깨를 으쓱이곤 그 무리에서 멀어졌다. 지원겸에게는 나중에 보자는 손짓을 남긴 뒤였다.
“하하, 재밌네.”
“난 하나도 재미없거든.”
“겸이 형, 제발… 우리도 좀 가자…….”
너희 싸움에 나 끼워 넣지 마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듣다가 몰려오는 피로에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이후, 머리 뒤로 뒷짐을 진 권혜성이 나를 돌아봤다. 의상 세팅이 변명이었단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급하단 말과 달리 천상 느긋한 권혜성의 태도가 바로 그 증거였다.
쟤 덕분에 살았네. 이건 진심이었다.
“형은 안 그러는 척, 이상한 사람들이랑 잘 어울린단 말이야~”
“어울린다기보다는 엮이는 거거든. 그리고 나도 그러기 싫어.”
“킥킥, 그럴 것 같아서 구하러 온 거지!”
“고맙다…. 다른 애들은?”
“태오 형은 정원이 형 마크 중. 유준이 형은 채민이한테 잡혀 있고! 윤명은 음료수 먹다가 흘려서 혼나고 있어~”
“…네가 온 이유가 있었구나?”
들리는 이야기들에 이마를 짚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에도 권혜성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시덕거리길 한참이었다.
“나 말곤 없지? 내가 짱이지?”
“그래, 네가 짱이야.”
유쾌한 몸짓에 따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인다. 괜히 장한 기분이어서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악, 형! 머리 망가지면 나도 혼나!”
“맞다! 깜빡했어. 미안, 미안.”
저기를 벗어났다는 걸 떠나서 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얘네에게 정을 주긴 한 모양이다. 이걸 유대감이라고 봐야 하나. 머쓱한 마음에 머리만 긁적였다.
* * *
“악! 비 온다! 내 카메라!”
갑자기 쏟아진 비로 객석이 온통 난리가 났다. 우비는 챙겨 왔지만 쏟아지는 물세례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이사인이 두 번째 앨범으로 컴백한 것도 벌써 한 달이었다.
계정을 운영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바늘구멍 같은 티켓팅에 성공하여, 지방까지 짐을 싸 들고 내려왔다. 춥고 배고프고 처량한 신세였지만 하이사인을 볼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이겨 낸다… 원래 레전드는 이런 행사에서 나오는 거라고.”
온몸으로 카메라를 감싸며 무대만 지켜보길 한참, 앞 그룹의 공연이 끝날 때쯤 퍼부은 물줄기에 무대 위론 흥건한 웅덩이가 생겨 있다. 미친, 공연 중단하는 건 아니겠지?
상승세를 통해 인기를 끌어서일까 연차에 비해선 제법 뒤 순서를 배정받은 하이사인이었다. 괜히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어선 MC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다음은? 강렬하고 묘한 퍼포먼스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분들이죠? 하이사인입니다!”
“꺄아악!”
“얘들아!”
쏟아지는 비와 맞먹을 정도의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쯤 그늘이 진 공간을 벗어나 완전한 야외로 움직인 멤버들이다. 빗줄기가 굵어진 탓이었을까, 세팅받은 머리와 의상이 젖어 가는 걸 목격했다.
센터인 해신이는 조금 추웠는지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로 대형에 위치해 있었다. MR이 나오는 걸 기다리는 모습에서 오늘 대박이 터질 거란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미친…….”
늦은 저녁, 빗줄기를 뚫고 조명 7개가 번쩍 빛을 발했다. 그 아래론 멤버들이 서 있었는데 화려한 모션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렌즈에 물기가 닿는 걸 닦아 내며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들이 해신이의 움직임에 따라 튀어 올랐다.
여차하면 미끄러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멤버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음향 기기에도 문제가 생긴 것일까. 평소보다 작은 음원 속에서 생생한 라이브가 전달된다.
실력 존나 쩐다……. 이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에 있던 데이터 팔이들과 타 그룹 홈마들도 무대를 돌아봤다.
셔터에선 손을 떼지 않은 상태로 푹 젖은 채 머리가 내려온 해신이를 목격했다.
- Woo- ah- woo-
Yes, pandora
이정원의 높은 고음에 맞춰 더블링을 깔아 주곤 오른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흰 얼굴 위로 튀어 오른 물방울이 불편했는지 찡그려진 미간이 스크린 위로 떠올랐다.
“꺄아아악!”
검은 슈트 형식의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습기로 달라붙어 실루엣이 드러난 상태였다. 멤버들이 앞으로 나서는 파트에 맞춰 체인 장식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차고 있던 넥타이가 목을 죄었는지 이유준과 이정원은 목덜미 주변의 셔츠를 끌어 내렸다.
문채민은 인이어가 귀에서 빠졌지만, 방해 요소가 아니란 듯이 완벽한 랩을 구사했다.
- 변화를 받아들여
이끌림에 따르면 되는 거야
걱정 마 이건 새로운 너(나)야
빗줄기에 맞춰서 권혜성의 댄스 브레이크가 이어졌다. 긴 팔다리로 빠르고 정확하게 모든 동작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멍한 눈빛의 윤명의 턱선으로 빗물이 고여 떨어지고 물에 젖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강태오가 센터로 걸어 나왔다.
- Don’t be afraid
숨겨진 미지를 향해
그 걸음을 내디뎌 봐
곡의 절정에 달한 순간 해신이가 사나운 기색을 내비쳤다. 타이밍에 맞춰 하늘에선 ‘번쩍!’ 하고 천둥이 내려쳤다.
스크린 위로는 새까만 안광을 빛낸 해신이가 잡혀 나온다. 창백할 정도로 질린 얼굴과 대비되어 까만 차림이 부각된 순간이었다.
- Pandora 어서 그 상자를 열어
손을 들어 포인트 동작을 해낸 해신이 주변으로 멤버들이 동선을 이동했다. 서로를 붙잡은 듯한 포즈를 취한 채 가쁜 숨을 내뱉는 중이었다.
입가에선 연신 김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게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는 듯했다.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림새의 남자들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과 뺨을 훔쳐 내며 객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쩐다.”
뷰파인더에서 시선을 내린 뒤에야 무대 위의 서 있는 일곱 명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이사인의 무대를 끝으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진다. …하늘이 얘네를 도왔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장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친아…….”
나, 레전드급 사진을 찍은 게 아닐까.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로 시선을 이동했다. 그리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자 애를 써봤다.
* * *
이날은 여타 홈마들도 본인 그룹의 레전드를 건졌다며 글을 올렸다. 먼저 올라간 후기들로 인해 실트까지 장악한 지방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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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콘 하이사인 장난 아니었다
진짜 얘네한테 홀린 것 같았음
무대 끝나니까 빗줄기 가늘어진 게 레전드 ㅜ
신해신 파트 때 천둥쳤는데 그때 안광 잡힌 거
두고두고 회자 될 이야기임 ㅁㅊ 말도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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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 다녀온 애들 중에서 하이사인 입덕 존나 많네;; 프리뷰 보긴 했는데 그렇게 쩔었냐
- 그냥 미쳤었어 와이튜브 당시 라이브 보면 알 걸 현장감은 더 오졌대 와 이걸 갔어야 했는데……
- 비에 젖은 미남 존나 귀하다 그걸 실물로 봤는데 나 같아도 넘어가지 ㅜㅠ 안 그래도 퇴폐 날티상이 센터인 노래인데 거기에 날씨까지 따라준다? 갓전드 아닌 게 이상할 지경임
프리뷰까지 속속 들어 올라오니, 팬들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보정이 된 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무대였단 게 화면 밖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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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 씨(our sea) @our_sea_pic · 10분 전
(사진) (사진)
000000 ○○콘 preview
#하이사인 #HISIGN #해신 #HAE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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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g! He is amazing!!
- 이렇게 꽁꽁 싸매고서도 퇴폐미 오질 수가 있냐
- 진짜 난 해신이의 이런 갭차이를 너무 사랑해 ㅠㅜㅠㅜㅠㅠ
- 하 나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들다
뒤이어 하이사인 멤버들의 프리뷰와 영상이 쏟아졌다. 직접 참관했던 사람들의 후기까지 나오며 온갖 화력을 끌어모은 무대였다.
- 나의아기말랑샤크베이비 챔니 ㅠㅜㅠㅜㅠㅜ 물에 젖으니까 얼굴 말간 것 봐 ㅠㅠ
- 오늘 신해신 존나 잘했다고 느꼈는데 나만 그런 거냐???
- ㄴㄴ 나도 그거 느낌 얘 점점 실력이 좋아진다? 원래도 리드는 거뜬히 할 정도였는데 이젠 메보급은 나오는듯; 7인조에서 메보 둘이 가능했구나;;
- 음향 좃나 구렸는데 이정원 성량이 저걸 뚫고 나가는 거에서 개 발렸다 애넨 진짜 실력으로 까면 안됨
- 음기 모범생상 이너준 이렇게 또 갓전드 갱신 ㅠ 진짜 이 영상 오백번째 보고 있음 ㅠㅜㅠㅜㅠㅜㅠ
- 바닥 진ㅉㅏ 미끄러웠던 거 같은데 얘네 아무도 티안내서 놀랐음 특히 땐스강쥐 걍 물만난강쥐였던 ㅋㅋㅋㅋㅋㅋ 동선 이동하는 동작에서 발로 슬라이딩 치는 장면이 이날 명장면임 무슨 영화처럼 물이 튀어나가;;;
- 짧고 굵게 그날 후기 남긴다 윤명 입덕
- ㅁㅊ ㅋㅋㄱㅋㄱㅋㄱㅋㅋ아가명 그날 강했지 애기 같은데 남자미 쩔었음
- 물에 젖은 미남 1위 강태오아니었냐 아니 어떻게 신이 이렇게 몰빵으로 인간을 만들 수 있는거지 댄스멤인데 노래도 라이브 안정적이어서 나 입벌어졌잖아 무대에서 표정 연기 개잘하고 나중에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 거 본 ㅅㅏ람 처연함으로 다 잡아먹었다 ㅜㅜ
근래 사건, 사고가 많은 하이사인이었지만, 그걸 이겨 낸 모습으로 좋은 반응을 받았다.
화제성도 중첩되어 대중들의 관심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 * *
“으, 으엣취!”
“으악 혜성이 형! 감기 옮아!”
“킁, 문채민 넌 왜 멀쩡한 거야. 윤명도 그렇고 다 이상하잖아!”
“…약골.”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쏟아진 폭우에 쫄딱 젖어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스태프들은 준비해 둔 담요와 수건으로 우리를 감싸기 바쁜 상황이었다.
어떻게 대기실까지 돌아갔더라. 그 부분만 잘린 것처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추위에 덜덜 떨면서 단체 클로징이 없는 행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스태프들이 쏴주는 드라이기 바람에 몸을 녹였다. 연신 뜨거운 기운이 쏟아졌지만 묘하게 한기가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로 숨죽여 서 있으니 그런 날 발견한 문채민이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악, 깜짝이야! 해신이 형, 왜 귀신처럼 서 있어! …그나저나 얼굴 너무 창백한 거 아니야?”
“채민아, 너도 나랑 비슷해.”
몸 상태가 별로인 건 맞았으나 가서 쉬면 괜찮아지겠거니 싶은 마음이었다.
아픈 티를 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까, 가장 막내인 문채민의 외투 지퍼를 올려 주며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려 버렸다.
“채민아, 외투 여미자. 머리 더 바짝 말리지 그랬어.”
“으응……. 이 정돈 괜찮아.”
대충 정리가 끝난 뒤에야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대기실 밖으로 움직였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문 앞에 서 있던 이정원이 나를 돌아본다.
“뭐 해? 안 가?”
“…어. 가야지.”
그냥 떠나도 괜찮으려나? 아직 못 본 지원겸이 신경 쓰인다.
디레스트와 더불어 연차로 탑이었던 출연진이어서 거의 엔딩까지 남아야 했나 보다.
그때, 먼 곳에서부터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함성이 섞여 있었지만,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인클루의 노래였다.
…이제 시작했나 보군. 글렀네. 무대 위에 올라가 있을 지원겸을 떠올리며 복도 너머의 대기실을 살펴봤다.
“엣취!!”
권혜성을 살펴보던 이유준이 얼른 가봐야겠다며 학을 뗀다.
“혜성이 넌, 얼른 가서 쉬어야겠다.”
“킁, 유준이 혀엉~ 나 콧물 나~”
“혜성아, 형은 휴지가 아니야.”
“권혜성… 나한테서 떨어져…….”
“다들 너무해!!”
아무래도 그냥 가 봐야겠는걸. 권혜성의 훌쩍거림이 커짐과 동시에 그냥 모두를 따라서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원겸, 미안. 도움은 받았으나 챙겨야 할 놈이 바로 옆에 있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이후에는 가장 먼저 권혜성이 감기 기운을 호소했다. 무대 위에서 날뛸 땐 언제고 이제는 다 죽어 가는 강아지 꼴이었다.
“왜 다 멀쩡한 거냐고오…….”
이불을 둘둘 둘러맨 채 이유준이 타 준 따듯한 차를 들이킨다.
가장 여리여리한 느낌의 이정원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건강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 맞아서 나른한 느낌은 있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체온이 돌아왔거든.”
소파 한구석에 자리 잡고선 커피를 마시던 강태오가 여길 돌아봤다. 태연하다 못해서 차분한 얼굴이 비와 감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듯하다.
…지독한 녀석들. 강골인 건 알았지만 지나치게 튼튼한 감이 있다니까.
아오, 머리 아파. 사실 나도 아까부터 몸이 으슬으슬한 상태였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내고 싶진 않아서 권혜성에게 따듯한 물을 따라 주는 중이다.
“…해신이 형.”
“어, 왜? 명이 너도 물 좀 줄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때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선 내 이마를 푹 덮어 버렸다.
뭐야, 이유준 넌 또 왜 그러는데. 이유준이 자신의 이마와 내 이마를 연달아 재 보며 미간을 찡그리곤 잔소리했다.
“형, 열나잖아.”
“…푸엣취! 킁, 해신이 형, 열나?!”
“권혜성 넌 재채기만 하든가, 말만 하든가…….”
“해신이 너, 귀가 좀 빨갛다? 미열 있는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앉아 있던 강태오가 자리를 비켜 서선 내가 앉을 공간을 만들어 줬다.
문채민과 윤명의 인도하에 들고 있던 물통까지 빼앗기고 권혜성 옆에 앉게 됐다.
“어, 어어……!”
“뭐야, 해신이 형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잖아. 얼른 앉아.”
“간호는 안 아픈 사람이 해야지…….”
우릴 지켜보던 권혜성이 어깨에 덮고 있던 이불 무더기를 풀어 헤치곤, 양팔을 벌려서 나를 끌어안으며 이불을 덮어 줬다.
……이게 무슨 꼴이야. 얼떨떨한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연신 훌쩍이던 권혜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내 어깨에 몸을 기대기 바빴다.
“킁, 킥킥……. 감기 동지가 생겼다……. 엣취!”
“권혜성, 너, 고개 돌리고 재채기해. 해신이 형, 옮아.”
“크흥, 윤명 진짜 너무하다……. 어차피 감기는 걸렸, 푸엡취!”
투닥거리면서도 윤명의 말을 따라 얌전히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는 애였다.
“어… 나는 이럴 필요 없는데.”
“오늘만이라도 제발 좀 쉬어. 가만 보면 네가 자기 몸 제일 안 챙겨. 허구한 날 위험한 짓이나 하고.”
정원이 너, 팩트가 날카롭다…? 그래도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조용히 녀석들의 말을 따랐다.
날 보던 이유준은 새로운 머그잔에 따듯한 차를 담아 온다. 가장 먼저 내 상태를 눈치챘던 애답게 감기약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 주는 모습이었다.
“몸 좀 녹이다가 일찍 자. 또 생각 많다고 밤잠 설치지 말고.”
목에 따듯한 수건이 감싸지고 머그잔까지 들린 상태에서 이불에 싸여 있길 한참이다.
먼저 방에 들어갔던 강태오가 다시 거실로 돌아 나오는 걸 목격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툭 던져 주는데,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살피니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사라진다.
“먹든가, 말든가.”
이건 목캔디잖아. 그런 녀석을 향해 이정원이 미묘한 어투로 칭찬을 던졌다.
“태오 쟤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섬세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정원이 형… 태오 형이 들으면 삐지겠어…….”
문채민과의 대거리를 살펴보다가 강태오가 주고 간 목캔디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하나 까서 콜록거리는 권혜성의 입가에 대 줬다.
뭐 해, 안 먹고. 아까부터 연신 재채기와 기침을 연발하던 권혜성이 신경 쓰였다.
고갯짓으로 받아먹으란 의사 표현을 하자 입을 벌려 사탕을 먹은 녀석이 몸을 기대 엉겨 붙는다.
“혀엉~~~”
“뭐, 뭐야, 왜 그래.”
감기 기운으로 뜨끈하게 오른 체온이 느껴지고, 그런 우리를 돌아본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플 때 타인의 간호를 받은 게 얼마 만이더라. 성인이 되어 독립한 이후론 감기약을 먹으며 꾸역꾸역 버텼던 나날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신 사나운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피식 미소가 터져 나왔다.
뭐, 어색하긴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