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다른 선배님이 오셔서 종결됐다고요?”
- 어, 난 막 시동 걸었는데 진재영까지 와서 걔한테 끌려갔어.
휴대폰 너머로 지원겸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가고 난 이후로 어떻게 마무리됐을지 궁금했는데. 내용을 듣자 하니 다른 멤버가 와서 지원겸을 연행해 간 모양이었다.
- 그나저나,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야. 너 혹시 뭐 궁금한 거 있냐?
하여간에 눈치는 더럽게 빨라요. 동맹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중이었다. 뭐, 저기가 요청 안 한 거지. 일단 내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네.”
- 이젠 둘러대기도 안 하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어? 그냥 알려 주시게요?”
- 쳇, 나중에 배로 뜯어먹을 거야. 얼른 말해, 마음 바뀌기 전에.
“디레스트 김환준 선배ㄴ…….”
- 그 새끼가 왜!!
아, 깜짝이야. 김환준의 이름을 듣자마자 지원겸의 분노가 쏟아졌다.
“…그렇게 큰일은 아닌데요.”
- …에이 씨, 미안, 얼마 전에 걔네한테 1위 뺏겨서 나도 모르게 욱했어.
“이해해요. 저 같아도 좀 열받았을 거예요.”
스턴즈 애들한테 1위를 빼앗겼으면 말이야.
이제 좀 이성을 되찾았는지 씩씩거리던 지원겸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전생에 원수라도 졌나? 김환준의 이름을 꺼내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느낌이다. 그래서 최대한 명사는 빼고 언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람 목적이 좀 궁금해서요. 제가 스턴즈에 사나운 애 하나 있다고 했었죠? 거긴 그런 느낌이 안 들더라고요. 경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 편이라고 할 수도 없고. 멘토님은 오래 봤잖아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세요?”
- 걔, 되게 애매모호하게 굴지? 태생이 원래 그런 놈이거든. ……믿지는 마라. 까놓고 보면 속이 새까마니까.
“믿을 생각도 없어요. 그냥 목적이 뭘까 싶어서 그런 거죠.”
- 정 그러면 한번 만나서 물어보든가.
“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래. 너무 예상 밖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귀만 만지작거렸다.
- 왜, 궁금하다며. 그냥 가서 들이박아! 너 녹음기는 잘 챙기고 다니지? 그것도 빼먹지 말고. 뭐… 조심성 많으니까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래, 잊고 있었다. 지원겸 이 사람도 제정신이 아니었지.
내가 물어본다고 답해 주겠냐? 무엇보다 김환준과 내가 사석에서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기 싫어서 연락처도 거절했던 거잖아. 별다른 소득도 없이 지원겸과의 통화를 종료했다.
“내 기운만 뺐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 지원겸의 이야기와 엇비슷한 기회가 생겼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김환준 측에서 직접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010-XXXX-XXXX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디레스트 김환준입니다.
만나서 얘기해 보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요?
이거 함정 아니야? 혹시 나만 이 세상을 복잡하게 보고 있던 걸까.
‘네.’라는 답을 적어 놓은 상태로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형,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으악!”
[발신 완료]
등 뒤에서 나타난 이유준에 의해 그대로 답변을 보내 버렸다.
“망했다.”
“왜? 뭔데 그래?”
…얘가 알면 난리 나겠지. 거기다 이정원의 귀에 들어가면 디레스트 숙소에 쳐들어가겠다는 애를 뜯어말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 비밀로 하자. 핸드폰을 숨긴 채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수상한데?”
“…이유준, 넌 의심 좀 그만해.”
* * *
며칠 지나지 않아, 김환준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게 맞는 걸까. 한적한 카페에 자리해서 마주 앉은 인물을 바라봤다.
저렇게 꽁꽁 싸매고서도 연예인 포스가 날 수 있는 거였구나. 지금도 충분히 구석 자리였지만 더 안전한 곳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미안합니다.”
“아, 예…….”
그것보다 내 번호는 어디서 알아냈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진짜 한번 부딪쳐 볼까. 주머니에 들어 있는 녹음기를 매만졌다.
…이런, 방금 내 손을 본 것 같았는데? 놀란 마음에 눈을 홉뜨니 낮게 웃은 김환준이 커피를 마신다.
“사실 좀 궁금해서 불러낸 거긴 한데. 신해신 씨도 응해 줬으니 선물을 줘야겠죠. 음, 뭘 줘야 제일 좋아할까.”
“네?”
“나한테 궁금한 거 많았죠? 물어봐요. 답해 줄게요.”
이거 미친놈인가? 아니, 미친놈 맞네. 진짜 지원겸 말대로 된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 눈앞의 잔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저희 적이시죠?”
“지금 상황으로 따지자면 그렇겠죠?”
“그럼, 선배님이 주도하고 있는 건가요?”
“아뇨. 뭐, 변명 같아 보이지만, 나도 회사에선 일개 소속 아티스트거든요. 상부 말은 금인 직장인이죠.”
김환준은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내 질문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군가 시켜서 돕고 있는 거세요?”
스턴즈를? 뒤의 명사는 숨긴 채 김환준의 눈을 마주 봤다.
“…허, 꽤 날카롭네? 일단은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해 둘까요?”
자의가 있다니, 이러면 나도 신중해져야만 한다.
앞의 대답에선 안 그러는 척 을이라고 상기시킨 김환준이었다. …솔직함 속에 함정도 있었구나. 묘하게 말린 것을 느끼며 놈을 경계했다.
“목적은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생각보다 성실한 타입이었구나?”
“……네?”
“있잖아요. 세상에 항상 이유가 있지만은 않아요.”
…무슨 소리야? 그럼 아무 이유 없이 자의로 회사의 도구가 되어 스턴즈를 돕고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종합하니 어딘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됐다.
김환준은 지금 이 사태를 즐기고 있는 듯한데. …이거 엄청 위험한 놈이었다.
“어, 왠지 이야기하면 할수록 내 이미지에 손해인 것 같은데? 그럼 방금 멘트는 취소.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취소되겠냐.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겁도 상실하게 되나 보다. 저도 모르게 김환준 앞에서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버렸다.
“나도 일단 시키면 해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악감정은 없으니까, 너무 화내지 마시고.”
그 말을 끝으로 김환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켜서 했다는 것치곤 너무 평온한 어조였다.
이제야 지원겸이 질색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로 봐도 내가 상대하기엔 과하게 버거운 타입의 사람이었다.
…서도경한테 넘기자. 헤어지는 그 즉시 번호부터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또 모르잖아요. 어제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될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지금 그 태도로는 말이야. 조건이 갖춰진다 한들, 같은 편이 될 생각도 없었다.
조금은 단호한 내 대답에 놀랐다는 얼굴을 한 김환준이다.
“하하! 이래서 지원겸이 그랬던 거구나. 하여간에 보는 눈은 있다니까.”
“하아.”
한 가지 확실한 건 지나치게 피곤한 감이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더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 드니 시원한 웃음을 연발한다.
다 됐으니까 얼른 가라. 아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채 김환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먼저 발걸음을 떼며 테이블에서 멀리 벗어났다.
몇 걸음이나 이동했을까, 뒤에서 능청스러운 어조의 충고가 던져졌다. 아니, 이건 충고라기 보단 경고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나중에 또 봅시다. 아! 주머니에 있는 그건 쓸 생각 마시고요.”
…다시는 저 인간 상대 안 할 거야. 별것도 안 했는데 기가 쭉 빨려버렸다. 방어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는 적수가 등장한 느낌이다.
* * *
실질적인 활동기는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스케줄이 들이닥쳤다. 충실히 인지도를 쌓았던 탓이었을까 각종 연말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 도착하여 뒤에 있을 공연들에 대한 미팅에 참석했다.
마무리가 지어진 분위기에 연습실로 이동하는 멤버들을 따라가니 여길 돌아본 서도경이 고개를 까딱였다.
“얘들아, 너희 먼저 가 있을래?”
“너는?”
“신해신 씨는 저랑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대표님이랑요?”
“괜찮으니까, 가 있어.”
미심쩍다는 눈빛의 이정원이었다. 강태오가 등을 떠밀자 억지로 발을 옮기는 녀석이다.
이유준의 시선을 가린 문채민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미팅 룸의 문이 닫혔다.
지긋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 있던 서도경은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꽤 그룹 같아졌네요? 이젠 유대감이 생겼나 봐요.”
“네? 네, 뭐…….”
종일 붙어 다니는데 안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별다른 대답은 해 주지 않았으나 무슨 뜻인지는 전부 알아들었을 것이다.
“보내 준 문자는 확인했습니다. 디레스트랑 접촉했었다고요.”
“거기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원래도 온갖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근래 하는 행동들은 저도 좀 마음에 안 들더군요. 그러던 상황에 연락까지 와서 제법 놀랐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하지. 전혀 놀라지 않았단 표정이다.
사실 김환준과의 자리 이후, 서도경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놨다.
저 사람한테 떠넘긴다고 했었지? 그건 모두 진심이었다.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제정신 아닌 인간을 왜 상대해. 급이 맞지 않는 싸움엔 도망가는 것도 전략 중 하나였다.
“쯧, 조만간 힘들어질 것 같은데… 할 수 있을 때 밑밥 좀 깔아 둬야겠네요.”
“…네?”
“아닙니다. 저번 특혜 조작 사건 이후론 한동안은 조용해 보이던데요. 혹시 또 다른 움직임 같은 게 포착됐나요?”
“아뇨,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없었어요.”
“이렇게 잠잠한 것도 이상한 일인데. 스턴즈까지 컴백한 상태에서 두고 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하지만, 아직은 확실치 않아서 좀 더 알아보고 연락해 줄게요.”
역시 손이 빠른 사람이야. 서도경은 이미 무언가를 캐치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야 믿고 맡겨도 되겠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이야기를 끝내려 하는데 그런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직접적인 대화로 얻는 정보를 포기하기가 아쉬운걸요.”
“예?”
“왜, 신해신 씨, 그런 거 잘하잖아요.”
“…네?”
“디레스트 김환준, 상대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신해신 씨에겐 묘하게 잘 얘기하는 것 같으니까요.”
“…….”
뭐라는 거야. 저 인간? 지금 저건 나보고 김환준과의 교류를 이어 가란 소리였다. 얌전한 얼굴로 돈 그 인간을 어떻게 상대하란 거지.
“어서 연습하러 가 보시죠.”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어진 축객령이었다. 이건 그냥 조용히 수용하란 뜻이기도 했다. 이런.
“…네.”
최고 상사한테 반항할 순 없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으려는데, 그 사이에서 무슨 생각 중인지 모를 대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맞아, 저 사람도 특이한 구석이 있었지. 애써 올라오는 한숨을 참으며 연습실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다.
* * *
뒤늦게 합류한 연습실은 이미 열기로 후끈거렸다. 가벼운 몸풀기는 끝이 났는지 땀을 닦고 있던 멤버들이다.
조용히 옆으로 섞여 들어가자 날카로운 눈빛의 이정원이 질문 폭격을 던졌다.
내가 뒤에서 많은 일을 하고 다녔단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이정원은 한층 더 매서워져 있었다.
“무슨 얘기 한 거야?”
“뭐… 별건 아니고. 그룹 생활 이런 거 물어보셨어.”
“거짓말.”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봤냐.”
우리 팀에 의심병 말기 환자가 있었네. 역시 그때 들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제 나름 적당히 대꾸했다곤 생각했는데도 미심쩍다는 반응이 사라지지 않는다.
멋쩍은 마음에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이유준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자업자득이야.”
“이유준…….”
너까지 그러기 있냐.
축하 공연 연습을 끝낸 이후론, 새롭게 연출에 들어가는 연말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백댄서들이 휴식을 위해 사이드로 빠지자 가운데에 드러누운 권혜성이 목격된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던 윤명이 성큼성큼 권혜성에게 다가갔다.
“흐음, 권혜성, 귀 좀 줘 봐…….”
“뭐야? 갑자기 왜?”
“있잖아…….”
그러곤 뭐라고 귓가에 속삭이는데, 가만 듣고 있던 권혜성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한다.
“…진짜?”
“으응.”
“…그럼 이건 무조건 스파르타지!”
“…좋아. 아주 멋져.”
쟤 왜 저래? 단말마의 각오를 내뱉고는 빠르게 몸을 푸는 권혜성이었다. 갑자기 노선을 튼 게 이상해서 넌지시 윤명에게 물어봤다.
“명아, 너 뭐 한 거야?”
“…그냥 가볍게 경쟁 심리 좀 부추겨 봤어.”
“경쟁 심리?”
“가요대전, 스턴즈도 나올 거 아니야……. 하이눈 기 살려 주려면 걔네 이겨야 한다고 했지. 게다가 거기 메인 댄서가 공연 예고 출신이더라고. 그 얘기도 좀 흘려 주고. 근래 있었던 유준이 형이랑 채민이 사건, 복수해 달라고 말했어. 아, 예전부터 형 긁던 멤버 이름도 꺼내니까 효과가 아주 직빵이던데…….”
…윤명, 이 녀석도 안 그런 척 세단 말이야. 열받아 할 포인트만 긁어서 권혜성을 도발했다. 원래도 잘하는 애였으나 동기부여가 있다면 효과가 남다를 것이다.
설마 이걸 계산하고? 왠지 느긋한 태도의 윤명이 무섭게 느껴진다.
“잘했어, 명아.”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뒤에 있던 이유준이 나 대신 대답했다. 옆에 있던 문채민 역시 긍정한다는 뉘앙스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이거 원, 튼튼하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는 기분 속에서 댄스 트레이너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얘들아! 동선 잡자!”
옆으론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가져다 놨는데 거기엔 이번 무대의 메인 주제가 적혀 있었다.
[베러원 – 돌고 돌아 너] 동양 ver.
동양 버전이라.
베러원은 현재 비활동기에 접어든 4년 차 선배 보이 그룹이었다. 우리와 같은 7인조 아이돌이라고 들었는데 팬덤에겐 나름 이름을 알린 그룹 같았다.
거기서 우린 베러원의 3집 수록곡 ‘돌고 돌아 너’를 배정받았다. 사실 제작진 측으로부터 이 곡을 전달받았을 땐,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전달받아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 프로듀서가 질이 좀 안 좋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케이블 프로그램의 스태프였지만 공중파 쪽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는 작업 환경이었다. 그 덕분에 대충이나마 우리가 왜 이 곡을 하게 됐는지도 알게 됐다.
뒷거래 한 모양이네. 너무 눈에 띄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애매모호하게는 건들 수 있는 업계였다. 주어진 곡이나 순서 정도만 만져도 난관이 생기는 무대였으니까 말이다.
이거 뭐, 방법이 있나,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곡에 대한 해석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모든 걸 잃은 것 같다는 남자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댄스곡이라고 했다. 이걸 확인한 A&R 팀에서는 애절한 느낌을 살려 동양풍으로 리믹스하자는 의견을 제시해줬다.
‘동양풍이요?’
‘네, 지금까지 하이사인으론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이잖아요. 고전 컨셉에 대한 수요는 높은 편이라서 무대 구성만 잘 짜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우리 멤버 중에선 동양풍 무대에 선 인물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편곡은 팬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컨셉이었다.
스턴즈 걔네도 나올 테니까 잘해야지. 요란하게 준비했을 녀석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형, 그래도 멋있을 거야! 이거 노래 좋거든!”
신난다는 듯이 외쳐 오는 권혜성을 두고 인근의 이유준도 턱을 괬다.
“뭐, 단순한 동양풍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래, 한번 이 꽉 깨물고 준비해 보자. 상태 창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스탯 해금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스타 코인 스탯 해금, 보컬과 끼에 사용할게.”
[‘스타 코인 스탯 해금’ 보컬에 1,0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4,675 코인
[보컬 스탯 해금 방법]
스탯 난이도 이상의 노래를 60번 부르세요.
[변화 가능 스탯]
보컬: A → A+
[‘스타 코인 스탯 해금’ 끼에 1,0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3,675 코인
[끼 스탯 해금 방법]
만 명 이상의 사람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세요.
(0/10,000)
[변화 가능 스탯]
끼: A → A+
숙소에 돌아온 이후에는 스타 코인 스탯 해금을 오픈했다.
히든 스탯인 S까지는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묘하게 품이 많이 드는 방법이었다.
“이거 원, 부지런히 해도 빠듯하겠는걸.”
지금보다 수면 시간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올려 보자며 다짐했다. 목표가 정해진 이후 거실로 나가 보는데, 희한하게 애들이 조용한 것 같았다.
…뭐지? 이상한 기운에 발걸음을 옮기자 권혜성과 윤명의 방 앞에 모여 있는 멤버들이 보인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쉬잇! 해신이 형, 쉿!”
그런 나를 발견한 문채민이 서둘러 손가락을 들어 제 입을 가로막는 제스처를 취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다가가 보니 슬쩍 열린 문틈으로 스탠드를 켜고 앉아 있는 두 명을 발견했다.
저건 권혜성이랑 윤명이잖아.
“쟤네 지금 뭐 하는 건데?”
“공부.”
“…공부?”
지금 이 시간에? 이정원의 대답에 놀라서 돌아봤다.
“해신아, 혜성이가 공부를 잘했어?”
나도 모르는데. 고3이란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 외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문득 유어돌 프로필 촬영장에서 성적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잘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스케줄이 비는 날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걸 목격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감회가 색다른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수능이 별로 안 남았구나. …혹시 쟤네 수능 보나?
“유준아, 혜성이랑 명이 수능 본대?”
“글쎄. 애들이 학교 얘기는 잘 안 했잖아.”
나야 고졸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었고, 다른 성인 멤버들도 연습생 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그런 그룹 속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애들이 나오니 뭘 해 줘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채민아, 네 입장에서 저 둘 성적은 어떨 것 같아?”
“그건 너무 포괄적인 것 같은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강태오 너도 안 그러는 척하면서 궁금해했잖아. 아니면 여기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지.”
“…….”
이정원의 날카로운 팩트에 흠칫 몸을 떤 강태오다. 쟤 같은 애들을 뭐라고 했더라. …츤데레?
강태오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라도 들었는지 팔을 뻗어 벽에 기대섰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가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19살 둘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직 수능까진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저러는 게 대견했다. 혜성이 녀석은 성적에 자신 있어 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말이다.
…맞다. 수험 날에는 도시락 챙겨 가야 하지 않던가? 스쳐 지나간 생각에 천천히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어? 형, 왜?”
“음… 얘들아. 그, 수능 볼 때 도시락 싸 가지 않냐.”
“보통 그렇지. 점심 안에서 먹으니까.”
“…혹시, 도시락 쌀 줄 아는 사람?”
내 말을 끝으로 남아 있던 모두가 한 곳을 돌아봤다.
“…뭐야. 왜 날 봐.”
안타깝게도 우리 팀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줄 아는 인물은 극소수였다.
저기 방 안에서 공부하고 있는 권혜성과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강태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