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수능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하이사인 공식 계정에 새로운 게시물이 나타났다.
[HI_LOG] 우리도 수능 도시락은 처음이라… +혜성이와 명이의 우당탕탕 수능 도전기!
- 헐 이게 뭐야?? 도시락? 수능?? 얼마 전에 혜성이랑 명이 수험장 들어가는 사진은 봤는데 ㅠㅠㅠㅠ
- 아 혹시 이거 그건가? 애들 폰 배사 음식이던 거 ㅋㅋㅋ 먹보들이라고 귀여워했는데 멤버들이 다 싸준 거였구나
영상 속에선 어두운 거실이 나오고 그 위로 누군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있었는데 졸린 눈으로 연신 손을 흔들어 댄다.
채민: 안녕하세요. 현재 시각, 새벽 3시. 아… 완전히 목이 잠겼네.
거친 목소리를 자랑한 문채민이 부엌의 불을 켰다.
구석에 있는 부엌칼을 꺼내려 드니 멤버들이 나타나서 문채민을 가로막는다.
채민: 응? 내가 첫 타자인가. 그럼 먼저 준비를…….
정원: 채민아, 그 칼 내려놔.
- 채민아 너 무서워
- 근데 저렇게 말하는 정원이가 더 무서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에서 깬 게 얼마 안 됐는지 하나같이 퉁퉁 부어서 모자를 눌러쓴 차림새였다.
유준: 안녕하세요, 하이눈. 음, 이렇게 시작해도 괜찮은 건가? 유준입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조금만 양해 부탁드려요. 아직 혜성이랑 명이가 자고 있거든요.
해신: 오늘은 20XX년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입니다. 이번에 시험을 치르는 혜성이와 명이의 도시락을 싸 줄 거예요.
유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기 있는 태오가요.
태오: …안녕하세요, 하이눈.
이유준을 흘깃 돌아본 강태오가 준비해 뒀던 도시락 통을 꺼내 들었다. 이미 사전에 시뮬레이션이라도 해 본 것처럼 착착 진행되는 준비 과정이었다.
- 아니, 너무 예상외의 포지션인데. 혹시 요리 담당 강태오임?
- 함께가요 하이사인 글램핑편 보고 오세요.
- 요리 담당이 혜성이랑 태오라니 처음엔 상상도 못 했다 ㅋㅋㅋㅋㅋ
문채민은 그런 강태오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소시지를 하나 얻어먹었다.
채민: 형, 나 졸려……. (막내는 아직 꿈나라에 있을 시간) (하지만 소시지는 맛있다.)
- 아구 아직 애기잖아 울 막내 ㅠㅜㅠㅜㅠㅜㅠㅠ
- 얘네 다 왜 이렇게 귀엽냐 ㅋㅋㅋㅋ
- 그 와중에 자기도 도시락 만들었다고 하려고 버티고 있는 거 봐 ㅜ
졸면서 우물거리는 문채민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쉰 강태오다. 이정원과 신해신이 채소 씻기를 돕자 이유준은 그런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준: 나도 뭐 좀 도와줄…….
정원/해신/태오: 넌 가만히 있어.
유준: 하하, 다들 너무하네. 그쵸, 하이눈? 저 요리 못 한다고 맨날 구박당해요~
채민: 형, 그냥 나랑 같이 소시지나 먹자.
- 와 방금 합 쩔었다
- 이쯤 되면 유준이가 만든 음식 한번 먹어보고 싶음 얼마나 심하길래……
- 사진 봤었는데, 일단 먹는 것의 형상은 아니었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ㄱㅋ 그게 뭐야
- 오늘도 딜 광역기 막내 등장
합창하는 멤버들을 지켜보던 이유준이 얌전한 태도로 식탁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러곤 문채민과 함께 제 나름의 작은 코너들을 만들어 나름의 분량을 뽑기 시작했다.
강태오의 현란한 칼질이 이어지고 보조로 보이는 맏형들이 도시락 통 안에 음식들을 밀어 넣었다.
해신: …어, 뭔가 애매한데.
정원: 왜, 안 들어가? 그냥 욱여넣어. 명이 배 채우려면 이 정도 양으론 택도 없어.
태오: ……. (기껏 예쁘게 만들었더니, 저 형들이…….)
- 신해신 ㅋㄱㅋㄱㅋㄱㅋㄱㅋ 자기 손가락만한 거 넣겠다고 씨름하는데 왜 이렇게 웃겨 ㅋㅋㅋㅋ
- 그 와중에 정원이 안 들어간다고 목에 핏대 세운 거 봐 ㅋㄱㅋㄱㅋㄱㅋ 저기요 이게 그렇게까지 밀어 넣을 일이냐고욬ㅋㅋㅋㅋ
- 자기가 만든 음식이 다른 형태로 바뀌는 걸 지켜보는 강쉪
조리용 젓가락을 든 채로 할 말을 잃은 강태오가 보인다. 하지만 권력은 없었는지 포기하고 다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각자 따로 노는 요리 속에서 동이 트고 먼 방에 있던 알람이 울렸다.
♩♪~♫♬~
방문이 열리자 누군가 걸어 나온다. 머리는 산발한 상태의 권혜성이다. 하품을 연발하는데 그런 얼굴 위로 투명한 막이 생성됐다.
혜성: 하~~~암 (아티스트 보호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를 했습니다.)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권혜성 도대체 어떤 얼굴로 하품했길랰ㅋㅋㅋㅋㅋㅋㅋㅋ
- 역시 하이사인에서 자연인을 담당한 자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리며 부엌으로 다가온다.
목이 잠긴 윤명도 눈을 감은 얼굴로 권혜성의 뒤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혜성: 응? 뭐야? 킁, 맛있는 냄새.
명: …야, 권혜성. 너 왜 혼자 나가. 아, 아. ……내 목소리 왜 이래.
채민: 어? 형들 웬일이야. 알람 듣고 바로 일어났네?
유준: 혜성아, 명아. 너흰 얼른 씻어야지. 오늘 시험 보잖아.
- 너준씨, 혹시 이 둘의 삼촌인가요? 나 왜 이렇게 아침 가족 드라마 보는 기분이냐
- 그럼 혜성이랑 명이는 형제야?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싸우는 거 보니까 찐형제 같긴 하다
- 그리고 19살즈에게도 멈추지 않는 챔니의 광역 딜
- 아니, 윤명 목소리 무슨 일인데 명아… 너 아가잖아… 나 낯설다?
- 이유준이 지하 땅굴이라면 모닝명 목소린 지구 내핵이다
이유준이 권혜성과 윤명의 엉덩이를 툭툭 때린 후 화장실로 이끌었다.
그 뒤에 덧붙인 이야기를 들은 강태오가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이유준을 쳐다봤다.
유준: 새벽에 일어나서 너희 수능 도시락 쌌어. …태오가. 맛있는 걸로만 많이 준비했거든. …태오가.
태오: …이유준.
유준: 왜? 아, 그러고 보니까 너 오늘 일어나서 처음 말 거는 것 같다?
태오: ……. (오늘도 태오의 아침은 버겁기만 합니다.)
-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뒤에 전부 ……태오가 붙이는 거 존귀 ㅋㅋㅋㅋㅋ
- 역시 강태오 사냥꾼 이유준 ㅋㅋㄱㅋㄱㅋ
- 그치 전부 태오가 했지 ㅋㅋㅋㅋ 해신이랑 정원이도 거의 손 못 대게 했잖아 ㅋㅋㅋㅋㅋ
- 나 왜 강태오 위로 인X극장 BGM이 들리는 것 같냐
태오: 됐다. 윤명, 권혜성! 얼른 씻고 와서 아침밥 먹어!
혜성: 와! 형이 밥했어? 그럼 믿고 먹을 수 있지!
명: 난 유준이 형만 안 했으면 괜찮아…….
- 하이사인 저격러 둘 잠 다 깼네
- 역시 세상 두려울 게 없는 고3
- 원래 고3이 신분임 수능날 건드리면 천벌 받아
- 윤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혜성이는 악의가 없어서 더 웃겨 ㅋㅋㅋㄱㅋㄱㅋㄱㅋㅋ 아니 도대체 얼마나 요리에 대한 신용이 떨어지는 거냐고 ㅋㅋㅋㅋ
- 명이도 유준이의 음식만큼은 씹기 싫구낰ㅋㅋㅋㅋㅋㅋㅋ
윤명의 뒤로 이유준이 서운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이유준을 지켜보던 문채민이 집어 먹던 소시지를 이유준에게 건네줬다.
채민: 이거 먹고 힘내, 형. 요리를 못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물론 형은 좀 심각하지만.
유준: …그래, 참 고맙다. (냠)
- 나 유준이가 이렇게 너덜너덜 당하는 거 처음 봐서 두근거려
- 저기 혹시 변태세요?
- 냠 뭔데 ㅜ 20살 아니고 20개월임 ㅜㅠ
- 183cm인 20개월이 어딨어
- 유준이 그래도 채민이가 줬다고 새벽부터 소시지 먹어주네 ㅠ 머가 우정이냐 이게 찐우정이지
- 맞아 저 입도 짧은 애가
해신: 명아! 외투 두꺼운 걸로 입어야지! 형이 다시 꺼내 놓는다?
정원: 권혜성, 너 필통 챙겼어? 어제 공부한다고 던져 놓은 것 봤는데. 나가기 전에 검사할 거야!
- 우리네 상냥하신 엄마와 조금 엄한 아버지
- 미친아 가족 다큐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
- 그럼 강태오는?
- 요리 못하는 엄빠 대신해서 밥해주러 온 작은 삼촌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하이사인은 가좍이다
소란스러운 멤버들의 움직임 속에서 윤명과 권혜성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손에는 도시락으로 보이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행복하단 표정이었다.
혜성: 나 아까 사진 찍었다? 배사 해야지~
명: …야, 권혜성. 나도 보내 줘.
해신: 오늘 가서 시험 잘 보고 와. 저녁엔 너희 먹고 싶은 거 먹자.
혜성: 아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명: …다녀오겠습니다.
- 이게 뭐라고 눈물이 다 날 것 같냐 ㅠ
- 우리 애들은 리얼 가족이다… 하이눈 울다가 웃다가 이제는 배고파짐
- 하씨 혜성아 나도 그 사진 공유해줘 우리도 공식 배사 있다 대신 보면 좀 배고파질 뿐
고개를 꾸벅 숙인 둘이 멤버들의 배웅하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렇게 브이로그를 빙자한 하이사인의 소소한 일상이 공개됐다.
* * *
“얼른 일어나.”
“바로 가는 거냐…….”
땀에 절어서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죽겠어. 거짓말 안 보태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먼저 말 꺼낸 건 너였잖아.”
“그건 그런데, 우리 조금만 쉬면 안 될까?”
어차피 밤새워야 하잖아. 나는 다른 곳으로도 머리 쓸 일이 있단 말이야.
한껏 불쌍한 눈빛을 발산하니, 마지못해 이정원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럼 딱 5분만 있다가 다시 모이자.”
허락이 떨어짐과 연습실 밖으로 도망갔다.
사실 연말 무대 연습에 들어가던 시점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었다. 같은 날 출연하는 스턴즈 녀석들이 대규모 언플을 시작한 것이다.
[MXP 단결, 디레스트와 스턴즈! 연말 콜라보 무대 게시!]
…치사한 놈들. 활동기의 정점에 치달은 디레스트에게 얹혀 가는 걸 발견했다.
얘네는 디레스트 노래 하겠단 소리군. 의미 없는 반박 속에서 MXP의 뒷공작이 이어졌다.
[스턴즈 초동 45만 장 돌파!]
[괴물 신인의 무서운 상승세!]
얘네가 초동 45만을 넘겼다고?
우리가 비활동기에 접어들면서 각종 방송에 출연한 걸 확인했었다. 방송 점수로 1위를 차지했길래 대수롭지 않아 했는데, 우리와 비교하는 기록으로 기사들이 나오니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 올해 데뷔 돌 중에 최고 기록 찍은 거 아니냐?
- 헐 나 이번 신인상은 ㅎㅇㅅㅇ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모르겠네
- 뭔 개소리 ㅋㅋㅋㅋㅋㅋ 엔필름빨이잖아 고우림 챌린지니 뭐니 했던 것도 남한테 탑승한 거지
- 기록 깨진 거 우리 탓하는 것도 웃김 응~ 그래도 우리가 너네 이겼어~
얌전히 있는 우리까지 끌어들여 자기네를 부각하는 시스템이었다. 팬덤도 어느 정도 휩쓸린 것 같지? 잠잠하다 했더니 또 사건이었다.
그렇게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일념 속에서 들고나온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 …걔네가 45만이 넘었다고?
“네, 뭐 그렇다던데요?”
- 그렇다던데요?? 넌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윽, 쏟아지는 호통에 서둘러 귀를 막았다. 왜 나보다 더 열받아 하는 건데.
지원겸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아니, 저도 위기감은 느끼고 있는데요…….”
난 이거 실패하면 진짜 파산하거든.
- 걔네가 어떻게 45만을 넘겼지? 아직 초동으로 그 수치를 찍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도 좀 의심스럽긴 한데, 디레스트랑 언플 효과가 아닐까요? 동맹 같은 거요.”
- 야, 걔네 코어는 스턴즈 그렇게 안 좋아해. 너도 잘 알면서 그 소리가 나오냐. 그리고 동맹 팬덤이 앨범까진 안 사 주지. 이번 컴백은 우리랑 맞붙어서 거기도 비상이었을걸?
사실 지원겸의 말이 정답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근데 그것 말고는 없잖아.
스턴즈는 전형적인 팬덤용 컨셉을 밀어서 대중 픽으로 그 수치를 찍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디레스트랑 언플뿐. 내겐 나름 합리적인 방향의 추론이었다.
- …야, 신해신, 너 혹시 걔네 초동 수치 파일 있어?
“네? 있긴 하죠.”
서도경에게 미리 부탁해 놨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왜 찾는 거지?
눈치 없는 척 덤덤한 목소리로 지원겸을 떠봤다. 들려오는 대답은 제법 좋은 방향이다.
- 에이 씨, 그거 나한테도 보내 놔.
“왜요?”
- 아, 왜긴 왜야! 알아봐 주려고 그러지!
“다음부턴 안 봐준다면서요.”
- 네가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이거 똑똑한 줄 알았더니 왜 싸워야 할 땐 맹탕처럼 굴어?!
음, 됐군. 방금 정보통 하나가 더 추가됐다.
저번부터 마음 약하게 굴길래 한 번 더 도움받을 수 있을까 싶었지.
머리는 비상한 것 같은데, 이상한 데에서 인간미가 넘치는 지원겸이다.
…그나저나 너무 받는 것 같긴 하지? 그래서 나중에 인클루도 한번 도와주자고 생각했다.
“그럼 감사하죠.”
- …너, 이거 노렸지.
“제가 멘토님이 이럴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다 그쪽이 가르쳐 준 거잖아. 이 판에선 약아야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그걸 숨기며 태연하게 말하니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이어진다.
- 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감사해요. 도와주셔서.”
일단 그건 진심이야.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해신이 형?”
아, 이런. 지원겸 미안.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서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니 멍한 표정의 윤명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뭘 도움받았길래 고맙다고 하는 거야……?”
“어?”
“…형, 방금 그거 누구야?”
하여간에 이상한 구석으론 눈치가 빠르다니까.
뭐라고 답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이정원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해신! 윤명! 쉬는 시간 끝났어!!”
“명아, 일단 들어가자!”
“…으응.”
미심쩍은 눈길이 쏟아졌지만, 당장은 피할 곳이 존재했다.
아, 하필이면 촉이 좋은 윤명에게 꼬리가 밟혀서. 다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을 정리해봤다.
* * *
숙소에 돌아온 이후, 지원겸에게 전화를 끊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초동 파일을 보내 놨다.
[지 말만 하는 인간]
멘토님이 말하는데, 중간에 막 끊고 말이야.
하여간에 다음에 만나면 잔소리 100배야.
“…음, 굳이 볼 필욘 없지.”
항의하는 듯이 진동하는 알림엔 고개를 내젓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연이어 다른 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도경]
일단은 알겠습니다. 저도 한 번 더 확인해 보죠.
이 건을 가장 먼저 알려 준 장본인이자, 다른 방향에선 머리를 쓰고 있는 인물, 서도경이었다.
“몰랐지, 거기 초동까지 체크하고 있었을 줄은.”
저번에 대화했을 때부터 짚이는 게 있다고 하긴 했었다.
뭔가 알아보곤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내용을 알려 주지 않아서 나도 발로 뛰는 중이었다.
똑똑-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어린애처럼 길게 늘어지는 발음으로 보아 이건 분명 윤명이었다.
“혀엉…….”
“왜.”
“얘기 좀 하자고…….”
아까 연습실에서 있던 일이구나. 묘하게 끈질긴 구석이 있는 애였으니까 다시 찾아올 거란 건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원이 씻으러 간 틈에 독대하려 들지는 예상 못 했다.
에휴, 피할 방법도 없는 것 같지.
반쯤 포기한 상태로 앉으라고 눈짓하니 잽싸게 침대 옆자리를 차지한다.
저번 사생 건과 반대되는 희한한 광경이 만들어진 듯하다.
“…….”
그래서 뭔데. 말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 오늘도 멍한 얼굴의 윤명을 쳐다봤다.
“명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으음, 아까 전화하던 상대방……? 그리고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똑똑한 녀석이네. 팩트만 쏙 집어내서 빠져나가기도 애매했다.
그냥 다 불어 버려? 아니야. 대충 틀만 설명해 주자고 다짐했다.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까 전화한 건 대표님이야. 저번에 그 일 때문에.”
전부 다 말해 줄 수는 없지. 지원겸과 내 커넥션을 아는 멤버는 이유준과 이정원 둘로 충분했다.
“그거, 초동이랑 기록 말하는 거지……?”
“어. 우리도 활동하려면 신경 써야 하잖아.”
그때 윤명에게서 낯선 제안이 들어왔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음, 내가 알아봐 줄까?”
“뭐?”
“형,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라면 알아봐 줄게.”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아본다고 그래.
멤버들은 굳이 이 일에 끼워 넣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제껏 연습생 생활만 했을 텐데, 민간인이 덤비기엔 기업적인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도 한발 물러선 뒤 대표인 서도경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윤명이 엄청난 내용을 꺼내 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봤을 정도다.
“뭐?”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그쪽 사람들 많이 알고 있다고…….”
누나라면 그때 그 여성분 아닌가. 윤명과 열애설이 났던 사진 속의 인물 말이다.
거기 사람들을 많이 안다니,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누나네 회사가 음악 저작권 투자를 많이 해서, 그쪽으론 인맥이 있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스턴즈의 수상쩍은 초동에 대해 윤명의 누나가 알아봐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누나네 회사?”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 회사지만.”
…윤명 너, 다이아 수저였냐? 아무래도 새로운 돌파구가 하나 더 생긴 모양이다.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 * *
내가 내민 서류들을 진지한 얼굴로 살핀 서도경이다. 파일의 출처는 윤명의 누나라고 덧붙인 이후였다.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거기 인맥이 컸을 줄은 몰랐네요.”
“…….”
…알고 있었구나. 침착한 서도경의 얼굴에 진이 쭉 빠져 버렸다. 그동안 자료 구하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벌써 파악하고 있던 정보였나 보다.
“그래도 신해신 씨가 알아 온 것 보고 꽤 놀랐습니다. 여기까지 캐냈을 줄은 몰랐거든요. 역시 사재기였네요. 안 들키려고 음악 방송은 방송 점수로 숨기고, 뒤에선 판매와 스트리밍 성적을 건들고 있더군요.”
내 눈앞에는 서도경이 가져온 파일이 놓여 있었다. 거기엔 자세한 그래프와 함께 숫자가 잔뜩 기재되어 있었다.
타이밍이라도 맞춘 건지 지원겸과 서도경 그리고 윤명의 누나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받았다.
초동 45만 장을 기록했다는 스턴즈가 앨범 사재기를 했다는 특보였다.
그 녀석들이 못되긴 했어도, 이런 수법까진 안 쓰겠다고 믿고 싶었는데. 왠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문득 지원겸과 나눈 통화가 떠올랐다.
- 야, 신해신. 걔네 사재기에 언플 때린 거야.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 내가 왜 너한테 파일 보내라고 했겠냐? 짚이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혹시 디레스트도 이거 했어요?’
너무 잘 안다는 어투였기에 이번에도 경험에 의한 일인가 싶었다. 설마, 김환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답해 준다.
- 아니, 걔넨 안 했어. 대신 우리가 활동할 때 경쟁하던 다른 그룹 녀석들이 했었지. 중소였던 탓에 브로커 사탕 발린 말로 넘어간 모양인데. 사재기 뉴스 나오자마자 바로 쫑났거든. 혹시나 해서 짚어 봤더니 역시나. 아, 맞다! 사실 확인은 했는데, 증거는 못 구했다? 여기서 더 들어가기 힘들더라. 일단 나도 아이돌이라 조심해야 하거든.
‘아뇨, 이 정도만으로도 감사해요.’
지원겸과 통화를 끊고 난 뒤에는 윤명의 누나로부터 메일 하나를 받았다. 그건 비상식적인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스턴즈의 스트리밍 성적이었다.
거기에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모니터 수백 대가 붙어 있는 벽과 스턴즈의 스트리밍이 돌고 있는 기괴한 장면이었다.
‘형……. 누나가 내용 확인하래. 근데 공식적으론 쓰기 힘들 거라고 했어…….’
어… 안 봐도 그럴 것 같더라.
뭔가 음습한 냄새가 나는 게 깨끗한 경로로 얻은 증거는 아닌 것 같았다. 개인 인맥을 이용했을 테니까 저걸 쓰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은 없을 듯했다.
추론했던 사실들이 정답이란 걸 알았으면 됐어.
윤명에게는 적당히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 줬다.
‘고마워, 명아. 그리고 이건.’
‘…응, 다른 사람한텐 말 안 할게.’
지원겸의 말에 이어 심증을 확신할 수 있는 자료까지 나온 상태였다.
곧장 서도경을 찾아가니 여기도 이미 사재기 정황을 발견했던 것 같았다. 비슷한 내용의 서류를 보여 주며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 든다.
“제가 갖고 있는 자료도 관계자를 통한 거라 쓰기는 힘듭니다. 다른 엔터에서 이런 걸 밝힌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죠. 이걸 터뜨리면 MXP가 스턴즈를 이용해서 괴롭힐 생각을 접을 거란 겁니다.”
아무래도 서도경은 큰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스턴즈를 통한 공격을 차단해버릴 속셈이다.
“…사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요.”
“역시. 뭔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한번 들어 보죠.”
나도 이런 싸움은 질려 있었다. 각자 갈 길 가자. 조승화와는 더 이상 연관될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 멤버들이 직접 당한 뒤에는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