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69화 (168/328)

169화

대망의 연말 무대 개시일. 모든 작전의 끝이자 스턴즈를 끊어 낼 디데이가 찾아왔다.

“아까 리허설 봤는데, 스케일 장난 아니더라.”

“거기?”

“응.”

“웬일로 정원이 네가 약한 소리를 다 하네?”

“약한 소리한 거 아니야. 그렇게 나올수록 더 불타는 법이잖아. 난 제대로 붙어 볼 생각이거든. 그리고 네가 제일 독하게 연습했으면서 웃기다?”

“…잘해야지.”

세팅을 끝낸 이정원이 옆자리에 앉았다. 어딘지 호기롭다 못해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A+

댄스: A-

운: B-

끼: A

정보: 플레이어

아슬아슬하게 해냈네. 오랜만에 스탯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스타 코인 스탯 해금을 오픈한 이후, 죽어라 노력한 결실이기도 했다.

우선 보컬 스탯은 스탯 난이도 이상의 노래를 60번 부르라고 했다. 이건 전적으로 이정원에게 도움을 받은 게 큰 편이었다.

트레이닝을 핑계 삼아 녀석의 연습을 쫓아다니면서 스파르타로 부딪친 기억이 떠오른다.

‘너 오늘은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43/60

‘아아, 내 목 상태가 그렇게 별로야?’

‘아니, 그냥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맛이 간 거 아니면 괜찮아. 마저 해 보자.’

‘쯧,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야. 아까 ‘~지만 널 기다리는 내 마음은.’ 여기 피치가 좀 떨어지더라. 거기 다시 해 볼래?’

난이도 ‘A’는 넘는 곡을 찾아야 해서 음역대의 폭이 큰 발라드를 불러야 했던 것도 힘든 일 중 하나였다.

그 이정원이 연습용으로 선곡했을 정도니까 그리 쉽지 않았단 이야기였다.

몇 날 며칠에 걸쳐 60회를 채웠을 땐 이정원의 눈빛이 변해 있는 걸 목격했다.

‘…너.’

‘어?’

‘뭐지? 방금 엄청 좋았던 거 같은데. 호흡이야 원래 잘했지만 좀 더 탄탄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 곡만 며칠 매달렸잖아. 습득돼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

하여간에 매섭기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다른 곡의 악보를 건네준 이정원이었다.

자연스럽게 무마하기 위해서 보컬 룸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보컬 스탯을 올린 이후에는 바로 끼 스탯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이건 폼생폼사 스킬을 끼고 있어서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A+로 올라갈 미래를 생각하면 무조건 해놔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끼 스탯 해금 방법]

만 명 이상의 사람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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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명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춤과 노래를 하는 건 둘째 치고, 보여 줘야 할 사람들이 문제로 느껴졌다.

조용히 거실에 나왔다가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는 애를 발견했다.

‘해신이 형! 형도 먹을래?’

‘아니, 난 괜찮아. 근데 혜성아. 그거 명이가 사 온 거 아니냐?’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러다 명이한테 들킨다? 자기 아이스크림 자꾸 사라진다고 너 의심하던데.’

‘그건 문채민도 같이 먹었는데! 와, 억울하다!’

헛웃음을 지으며 물을 따라 마시다가 문득 예전에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혜성이 쟤, 어지간한 아이돌 그룹 춤은 거의 다 독파하고 있지 않았나? 스턴즈와 출연했던 프로그램으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던 일화가 있었다.

방송국이야 어그로를 끌어서 시청률을 가져올 생각이었겠지만, 그게 방영될 시기에 특혜 논란이 해결됐던 터라 긍정적인 흐름으로 이어졌었다.

거기서 단연 돋보인 건, 랜덤 플레이 댄스에서 대활약한 권혜성이었다.

- 혜성이 부분만 계속 돌려보게 되네 ㅋㅋㅋㅋㅋㅋ

- 근데 춤 진짜 잘 춘다 다 자기네 앨범처럼 추는 게 대박이야…

- 댄스강쥐가 닉값한거지 뭐 ㅋㅋㅋㅋㄱㅋㄱㅋ 마지막엔 만인의 귀염둥이처럼 됐잖아

- 남돌이 여돌 춤 희화화 안 하고 춰주는 거 좋다 ㅠㅜㅠ 애들 컨셉 잘 살려서 해준 거 너무 감동이야 ㅠㅠㅠㅠ

그래, 쟤랑 연습실 라이브 방송을 하자.

안 그래도 간혹 팬들이 그런 걸 요청했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기억만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죽어라 하기로 한 것, 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연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회사와 권혜성에게 동의를 구한 뒤, 매일같이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보컬에 이어 댄스 트레이닝까지 몰두하니 다른 멤버들의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강태오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면 다 한 건가.

아니다. 쟤는 예전에 내가 페널티로 앓았던 모습을 본 목격자였다.

그럴만했다며 웃어넘기곤 권혜성과 트레이닝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라이브 방송 날, 평소와는 달리 연습실에서 하이눈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하이눈. 오늘은 안무 연습실에서 만났죠?’

‘안녕~! 저도 같이 있어요!’

- 헐 뭐야 미친 얘들아 왜 연습실에서 라방해??

- 넘 조아 ㅠㅠㅜㅠㅜㅜㅠ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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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명, 생각보다 쉽게 모이는 거였구나. 빠르게 입장하는 팬들을 확인하며 본격적인 방송을 시작했다.

‘해신이 형이 오늘 방송 때문에 엄청 열심히 연습했었거든요~ 제가 좀 밀려도 봐주세요!’

‘오늘은 그동안 하이눈들이 요청했던 거 전부 다 해 줄게요.’

메모장에 적어 놓은 노래를 살피곤 한 곡씩 음악을 틀어 춤을 췄다. 중간에는 직접 노래까지 불러 가며 본무대처럼 임한 방송이었다.

스탯을 해금하려고 한 건 맞았지만, 언젠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이벤트이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건지, 팬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 우리 때문에 이거 다 연습해 온 거야??

- 미쳤다… 한 두 곡도 아닌데 레전드다 진짜

- 더 잘되자 해신아 혜성아 ㅜ 너무 고마워 사랑해

- 기특강쥐 기특냥이야

- 대박 내가 요청한 곡도 있네 진짜 다 기억했어 팬사랑 레전드남 인정

(10,000/10,000)

만 명을 모두 채우고 난 뒤에는 귓가에 성공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끼고 있던 폼생폼사 스킬이 A 고정이었기에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이긴 했다.

일단 폼생폼사의 전원 버튼을 눌러 놓고 다시 라이브 방송에 집중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으나, 마지막까지 해 보자며 흐르던 땀을 닦아낸 날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어? 아니, 그냥. 오늘 잘해야겠다 싶어서.”

이정원이 잠시 일어난 틈을 타 윤명이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형, 큰마음 먹은 것 같던데.”

별말 없이 등을 두들기니 여길 돌아보며 작게 웃는다.

“잘될 거야.”

“그래, 고맙다.”

가만두면 애들이 계속 힘들겠지. 독한 마음을 먹자며 모니터를 쳐다봤다. 작전 카운트까지는 하루. 실행은 모든 무대가 끝난 이후였다.

* * *

방송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SNS에 연말 무대 큐 시트가 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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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계자가 풀었다

연말 큐시트 다 떴음

개꿀잼 무대 몇 개 있는 듯

근데 좀 짱나기도 하네 ㅋㅋㅋ

내 본진 분량 리얼 헬임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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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서 중소돌 못 판다니까 ㅜㅠ 나 지금 한 처먹은 빠됐잖아

- 예 2천원 비싸졌는데요

- ㅁㅊ아 이거 진짜냐??? 일부한테 존나 몰아준 거 보이구요

- 아시바 또 디레스트에 스턴즈 묻었네

- 언제는 좋다더니 ㅋㅋㅋㅋㅋ

- 응 턴즈온 개꿀~ 그래도 얘네 뭉치면 버즈량은 킹정임

- 엠엑스피파티냐고 ㅋㅋㅋㅋ ㅋㅋ

- 하이사인 또도라 하는 거 아니지? ㅜ 이제 정규까진 안 바랄게 제발 미니 정도는 내줘라

- 야 그래도 쟤네 개같이 일하고 있잖아 6개월 안에 데뷔하고 1 컴백이면 쉬지 않았다

- 서바 끝나고 바로 나와서 싱글 2개야 얘들아 열일할 때 감사하자 얘네처럼 비활동기에도 콘텐츠랑 소통 화수분인 남돌 없다

분량부터 순서까지 온갖 문제로 시끄러워진 팬덤이었다. 하이눈은 하이사인의 예상 밖의 선곡에 놀랐다는 반응을 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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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ㄹㅇ? 갑자기 여기서 ㄷㄷㄴ를 한다고???

만호야 미쳤냐 곡 배정 무슨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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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곡 해서 좋긴 한데 선곡 어케 된 일임? 아니 뭐 싫은 건 아니야 근데 너무 노관련이잖아

- ㅁㅈ 돌돌ㄴㅓ가 숨띵곡이긴 하지만 너무 뜬끔없긴 했음

- 연말 ㅅㅌㅈ 애들 ㄷㄹㅅㅌ랑 엮은 거 보고 걍 어이 털려서 웃었는데 ㅋㅋㅋㅋ 시발 쟤네 곡도 텍미나하네

- 텍미나??? ㄷㄹㅅㅌ가 3주 연속 먹은 그거? 존나 치사하다 누군 관련도 없는 그룹 수록곡 시켰으면서 ㅋㅋㅋㅋㅋㅋㅋ 여긴 엔넷 아니라 이건가

- 하긴 만호 읍엑스피 실장이랑 친하단 찌라시 돌앗지 ㅎ

- 우리 애들 괜찮은 거냐;;

연말이 다가오면서 신인상으로 인한 견제가 심해진 상황이었다.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하이사인과 스턴즈의 싸움이다. 이들 팬덤에겐 오늘 무대가 아주 중요한 이벤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 아 ㅅㅂ 시비 쩌네;; 공계에서 얘기를 못하겠음

- 까빠랑 타팬이랑 타돌빠는데 팬인척 하는 구라계까지 지금 난리임 걍 들어가지 마라 그게 정신건강에 좋아

- 메이터스도 나름 머기업 아니었어? ㅋㅋㅋㅋ 난 걍 자기네 후려치는 걸로 밖에 안보이는데

- 신생이라고 천 번 정도 얘기한 것 같다 에휴 말이 안 통하네

- 여기까지 들어왔어 하이눈들 오늘 하루 병먹금 눈막귀막 파이팅하자 ㅜ

팬들이 기 싸움과 키보드 배틀로 지쳐 갈 무렵, 하이사인의 본무대가 시작됐다.

거대한 스크린 위에 밤하늘이 떠오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곱 개의 별이 빛났다.

꺼져 가는 빛무리 사이, 흰색의 정갈한 붓글씨가 나타난다.

[思慕] 사모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함’

세로로 길게 늘어진 문구가 사라진 이후였다. 무대에 걸린 하늘하늘한 천 너머에서 멤버 하나가 등장했다.

흑백의 한복을 입고 머리띠를 동여맨 강태오가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전통 가옥의 형태를 띤 조형물 위로 어슷한 그림자가 지며 흰 꽃잎이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가는 피리 소리가 들리고, 가야금의 애달픈 곡조가 중첩되며 화음이 쌓였다.

- 주마등이 스치는 기억

널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나

카메라의 무빙이 돌자 대형에 서 있던 6인의 멤버들이 모두 나타났다. 전원 같은 한복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센터에 서 있던 이정원이 눈을 가린 천을 풀어 헤친다.

미성이 신스팝 베이스의 동양적인 느낌을 살리며 서글픈 기운을 이어가고 있었다.

- 네가 없는 이 하루는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아

서로 엇갈리는 동선으로 이동한 뒤였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신해신이 이정원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높이 손을 들어 올리곤 소매 자락 사이로 드러난 이정원의 팔뚝을 감싸 쥔다.

- 허망으로 채워 넣은 마음은

그저 불완전하기만 하고

어느덧 합류한 강태오와 함께 하늘을 쳐다본 자세의 윤명이 등장했다. 긴 팔과 다리를 이용하여 현대 무용과 같은 동작을 소화해 낸다.

- 자신을 달래 봐도

결국 널 부르고 있어

더블링을 하며 화음을 깔아 준 이유준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앞으로 이동했다. 등 뒤에는 꽃잎처럼 멤버들의 팔이 퍼졌는데, 그게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 더는 가만있는 게 의미 없어

이젠 돌이키고 싶은 게 있어

Don't be afraid

끝까지 붙잡고 있어

나를 완성시켜 주는 건 너야

핑그르르 퍼지는 한복 자락 속에서 서로 엇갈려 등을 진 채 고개를 돌린 권혜성과 강태오였다.

파워풀하면서 섬세한 동작으로 페어 안무를 추며 시선을 공유한다.

이정원의 눈을 가렸던 것과 동일한 천이 하늘 높이 던져지고, 그걸 다시 받은 권혜성이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다.

- 텅 빈 거리에 걸음으로 수놓아

너를 찾아 떠나는 지금 이 시간

오로지 흰색과 검은색 두 가지만으로 연출된, 조금은 기묘한 무대였다.

멜로디컬하면서도 국악 베이스의 서글픈 MR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와 다리를 부드럽게 연결한 동작으로 대형을 이동한 멤버들이었다. 그 사이에선 손목에 천을 둘둘 감은 신해신이 센터 방향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허스키하지만 탄탄한 보컬이 이정원의 미성과 함께 어우러지고, 높게 치닫는 목소리 사이로 현악기 특유의 울림이 합쳐졌다.

- 다시 돌고 돌아 너

내 마지막 엔딩의 주인공은 바로 너

- (I'm looking for you)

- 소중함을 기억해

멤버들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자 스크린 속 달이 암흑 속에 잠겨 사라져버렸다.

곡조가 처연한 기색을 띰과 동시에 모든 조명이 꺼지며 한 줄기의 빛이 쏟아진다.

그곳에는 권혜성이 홀로 서 있었는데, 손목에는 천을 휘감은 채 화려한 독무를 추기 시작했다.

- 멀어지지 마 내게 돌아와

다시 널 만나면 그냥 품속에 안을래

그리고 그런 권혜성과 바통 터치하듯이 문채민이 모두를 돌아 앞으로 나왔다. 이유준과 마찬가지로 핸드마이크를 든 상태에서 정확한 발음으로 랩을 읊는다.

- 기나긴 공백 그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난 네 모습에

멈춰 있던 모든 게 다시 움직여

한 번에 켜진 조명 너머로 천장에서 흰 천들이 잔뜩 쏟아져 내려왔다. 투명한 천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멤버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풍경이었다.

그 사이 영상 속 보름달은 서서히 초승달로 변하고 있었다. 개기월식을 겪는 것처럼 길게 늘어진 달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동작이 풍성해진 멤버들 속에서 손에 부채를 쥔 윤명이 이동했다.

촤륵, 한 번에 활짝 펼쳐 내고선 하관을 가리며 해당 파트를 불렀다.

- 텅 빈 거리에 걸음으로 수놓아

너를 찾아 떠나는 지금 이 시간

달이 점차 붉은색으로 변해 가는데 고개를 돌려 그걸 지켜본 신해신이 무표정한 얼굴의 이정원과 마주 섰다.

- 다시 돌고 돌아 너

내 마지막 엔딩의 주인공은 바로 너

- (I'm looking for you)

- 소중함을 기억해

이때, 어디선가 긴 검을 동여맨 강태오가 무대 가운데로 나타났다.

검집을 빼내고 화려하게 휘두르며 춤을 추는 동작으로 조명에 반사된 은빛 칼날이 섬뜩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 너와 떨어질 수 없어

이게 내 운명인 걸

격해진 곡조 속에서 걸음을 옮긴 윤명과 권혜성이 손을 들어 서로의 눈을 가렸다.

멤버들은 각자 맡은 천 뒤로 이동해서 숨은 것처럼 몸을 돌려 턴을 하는 중이었다.

하늘하늘한 흰색의 천 너머로 멤버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의 얇은 두께였던 터라 동작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 밤하늘 떠 있는 저 달처럼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줘

신해신과 강태오 단 둘만 남은 무대 위, 모든 조명이 조도를 낮추고 은은하게 퍼져 갔다.

공중에는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는데 그걸 본 신해신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 다시 돌고 돌아 그 끝은 너

내 인생이란 이야기의 마지막은 바로 너

한 발짝 나타난 강태오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은 신해신이었다.

이상한 이질감을 뽐내는 광경 속에서 강태오의 검이 신해신을 내리긋는 동작을 취했다.

샥- 쿵!

서글프게 휘몰아치는 해금 소리 너머로 춤을 추던 멤버들이 제각기 동작을 멈췄다. 각자 꽃이 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상태에서 스산한 바람 소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쏟아지던 흰 꽃잎들 속에 붉은 꽃잎이 섞여 나오고, 그걸 끝으로 스크린 위의 달이 완전히 저물었다.

가운데에 뜬 멘트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再會] 재회

‘다시 만남’

까맣게 암전된 무대를 보고서야 팬들은 모든 공연이 종료됐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흥분한 상태에 접어들어 마구잡이로 SNS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이사인 돌돌너로 연말 찢었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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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원래 라이브랑 비주얼 쩌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번 무대로 그냥 신인상 우리 거임 하고 침 바른 수준이더라;;

처음에 돌돌너한대서 좀 신기했는데

(베러잇들 화내지마 너네가 봐도 너무 연관 없었잖아)

동양풍으로 내줄지는 진짜 몰랐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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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쉈다 찢었다 내 심장도 찢었음

- 돌돌너 원래 이런 곡이었음??? 띵곡을 띵곡으로 소화해낸 당신들 ㅠㅜㅠㅠㅠ

- 시작 때 강태오로 이미 찢고 들어가더라 ㅋㅋㅋㅋ 치트키 쓴 거 보고 독할 건 알았지만;;

- 이번 공연 레전드라고 해야지 뭐 ㅅㅂ 나 타빠인데 이건 인정해

- 얘네 엔터 원래 선택과 집중 오진다고 하더라 이번에 몽땅 쏟아낸 거 보였음 독기 돌았냐

타 팬부터 시작하여 하이눈까지 온 커뮤니티가 뒤집혀 버린 하루였다.

평소 견제를 많이 받는 팬덤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모두 인정해야겠다는 뉘앙스였다.

얼마나 여운이 깊었는지 타이틀도 아닌 커버 무대에 온갖 해석들이 나타났다.

[우리사인 돌돌너 무대 빌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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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졌쥬? 의미 너무 깊은 무대여서

혼자 가슴 내려치다가 해석해봄

처음 시작할 때 연인과 헤어져서

슬퍼하는 남자 노래인 줄만 알았거든?

근데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사별’이더라 ㅎ…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이 흰색인 것도 이유가 있었어

얘들아 저건 추모의 의미였다.

그것도 연인의 죽음에 대한 추모 시발……

광광 울고 있는 사람? 저요

메이터스 이 변태색기들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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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아 진짜 죽어서 다시 만나는 거였냐

- 사별해서 추모하고 있는 정인이었던??? ㅠㅜㅠㅜㅠ

- ㅅㅂ 그럼 무대 위에 색상 하나도 없이 흑백으로 깐 것도 계산한거임

- 마지막 가사 개사한 것도 좋았음 원래 ‘내 인생이란 스토리의’인데 ‘내 인생이란 이야기의’로 바꿨더라 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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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 혼자 있는 장면이 쓸쓸해 보이던데

일부러 그런 감정선으로 연기한 거 같음

그 천개 걷는 것도 그렇고 세트장도 뭔가

이질적이었잖아. 이거 혹시 연인을 잃고 난 뒤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란 걸 표현해놓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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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왐마야

- 엄마 나 이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 미친 거 아니냐 미친 거 아니냐 미친 거 아니냐

- 소리 지르지 말고 박수 쳐야 하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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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든 초반에 눈 가리고 있던 천

그게 연인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시점으로 보임;; 혜성이도 그 천 갖고 춤

추잖아 이게 약간 죽음을 각오하기까지의

빌드업 아닌가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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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네 소품 하나부터 안무랑 가사가 전부 다 의미 부여한 듯 아가명이 부채로 하관 가린 것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같지 않냐.

- 돌돌너 원곡 가사랑도 리얼 착붙이던데 ‘텅 빈 거리에 걸음으로 수놓아 너를 찾아 떠나는 지금 이 시간’ 이거 완전 연인을 찾아 죽음도 불사르겠다는 남자 아니냐고 ㅠㅜㅠㅜㅠ

- 달처럼 영원히 머물러달라면서 마지막 스크린엔 달도 다 사라졌잖아 거기서 리얼 소름 돋았다

- 쓰발 과몰입오지네

- 나 KIJUL

큰 화제성을 이끈 탓이었는지 원곡자인 베러원까지 직접 이 무대를 언급해줬다. 급하게 킨 라이브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소감을 이야기하는 게 목격됐다.

[무대 봤어요. 진짜 너무 좋은데요??]

[맞아요. 저희 지금 생방 보고 다시 보기 하려고 찾고 있다니까요? 와, 나 그걸 그렇게 해석해 줄 줄 몰랐지. 너무 예뻐서 홀린 것처럼 들었잖아요~ 하이사인 후배님들이랑은 나중에 꼭 합동 무대도 한번 해 보고 싶어요.]

비활동기에 들어간 그룹이었지만 이번 일로 화제가 되어 차트 인을 하는 기염까지 토했다. 그게 고마웠던 모양인지 아웃스타그램 스토리에 링크까지 걸며 극찬을 한 원곡자들이다.

그리고 그건 클립으로 편집되어 와이튜브와 티위터에 퍼져나갔다.

[커버 무대 하나로 수록곡 차트인 시킨 괴물 신인]

[하이사인 짱팬된 베러원.gif]

[우리 같이 무대해요 후배님들.gif]

- 베러원 지산이랑 택주 둘이 흥분해서 말하는 것 좀 봐 ㅋㅋㅋㅋㅋ

- 와 우리 애들이 이렇게 대놓고 음심을 다 보이네 하이사인 후배님들 ㅜㅜ 우리 애들이랑 나중에 콜라보 무대 하나 해줘요 나도 스트리밍 많이 할게

- 헐 재키 아웃스타에 링크까지 걸어놨네

- 러잇들 나만 지금 어색해? 애들 주접부리는 거 보니까 기분이 묘해 ㅜ ㅋㅋㅋㅋㅋ

- 알고리즘이 더 미친 리액션 영상을 보여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도 이번 기회로 하이사인이랑 베러원 좀 알게 됨 무대 연출 잘하더라 원곡도 들어보니까 괜춘한 듯

- 나 사극 악개라 이런 너무 무대 좋아 ㅠㅜㅠㅜㅠ 전통 퍼포 같아서 보는 내내 만족스러웠음 하이사인? ㅇㅋ 노래 들어 본다

연말 무대라는 공연 하나로 대중들에게 큰 눈도장을 찍은 하이사인이었다.

그 와중에 라이벌로 불린 스턴즈에겐 악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질기다면 질긴 악연을 끊기 위한 서두라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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