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우와, 배불러 죽겠다!”
“그런 것치곤 혜성이 너,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인상 수상이 끝난 후 회사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을 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며 온갖 흥에 겨워 있던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선 우리들끼리 조촐한 2차 축하 파티를 했는데, 오늘이 멤버들끼리만 하는 첫 음주 자리라고 볼 수 있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19살 둘과 18살에겐 오렌지주스가 건네진다.
은근슬쩍 맥주로 손을 뻗다 들킨 권혜성이 이정원의 칼같은 터치에 입을 삐죽거렸다.
“나 이제 성인까지 8일도 안 남았는데!”
“그럼 마저 그 8일 기다리든지.”
“우우… 정원이 형, 독재자! 해신이 혀엉~ 진짜 안 돼~?”
왜 나한테 그러냐. 평소엔 얌전히 잘 따르더니 갑자기 땡깡을 부리는 녀석이다.
이런 걸 보면 고등학생이 맞는 것 같다니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대답은 냉정한 이정원에게 토스해 버렸다.
“정원이한테 허락받으면 줄게.”
“…저거 마시지 말란 소리야, 권혜성.”
“에잇, 재미없어! 치킨이나 먹어야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캔 맥주를 하나 들었다.
그런 내가 신기했던 모양인지 이유준이 날 빤히 쳐다본다.
“형이 술 마시는 걸 다 보네?”
“원래 잘 안 먹어.”
…주량이 약하거든.
분위기나 맞출까 싶어서 몇 모금 홀짝이려던 거였는데, 그게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까, 형들이 어디 가서 술 먹는 걸 본 적이 없네. 유준이 형은 안 좋아하는 걸 알아서 제외하고…….”
“이유준, 너 술도 안 먹어?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형, 쟨 밥도 안 먹는데 술이라고 먹겠어.”
신기하단 어투의 문채민으로 인해 대화의 주제가 음주로 정해졌다.
본인 몫의 캔은 따지도 않은 채 미성년자들과 함께 주스를 홀짝이는 광경이었다.
저 체격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입이 짧은 녀석이란 말이야.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술도 안 마셔. 그 난리를 겪으며 데뷔한 사람으로는 독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정원이 형도, 태오도 둘 다 나한테 너무 박한 구석이 있다니까~ 해신이 형, 형이라도 날 잘 챙겨 줘야 해?”
예쁜 척 제 턱 밑으로 꽃받침을 한 이유준이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다 큰 사내자식이 부담스럽게 왜 저래. 들고 있던 맥주로 얼굴을 가려 버리니 이젠 대놓고 어깨에 기대는 녀석이다.
무거워, 인마. 떨어져. 징그럽다며 어깨를 털어 댔다.
“…유준이 형, 취했어?”
“야, 윤명, 너라면 오렌지주스 마시고 취했겠냐?”
“아, 다들 너무하다니까~”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말씨름을 이어 가는 열아홉 둘에 이어 평소답지 않게 흐느적거리는 태도의 이유준이다.
그런 이유준을 보던 강태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강태오, 너도 술에 손 안 댄 것 같은데?”
“넌 꼭 잘 나가다가 나한테 시비 걸더라.”
이유준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내려놓은 캔을 따지 않은 강태오였다.
그렇다고 쟤처럼 오렌지주스를 홀짝거리지도 않았다.
갑자기 웬 차? 혼자만 참 고상한 자세로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런 강태오를 바라보던 윤명이 궁금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태오 형, 그거 맛있어? 나도 먹어 보고 싶어.”
“그러든가.”
머그잔을 받아 홀짝이는데 미묘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문채민 역시 그게 궁금했는지 강태오의 잔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태오 형, 그거 뭔데 그렇게 사다 마시는 거야? 해외 배송이야?”
그래, 나도 좀 들어 보자.
버릇처럼 입에 달고 마시는 차였는데, 종종 쟤 방에 가면 박스 상태로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뭔가 꼬부랑글씨가 잔뜩 써진 패키지의 티백이었지.
영어인가 싶어서 읽어 봤지만, 해석은 잘되지 않았던 게 기억난다.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생긴 걸 봐선 유럽 계통인 것 같다. 뭐, 프랑스나 독일?
“그냥 먹는 거지 뭐. 어릴 때부터 마셔 버릇해서.”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이유준과 제 머그잔만 고수하는 강태오 그리고 맥주 몇 모금을 마시다 만 나를 본 이정원이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홀로 새 캔을 딴다.
“그나마 있는 성인도 넷뿐인데, 나 빼곤 전부 술을 안 즐기나 봐? 괜히 많이 샀다 야.”
…언제 저렇게 마셨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이정원의 뒤쪽엔 텅 빈 맥주 캔들이 널려 있었다.
취한 거 아니야? 기겁하여 확인해 보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삼키는 이정원이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렷한 발음을 자랑해 보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너…….”
말술이구나. 어째 쟤는 보면 볼수록 강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서 술주정 부릴 바엔 잘 마시고 사고 안 치는 게 낫긴 하다.
혼자 마시도록 두는 것도 미안해서 이정원을 향해 캔을 내밀었다.
“뭐야, 해신이 너, 내 상대해 주게? 나 술 센데. 각오해?”
“좀 봐줘.”
이정원과 맥주 캔을 맞대려는 순간, 멤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 들고 있던 잔을 들이밀었다.
“손들도 빨라.”
“해신이 형, 얼른 선창해 줘!”
“나? 그럼…….”
공중에 띄워진 7개의 손을 보며 조용히 이번 시상을 축하했다. 혼자 보낸 연말에 비하면 아주 시끌벅적한 밤이다.
“우리의 신인상을 축하하며.”
“건배!”
* * *
“…형. …신이 형!”
으, 어지러워.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내 어깨를 흔드는 인물을 바라봤다.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미간을 찡그리니 걱정스럽단 표정의 이유준이 보인다.
이정원, 저 독한 놈……. 상대해 주다가 그만 페이스에 휘말린 모양이다.
앞에 떨어져 있는 맥주 캔 세 개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하하, 해신이 쟤 취했네!”
“…정원이 형, 악마.”
“윤명, 넌 나랑 독대 좀 하자. 이리 와 봐.”
“싫어……. 권혜성, 나 좀 도와줘……!”
“헤헹, 알아서 살아남으시라~!”
정신없는 광경 속에서 의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날 살핀 이유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형, 명이 케이크 줘야지. 형이 준비해 놓고 못 챙기면 어떡해.”
“아, 맞다… 명이 생일…….”
12월 22일. 시상식 바로 다음 날인 오늘은 바로 윤명의 생일이었다.
예전에 받았던 설문지를 통해서 녀석들의 생일은 모두 외운 상태였다.
그걸 멤버들과 공유한 뒤 몰래 깜짝 생일 파티를 해 주기로 계획했지.
“명이 붙잡혀 있을 때 얼른 준비하자.”
주체되지 않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날 본 이유준이 재밌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하하! 아, 안 되겠다. 채민아, 태오야. 너희가 가서 좀 가져와라.”
“어, 그럴게! 태오 형, 가자……!”
“참 나, 완전 맛이 갔네.”
그거, 내가 산 케이크인데, 왜 너네만 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데 이유준이 손을 들어 나를 가로막는다.
“…스톱! 나 괜찮거든…….”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호언장담한 입과 달리 속마음은 솔직한 편이었다.
이유준, 나 왜 네가 3명으로 보일까. 흔들리는 바닥에 눈을 감고 발에 힘을 줘서 버티고 있었다.
“…해신이 형? 왜 그래?”
“어, 윤명!”
“형, 제대로 취했네…….”
이정원에게 잡혀 있던 윤명이 나를 보곤 눈을 깜빡거린다. 말간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 너!”
“…어? 나, 왜……?”
“해신이 쟤, 완전히 갔구나. 큭, 저런 건 또 처음 보네.”
“와~ 정원이 형, 진짜 못됐다…….”
“권혜성 너도 재밌단 얼굴이잖아.”
“뭐, 언제 이런 걸 보겠어?”
왜 말이 제대로 안 나오지.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댄 뒤 하고 싶던 말이 뭐였는지 떠올려 봤다.
그런데 술에 전 머리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 듯하다.
내일 일어나면 죽고 싶을 거란 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 그……!”
“…그?”
“…생일 축하해, 명아.”
아, 나왔다. 몰려오는 만족감에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실 불이 꺼지며 케이크를 든 문채민과 강태오가 나타났다.
“어…….”
“Happy birthday to you…….”
어리둥절하단 표정의 윤명을 앞에 두고 이정원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래, 이런 건 메인 보컬인 네가 해야지!
“윤명, 생일 축하해!”
“명이 형, 케이크는 저기 해신이 형이 산 거야. 비록 취해서 직접 주진 못했지만 말이야.”
“윤명, 선물은 네 방에 넣어 놨다.”
“언제 이런 걸…….”
권혜성이 씌워 준 고깔모자를 쓴 채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은 윤명이었다.
안 그래도 말간 인상인데 저러고 있으니까 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이거 해신이가 계획한 거야. 나중에 고맙다고 얘기해.”
“혀엉…….”
“윽, 흔들지 마. 속 안 좋아.”
가까이 다가온 윤명이 제 커다란 덩치로 나를 눌러 댔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바짝 눌리자 그런 윤명을 떼어 준 이유준이 물을 건네 온다.
“안 되겠다. 이 형, 먼저 재워야지.”
“그래, 해신아? 잘 자.”
“이정원 너, 나중에 두고 봐…….”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하나도 안 무섭네요.”
피식 웃는 이정원을 뒤로하고 이유준의 부축을 받아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엔 윤명을 향한 축하 인사도 잊지 않았다.
“명아, 생일 축하해…….”
“…응!”
* * *
“형도 어디 가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나 원래, 안 이러거든.”
팔을 들어 눈가를 누르니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눈을 떠서 천장을 바라봤다.
“취한 척했던 거야?”
“아니, 누우니까 좀 괜찮아진 거야.”
“그럼 다행이네. 음, 형, 이번엔 그냥 넘어가 줄게.”
“…뭐를?”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냥 애썼다 싶어서 넘기려고. 하지만 다음부턴 안 봐줘.”
“…너나 이정원이나 참 끈질기다.”
“알면 잘해. 잘 자.”
지금보다 어떻게 더 잘하냐.
한숨을 푹 내쉰 나를 보더니 조용히 스탠드의 조명을 꺼 준다.
밖으로 나간 이유준을 확인한 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만 끔뻑거리길 한참이었다.
이제 해볼까. 상태 창을 불러 냈다.
[키워드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1회
감성: 100%
강렬함: 98.7%
키워드 룸. 신인상을 무사히 타 낸 이후엔 저걸 다시 확인하려고 생각했었다.
윤명의 생일이다 뭐다 해서 여태까지 미루고 있던 일 중 하나기도 하다.
“…지금 하는 게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혼자 있는 이 시간이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시끌벅적한 거실의 소음을 들으며 키워드 룸을 전환했다.
“기억 키워드 열어 줘.”
[‘감성’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합니다.]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아득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 * *
‘…오늘도 여기야?’
보육원의 복도 한복판으로 낡은 나무 바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또 갓난아기였던 과거로 온 건가 싶어서 둘러보니 낯익은 아이 몇이 복도를 뛰어다닌다.
‘쟤네는, 민호랑 성민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애들은 나와 같은 보육원의 원생이었다.
2살 정도 어린 애들이었는데, 10살이 되기 전에 입양을 갔던 게 떠오른다.
대충 보기에도 쟤네, 9살은 되어 보이지?
아무래도 지금 이 시기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무렵인 것 같았다.
그때 작은 방 창문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옆에는 은사님이 함께 계셨는데, 내 시선 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앉아 계셨다.
‘해신아, 또 선생님네 집에 놀러 가지 않을래?’
‘…그래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주형이가 해신이를 얼마나 찾는데? 그러니까 우리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응?’
‘…네에. 선생님, 죄송해요.’
‘아니야, 해신이가 미안해할 건 없어.’
아, 혹시 그때인가. 은사님의 손을 붙잡은 내가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보육원 안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니.’
어린 내가 수저를 든 채 눈앞에 놓인 식판을 바라봤다. 식판 한구석엔 알록달록한 색깔의 초콜릿이 올라가 있었다.
‘해신아, 초콜릿 말고 과일로 바꿔 줄까?’
‘아니에요. 이거 다 먹을게요. …선생님, 저 이거 먹으면 선생님네 가도 돼요?’
‘…물론이지. 해신이가 다 먹을 때까지 선생님이 옆에 있어 줄게. 자, 다들 맛있게 먹자!’
‘네!’
합창하듯이 외치는 애들 속에서 수저를 쥔 내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야, 생일이었잖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이날은 내 법적 생일이었다.
이름도, 생년월일도 적혀 있지 않아서, 보육원에서 출생 신고를 해 준 날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저 당시의 나는 어린 마음에 발렌타인데이를 참 싫어했었다. 진짜 생일도 아닌데 축하받아서 뭐 하냐며 곧잘 울곤 했지.
이벤트성으론 아이들에겐 작은 초콜릿이 나오곤 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나는 그게 보기가 싫어서 도망가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까, 그땐 왜 시스템이 허용해 줬지.’
문득 유어돌 촬영 도중에 운 스탯을 올리기 위해 별자리 운세를 찾아봤던 일이 떠올랐다. 진짜 생일이 아니었지만 넘어가 달라고 빌었던 일화가 있었다.
‘불쌍하게 생각해주긴 했나 보네. 어? 여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다시 주변 광경이 변해 버렸다. 이번에는 야외로, 장독대가 있는 담장과 녹색 잔디가 깔린 정원 위였다.
‘은사님 댁이잖아.’
현관문 언저리에 깔려 있던 돌 위, 쪼그려 앉아 있는 어린아이 둘이 목격됐다.
장난감 자동차를 움직이던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주형아, 형이 이거 주고 갈 테니까, 다음부턴 선생님이랑 이모한테 떼쓰면 안 돼? 알았지?’
‘혀엉, 그냥 우리 집에 같이 살아. 응?’
최주형, 쟤 어릴 땐 참 귀여웠는데. 울먹거리던 어린 최주형이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대충 보아하니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인 듯하다.
‘…안 돼. 주형아, 이모랑 이모부 말 잘 들으면 형이 다시 놀러 올게. 그땐 더 큰 장난감도 가져다줄게, 알았지?’
‘…진짜?’
나도 제법 어른스러웠단 말이야.
사실 그 누구보다 여기 남아 있고 싶던 건 나였다. 하지만 차마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가방과 함께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 뒤에는 지금 스페인에 가 있는 이모와 이모부, 그러니까 최주형의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
‘엄마, 좀 더 있다 가도 괜찮은데…….’
‘아니야, 그럼 해신이 마음이 힘들어.’
‘어휴, 알았어. 해신아~ 다음에 또 이모네 놀러 와야 해? 그땐 이모가 더 맛있는 거 해 줄게.’
‘이모부도 해신이가 좋아하는 거 많이 준비해 놓을 테니까, 꼭 같이 놀러 가자.’
‘…네!’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는 내 얼굴 뒤로 빨간빛이 번쩍거렸다.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이번보다 훨씬 또렷한 광경이었다.
‘내가 생각한 게 맞았구나.’
은사님의 손을 잡은 내가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울먹거리던 최주형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다음에 보자고 인사해 주는 중이었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빨간빛 위에는 익숙한 문구가 하나 적혀 있었다.
[Bug] ?????…….
‘버그…….’
회귀와는 거리가 멀었던 어린 나였는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의 시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번 기억 키워드 전환을 통해서 내가 생각해 둔 가설이 진짜였음을 확인했다.
‘하하, 그런 거였어…….’
10살을 막 넘겼을 어린 내게는 새빨간 버그가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보육원에 버려졌던 그날부터, 아니 태어난 이후 줄곧 갖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처음부터 시스템과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 안 사실을 곱씹으며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를 느꼈다.
* * *
번쩍- 두 눈이 떠졌다.
“…돌아왔네.”
누워 있던 상태에서 손을 들어 얼굴을 훔쳐 냈다.
과거로 가면서 어린 내게 동화됐던 건지, 눈가엔 눈물이 잔뜩 흘러내려 있었다.
민망함에 한숨을 푹 내쉬는데, 이상하게 주변이 밝다고 느껴진다.
“…어, 그러니까.”
돌아본 곳엔 반쯤 열린 문과 함께 날 지켜보는 권혜성이 존재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표정으로 봐선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듯하다.
“그, 정원이 형이, 형 괜찮은지 보고 오라고 해서…….”
다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그런 날 본 권혜성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평소답지 않게 왜 저런대?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눈가를 닦아 냈다.
“나 술 다 깼어.”
“…형, 괜찮아?”
덤덤하게 말을 잇자 한달음에 내 침대로 달려온다.
그러곤 무릎을 꿇어 허벅지에 턱을 괸 채 찡얼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왜 그래~~~”
“넌 슬픈 꿈도 안 꾸냐. 별거 아니야.”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권혜성의 머리를 헤집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갔다.
“지금 몇 시야? 설마 아직도 먹고 있어?”
“방에 들어간 지 30분밖에 안 됐는걸.”
“그럼 다시 나가지 뭐. 가자, 혜성아.”
알아봐야 할 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지금은 잠시 넘어가기로 했다.
뭐, 윤명의 생일이기도 하고.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신파 취향이 아니었다.
“벌써 케이크 다 먹었냐?”
“…어? 형, 깼어……? 혜성이 너, 잘 자는지 보고만 오라니까…….”
“내가 깨운 거 아니야!”
“뭐야, 신해신, 금방 살아났네?”
“정원이 형, 형이 보냈잖아.”
“…다시 붙어, 이정원.”
“어? 할 수 있겠어? 좋아, 덤벼, 신해신.”
“하하! 둘 다 술에 빠져 죽으려고 그러는 거면 안 말릴게.”
“…하아.”
사연은 사연이고, 나는 현실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