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얘들아, 일어나 봐. 얘들아?”
“그냥 놔둬. 걔넨 글렀어.”
밴의 문을 열어 잠든 권혜성과 문채민 그리고 윤명을 흔들어 깨웠다.
그 꼴을 본 이정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냥 문을 닫아 주라 말했다.
권혜성, 쟤는 지가 오자고 해 놓고.
패딩에 파묻혀 서로에게 기대어 곯아떨어진 세 녀석을 바라봤다.
새벽 내내 똥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더니, 일출을 1시간 앞두고 잠이 들어버린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며 문을 닫아 주는데 이유준이 인근 편의점에서 사 온 커피를 건넸다.
그와 동시에 바닷가 백사장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올랐다.
“형, 이유준. 얼른 와.”
“어, 가.”
강태오가 몸을 돌려 나와 이유준을 급히 불렀다. 서둘러 바닷가로 걸어가니 본격적인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권혜성이나 윤명은 그렇다 치고, 채민이까지 저럴 줄은 몰랐는데.”
“채민이도 아직은 어려. 이제 열아홉인데……. 그동안 너무 의젓해서 다들 헷갈렸던 거야.”
이정원의 솔직한 한마디에 밴 안에 잠들어 있는 문채민이 떠올랐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으로 제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있단 걸 알게 됐다.
사내 괴롭힘에 연루된 걸로도 모자라서 자신 때문에 이유준이 연습생을 그만뒀다는 죄책감까지 떠안았던 상태였다.
그걸 이겨 내고 버틴 문채민은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그건 이유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도 고생이 많았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유준에겐 유어돌이 마지막 기회와 다를 바 없었다.
첫 대면에서도 개인으로 나와 페어가 될 줄 몰랐다며 쓰게 웃은 일화가 존재했다.
항상 능글거리고 태연한 척 굴어서 몰랐는데, 어째 속은 더 복잡한 놈인 듯했다.
원래 이런 일은 아는 척하는 게 아니라지만, 고생했다는 의미로 등을 한 대 툭 쳐줬다.
“하하, 형, 갑자기 뭐야?”
“넌 왜 웃냐.”
정든다, 인마.
“다들 소원은 빌었어?”
“소원은 무슨…….”
“왜, 강태오. 그런 것치곤 꽤 홀린 것처럼 보더니.”
“됐다.”
이정원의 옆에 서 있던 강태오였다.
그러고 보니까 쟤도 이유준만큼이나 속을 알기 힘들었지.
그래도 나름 마음은 연 것 같아서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왜, 난 소원 빌었는데.”
“…형이?”
“어, 내가 비니까 이상해?”
이정원의 투박한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발로 모래를 파헤치던 이정원은 다 마신 컵을 구기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래서, 뭐라고 빌었는데?”
“음, 이런 거 말해 주면 안 이뤄지지 않나?”
“쩨쩨하네.”
“하하! 나만 좋은 소원은 아니니까 그걸로 넘어 가 줘.”
내 말에 소리 높여 웃은 이정원이 바닷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저거, 또 민망하니까 괜히 말 돌리는 것 봐.
겉으로는 기가 세고 투박한 척 굴어도 생각보다 세심한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나도 말로는 무섭다며 장난쳤지만 근래 들어 이정원이란 인간의 새로운 점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책임감도 깊고, 안 그러는 척 멤버들도 많이 생각했지?
악역인 척 쓴소리를 하는 것 같아도 뒤에 가선 제법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려 들었다.
“하여간에. 우리 멤버들은 전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건 형이 제일 심한 것 같은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그걸 듣고 있던 강태오가 반박해 온다.
어라? 이런 건 끼지도 않던 녀석이. 묘한 기분에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지금부터 소원 빌 거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라.”
“해신이 형, 도망가는 것만큼은 인정해.”
이유준의 웃음기 섞인 태클을 들으며 새해 첫 일출을 보곤 소원을 빌었다.
시스템인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얘네를 만난 건 잘된 일인 것 같았다.
* * *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밴 안에는 오병은과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잘 버티는 것 같던 성인들도 하나둘 고꾸라지더니 이내 모두 고요한 숨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홀로 운전할 오병은을 생각해서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오병은 그런 내가 퍽 신기했나 보다.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 주셔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저희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혜성이 녀석이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렸어요.”
“저도 좋은 경험 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턴 휴가잖습니까? 공휴일이라 페이는 두둑하게 받았으니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하하, 팀장님, 저 방금 진심이 느껴졌어요.”
어설픈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운전에 집중하는 오병은을 확인하곤 시선을 돌렸다.
주머니에선 작은 진동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상대방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형이]
그래서 설 연휴는 어쩔 건데
추석에도 안 왔으면 설까지 안 오면 죽는다!
할머니는 봐줘도 난 안 봐줄 거야.
그러니까 무조건 내려와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침부터 참 팔팔하단 말이야.
밴에 탑승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최주형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란 문자가 도착했다.
활동기에 접어든 이후론 통 못 봤다며 답장을 해 주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투덜거리는 말투를 보자 괜히 얼마 전에 기억 키워드를 전환한 게 떠올랐다.
아주 어린 시절 최주형과의 일이었는데, 그때 울먹거리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음, 마침 우리도 며칠 쉬지 않았나.
돌려받은 저당금이 적지 않았으나 타이밍이 안 맞아서 은혜를 갚지 못했다.
그래,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해 보자. 최주형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주형아. 서울 놀러 오지 않을래?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답장을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미친 듯이 진동하는 핸드폰이었다.
액정을 터치해서 확인해 보다가 녀석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주형이]
신해신 지갑 다이어트시키러 간다
그런데 주형이의 문자 너머로 또 다른 알림이 와 있는 걸 발견했다.
진동이 겹쳐서 몰랐던 모양인데 지금 이 시간엔 보기 힘들 사람의 메시지였다.
[서도경]
서도경입니다.
오늘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신해신 씨, 혼자 말입니다.
아무래도 다시 시작인 것 같지. 숙소 전에 회사부터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좋은 시간 보냈나 보네요.”
“네, 뭐……. 잘 놀다 왔습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텅 빈 메이터스 사옥 안, 나는 지금 서도경과 함께 대표실에 와 있었다.
매번 미팅 룸에서만 대면하던 인간이었는데, 여기까지 부른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평소라면 수족처럼 따라붙어 있을 한지헌도 보이지 않는 것이 영 수상쩍었다.
이거 괜히 왔나 싶은데.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멤버들이 부러워졌다.
“쉬는 날인데, 불러서 미안합니다. 꽤 중요한 안건이라서요.”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모양인지 서도경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저래? 부담스러운 기분에 탁자 위로 내려놓은 잔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저희 케어는 만족스러웠나요?”
“…네?”
갑자기? 영문 모를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고민하던 순간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지. 먼저 나서진 않았지만, 요청한 건 흔쾌히 들어주는 회사였다.
일머리 좋은 상사 아래, 일머리 좋은 부하 직원들이 만나서 나쁘지 않은 시너지를 유지했었다. 게다가 인간적인 면이 적지 않게 있어서 친분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정이 쌓인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밀려오는 불길함에 답하기를 주저했다.
“생각한 그대로 말해 주셔도 됩니다. 대표란 걸 신경 쓴다고 하기엔 이런 저런 짓을 꽤 많이 하셨잖아요?”
“이런 저런 짓이라니요…….”
팩트 폭력 좀 하지 마시죠.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피드백이 빠르고, 그, 투자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관심도가 높은 만큼 사건에도 자주 연루됐는데 해결 방향이 빠르게 나올 수 있었던 건 회사와 대표님의 덕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멤버들이 나와 똑같이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진심 같아서 좋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인 서도경을 살피며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예상해 봤다.
케어해 준 것만큼 성과가 안 나왔나? 아니면 우리 활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최악의 예시들을 들어 가며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서도경이 창가에 다가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앞으론 그게 힘들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인 답이 나왔다.
이게 무슨 뜻일지 고민하기 바쁜 내 뒤로 몸을 돌린 서도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일단 신해신 씨만 알고 계세요. 후, 엔필름에서 메이터스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런 뉘앙스를 비친 건 꽤 됐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개입하려 들 것 같더군요.”
“견제라뇨……?”
너네 같은 회사잖아. 기업의 속사정을 모르던 내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런 나를 예측했었는지 지금의 상황을 알기 쉽게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레인디, 알고 있죠? 신해신 씨라면 이 정돈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거긴 분명…….”
메이터스가 설립되기 전에 대차게 망한 곳이었다.
레인디는 유어돌 시즌 1의 걸그룹이 속해 있던 곳이자, 엔필름에서 메이터스를 위한 지반으로 이용한 소속사였다.
전부 다 갈아엎었다고 들었는데. 나와선 안 될 상호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하게 메이터스는 그 레인디와 같은 개념으로 설립된 회사입니다.”
“네?”
“성공할지 모르는 가설 속에서 임시로 세우고 살펴본, 실험 자회사란 뜻입니다.”
메이터스가 레인디랑 같은 노선에 속해 있었다고? 미래에서 본 메이터스는 꽤 공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장 스태프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기만큼은 엔필름이 제대로 엔터 업계에 발을 박고자 설립한 회사라고 생각했다.
“한 번에 큰돈을 끌어 쓴 것 같아도. 엔필름에게 우스운 자본입니다. 레인디에 이어서 언제 엎어질지 모르는 시한부성 엔터였단 말이죠. 그런데 저희가 꽤 잘 이어 나갔나 봅니다.”
뭔가를 떠올린 서도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 인간, 저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묘하게 내비치는 기운이 어째 화를 내는 것 같아 보인다.
“2년 반으로 끝낼 만한 회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죠. 본격적으로 메이터스를 엔필름 자회사로 인정하려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좋은 일이 아닌가요?”
“하하, 그렇게만 끝난다면 좋은 일이었겠죠. 그것만 한 해피 엔딩이 없을 정도입니다.”
호탕하게 웃음을 던진 서도경이 표정을 굳히곤 정색했다.
…무섭게 왜 저래. 기업체에 대해 알 리가 없던 나로선 지금 이 상황이 공포스럽기만 했다.
“자기네 수족으로 두기 위해서, 사람들을 박아 넣기 시작할 겁니다.”
“사람이요?”
“네, 지금 운영이 만족스럽다 한들, 저는 완전한 엔필름 쪽 사람이 아니니까요.”
“…대표님이요?”
“네, 리스크가 컸던 프로젝트라 제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겁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온 거지만 말이죠.”
서도경, 금수저나 연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나?
화려한 외관에 능력도 출중하고 미국에서 왔다고 하여 기업체 노선을 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어투로 보아 상당히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은 모양이다.
커리어 하이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진짜 본인 능력으로 여기까지 기어 왔나 본대.
게다가 리스크니 뭐니 하는 걸 보면, 위험성을 떠안고 뛰어든 불나방이었던 것 같다.
저 인간, 야망이 큰 타입이었구나. 티를 내지 않아서 이제야 눈치챘다.
“뭐, 엔필름에서 자기네 사람들을 박아 넣는 것, 거기까진 오케이입니다. 애초에 본사 자본으로 시작했으니까 제가 할 말은 없는 부분이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죠.”
천천히 걸어온 서도경이 소파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서도경이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란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이 온다는 보장을 못 하겠거든요. 뒤에서 확인한 바로는 꽤 골치 아픈 인물이 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왜, 뉴스에서도 종종 보이지 않습니까? 전문 경영인을 앉혀 뒀을 땐 잘 흘러가던 회사가 본인네 사람 앉히고는 도산하는 것 말입니다.”
“…그 얘기는 지금 메이터스에도 파벌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인가요?”
“네. 아, 마침 한국 속담에 적절한 게 하나 있네요. 다 된 밥에 재 뿌린다. 하하! 딱이지 않나요?”
…엄마야. 이 사람 진짜 빡쳤나 봐. 어쩔 줄 몰라 몸을 사리니 그런 날 본 서도경이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신해신 씨를 부른 이유는 하나입니다. 저랑 협력하시죠.”
“…네?”
“지금까지 행동들을 보아, 잘 해내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신해신 씨도 회사로 인해 그룹에 피해 보고 싶진 않잖아요?”
…당연히 그렇지. 그나마 평화롭던 회사 내부에 큰 파란이 몰려올 거란 생각은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열받은 게 보여서 해결 방안을 떠올리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서도경이 직접이다 못해 직설적인 방법으로 협력을 제안해 왔다.
곧 내려올 썩은 동아줄을 생각하자면 이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 무섭단 말이야.
답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던 찰나였다. 손을 불쑥 내민 서도경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잡는 게 좋으실 텐데요?”
“예… 그렇겠죠…….”
웃는 얼굴로도 협박할 수 있는 거였구나.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압도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악수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왠지 썩은 동아줄 피해 보자고 불구덩이에 발을 들이민 듯하다.
“잘 부탁합니다.”
“…네.”
아무래도 내 아이돌 생활이 좀 더 스펙터클해질 모양이었다.
제발 싸울 거면 우리 좀 빼고 싸워. 이건 주변에 있는 원수들을 향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