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야, 신해신.”
“왜요.”
저기 팬들 안 보이나. 말 걸지 말라니까. 입고 있던 져지로 입을 가린 채 지원겸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거, 되게 성의 없네. 단물 다 뽑아 먹었다 이거지?”
“여기 녹화장이잖아요. 그리고 멘토님이 친목은 적당히 하자면서요.”
간 떨리게 왜 이러는 거야. 먼 곳에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정신 차리라는 뜻을 돌려 표현했다.
선수단은 중앙 트랙에 앉아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경기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전체 종목 중 하나인 e스포츠의 경기 시간이다.
각 팀에서 총 4명, 그룹당 한 명씩 출전한 선수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걸 확인했다.
우리 그룹 대표로는 문채민이 나가게 된 항목이기도 했다.
“문채민, 지기만 해 봐!”
“…안 질 것 같은데.”
“혜성이 너도 다 봤으면서. 이제 그만 인정해 주자~”
분개하는 권혜성의 너머로 이유준과 윤명이 문채민을 돌아봤다.
“아직도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저 똥 촉이 그렇게 잘하냐고~!”
“…너 게임 하러 가서 대차게 발렸잖ㅇ…….”
“얘들아, 녹화 중이다.”
우릴 구경하던 인클루와 얼티밋 나인 멤버 일부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나는 멤버들의 정신 놓은 멘트를 듣고 케어하기 바쁜 상황이다.
“어째 쟤넨 스물이 돼도 똑같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했ㅇ…….”
“아, 제발 좀.”
믿었던 이정원과 이유준까지 초를 쳐 등골이 싸늘했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마이크를 가린 제 옷깃을 가리키며 연신 키득거리는 이정원이었다.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경기장 내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고, 스크린 위로 좌석에 착석한 문채민이 나타났다.
팬들의 응원 소리에 맞춰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주는 녀석이다.
“채민아! 화이팅!”
처음 항목을 정하던 시점부터 호기롭다 못해 자신감이 넘친 문채민이었다. 위풍당당한 표정을 보니 믿고 맡겨도 되겠단 생각을 했었다.
‘이거 내가 찜.’
‘e스포츠?’
먼저 나서서 요청한 적이 없는 애였기에 신기한 마음이 앞서 들었다.
지망하는 사람도 딱히 없을 것 같아서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런데 그때 권혜성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헐, e스포츠 배틀 히어로 하네? 나도, 나도!’
‘이거 그룹당 1명밖에 못 나가는데?’
‘야, 문채민! 한판 붙어! 실력으로 정하자!’
권혜성도 좋아하던 게임이었는지 문채민과 출전을 두고 경쟁이 붙었었다.
평소 문채민의 성격을 알아서 양보해 주려나 싶던 찰나, 문채민이 왼쪽 입꼬리를 올리며 권혜성을 비웃었다.
뭐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 무섭게 그걸 목격한 권혜성이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너 왜 나 비웃어!’
‘덤벼.’
‘어쭈~ 좋아! 배히 한판 붙어! 너 시즌 랭킹 몇이야!’
‘형은 상상 못할 높은 곳.’
‘…너, 좀 약 오른다?’
영문 모를 막내의 행동에 윤명도 신기하단 기색을 내비쳤다.
숙소 내엔 두 대나 되는 컴퓨터가 없어서 PC방에 다녀오겠다며 외투를 걸친 둘이었다.
‘야, 유준아. 채민이 쟤, 왜 저러냐?’
‘채민이가 승부욕이 좀 있잖아. 근데 제일 심한 곳이 온라인 게임 관련이거든.’
씩씩거리며 모자를 눌러쓴 권혜성의 뒤로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의 문채민이 등장했다. 마치 어딜 덤비냐는 듯이 거만한 자태였는데, 그걸 본 강태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유준, 너랑 친한가 했더니. 저거 보니까 둘이 똑같네.’
‘나 지금 욕먹은 기분이다?’
말과 달리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재밌어 보이는 이유준이었다. 다급하게 운동화를 꺾어 신는 권혜성의 뒤로 심판을 봐주겠다며 윤명이 쫓아 붙었다.
저 셋만 보내도 괜찮을까 싶던 찰나, 호기로운 얼굴의 삼인방이 튀어 나갔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달리 태평한 얼굴의 성인 삼인방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도어 록 치는 소리와 함께 밖에 나갔던 애들이 돌아왔다.
‘왔어? 그래서 누가 이겼냐?’
‘정원이 형, 쟤네 얼굴 보면 답이 딱 나오잖아. 혜성아, 너 졌구나.’
‘유준이 형, 정답.’
‘…문채민, 네가 제일 나빠.’
터덜터덜 거실에 들어선 권혜성이었다.
그 뒤론 문채민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상석을 차지했다.
‘…권혜성, 완패. 두 번 볼 것도 없었어. …쟤, 진짜 못해.’
‘야! 내가 못한 게 아니거든! 나 잘하는 편이거든!’
‘맞아, 명이 형. 내가 과하게 잘한 거지.’
…문채민이 원래 저런 캐릭터던가? 시큰둥한 표정의 이정원을 앞에 두고 PC방을 다녀온 삼인방이 투닥거렸다. 결과는 보이는 대로 문채민의 승리였다.
‘…영상 보여 줄까?’
‘윤명, 너 그거 찍었냐?!’
‘…으응.’
‘그걸 왜 찍어어~!’
윤명의 핸드폰을 뺏어 들려는 권혜성과 그걸 피해 급히 달아난 윤명이었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기 싫다는 표정으로 강태오가 걸음을 피하려던 순간, 윤명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강태오에게 떠넘겨 버렸다.
‘…태오 형, 토스~!’
‘…이걸 왜 날… 야! 권혜성! 이리 오지 마!’
‘태오 형! 핸드폰 내놔!’
‘난장판이네.’
‘하하! 재밌잖아! 강태오, 핸드폰 든 김에 영상이나 틀어 봐!’
‘…내가 왜! 야! 아! 가만히 있으라니까!’
그 뒤, 우린 거실에 모여 앉아 윤명이 찍어 온 영상을 구경했다.
권혜성이 불만을 제기했으나 출전 여부에 대한 검증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윤명이 찍어 온 영상 속에 문채민의 아이디로 추정되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래서 이게 무슨 게임인데?’
게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어서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정보였다.
그때, 핸드폰으로 내용을 찾아본 이유준이 화면을 돌려 설명해 줬다.
‘여기 봐 봐. 저거, 레벨 엄청 높은 거래.’
‘어디 보자. …이게 뭐야?’
‘야, 채민아. 너 혹시 새벽에 안 자고 게임만 하냐.’
문채민은 다소 게임 중독이 의심스러운 성적을 갖고 있었다.
이정원의 질문과 동시에 문채민과 권혜성의 출전을 건 승부가 시작됐다.
다른 사람들도 잔뜩 섞인 틈바구니에서 권혜성과 문채민의 캐릭터가 등장했다.
모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기로 보이는 뭔가를 줍고 다녔다.
‘아주 손가락이 날아다니네.’
‘난 봐도 모르겠다.’
거기에 다소 삭막한 이정원과 강태오의 소감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채민의 캐릭터가 공격을 날렸다.
[악! 야, 너! 연장자 우대도 모르냐?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많이 있잖아!]
[눈앞에 얼쩡거리질 말든지.]
[저, 저……!]
아무래도 그건 권혜성의 캐릭터였나 보다.
반대편 모니터를 살피는데,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화면이 보였다.
당황한 권혜성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려던 순간, 차에 탑승한 문채민이 권혜성을 향해 라스트 공격을 가했다.
[KILL-!]
[아악!]
‘…살벌하네.’
‘…다시 봐도 권혜성, 되게 못한다.’
‘채민이가 너무 잘하는 거 아닐까?’
권혜성의 처절한 비명은 들리지도 않는지 다른 곳을 향해 이동한 문채민이었다.
표정에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상태로 적진을 종횡무진하는 문채민의 캐릭터가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상황 속에서 강태오와 나는 점차 말을 잃어 갔다.
독설을 내뱉는 이정원과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이유준의 허락이 떨어지고, 그렇게 최종적으론 문채민의 e스포츠 출전이 확정됐다.
[아, 하이사인의 채민 선수! 시작하자마자 좋은 고점을 차지했습니다! 어! 쉬지 않고 파밍을 하여 무기를 획득했습니다. 저런, 장착하자마자 먹잇감이 눈앞에 지나가는데요! 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저격합니다! 상대는 그레이에잇의 진온! 진온! 원 킬로 사망합니다!]
[KILL-!]
“우리 막내가 게임 중독이었다니…….”
방송임은 신경 쓰고 있었는지 입가엔 미약하게 웃음을 띠고 있던 문채민이었다.
그런데 그런 얼굴로 마주치는 적군마다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문채민의 화려한 스킬에 해설을 맡은 탤런트와 전문가가 소리를 질러 댔다.
괜히 여기로도 시선이 쏠리는 기분인데. 강태오는 그게 부끄러웠는지 무리가 아닌 척 몸을 돌려 피하고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연신 문채민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특히 여기에 출전하고 싶어 하던 권혜성은 날뛰다시피 문채민의 이름을 외쳐 댔다.
“문채민 잘한다!”
“얘랑 떨어져서 앉을걸……. 창피해…….”
[아! 채민 선수, 벌써 여섯 번째 킬입니다! 아주 주변을 초토화했어요! 신들린 실력! 하이사인의 채민~! 저격사인의 채민입니다! 배히계의 초고수! 채민을 마주치면 도망가세요!]
부끄러워……. 흥분한 해설 위원으로부터 이상한 명칭이 주어졌다.
다른 팀의 선수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는 와중에도 문채민만큼은 우직하게 적진을 무찔러 나갔다.
인클루의 출전 선수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지프차를 탄 문채민이 그를 쏜 상대방을 저격했다.
탕-! 털썩, 탕-! 털썩.
몇 초 간격으로 이어진 두 장면에 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 내 울려 퍼졌다.
[복수가 이뤄지는 시간은 단 3초! 일말의 자비도 없는 스나이퍼의 영혼입니다!]
“야, 신해신. 너네 막내 뭐냐?”
“…저도 몰라요. 묻지 마세요.”
지원겸이 엉덩이 걸음으로 다가와선 작은 목소리로 문채민에 대해 질문했다.
안 그러는 척 나비소녀와 얼티밋 나인도 여길 돌아보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숨고 싶은걸. 1등이고 뭐고 간에 조금 민망하다.
* * *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진 게임이었다.
차근차근 탈락해 가는 팀들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팀 블루가 보였다.
인클루의 멤버 하나가 죽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인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다.
다른 팀에선 많아야 2명 정도가 살아 있었는데, 그걸 보면 상당히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오정오~! 바위! 바위 뒤에!”
“문채민! 오두막, 오두마악~!”
“어우, 시끄러워.”
어느덧 흥분한 얼티밋 나인의 멤버 하나가 권혜성과 합류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 인간은 분명 나를 보며 ‘어’라는 말만 한 손제완이라는 인물이었다.
손가락을 접어 주곤 실례라고 말한 멤버는 둘의 모습에 귀를 막기 바빴다.
우리 팀의 이정원은 그 광경을 보며 퍽 재밌다는 얼굴을 한다.
막지는 못할망정 즐기다니. 리더 안 시키길 잘한 것 같았다.
[아! 팀 그린 런이프의 채린 선수! 팀 레드 디레스트의 대니얼 선수에게 저격당했습니다! 팀 그린~ 전원 탈락!]
그때, 남아 있던 팀 중 하나의 탈락 소식이 전해졌다. 익숙한 그룹명이 들림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지원겸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인간, 또 디레스트 듣고 욱했네. 티를 내지 않으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인클루의 멤버가 당황한 표정으로 지원겸의 어깨에 매달렸다.
“혀, 형……! 컴 다운 플리즈……!”
“야, 이거 안 놔?”
분명 그때 그 사람이었다. 김환준과 지원겸 그리고 내 삼자대면을 가장 먼저 목격했던 멤버 말이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는데, 날 보며 연신 울먹거리고 있다.
그래서, 뭐. 나보고 어떡하라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눈만 예쁘게 깜빡여 줬다.
그걸 본 멤버는 절망한 얼굴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재, 재영이 혀엉~!”
“넌 선빈이가 불쌍하지도 않냐.”
“저게 뭐가 불쌍해.”
신경 쓰지 않을 목적으로 멤버들을 향해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이유준의 시선이 내리꽂히는데 묘하게 무서운 기색이었다.
“형, 뭔가 또 아는 기색이네?”
“…뭐가.”
“거짓말도 못하면서 뭘 그렇게 숨겨.”
내가 남 걱정해 줄 처지가 아니었구나. 이유준에 이어 강태오도 여길 돌아본다.
안됐다는 동정이 담긴 눈빛이다. 그렇게만 보지 말고 좀 도와주지?
이윽고 한숨을 내쉰 강태오가 이유준과 내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정말 생긴 것과 다르게 마음이 약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이유준, 너도 적당히 해라. 형 식은땀 흘리는 거 안 보이냐.”
“너도 좀 수상하단 말이야. 꼬리가 길면 밟히는 거 알고 있지?”
스물하나 동갑내기 둘의 대화가 길어질 무렵, 해설 위원의 흥분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남은 팀은 단 두 팀! 팀 레드와 팀 블루~!]
[팀 레드! 디레스트의 대니얼 선수와 노이어의 성결 선수가 생존해 있습니다! 떠오르는 뉴 강팀으로 후반부에 들어서 체력이 깎인 선수들을 하나, 둘씩 해치워 버티는 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아~ 정말 디펜스의 정석이죠! 중간에 탈락한 마이어걸즈 규나 선수와 킬웨이브 운화 선수의 몫까지 훌륭하게 해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또 맞붙게 되네. 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반대편 적진의 멤버가 보인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기도 디레스트의 멤버라고 이야기했다.
조용히 팀 레드의 선수진을 살펴보니 여길 보고 있던 김환준과 눈이 마주친다.
다들 게임에 집중하고 있어서 안 들킬 줄 알았는데.
하,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못 본 척 스크린을 향해 집중했다.
채민아, 다 됐으니까 저 대니얼이라는 사람은 꼭 네가 해치워라.
문채민이 이기길 바라곤 있었지만, 개인적인 희망을 담아 좀 더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렇다면 팀 블루는요! 레드와는 정 반대되는 오펜스의 정석! 최강 딜러! 자비라곤 없는 스나이퍼의 현신, 채민 선수를 주축으로, 눈에 보이는 적군을 무자비하게 해치운, 마주치면 끝장인 파멸의 팀입니다!]
[중간에 인클루의 김가온 선수가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나, 그를 제외하면 셋이나 살아남은 무적의 팀워크를 자랑합니다!]
설명이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파멸이니, 스나이퍼의 현신이니, 아이돌로선 쉽게 붙기 힘든 별칭들이 쏟아져 나왔다.
왠지 오늘 녹화가 끝나면 문채민에겐 희한한 호칭들이 생겨 있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스크린 위로는 유일하게 탈락한 인클루의 멤버가 등장했다.
민망하다는 듯이 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걸 본 또 다른 인클루 멤버가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린다.
“으하하학! 김가온, 혼자 죽냐!”
그룹마다 저런 캐릭터는 꼭 하나씩 껴 있구나.
권혜성과 손제완이라고 불린 아이돌 그리고 저 남자가 우리 팀의 위상을 떨어트리고 있는 듯하다.
“악! 지유야~!”
그 사이 나비소녀 진영 속에서 높은 목소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스크린 위로 우리 팀의 여자 캐릭터 하나가 죽어 있었다.
나비소녀의 멤버가 탈락한 모양인데.
머리를 양 갈래로 높이 올려 묶은 아이돌 한 명이 허탈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 팀 블루의 나비소녀 지유 선수! 노이어의 성결 선수에게 탈락합니다! 이제 승부는 2: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디펜스의 팀 레드냐~! 오펜스의 팀 블루냐~!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승부!]
“문채민, 지면 저녁밥 없다~!”
“권혜성, 네가 주는 것도 아니면서…….”
“오늘 우리 도시락 아니었어?”
“하하! 지금 너무 재밌다!”
“…다들 왜 이렇게 목숨 거는 건데.”
이어지는 멤버들의 한마디에 조용히 머리를 감싸 안았다.
스크린 위로는 문채민의 얼굴이 나타난다. 처음에 짓고 있던 아이돌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살벌한 기색이었다.
저거, 지금 완전히 몰두한 것 같지?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 속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얼티밋 나인의 멤버가 외쳤다.
[오두막 뒤요!]
[양쪽에서 포위합시다. 선배님, 제가 오른쪽으로 돌게요.]
[그럼 전 왼쪽이요!]
[지금 전방에서 세 번째 나무 뒤로 들어갔어요. 그대로 움직이면 제 시야에 확보됩니다. 5초 카운트하고 바로 저격 들어갈게요. 5, 4, 3, 2, 1. 쏩니다.]
그때, 진짜 녀석의 말대로 나무 뒤에서 팀 레드의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손을 제외하면 미동도 없던 문채민이 순식간에 작전을 짜 상대 팀의 멤버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러곤 빠르게 카운트를 외치며 탕! 하고 저격했다.
처음에는 상대 선수도 눈치챘는지 다시 나무 뒤로 몸을 숨기려 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걸 계산해서 각도를 틀어 총을 쏜 문채민이었다.
마침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캐릭터에 ‘KILL’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아! 완벽한 호흡이었습니다! 적진의 이동 방향까지 예측한 스나이퍼의 신! 채민 선수~! 갓채민! 파멸의 채민~! 남은 적군은 단 한 명! 디레스트의 대니얼 선수! 2:1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 피신할 곳을 찾아 숨습니다!]
드디어 남은 적군은 하나.
쏟아지는 팬들의 아우성 속에서 침착하게 상대방이 숨어 있을 곳을 뒤진 문채민이었다.
옆자리의 아군과는 말을 나누는데, 시선은 오로지 정면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다.
쟤는 사실 아이돌 말고 저걸 해야 했던 게 아닐까.
복잡한 심경으로 응원하던 와중에 디레스트의 멤버가 얼티밋 나인의 멤버를 저격했다.
[KILL-!]
[아~! 얼티밋 나인의 정오 선수! 디레스트의 대니얼 선수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남은 건 1:1! 디펜스의 정석~! 디레스트의 대니얼!]
[디레스트의 디가 디펜스의 디였나요~?]
“대니얼! 대니!”
[그 반대편은 오펜스의 현신, 파멸의 신! 21세기 스나이퍼의 영혼을 갖고 있는 하이사인의 채민~!]
“채민아! 할 수 있다!”
쏟아지는 팬들의 응원 속에서 대형 화면이 2분할로 나뉘었다.
그 속엔 긴장한 디레스트의 멤버와 무표정한 얼굴의 문채민이 들어가 있었다.
둘 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티밋 나인의 멤버를 저격하며 은신 장소를 들킨 디레스트의 멤버가 서둘러 도망쳤다.
확실히 방어를 통해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문채민과 마주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찬스를 놓쳐 버릴 문채민이 아니었다. 지도를 통해 상대방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 예측했던 것 같다. 지형물에 숨어서는 한 방향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허허벌판으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놀랍게도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그곳에 디레스트 멤버의 캐릭터가 나타났다.
…저건 어떻게 예측한 거야? 사람이 너무 차분하니까 무서울 지경이다.
[채민 선수! 이젠 예측까지 합니다! 완벽하게 말렸어요! 대니얼, 대니얼~! 거긴 이미 지옥 입구입니다!]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이 이어지고, 문채민이 망설임 없는 손길로 키보드를 눌렀다. 탕-!
[KILL-!]
[GAME OVER-!]
[아이돌 전국 체전 배 e스포츠 부문! 치열한 접전 끝에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후의 1인은~! 21세기 스나이퍼의 현신! 파멸의 전사~! 하이사인의 채민 선수!]
[이렇게 팀 블루가 최종 우승을 차지합니다!]
화려한 그래픽과 동시에 한숨을 내쉰 문채민이 잡혀 나왔다.
이제야 무표정을 풀고 씨익 활짝 웃어 보인다. 평소와 달리 개구진 기색이 강한 얼굴이었다.
“으악! 문채민, 장하다!”
“1등이다, 1등~!”
“으하하! 김가온! 쟨 거저먹었네~!”
아까부터 시끄럽던 권혜성과 그 무리들이 큰 소리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비소녀의 멤버 하나도 하늘 높이 양팔을 들으며 팀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아자! 이겼다!”
“혜빈아, 진정해…….”
꽤 터프하네.
스크린 위로는 다시 엄지를 치켜세운 문채민이 등장했다.
같은 팀이었던 아이돌들이 금메달을 걸고 한우 세트를 받아 든 장면이 이어진다.
[딱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채민 선수 짱……!]
[선배님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 중간에 같은 팀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선수분들과 한 팀이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얘들아! 우리도 한우 먹는다~!]
[하하! 아주 화기애애한 소감이었습니다. 그럼 오늘 우승의 공신 채민 선수의 소감도 들어 보겠습니다!]
[어, 정말 즐거운 경기였습니다. 합이 잘 맞는 걸 느껴서 경기하는 내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음, 이걸 지켜보고 있을 형들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예측이 되는데요… 그, 해명을 좀 하자면… 형들, 나 게임 중독 아니야. 한우 가져가니까 좀 봐주라.]
[하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문채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겸손하게 이야기했다.
“정원아, 채민이 봐줄 거야?”
“음, 조금 고민되는데.”
“…문채민, 불쌍해……. 이겼는데, 해신이 형이랑 정원이 형이 대기하고 있네…….”
채민아, 일단 돌아와서 얘기하자. 문채민과는 약간의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