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83화 (182/328)

183화

눈을 떴을 땐 홀로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제법 넓은 곳으로 보이는데, 한국에선 보기 힘든 스타일의 방 안이었다.

허허벌판에 가까운 이곳엔 피아노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육중한 몸체를 따라 이동하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보인다.

…저건 강태오? 내가 보여 달라고 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는데, 지금 저 모습은 누가 봐도 10대 초중반의 소년 시절이었다.

띵-

건반을 하나 누른 강태오가 고개를 들어 벽을 쳐다봤다. 벽장 안에는 번쩍거리는 상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전부 강태오가 받은 건가? 피아노를 쳤단 건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까 저 녀석, 가끔 방에서 악보를 보곤 했지. 과거 목격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상패를 구경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이건 강태오의 이름이 아닌데? 내 예상과 달리 상의 주인은 따로 있었나 보다. 처음 보는 이름에 스펠링을 살펴봤다.

[Nan o. K]

K를 강태오의 강씨라고 유추해 보자 강난오란 한국식 이름이 완성된다.

…음? 강난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단 말이야. 죄다 금색에 화려한 모양을 띠고 있는 트로피들이었다.

그와는 다른 이름의 상들도 몇 개 발견됐는데, 여기도 한국식 이름으로 보였다.

[Jin o. K]

저건 진오라고 읽으면 되는 거겠지. 어째 혈연임이 느껴지는 어순이었다.

강태오의 가족들인가 싶어서 녀석의 얼굴을 살펴보니, 어린 강태오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하얗게 질려서는 고개를 숙이고 건반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쾅-!

그대로 피아노를 세게 내려친 강태오가 제 입술을 깨물며 괴로워했다. 그러곤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피아노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뒤로 넘어간 피아노 의자 앞에는 낯선 얼굴의 강태오가 서 있었다.

저건 여기로 넘어오기 일보 직전, 도망쳤다고 말하던 강태오가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Teo? Was ist denn los?! 어머, 태오야!’

방문이 열리고 낯선 얼굴의 성인 여성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처음엔 뜻 모를 외국어로 말을 걸더니, 방 안의 상황을 보곤 강태오에게 달려간다.

‘엄마…….’

엄마? 자세히 보니 강태오와는 많이 닮아 보이는 이목구비다. 걱정하는 얼굴조차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엄마, 나, 도망갈래요. 도망치고 싶어요.’

‘태오야…….’

‘쫓아갈 수가 없어. 나, 너무 숨 막혀, 엄마.’

‘…그래, 그러자. 도망치자. 엄마가, 엄마가 도와줄게.’

넋이 나간 강태오를 안고선, 연신 강태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오는 집안의 관습에 따라 피아노를 쳤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강난오와 강진오 저 사람들이 강태오의 직계가족이란 것도 예상됐다.

유어돌 내내 남들에겐 우상처럼 높게 보인 강태오였는데, 이 시기의 강태오는 아무도 쫓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낀 것 같다.

아, 도망쳤다고 하는 건,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힘들어 보이는 모자에게 시선을 돌리자 서서히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높은 천장과 광활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수십 대의 비행기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긴 공항이잖아.

다시 나타난 강태오는 아까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체격과 비슷한데, 얼굴만 좀 더 앳된 기운을 띄고 있다.

여권에 발급받은 티켓을 끼고선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얼핏 보인 행선지는 ‘South Korea’. 대한민국이다.

‘태오야,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게.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해?’

‘네. 저 이제 갈게요.’

여자의 품에 안긴 강태오가 비행기 탑승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가족은 안 온 건가?

멀어지는 강태오를 지켜보던 여자가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받는다.

‘태오, 지금 갔어요. 진짜 괜찮겠어요? 이렇게 안 보고 보내도?’

- …지금 날 보면 더 힘들어할 거야. 그냥 우린 기다려 주기만 하면 돼.

‘여보, 전 태오가 너무 걱정돼요. 이게 진짜 태오를 위한 걸까요?’

- 태오 엄마, 태오가 스스로 이겨 낼 거야. 알잖아, 우리 아들, 누구보다 강한 거.

시스템이 허용해 준 덕분인지 내 귀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내용이었다.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통화를 끊자, 핸드폰 너머로 상대방의 이름이 보인다.

[Nan o]

난오? 아, 강난오는 강태오의 아버지였구나.

그렇다면 강진오는 아마 그 사람일 것이다. 강태오가 종종 이야기했던 친형 말이다.

하늘 높이 떠오른 비행기를 바라보니, 다시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비틀거리며 눈을 떠 봤을 땐, 조금은 익숙한 광경이 나타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원한 시간으로 왔네. 여긴 어느 고등학교의 교실이었다.

쉬는 시간인지 시끌벅적한 교실 너머로 자리에 앉은 강태오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도 무뚝뚝하지만 저땐 더 심했군. 아니, 무뚝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세상과는 벽을 등진 사람 같달까. 어떤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모습이었다.

‘저 새낀 혼자 있는 폼 없는 폼 다 재네.’

‘야, 차은석. 넌 왜 이렇게 강태오 싫어하냐? 쟤 조용하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재수 없잖아~! 얼굴만 반반해서 여자애들은 꺅꺅거리고. 아, 아무튼 난 저런 애들 질색이야!’

‘야, 쟤 김은하한테 차여서 그럼. 김은하가 강태오 좋아한다고 했거든.’

‘미친 새끼.’

강태오와는 그리 멀지 않은 자리였다.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강태오를 보며 쑥덕거린다.

사내자식들이 쩨쩨하게 떼로 몰려서 저러냐. 강태오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것 같았는데, 흥미조차 없단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다.

그때, 강태오의 옆자리에 앉아서 문제집을 풀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야, 시끄러워.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너네 자리 가서 떠들어라.’

‘아, 반장 저 새끼는 담임한테 뭐라도 받았나. 허구한 날 강태오 감싸 주기 바쁘네.’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잖아. 시시비비 한번 따져 봐?’

‘야 야, 적당히 하고 가자.’

쟤가 그 강태오가 말했던 반장이구나.

그 시기의 남자애들답지 않게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풀고 있는 녀석이었다.

강태오와 친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적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고마워.’

‘난 너한테 고마움받을 일 한 적 없어. 문제집 푸는데 차은석 저 새끼가 너무 시끄럽게 굴길래 짜증 낸 것뿐이야. 그리고 강태오, 너도 이럴 땐 화 좀 내라. 가만히 있으니까 만만한 줄 알고 덤비잖아. 덩치만 봐도 한 방에 넘길 새끼가.’

‘…별로 그럴 마음은 없는데.’

‘에휴, 너도 참 답답하다. 다시 돌아간다더니, 그래서 그러냐? 하여간에 새끼, 고지식해서.’

반장이라더니, 문제집을 푸는 행동과 달리 제법 입이 거친 구석이 있다.

하긴, 이 또래 남고생들은 대개 그러겠지. 녀석의 타박을 끝으로 강태오가 책상에 엎드렸다.

진짜 안 친한 건 맞는 모양인데. 의례 해야 할 일만 했다는 듯이 다시 적막이 이어진다.

아, 맞아. 이럴 때가 아니지.

강태오와 옆자리의 반장을 바라보다가 다급하게 교탁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위에 있는 출석부의 페이지를 하나하나 전부 읽어 내렸다.

김… 김… 여깄다! 김경훈. 아직도 문제집을 풀고 있는 반장의 명찰을 살펴봤다.

동일한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곤 아래 적힌 개인 연락처를 외웠다.

이 시기에 오면 반장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혀 있는 내용들을 꼼꼼히 외우곤 다시 엎어져 있는 강태오를 바라봤다.

도대체 넌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거냐. 아까 둘의 대화만 들어도 강태오의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녀석의 얼굴에선 기쁨이란 감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어머니가 걱정돼서 돌아갔던 것뿐이구나.

딩-동-댕-동-

수업을 알리는 벨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강태오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곤 엎어져 있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이템의 효과가 막바지에 달했는지 눈앞으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내 착각이었을까. 현실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에 고개를 든 강태오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강태오, 3년 뒤에 만나자. 아직 어린 녀석에게 나만 기억할 안부 인사를 남겼다.

* * *

“형? 해신이 형?!”

눈을 떴을 땐 당황한 것 같은 강태오가 날 흔들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자세에서 넋을 잃어 놀랐단 얼굴이었다.

“아, 미안하다. 태오야, 뭐 하나만 더 물어보자.”

“…어.”

“그 반장이라는 녀석, 네가 부탁하면 뭐 하나쯤은 들어 줄까?”

“…반장? 갑자기 그건 왜.”

“일단 묻지 말고, 그냥 얘기해 줘.”

“아마, 그렇겠지……? 입은 거칠었어도, 반듯한 놈이었으니까.”

“그럼 됐다.”

영문을 몰라 하는 강태오를 보고 곧바로 서도경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17살 무렵이라면 4년이 채 안 지났으니까 연락처나 집 주소, 둘 중 하나는 같겠단 생각이었다.

[증언해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근데 아직도 이 연락처와 주소를 쓰고 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이 사람, 인적 사항 확인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물어보는 건 태오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은데,

되도록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도경에게서 곧바로 알겠다는 회신이 날아들었다. 그럼 강태오에게도 설명은 해 줘야겠지.

“태오야,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서 대표님이 그 반장이란 녀석의 연락처를 찾아 주실 거야.”

“…뭐? 그게 가능해?”

“불법 루트는 아니야, 인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마도 아닐 거야. 나쁜 짓은 하지 않고 교탁에 놓여 있는 출석부만 훑어보고 온 과거였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강태오에겐 여러 당부를 늘어놨다.

“연락은 반드시 네가 해야 해. 거기서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당연하지. 내가 부탁해 볼게.”

“그리고 그, 반장이 연락처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꼭 학교 다닐 때 직접 들었다고 우겨야 한다? 알았지?”

“…참 나, 불법 아니라며. 도대체 그게 뭐야.”

말을 더듬거리자, 그런 날 본 강태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까진 희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제 원래의 평정심을 되찾은 듯하다.

“뺨, 멍이 많이 진해졌어. 형도 얼른 치료부터 받아.”

“어, 그래야지.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태오야, 힘내라.”

“…나도 난데, 형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를?”

뺨의 멍을 훑어본 강태오가 몸을 돌려 문쪽 방향을 가리켰다.

“다들 분위기 엄청 흉흉하던데. 저거 감당은 할 수 있지?”

“…아, 맞다.”

우리끼리의 시간을 만들겠다고 다소 무리하게 부딪친 아까의 일이 떠오른다. 급한 마음에 다른 녀석들에겐 제대로 된 처신조차 해 놓지 못한 상태였다.

어떡하… 아! 버릇처럼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뺨에 든 멍을 건드려 버렸다.

통증에 크게 소리치니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걱정스러운 얼굴의 멤버들이 들이닥친다.

“신해신!”

“형~!”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봐, 형도 애 좀 써야겠다.”

“하하, 걱정해 줘서 참 고맙네…….”

살벌한 얼굴과 놀란 표정들을 훔쳐보며 강태오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남은 건 서도경의 연락을 기다리며 사건을 무마하는 것뿐이다.

* * *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도경에게 의문의 파일을 하나 전달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클릭해 보자 누군가의 인적 사항이 나타난다.

[서도경]

확인 완료했습니다. 집 주소는 바뀐 것 같았지만,

연락처는 계속 쓰고 있더군요. 참고로 이 사람, 2년 반 전에

해외로 나갔던 것 같습니다. 추정 국가는 미국이니까 시차 맞춰서

연락 넣어 보세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해신 씨

믿어 보겠습니다. 그 뒤 진행된 일들은 전부 보고하세요.

역시 일 처리 하난 끝내준단 말이야. 서도경은 아군으로 삼으면 참 든든한 인물이었다.

조진만을 상대하면서 열받은 탓에 평소보다도 훨씬 적극적이기까지 하다.

서도경에게 받은 연락처는 곧바로 강태오에게 넘어갔다.

메일과 연락처 주소를 받고선 한참을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강태오였다.

학교 폭력같은 도덕적 문제는 무조건 빨리 처리해야만 하는 업계였다.

큰마음 먹고 연락한 강태오에 맞춰서 상대방은 놀랐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 내가 연락처를 가르쳐 줬었어?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새끼, 똑똑하네. 하긴 맨날 엎어져 있던 거 비해서 공부는 꽤 잘했었지. 아침부터 메일 온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미친놈아. 아, 한국은 지금 밤이던가?

“뭐, 그렇지.”

- 무뚝뚝한 것도 똑같네~ 근데 네가 아이돌을 한다고? …허, 진짜잖아? 어쭈, 무대 좀 한다?

스피커폰을 통해 들은 목소리는 과거에서 본 기억과 동일했다. 걸걸하다 못해 거친 말투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반장이었다.

그사이 우리 무대라도 찾아보고 있는지 익숙한 노래가 들리고 있었다.

강태오에게 그 난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 네가 독일로 떠나고 얼마 안 돼서 나도 미국으로 왔거든. 그래서 몰랐어. 데뷔한 것도, 이런 논란이 생긴 것도.

과연, 그랬었군. 간략한 사정을 들은 뒤에는, 강태오보다 더 분개하는 녀석이었다.

괄괄한 만큼 정의감은 투철했던 모양인데. 있는 욕 없는 욕을 섞어 가며 격하게 화를 내 준다.

- 이거 순, 미친놈 아니야? 얘 정말 우리 반이었던 인간 맞아? 이렇게까지 질 나쁜 새끼가 있었나……. 다른 애들은 무슨 증언 안 해 주대?

“…반년 정도밖에 없었던 데다가 내가 얘기를 잘 안 했으니까. 뒤에선 사람 괴롭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뭐.”

- 입 다물고 있던 새끼들 편을 왜 들어 주냐?! 하여간에 생긴 거랑 달리 순해 빠져 가지고. 야, 강태오. 내가 증언해 줄게.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하면 되는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비해서 의욕이 넘치는 태도였다.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해명 글을 올리겠다며 반 사진을 찾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강태오는 오랜만에 듣는 과거의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당시 방황했던 기억들관 상관없다는 듯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회포가 이어진다.

대충 인증할 만한 증거를 찾자마자 바로 글을 올려 주겠단 반장이었다.

그렇게 통화가 끊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인터넷엔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갔다.

일부러 팬들이 많이 한다는 SNS까지 가입해 준 반장이었다. 타래에 타래를 이어 가며 논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적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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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회지 사진) (명찰 사진) (당시 교복 사진)

안녕하세요. 하이사인 강태오랑 같은 반이었던 사람입니다.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우선 강태오는 사람을 괴롭힌 적이 없습니다. 반년 동안 급우로 지냈지만, 워낙 조용해서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학급 회지 사진에서 강태오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 바로 접니다. 임시방편으로 모자이크 처리는 해놨으나 같은 반이었던 녀석들은 제가 누군지 알 겁니다.

강태오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편이긴 했지만, 그 누구한테도 폭언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녀석이었습니다.

되려 다가와서 시비 거는 놈들이 있으면 있었지.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돌을 준비하겠다며 전학을 갔다고 이야기하던데, 그것도 거짓말이어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강태오는 있지도 않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전학을 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족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간 것뿐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길지 않은 학교생활이었고, 낯선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홀로 지내던 녀석입니다. 사춘기를 맞이한 청소년들이 그러듯 강태오도 그냥 평범한 고딩이었습니다.

아이돌 문화를 몰라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저 녀석이 착한 놈이었단 건 제가 인증하겠습니다.

이걸 보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oo고 1-7반 이 새끼들아, 나 성격 더러운 반장이다. 너넨 이걸 보고도 가만히 있냐? 연락 돌리기 전에 제대로 말해라

그리고 헛소문 퍼뜨린 글쓴이. 우리 학교였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넌 나중에 나 좀 보자.

이상으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디 녀석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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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부터 당사자의 성격이 느껴진다. 정말 이 판은 모른다는 듯이 괄괄한 어투의 해명이었다.

그게 도리어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게 된 모양인데, 반장이 올린 글은 커뮤니티를 타고 널리 퍼져 갔다.

- 미친 저거 말투 완전 찐 남자지? 돌판에 몸 담근 사람은 아닌 듯 저 정도면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

- 내가 뭐랬어!! 태오가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ㅠㅠㅠㅠ

- 증거 사진 너무 빼박 아니야? 명찰이랑 교복까지 올렸잖아. 자기 신분도 밝힌 거 보면 진짜여서 그런 듯

- 엥 저 정돈 중고 사이트에서도 구할 수 있지 않나? ㅋㅋㅋ 시녀 누구 하나가 연기하는 걸수도 있는데 너넨 정병들 하루 이틀 보냐

- ㄴㄴ 인증 나왔음 저 사람이랑 같은 반이었다는 사람인데, 쓰니로 추정되는 사람 졸업 전에 유학 갔대. 졸업 앨범이 있으면 이상한 거임.

- 헐 갑자기 신뢰감이 확 생기네 그럼 학폭 논란 전부 구라였던 거야? ㅜㅜㅜ

- 아 근데 나 이런 해명글 첨봐서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

- 우리 태오 맘 고생한 거 너무 속상한데 ㅜㅜㅜㅜ 친구분 너무 또라이같으세여 ㅋㅋㅋㅋㅋㅋㅋ

- 태오랑 다르게 단호하시네요 말투에서부터 쌍남자 기운 느껴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ㅅㅂ 우리 애들이 슈스이긴 한가 보다 온갖 루머가 다 꼬이네

논란이 발생한 지 하루도 안 돼서 급하게 올라간 해명문이었다. 이런 내용이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아웃스타그램 광고 계정들이 해당 게시글을 퍼 날랐다.

[역대급 쿨한 학폭 해명문. jpeg]

[사나이의 우정을 보여준 아이돌. jpeg]

[남고딩들의 해명은 이런 것이다. jpeg]

다소 농담 식의 제목이었지만 우리에겐 좋은 상황이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강태오의 억울함이 알려진 것이다.

이로써 팬들은 팬들대로, 일반인은 일반인대로 진실을 확인했다.

반장의 협박성 멘트에 의한 것인지, 같은 반이던 녀석들의 증언도 이어져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말수가 없고 조용한 편이라서 그럴 만한 녀석은 아니었단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남자 반이었던 탓에 관심이 없으면 없었지, 반에서 일진 노릇을 하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고 알려 준다.

- 와 증언 여기저기서 막 나오네 야 욕했던 애들 다 어디 갔음?

- 이글 아웃스타에서도 장난 아니게 퍼짐 반장님 큰일 해내셨어요

- 저희 태오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

- 태오야 ㅜㅜㅠㅠㅠ 우리 애 마음고생 얼마나 심했을까 다른 사람들도 전부 얘 엄청 순하다고 하던데 그 격할 때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착했던 거야 ㅠㅜㅠㅠ

- 이때다 싶어서 하이사인 싸잡아 학폭돌이니 뭐니 하던데 내가 진짜 다 기억한다

- 확실하지도 않은데 중립을 박아야지;; 인간들 존나 못 됐어

이로써 강태오는 학폭돌이란 오명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보고하고자 방문한 회사였다.

“강태오 씨, 고생 많았습니다. 빠르게 해명된 덕분에 여론도 거의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공식적인 해명 기사도 오늘 중으로 나갈 예정인데… 그 친구분께는 감사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강태오 씨 관련 일로 메일이 하나 들어와서 말이죠.”

서도경의 말에 한지헌이 노트북 모니터를 돌려 보여 줬다.

…저건 뭐지? 보여 준 화면엔 누군가가 보내온 메일이 띄워져 있었다.

“이건 강태오 씨의 허락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아.”

강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 그러곤 동의한다며 작게 끄덕였다.

[…아들에겐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만약 태오가 괜찮다고 해 준다면, 또 회사 분들이 양해만 해 주신다면, 작게나마 강난오의 이름으로 태오와 태오의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신해신 씨는 이걸 함께 보시죠.”

메일을 읽던 내게, 서도경이 외국 것으로 보이는 잡지 한 부를 던져 줬다.

이제야 과거에서 본 기억들과 함께 저 메일의 내용이 전부 이해됐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조용히 강태오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펼쳐진 페이지엔 커다란 아트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Nan o. K] Meister der Tonkunst

난오 강, 강난오. 독일로 떠난 클래식 피아니스트.

저건 바로 여기 있는 강태오의 아버지였다.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난 자식에게 아버지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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