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88화 (187/328)

188화

“비공식적인 미팅이란 거죠?”

“네.”

원래 미팅하던 미팅 룸이 아닌 경영 지원 팀 내부에 있는 작은 별도 공간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서도경은 팔짱을 끼곤 우릴 돌아봤다.

늦은 밤 다급한 연락을 받고 아침 일찍 회사로 넘어온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박재민과 오병은 둘 모두가 마중 나왔겠는데, 오늘은 오병은 단 한 명만이 조용히 움직여서 이상하다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가 서도경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어리둥절해 보이는 멤버들과 함께 진지한 표정의 서도경을 바라봤다.

“저희는 정규 앨범 타이틀이 정해졌다고 들어서 왔는데요.”

“그건 공식 미팅에서 다시 다룰 겁니다. 오늘 할 이야기는 따로 있죠. 한 실장님.”

“네.”

서도경의 손짓에 문가를 가리듯이 지키고 서 있던 한지헌이 다가왔다. 근래들어 뭘 하는 지 통 안 보이더니 서도경의 비밀 임무라도 하고 있었나 보다.

손에 들린 두툼한 서류들이 우리 앞으로 하나씩 배부됐다. 거기엔 뭔가 빽빽한 글들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우선 이건 컴백 전 스케줄 보고입니다. 원래라면 정식 루트로 넘기려고 했는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죠. 이번엔 과감하게 생략할 예정이라 이렇게 직접 말하게 됐습니다.”

서도경은 우리 몰래 꽤 치열한 암투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2배는 더 날카로운 얼굴로 서류들을 넘겨 보며 설명해 줬다.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지금 사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서요.”

손을 들어 서도경에게 질문하니 옆에 있던 이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쟤도 이걸 물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비밀리에 만들어진 자리라면 거리낄 게 없었다.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당사자 입에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도 앞일 좀 대비해 보자. 정확하게 회사가 원하는 바를 캐치하고 싶었다.

“다들 어렴풋이는 알고 있겠지만, 회사 사정이란 게 다 그렇습니다. 잘된 계열사는 자기네로 흡수해서 편하게 세력을 키우고 싶어 하죠. 짧게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높은 분들한테 제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는 거요. 하지만 명목이 없으니 바로 치우진 못하겠고, 여러분을 건드리면서 제 지반도 흔들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러면 저희가 서 대표님의 약점이자 목숨줄 같은 게 된 건가요?”

“저, 정원이 형.”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정원이 거침없이 제 의견을 말했다. 근처에 있던 문채민은 당황해서 이정원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서도경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로 대수로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자리를 만든 것부터 솔직하게 패를 까자는 의미 같았으니까 말이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배를 탄 거, 이 정돈 다 얘기할 마음이었으니까요. 평범한 회사가 아니어서 미안한데, 여러분이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날카로운 눈매를 누그러뜨린 서도경이 턱을 괴며 멤버들을 훑어봤다.

“솔직히 여러분도 보셨잖아요? 본사 인력이 내려오면 무조건 좋을 것 같습니까?”

하여간에 성격하고는……. 저건 분명 조진만의 이야기였다. 본사에서 온 인력으로 위쪽이 교체된다 한들 우리가 편할 거란 보장이 없단 뜻이었다.

사실 저게 정답이었다. 서도경이 대표로 있는 회사만큼 좋은 엔터테인먼트도 드물었다.

이래저래 들었던 연예계 사정에 비하면 우리가 꽃밭이다 못해 비단길이긴 했었다.

권혜성이나 이정원, 이유준같이 소속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혔던 멤버들은 공감하는 얼굴이었다. 문채민도 조금 겁을 먹은 것 같긴 했지만, 응당 맞는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뭐가 좀 들리는 게 하나 있는데. 윗분들이 제가 잘 버티는 게 영 아니꼬왔나 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조만간 여러분도 조금 고생할 것 같습니다.”

“네?”

“이건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일단 첫 정규 앨범인 만큼 저희 쪽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일단 방해되는 요건들은 최대한 제 선에서 커트 쳐 보겠는데.”

커피를 홀짝인 서도경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한지헌에게 받은 서류를 넘겼다.

“최대한 빨리 당겨 봤는데도 컴백은 6월이나 되어야 할 것 같네요. 정규인 탓에 준비할 게 많아서 이 건은 미리 양해를 구하죠. 그렇다고 해서 상반기를 통으로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자, 그럼 권혜성 씨, 가장 근처에 있는 스케줄을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네? 네! 어, 그러니까… 엥? ‘쉬지 말고 달려라’?”

권혜성의 외침에 스케줄표 상단에 적힌 프로그램명을 확인했다. ‘쉬지 말고 달려라.’ 공중파에서 황금 시간대를 유지하는 장수 예능이었다.

대표 MC 넷을 제외하면 매주 새로운 게스트들로 구성을 짜는 독한 제작진이었지. 내가 스태프로 일하던 시기에도 들을 수 있던 내용이었다.

“거기 출연진 보이시죠?”

출연진이 왜……. 어라? 적혀 있는 내용에 눈을 비볐다. 거기에 나온 명단에는 멤버 셋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출연: 해신(하이사인), 혜성(하이사인), 채민(하이사인)]

“어? 나도야?”

“형, 나도 있는데…….”

당황한 나와 문채민 뒤로 서도경이 설명해 줬다.

“첫 개별 활동입니다. 슬슬 대중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마침 좋은 기회가 왔길래 프로그램 측에서 요청하던 세 분으로 확정이 났습니다. 겸사겸사 외부의 적도 확인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외부의 적이라ㄴ…….”

앞의 내용은 알겠는데 뒤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채민과 시선을 맞추곤 서류를 확인하니 거기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출연: …김환준(디레스트), 션(디레스트)]

디레스트? 얘네도 여기 나오는 거야?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은 동시에 살펴봐야죠. 뭐, 그게 아니더라도 미리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잖아요?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서도경의 말에 머리를 짚었다. 어째 솔직하게 말해 주나 싶더니, 다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거였다.

* * *

‘쉬지 말고 달려라’의 녹화 날이었다. 다른 멤버들의 신신당부 아래 첫 공중파 예능을 촬영하러 왔다.

대기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바뀐 환경이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문채민과 권혜성이 보인다.

여기 PD 성향이 어떻다고 했더라. 뭐라도 힌트를 받아 볼까 싶어서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낯선 이름 석 자만으로는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도착해 있을 출연진들을 만나 보기 위함이었다.

똑똑- 가장 연차가 높은 메인 MC들의 대기실이었다. 장수 프로그램답게 국민적인 호감도가 높은 개그맨과 탤런트의 무리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인사드리러 찾아뵀습니다.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권혜성과 문채민과 소리 높여 인사하니 앉아 있던 사람 중 둘이 몸을 일으켰다.

“어? 어머! 나 처음 봐~”

“아~ 여기가 그 친구들이야? 반가워요!”

게스트로 다양한 계열의 연예인들을 보면서 아이돌도 심심치 않게 봤는지, 구호성 인사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젊은 친구들이 많네. 얼굴들이 어려 보이는데, 혹시 미성년자도 있어요?”

“아, 네!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의 막내, 채민입니다. 올해 열아홉 됐습니다.”

“헉! 열 아홉? 그럼… ○○년생?”

“네!”

“…나, 그때 23살이었는데.”

“조용히 해. 난 개그맨 콘테스트에서 상 탔을 때니까.”

긴장한 것치곤 자기의 특징을 살려 적당히 분위기를 치고 빼는 문채민이었다. 영 자신 없다더니, 그럭저럭 버티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권혜성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유쾌하고 밝은 캐릭터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중이었다. 저번 앨범까지 전달하며 자체 PR을 이어 갔다.

“음, 오늘 벌써 CD 두 개째네? 이따 집 가면서 들어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두 개째? 디레스트가 먼저 왔다 갔나 보군. MC의 말에 테이블을 쳐다보자 제법 두꺼운 앨범의 패키지가 하나 보였다. 얼핏 보이는 영문 스펠링 ‘D’가 내 예측을 확신으로 바꿔 줬다.

그렇게 적당히 잘 부탁드린다는 아부와 함께 다음 대기실로 이동했다. 당일 녹화의 컨셉과 포맷도 사전 공지해 주지 않는 이 프로그램에선 MC 줄을 잘 타야만 승리로 갈 수 있었다.

…잠깐, 승리? 앞서 걷고 있는 권혜성과 문채민을 보니 떠올랐다. 우린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야, 얘들아……. 너희 생각해 봤어?”

“엥? 뭐를?”

“…왜 우리 셋이 뽑혀 나왔는지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까, 진짜 왜 하필 우리지?”

문채민도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내가 아닌 윤명이 들어와 있었다면 적당히 어리고 혈기 넘치는 놈들 조합이라고 보겠는데.

예능에 잘 맞는 유쾌한 권혜성에, 미묘하게 독설을 날리는 경향이 있는 막내 문채민, 거기다 팀의 리더인 나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마 오늘 포맷에 맞춘 걸걸요?”

“……!”

말문이 막힌 멤버들 사이로 낮은 목소리 하나 끼어들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보니 코너 너머에서 김환준과 디레스트의 멤버가 나타났다.

먼저 대기실을 돌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복도 한가운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형.”

“하핫,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내 뒤로 다가오는 김환준을 보며 권혜성이 웃는 얼굴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문채민도 슬그머니 걸어와선 옆자리에 붙듯 인사를 했다.

다들 교육이 잘되어 있군. 지금까지 내 조언이 효과를 보이는 듯하다.

“그렇게 뭉쳐서 경계하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난 중심부터 치는 스타일이라서요.”

김환준의 시선이 내게 박혔다. 그와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어딜 봐서 내가 중심이냐. 다른 건 모르겠지만 보는 눈은 없는 인간 같았다.

“형도 적당히 좀 해.”

“먼저 들어가 있을래? 여기랑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아, 난 모르겠다~ 마음대로 하셔~”

우릴 살피던 디레스트의 멤버는 고개를 내젓더니 여길 향해 까딱였다. 그러곤 김환준을 등진 채 자기네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우린 여기 3회 차거든요. 그래서 대충은 알고 있어요. 리스트 보면서 의외의 조합이다 싶었는데, 아전체 때 생각하면 오늘은 뭘 할지 유추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전체요?”

“일단 잘 뛰면 좋아하는 피디님이라서. 왜, 그 권혜성 씨는 나랑 60M 박빙이었잖아요? 신해신 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렇죠? 아전체 뉴 계주 챔피언?”

“…아, 예.”

진짜 그런 이유로 선발된 건가. 김환준은 경계가 됐지만, 오늘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도 중요했다.

“그럼, 난 왜 뽑힌 거야.”

“그러게, 문채민, 너도 어디서 뛰었어?!”

“혜성이 형, 형이 제일 잘 알잖아. 난 앉아서 게임만 했어.”

문채민과 권혜성의 이야기에 김환준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다른 건 다 이해하겠는데, 그쪽 막내가 영 걸린단 말이죠. 뭐,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칩시다. 맞다, 신해신 씨는 나랑 얘기 좀 하지 않을래요?”

김환준의 자연스러운 주제 돌림에 권혜성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지 말라고? 문채민도 이유준에게 무슨 당부를 들었는지 내 셔츠를 잡아 쥔 채 속삭였다.

“그냥 대기실 돌아야 한다고 말하고 빠지자.”

사실 그게 좋긴 하겠는데. 가만히 우릴 바라보고 있는 김환준이 거슬렸다. 게다가 서도경의 말도 떠오르는데. 분명 저번에 외부의 적도 살펴보라고 말했다.

일단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잃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간절해 보이는 녀석들의 어깨를 잡은 채 흔쾌히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래요. 대신 얘네는 먼저 대기실로 보내도 될까요?”

“물론이죠.”

“형…!”

“난 몰라, 유준이 형한테 혼나도 알아서 해.”

다급해 보이는 권혜성과 체념했다는 얼굴의 문채민이었다. 미안하다. 저놈 정체 좀 확인해 보고 갈게. 이번 기회에 놈의 의도를 전부 파악해 보자고 다짐했다.

* * *

“그래서, 하실 말씀이란 게 뭔가요.”

“…음, 좀 변했나?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말이야.”

“됐으니까 본론부터 말해 주세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비상구 계단이었다. 창가에 기대서 김환준을 바라보니 입가를 가린 채 신기하단 표정을 짓는다.

“아, 뭔가 했더니 좀 단단해졌네.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마음이 강해졌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놈과 MXP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나온 거였는데 먼저 선수를 쳐 버린다.

그나저나 김환준 저 자식, 도대체 정체가 뭐야? 쟤가 말한 내부 문제란 건 조진만을 말하는 거였다.

“다 방법이 있죠. 음, 너무 밝혔나? 뭐 뒷수습은 내 몫이 아니라서.”

“계속 이런 식으로 구실거면, 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지원겸이랑 어울려서 그래요? 성격 되게 급해졌네.”

이대로 있다가는 말릴 거란 생각에 계단으로 발걸음을 돌린 찰나였다. 등 뒤에서 지원겸의 이름이 나오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김환준을 바라봤다.

“그럼 대답해 주세요. 제가 물어보는 것 세 가지요.”

“이렇게 나오시겠다?”

“얻는 게 없으면 굳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멤버들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먹혀라, 먹혀라. 담담한 안색을 유지했지만, 속으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대놓고 낚는 낚시질에 대어가 걸릴지는 미지수였다.

“하아,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인데. 쯧, 그래요. 지금까지 놀린 게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 거기도 어울리는 재미가 있겠지. 물어봐요, 답해 줄게요.”

됐다! 지금 김환준은 조금 어이없단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판을 깔아 준 건 김환준 바로 본인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저 사람,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나랑 놀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방식이 그리 건전하지 못해서 그렇지, 즐기고 있단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김환준에게 대형 딜을 걸었다. 이건 나랑 놀고 싶으면 거기도 뭔가를 내놓아야 할 거란 이야기였다.

“그새 나에 대해 좀 파악했나 보네요?”

그럼, 잘 파악했지. 김환준은 회사의 말에 그리 잘 따르는 모범생 타입이 아니었다.

첫인상이 조용하고 미스터리 해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정석인 줄 알았는데. 한 번씩 튀어 나가는 언행들을 보아하니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불량아 재질이었다.

지금 이 자리만 해도 본인의 독단적인 의견이었겠지. 먼저 돌아간다며 체념한 표정을 짓던 디레스트의 멤버가 떠오른다.

“첫 번째, 분명 우리한테 악의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럼 진짜 회사가 시켜서 도구 노릇을 하며 괴롭히는 겁니까?”

“처음부터 너무 돌직구 아니에요? 오, 얼굴 보니까 제대로 각오한 모양이네. 이번엔 내가 말렸어요. 대답해 줄게요.”

나를 보고 양손을 들어 흔든 김환준이었다.

“맞아요. 나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레스트 전 멤버가 하이사인이랑 메이터스를 싫어하진 않아요. 그쪽들 입장에선 우리가 못된 놈처럼 보인단 건 알겠는데. 내가 말했죠? 나도 직장인이라고. 흥미 가진 건 인정 할게요. 조승화랑 박정문 그리고 회사가 얘기한 걸 살짝 엿들은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뭐 하는 인간이길래 이렇게 미움을 받나 싶어서 궁금했어요. 내가 스턴즈를 도와줬다기보다는, 회사가 시킨 걸 얌전히 따른 것도 있고, 난처하단 얼굴을 하고서 죄다 빠져나가는 그쪽 구경이 재밌었던 것도 있고. 음, 이걸로 답변은 충분했죠?”

어이가 없었다. 김환준은 자신이 순수한 방관자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우릴 괴롭히거나 욕설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않나? 묘한 기색을 뿜어내며 최종 보스인 것처럼 행동하던 과거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하나둘씩 퍼즐을 맞춰 보니 거짓이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그, 그럼 두 번째. MXP는 왜 그러는 건데요? 굳이 엔필름과 부딪치면서까지 이러는 목적이 뭐냐고요.”

말리기 전에 질문을 던진다는 게 그만 당황한 티를 내 버렸다. 하지만 김환준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이번 역시 성실하게 대답해 주며 지금까지 궁금해하던 점들을 모두 알려 줬다.

“거기도 생각보다 단순해요. 업계 죽이기죠. 아, 참고로 그쪽들이 첫 피해자도 아닙니다. 지원겸한테 아직 못 들었나? 인클루도 우리한테 꽤 당했을 텐데.”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할 뿐이다.

“엔터란 게 다 영역 싸움이거든요. 자사에서 상품이 하나 나오면, 다른 경쟁사는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법이죠. 특히 그쪽네, 엔필름이라는 대형 기업이 버티고 있잖아요? 아직은 완전히 한편이 아닌 것 같으니까, 더 커져서 영향을 끼치기 전에 눌러야겠단 생각이 강했을 거예요. 심지어 새로 론칭한 스턴즈랑 기간까지 겹쳐 버렸으니, 포커스가 전부 쏠릴 수밖에요. 그렇다고 해서 억울해할 건 없어요. 하이사인 전으로도 몇 그룹이나 그랬고, 또 초장 싸움에선 메이터스가 이겼잖아요?”

“그걸 이겼다고 하는 것도 좀…….”

“이긴 게 맞죠. 내 후배지만 스턴즈 걔넨 당분간 컴백하기 글렀으니까요. 투자한 게 있어서 버리진 않겠는데. 공격 패로의 가치는 바닥이라고 판명 났거든요.”

아,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어째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 줄 줄이야.

김환준에 대한 적의가 팍 사그라든다. 그걸 노리고 말한 거라면 통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얼른 필요한 거나 얻어서 가야지. 녹화도 들어가기 전에 정신력이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 질문만 하고 갈게요.”

“음? 벌써 끝이에요? 한참 재밌는데.”

난 재미없었다. 이 자리는 적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자 나온 곳일 뿐이었다.

“계속 할 겁니까? 그 도구인지 뭔지 하는 짓거리.”

“…예리하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면 솔직하게 가 보자. 예전부터 직감적으로 느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김환준이 MXP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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