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하이사인 다이어리가 종료된 이후, 영상 끝에 클립이 남아 있었다. 미방분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웅장한 BGM이 흐르는 장면이었다.
흑백 처리가 된 회색 건물 외벽으론 얼기설기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마치 미로처럼 복잡해 보이는 공간 속에서 측면을 보인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보이는 곳의 문이 열리자 그 중앙에는 화려한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완벽한 쓰리피스의 수트를 입고 있던 남자가 뒷모습을 보인 채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한쪽 팔은 턱에 괴며 권태롭다는 듯한 입꼬리를 보인 남자는 화면 구석에서 누군가가 건네준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팔로는 작은 테이블 위에 있던 사각형의 판을 매만진다. 가로, 세로 8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흑백의 체스판이었다.
남자는 쥐고 있던 장기 말을 하나 들어 체스판 위에 올려 두었다.
탁- 그와 동시에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던 세상이 색을 되찾았다. 우중충한 하늘과 먹구름이 낀 먼 광경을 보며 남자가 차를 마셨다.
노이즈가 낀 것 같은 효과 뒤로 철제와 벽돌로 이루어진 복잡한 형상의 건물이 나타났다.
사이사이 하관만이 드러난 테크 웨어 복장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코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제스처만으로도 그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이 몸을 돌려 계단과 건물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옥상의 남자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끔하게 드러난 입꼬리는 위쪽을 향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끝으로 빠른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까맣게 점멸된 화면이 떠오른 뒤 거친 텍스처의 폰트가 올라갔다.
‘RULE(도취)’
05.03
치직- 치직- 치지직-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이어지며 모든 영상이 종료되었다.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맞춰 하이사인의 공식 계정으로도 이 영상이 올라갔다.
팬들은 이제야 해당 영상이 정규 앨범 타이틀에 대한 대형 떡밥임을 눈치챘다.
- 내가 지금 뭘 본거임???
- 방금까지 이 깍 깨문 좀비가든 보다가 ? 이 상태됨
- 엄마 나 웃다가 멈췄어
첫 정규 앨범 타이틀 소식에 하이눈들은 SNS에 올라간 사진을 분석했다. 영상 이후 바로 추가 업로드된 이미지였다.
체스판 위 쓰러져 있는 장기 말들을 두고 가운데 킹의 포지션이 올라가 있었다. 검은 배경 위로 말을 올린 것 같은 손이 올라가 있었으며, 그 뒤에는 어지럽게 꼬여 있는 미로가 보였다.
사전에 올라간 영상을 비롯하여, 하이사인의 세계관을 알고 있던 팬들은 이것 역시 메이터스가 깔아 놓은 복선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센터로 추정되는 멤버와 더불어 이번 곡의 컨셉에 대해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이사인 첫 정규 떴다!!! /스포성발언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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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컨보다가 입틀막한 사람 여기요
기다리기엔 성격 급한 K걸
티위터에 있는 해석 다 긁어옴
스포성 발언 있으니까 싫은 하이눈들은 뒤로가기 눌러줘
.
.
.
일단 센터 뒷구르기 하면서 봐도 정원이 ㅋㅋㅋㅋㅋ
Night(한밤의 동화) 뮤비에서 보여준 개인 소품 여기서 내보낸 거 보고
걍 확신했다 판도라 때 다들 못 맞추니까 쉽게 깔아준 것 같아 ㅜㅜ
일단 센터는 이가든으로 보고 나머지 떡밥은 뭘까
아무래도 체스판 나오고 미로 깔린 거 보면 이 세계의 왕이 아닌가 싶어
영상 중간에 테크웨어 입은 남자들이 막 뛰어다녔지?
……ㅎ 전부 우리 애들이더라. 정원이가 얘네를 가둔 게 아닐까?
일단 뮤비 오픈하는 것 더 봐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에도 변태 메이터스가 사고쳤다는 거
얼른 5월 되게 해주세요 ㅠㅜㅠㅜㅠㅜㅠ
여담으로 혹시 얼마 전에 애들 쉬말달 체스레이스 보낸 것도
전부 떡밥이었습니까 메이터스……?
이게 정답이라면 사내 오타쿠잘알이 있는 거 확실함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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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존나 짜릿
- 얘넨 여러 컨셉 다루면서도 세계관 전부 이어져있는게 리얼 소름인 듯…
- 아니 초반부터 치트키썼잖아 ㅋㅋㅋㅋㅋ 센터멤 자아성찰로 깔아버리니 뭘 해도 연결되지 ㅋㅋㅋㅋㅋㅋㅋ
- 디스토피아 광인 테크웨어에서 한번 넘어가고 체스에서 두 번 넘어 감 ㅠㅜㅠㅜㅠㅜㅠㅠ
- 언제 5월 됨? ㅠ
- 오타쿠 회사 짱
- 센터 곡 줄 때 센터 치켜세우는 거 존나 확실하네 ㅋㅋㅋㅋㅋㅋ 일단 정원이가 킹이라고? 오케이 먹고 본다
이어진 팬들의 호응 속에서 하이사인 첫 정규 타이틀의 뮤비가 공개됐다. 다소 기습적이던 티저 공개와 같이 공격적인 방향의 컴백이었다.
* * *
‘RULE(도취)’
치지지직- 잘게 흔들리는 폰트 아래로 회색의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영상에선 외벽에 연결된 계단이 빠르게 지나갔다.
순식간에 뒤바뀐 장면 너머로 어지럽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 있는 멤버들이 나타났다. 여러 분할로 이루어진 화면이 나오고 그와 동시에 격한 비트의 음악이 이어졌다.
Doo- doo do- doo- do-
옥상 의자에 앉아 있던 이정원이 몸을 일으켰다. 양손에는 찻잔과 그 받침대를 들고 있었다. 뚜벅뚜벅- 구둣발을 옮기며 펜스가 없는 건물의 외곽으로 이동했다.
이정원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멤버들이 갇힌 걸로 추정되는 미로였다.
복잡해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며 이정원의 입이 열렸다.
그때 사이키델릭 한 효과음이 흐르며 온 세상이 색을 되찾았다. 창백한 얼굴에 대비되어 붉은 입술을 보인 이정원은 터지는 비트에 맞춰 첫 소절을 불렀다.
- 방심하는 순간 압도해
이건 자기도취
Sick burn now
그러곤 곧바로 등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체스판의 말을 하나 들었다.
차가 담겨 있는 찻잔 위에 올린 채 재밌다는 듯이 퐁당 담가 버린다.
- 깨달아 Fake check
돌아봐 Fake check
이지 잃고 Go away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습을 보인 건 미로 속에 갇혀 있던 이유준이었다. 쏟아진 물에 흠뻑 젖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땅을 달리듯이 박차고 나선 이유준이었다. 멜로디컬 하기보단 라임이 갖춰진 파트를 불렀다.
벽을 넘어가는 듯한 무빙이 이어지며 다른 곳에 갇혀 있는 신해신이 등장했다. 여긴 철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신해신이 하늘을 향해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 Wow 착각에 빠져들었어
판단한 실체의 정원
이것도 가짜 저것도 가짜
승리자인 줄 알았던 난
수위에 잠긴 모형
그 뒤론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정원이 미소를 지었다. 체스판 위의 장기 말들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재밌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상은 이정원의 손짓에 따라 난관에 부딪친 멤버들 시점으로 변했다. 좁은 벽에 갇혀 있던 윤명이 양손을 들어 사방의 벽을 내려쳤다.
벽에서 튀어 오른 돌가루가 느린 모션으로 번져 나갔다. 윤명은 그걸 보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앞으로 전진 Go step
고장난 병정처럼 Non stoper
좌우 위아래 사방이
거꾸로 돌아 Bing Bang
다시 바뀐 화면에는 주머니에 있던 반장갑을 끼고 있는 강태오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벽 앞에 쪼그려 앉더니 한 곳을 두드려 보곤 손을 멈춘다.
- 수천 번 되물어서야 이건 내 자아도취
에라 모르겠다 Give up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발로 그 벽을 걷어찼다. 강한 충격에 벽이 두어 번 흔들렸다. 그걸 확인한 강태오가 이를 악물어 몇 차례 같은 곳을 더 가격했다.
흩날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후로 벽의 한가운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라고 소리치는 시늉을 한 강태오의 뒤로 어두운 공간에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문채민과 권혜성이 등장했다.
- Rlue을 깨부숴
심판은 개나 줘
- 이게 내 게임의 법칙
너는 알아서 머피의 법칙
문채민이 랩이 아닌 파트 한 구절을 부르자 뒤에 있던 권혜성이 이어 불렀다.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살핀 그 둘은 어둠 속에서 가는 빛이 퍼져가는 걸 확인했다. 그 뒤 무언의 신호에 맞춰 빛의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다시 강태오의 시점이 되었다. 여기서 강태오는 주머니를 뒤적여 가지고 있던 자그만 구체를 꺼내 들었다. 꼭지에 달린 핀을 뽑고선 멀리 떨어져 아까의 그 벽을 향해 내던진다.
쾅- 이어지는 폭음에 맞춰 사방으론 자욱한 흙먼지가 흩날렸다. 우수수 쏟아진 파편 너머로는 멀찍이 엎어져 있던 권혜성과 문채민이 보였다.
그 둘은 자신들에게 튄 돌가루를 털어 내며 몸을 일으키곤 강태오를 바라봤다. 무너진 외벽 너머로 한쪽 발을 올린 채 문채민과 권혜성에게 손을 뻗고 있던 강태오였다.
- 그냥 전진 유일한 반항
이기지 못할 바엔
- Just 망치는 판 Sweg
- 정정당당? I don‘t think so
알려 주지 않았잖아 비겁한 태도
- 너의 Miss choice 인생은 실전
각자 한 파트씩 부르기가 이어진 뒤에는 맞춘 것처럼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셋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엉망이 된 복장이었음에도 위풍당당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그때, 사이키델릭 한 음성이 섞이며 비트 위로 무거운 드럼 소리가 이어졌다. 보다 화려해진 퓨처 베이스의 전개가 이어졌다.
풍성해진 음율에 대비되어 가장 높은 지대에 있던 이정원이 표정을 구겼다.
이정원이 체스판 위에 있던 킹을 잡으려 한 순간, 단체 안무가 시작되었다.
처음 입고 있던 수트와 달리 멤버들과 같은 테크웨어 복장의 이정원이었다. 모형 정원으로 이루어진 세트 한가운데에서 고음의 싸비를 불렀다.
피치가 큰 편이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 깨달아 Fake check
돌아봐 Fake check
이지 잃고 Go away
멤버들을 비추던 카메라 무빙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위를 가리켰다. 가장 높은 곳에서 멤버들이 미로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광경을 보여 줬다.
서 있던 스테이지의 바닥은 좌우가 여덟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이었다. 검정색과 흰색으로 얽혀 있는 사각형 속에선 이정원을 가운데에 둔 멤버들이 웃었다.
바뀐 장면에서 철제로 이루어진 계단 위에 있던 신해신이 난간 위로 몸을 올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아래편엔 단체 군무에서 보였던 것처럼 테크 웨어를 입은 이정원이 서 있었다.
- 수단을 잘못 골랐어
이용 가치가 없는 선수
그 자리는 역시 내 것
흐르는 간주에 맞춰 마지막 가사를 내뱉고는 고개를 내젓는 이정원을 무시한 채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추락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신해신은 전혀 다른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그건 아까 전 윤명이 홀로 갇혀 있던 미로의 암벽 위였다.
3m는 될 법한 두꺼운 콘크리트 덩어리 위에서 윤명을 내려다본 신해신이 손을 뻗었다.
- 착각은 뒤집으면 그만
판단한 실체의 모형 정원
- 이것도 가짜 저것도 가짜
가짜를 진짜로 만들면 진짜
벽에 갇혀 있던 윤명이 신해신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윤명을 감싸고 있던 벽들이 허물어져 내렸다. 도미노처럼 쓰러진 옹벽 가운데에 서 있던 윤명이 몸을 돌렸다.
어느덧 신해신은 그런 윤명의 곁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계단 위에 있던 인물은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곤 자리에서 뛰어 내려왔다. 거센 숨을 삼키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은 이유준이었다.
이유준은 부서진 세상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유쾌하다는 듯이 폭소했다.
- 승리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우린
이미 전부 수위에 잠긴 모형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먼발치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강태오와 권혜성 그리고 문채민을 발견했다. 셋의 만남이 이뤄짐과 동시에 미로의 중앙에 있던 이정원이 잡혀 나왔다.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이정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센 모래바람이 휘날리며 멤버들의 단체 군무가 이뤄졌다.
이유준과 문채민의 주고받기식 랩이 이어지며 등 뒤에 서 있던 멤버들이 발을 올려 찼다. 둥글게 돌아가는 장면 속에선 칼같은 박자의 안무가 연결되고 있었다.
- 그냥 전진 유일한 반항
이기지 못할 바엔
Just 망치는 판 Sweg
- 정정당당? I don‘t think so
알려 주지 않았잖아 비겁한 태도
너의 Miss choice 인생은 실전
다시 팀에 합류한 이유준과 문채민을 두고 윤명과 신해신이 화음을 쌓아 갔다. 그 가운데에 있던 이정원은 맑은 미성의 고음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 깨달아 Fake check
돌아봐 Fake check
이지 잃고 Go away
어느덧 구름이 낀 하늘 사이론 한 줄기의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둡고 침침하던 미로와 등 뒤에 있던 흑백의 체스 말들은 천천히 산화되어 가고 있었다.
사방을 울리는 진동에도 멤버들은 태연하게 안무를 췄다.
쓰러지는 세계관 속에서 이정원이 졌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 돌진 또는 행진
죄다 망치길 그게 내 특징
부서진 건물과 철제 조각 사이 폐허 같은 풍경 속엔 7명의 남자만이 서 있었다.
다시 바뀐 화면은 이정원이 처음 등장한 옥상의 의자와 테이블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체스판과 쓰러져 있던 모형 말들은 모두 깨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점점 꺼져 가는 음악 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이정원의 마지막 파트가 이어졌다.
- 자기도취 아니 자아도취
뒤엎으면 이건 그냥 승리 도취
휘잉-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며 무너진 잔해가 포커스 됐다.
검은 먹구름으로 자욱했던 하늘에선 여러 줄기의 빛이 쏟아지며 희망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이사인의 첫 정규 타이틀 ‘RULE(도취)’의 MV가 모두 공개됐다.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못해 온라인을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