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스케줄이 종료된 이후 회사로 퇴근했다. 밴 안에서까진 시끌벅적하던 멤버들도 회사 인근에 도착해선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몰래 서도경이 있을 대표실까지 올라갔다. 노크하지 않았음에도 오병은이 연락을 넣어 놨는지 타이밍에 맞춰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안엔 한지헌과 서도경이 있었다. 저번에 봤던 얼굴과 다르게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걸 본 권혜성은 기겁했다는 듯이 내 어깨를 찔렀다.
“형, 나만 지금 눈치 보여?”
“…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앉아…….”
“윤명, 넌 여기서 내 편을 들어 주지 못하고.”
“형들, 됐으니까 중요한 것부터 해결하자.”
태연한 얼굴로 스쳐 지나가는 이정원과 이유준을 보며 문채민이 입을 열었다. 한숨을 내쉬며 따라 앉자 상석에 앉아 있던 서도경이 다리를 꼬았다.
거기서 이번 사건에는 서도경이 깊게 연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물어보세요.”
“너부터 할래?”
“아니, 난 머리 좀 정리할게. 너부터 해.”
팔꿈치로 나를 가리키던 이정원이 작게 손을 올리며 질문했다. 어제부터 얌전히 있다 싶었더니, 참을성이 한계치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정말 기사대로 되는 겁니까?”
“어떤 기사요?”
“디레스트 …선배님들이요.”
그래도 대표 앞이라고 꾸역꾸역 사회생활을 하는 이정원이었다. 짧은 공백 너머 선배란 단어를 들은 서도경이 고개를 숙이곤 웃는다.
“네, 맞습니다. 기사로는 상의 혹은 접근 정도라고 나왔는데, 사실 계약은 거의 완료 상태입니다.”
“허억……!”
“…대박.”
“그럼 우리 진짜 같은 회사 되는 거야?”
“그러게…….”
권혜성이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자, 표정만은 태연하던 윤명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문채민과 이유준 역시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강태오는 아까부터 말없이 앉아만 있었는데, 눈을 껌뻑이는 태도를 보아하니 너무 몰라서 그러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간략하고 시원하게 사실을 밝혀 줄 줄은 몰랐기에 이정원 역시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서도경의 계획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정원과는 바통 터치 해 정리해 놓은 리스트를 꺼냈다.
“도대체 언제 거기랑 접촉하신, 아니 그 전에 거기는 저희 편이긴 한가요? 또 조 이사님 내외랑 엔필름 쪽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 게 많습니다.”
“흐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접촉한 지는 꽤 됐습니다. 올해 초부터니 5개월은 훌쩍 넘었네요. 참고로 먼저 연락을 넣은 건 제가 아니라 디레스트 측입니다. 정확히는 김환준 씨죠.”
“…김환준이ㅇ, 아니, 김환준 선배님이요?”
“역시 친한가 보네요? 거기서도 신해신 씨를 편하게 부르더니. 계약 만료가 다가오는데 MXP와는 재계약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견제해 오던 제게 이런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시원하게 대답하더군요. 손을 잡잡니다. 그래서 저도 허락했죠.”
“…그게 그렇게 나올 일이…….”
서도경의 쿨하다 못해 간결한 답변에 강태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내다가 마는 걸 보니 저기도 제법 암담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짚는 행동에 나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싶어졌다. 그런 내 속도 모르는지 서도경은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여러분께는 조금 죄송한 일인데, 이건 어떻게 보면 찬스거든요. 귀찮게 구는 주체는 디레스트가 아닌 MXP지 않았나요? 그럼 거기가 가장 크게 휘두르는 무기를 뺏어야죠. 하물며 우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곳입니다. 그걸 허락하지 않으면 바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사실 서도경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멤버들도 어이없어 하면서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맞아, 저 사람은 기업인이지, 우리에게 봉사 활동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회사의 득과 실을 따져서 유리한 방향을 만들어 내는 게 최선이었다.
“저희 편이란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신하기엔 그쪽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요. 아마 본인들이 가장 잘 알 겁니다. 자, 일단 디레스트 건은 여기까지로 하고. 회사쪽 흐름도 질문했었죠? 여기도 그렇게 자세히 말해 줄 것까진 없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어조의 서도경이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댔다. 조 이사네 미꾸라지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이정원이 그런 서도경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한동안은 거기도 잠잠할 겁니다. 제가 한 건 해냈으니까요.”
“네? 형들, 그게 무슨 소리야?”
“쉿.”
권혜성이 두리번거리자 이유준이 손가락을 붙여 입에 댔다. 저건 쉽게 말하자면 디레스트 건을 이용하여 서도경이 제 입지를 다졌단 뜻이었다.
“아하, 그런 거였네요.”
“…흐음, 한동안은 조용하려나. 그럼 난 상관없어.”
“그렇게 쉽게 말할 건 아니지 않아?”
이유준이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원도 이 답변에 얻은 것이 있어 그랬는지 알겠다는 듯 받아들였다. 우리 중 가장 정상인의 마인드에 가깝던 강태오만이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해 공감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말이다.
디레스트는 MXP의 주된 수입원일 정도로 벌이가 적지 않은 선배 그룹이었다. 국내의 수요를 넘어서선 해외에선 밀리언 셀러를 우습게 해내는, 규모가 큰 아이돌이란 의미였다.
그런 디레스트가 신생이나 다름없는 메이터스로 영입되었다고 말했다. 엔필름의 입장에선 이걸 성사시킨 서도경에게 태클을 걸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여기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이득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사내에 있는 조진만을 압박할 수 있다는 거다. 엔필름의 방조 아래에서 회사에 간섭하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일행이었다. 그런데 서도경이 한동안은 엔필름의 손길을 받지 못할 정도의 큰 건을 하나 해냈다.
이렇게 되면 능력 없이 뒤쪽 힘으로 설치던 저기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정원 역시 열받게 굴던 낙하산들이 조용할 걸 알게 되어 받아들인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김환준은 속이 시커매서 그렇지, 적이 아니라면 크게 상관하지 않을 부류였다.
지원겸도 어이가 없어 하는 점만 제외하면 나를 피해자로 봐 주는 것 같았으니까.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만 하면, 우리 쪽엔 탈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하물며 MXP가 주로 활동하던 실체가 사라져서 덜 귀찮을 수도 있었다.
“…너흰 괜찮냐.”
하지만 묘하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문채민과 이유준이었다. 저 둘은 MXP 측의 농간 때문에 크게 데었던 전적이 존재했다.
그런 곳에서 적으로 생각하던 그룹이 한솥밥 먹는 식구가 될 걸 떠올리니 걱정스러웠다.
“응? 나? 왜?”
“그러게, 무슨 문제 있나.”
예상외로 둘은 그걸 큰 문제 삼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의 문채민과 어깨를 으쓱이며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은 이유준이 보였다.
뭐, 쟤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런 우릴 돌아보던 서도경이 흡족하다는 얼굴을 했다.
“여기엔 좋은 소식을 하나 알리겠습니다. 한동안 고의 루머에선 벗어날 겁니다.”
“네?”
“기간이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지만, 타깃이 바뀌었을 테니까요.”
서도경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윤명이 눈을 굴렸다. 눈치가 빠른 놈답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디레스트.”
“디레스트? 거기? …아하.”
“근데, 그러면 대표님은 같은 상황 아닌가요? 어차피 한솥밥 먹기로 한 건데.”
대충 요약하자면 당분간 MXP가 눈에 불을 켜고 공격할 건 디레스트일 거란 소리였다. 자사를 벗어나 타사로 넘어갔으니 루머를 비롯하여 언론 플레이를 진행하려 들게 뻔했다.
다들 당했던 것도 있고, 의미심장하게 굴었던 김환준의 태도에 상관없다는 반응들을 이었다.
나도 뭐 좀 불쌍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사람 약올렸던 것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했다.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은 것은 그 디레스트에게도 서도경이 붙어 준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차피 거기도 끌어안아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지저분한 일들은 저기가 처리해 주려고 할 것이었다.
이건 또 지원겸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 큰일 하나 치렀더니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일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벤트는 고사하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사건들에 그룹을 추스르기도 정신없는 듯하다.
* * *
[디레스트 MXP와 전격 이별]
[MXP ‘디레스트의 멋진 행보를 응원’]
[디레스트의 새 둥지가 될 회사는? 물망 중이라는 소식 전해져…….]
[디레스트 7년을 보낸 MXP를 떠난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아 MXP 측과 디레스트의 이별을 공식화하는 기사가 나왔다. 좋게도 포장해 주는 것 같은데 그 실상은 다른 상황이었다.
이별 기사가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디레스트 측에선 여러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다. 뭐, 출처가 MXP일 거란 건 모르는 게 바보였다.
[ㄱㅎㅈ ㅇㅎㄴ랑 썸타는 거 사실 아님? 이거 커플템인듯]
[팬기만 레전드 아니냐고 ㅜ]
[예전에 본 썰인데 팬싸에서 ㄷㄴㅇ 존나 무성의했대]
[솔직히 국내 코어론 밀렸던 거 인정]
발목 잡기에 실패한 MXP에선 디레스트를 최선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여론을 구경하며 턱을 괬는데 사실 저기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든지 우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매일같이 배너를 교체하는 기사와 실시간 트렌드를 정복한 회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 곁에는 얼떨결에 같이 따라붙고 있는 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부지리로 얻은 관심이기도 했다.
- 야 이렇게 되면 진짜 우리 애들이랑 한솥밥 먹는 거 아니야????
- ㅁㅊ 저기랑 우리랑?? 나 지금 존나 상상 안됨 부정맥인가 가슴이 뛴다
- 내 주식 대박났다 나만 쉬말달 때 얘네 케미 좋아했었냐고 ㅜㅜㅜㅜㅜㅜㅜ
- 짭선배가 아닌 찐선배 생긴거? 아니 잠깐만 먼저 여기 들어온 건 우리사인이잖아 족보 브레이커 오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굳이 따지자면 반응은 호와 불이 반반 갈린 상태였다.
좋다는 측은 디레스트의 기존 팬덤과 규모가 마음에 든다는 의견이었다. 선배 그룹 하나 없던 작은 엔터가 디레스트의 영입으로 힘이 커지면 우리 쪽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들이 이어졌다.
반대인 측은 그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 시바 나만 독재체재 좋아했던 거냐고 ㅜ
- 좃목 반대 동성끼리도 싫음 극혐
- 잊었냐 저기 MXP다 ㅅㅌㅈ랑 얼마나 개같이 싸웠는데… 머리채만 안잡았지 리얼 쌍욕 다 했잖아 내 뒷계에 증거 있다 눈이들아 정신차려 ㅜㅜ
- 저기에 하이눈만 있다고도 못함 분란 종자들 웩지는데 ㅋㅋㅋㅋㅋㅋ 이때다 싶어서 편먹기 편가르기 온갖 편법 다 나오고 있음
- 에휴 악플러들만 신났지 나는 오늘도 피뎊을 딴다…… 피뎊따기 장인 되겠음
- 아니 왜 회사는 쟤네가 옮기는데 원래 있던 우리가 이 지랄을 당하는???
그동안 저기 회사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디레스트를 경계하는 팬들이 많은 것 같았다.
뭐 그것도 소설을 쓰라며 루머 생성하지 말라는 사람들에 의해 신빙성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 에엥 엔터 견제는 항상 있는 거 아닌가? 애들한테 좋은 선배 생겼으면 그냥 감사히 받아들여
- 솔직히 해외 ㅇㄴ팬덤 존나 큰 건 인정해야지 식구돼서 지금 외국에 우리사인 이름 존나 많이 알려짐 5인 그대로 데리고 가는 거라면 ㅇㄴ들한텐 감사하다고 절받아야 함
- 맞아 계약 해지하는데 그룹 유지해주는 돌 드물다 그리고 그대로 전부 흡수해서 받아들여주는 메이터스 미친 부처임
- ㄷㄹㅅㅌ 선후배님 우리 애들 좀 도와줘 너네 같은 프로그램도 나간다며
- 맞다 잊고 있었네;;; 얘네 곧 서바 나가지 어떻게 보면 잘 된 건가 시바 차라리 편이라도 먹을 수 있잖아…
끝내 호와 불호로 이어지던 엔딩은 디레스트와 우리가 모두 출연하기로 했던 경연 프로그램에 의해 좋게 흘러가는 듯했다.
어차피 붙어야 할 상대라면 표면적으로나마 한 편이 되어 있는 게 저기도 마음 편하단 뜻이었다.
의리 투표를 비롯하여 안 그런 척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단 의견이 이어졌다.
그렇게 복잡한 향방 속에서 디레스트와 메이터스의 공식 계약이 체결되었다.
서도경이 입지 다지기에 성공한 건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동시에 회사 사옥에서 저 인간을 마주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예.”
“대답이 너무 긴 거 아니에요?”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김환준의 모습에 다시 문을 닫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