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04화 (203/328)

204화

세트장 뒤편에서 대기하기를 한참이었다. 연차순으로 등장한다는 포맷에 맞춰 이미 들어간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단기간에 급습한 느낌으로 연출한 프로그램답지 않게 제법 공을 들인 티가 났다. MC를 맡은 사람을 보아하니 엔넷 측에서 돈을 투자한 걸 알 수 있었다.

“왕관은 단 하나, 그의 주인은 누구인가. 크라운을 갖기 위한 숨 막히는 대혈투. 엔넷 ‘크라운 게임’의 MC를 맡게 된 가수 안지하입니다.”

화려한 스테이지 중앙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저 사람은 국내에선 솔로 여가수로 탑을 찍은 유명한 아티스트였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데뷔했다가 솔로로 노선을 갈아탔는데 그게 대중들의 마음을 이끌며 가수로서의 원톱 커리어를 누리고 있었다.

감성적인 보컬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적으로도 기반이 다져져 있었기에 올라운더라고 칭송받았던 기억이 났다.

스태프로 일할 적에도 몸값이 천정부지를 찍어서 메인 제작진이 데려오려고 할 때마다 제작비 걱정을 했던 일화도 있었다.

“그럼 이제 4번째 그룹을 불러보겠습니다.”

화려한 홀로그램이 떠오른 화면 아래로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유어돌 때 불러 본 적 있는 곡들이 흘러나오며 우리의 반대편 공간에서 검은색으로 전신을 감싼 보이 그룹이 등장했다.

“최후를 부르짖는 다크 퍼포머! 얼티밋 나인입니다!”

저놈들은 묘하게 인연이 깊은 얼티밋 나인이었다. 우리보단 한참 먼저 데뷔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엔 워낙에 데뷔 연도가 널뛰어서 4순위까지 밀린 듯하다.

걸어 나오던 인물들 사이에서 손제완이 여길 쳐다봤다. 멤버 등에 반쯤은 가려진 몸을 이용하여 슬쩍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이 프로그램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일단 보는 눈이 있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해 줬다.

“형, 제완이 형도 여기 나오는 거 알고 있었을까.”

“…우리보단 빨리 알았다에 1표.”

“골치 아파졌네…….”

나와 마찬가지로 손제완과 친분 아닌 친분이 있던 윤명과 문채민이었다. 양옆에 딱 달라붙어 먼저 등장한 선배 가수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MC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봤다.

서로 관계성이 있던 그룹들이었던 탓인지, 본 프로그램 출연 전까지 대기실을 통제받았던 우리였다.

출연진 리스트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경쟁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제작진 짬밥이 있던 나로서도 생전 이런 건 처음 봤었다. 얼마나 악의적인 편집을 하려고 이러려나 싶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같은 소속사가 된 디레스트는 고사하고, 인클루와 얼티밋나인,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이민석이 있는 원더보이즈의 대기실조차 찾아가질 못했다.

지금 이 녹화 현장이 오늘로써는 처음 보는 자리가 된 것이었다.

대충 오가는 핑퐁을 살펴보다가 멤버들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했다. 등을 돌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놈들을 보니 생각보단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알고 있지?”

“어, 일단 다들 조심하자.”

“하하, 재밌겠다.”

“…이유준, 너도 불안하다? 혜성이랑 명이, 넋 놓지 말고.”

“옛 설~”

“…응.”

작은 목소리로 조언하니 여기저기서 알겠다는 답변이 들렸다. 지나가는 스태프들의 동선을 살피며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독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그 이유는 김환준에게 전달받은 사항 때문이었다.

프로그램 녹화를 며칠 앞두고 김환준에게서 만남을 요청받았다. 근래 행보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알겠다며 수긍해야 했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보다가 공식적으로 만만한 회사 내부 미팅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크라운 게임 대면식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 각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자리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는 내게 김환준은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숙소에서부터 준비해 온 것인지 접힌 자국이 꼬깃꼬깃 남아 있던 프린트였다.

‘…이게 뭡니까?’

‘한 식구가 된 기념 선물이요. 서 대표님께는 미리 말씀드려 놨는데. 공식으로 내려오기 전 먼저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신해신 씨가 머리를 꽤 잘 썼잖아요? 이번에도 그쪽으로 힘내 달라는 아부죠.’

김환준이 내민 프린트에는 잘 정리된 표가 하나 적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번 ‘크라운 게임’의 제작진과 업체 목록이었다. 각 파트별로 나뉜 세밀한 내용에 김환준을 올려다봤다.

이걸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제작진 리스트가 반가웠다.

알고 있는 이름이 있나 훑어보는데, 그런 날 살핀 김환준이 턱을 괬다. 그러곤 무심한 어투로 그렇지 못한 내용들을 설명했다.

‘거기 PD 좀 눈여겨볼래요?’

‘…PD요?’

‘그 사람, MXP에 있는 부장과 커넥션이 있다고 추측돼서요. 저번에 연말 공연에서 스턴즈 애들이랑 우리가 같이 했던 합동 무대로 거기가 좀 골치 아팠었죠. 그거 기억해요?’

‘네… 근데 거긴 왜.’

‘그때 총괄한 박 PD랑 이 사람이 MXP 부장과 술자리를 가졌던 일이 있었거든요. 아, 저도 정보로 들은 거지, 얽힌 사람은 아닙니다?’

김환준은 태연한 얼굴로 내게 크라운 게임의 메인 PD가 MXP 측의 부장과 커넥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왔다.

디레스트가 MXP측에서 계약을 연장하며 여길 나오게 될 걸 염두에 두고 미리 작업을 깔려고 했던 모양인데, 자기네가 계약 만료로 빠지며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을 거란 이야기도 곁들인 상태였다.

‘스턴즈는 국내 여론이 죽을 때까지 해외 뺑이 치려는 게 보이고, 다른 애들 들이밀자니 엔필름 주관이라 뚫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우리까지 메이터스로 빠졌으니까 열이 받을 대로 받았을 텐데. 친분이 있는 PD가 경연 프로그램의 메인이다? 이거 무슨 뜻인지 신해신 씨도 알고 있죠?’

‘네…….’

MXP가 이득을 떠나서 우리에게 좋지 못한 프레임을 씌울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서도경에게도 알려 준 모양인데, 미리 행동을 조심하라며 언질해 주려고 나를 불렀단 사실을 알게 됐다.

거기에 적힌 PD의 이름을 보며 내 쪽에서도 뭔가 해 놔야겠다고 떠올렸다.

그래서 멤버들에게는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 뒀다. 후원사도 서도경 측을 견제하는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붙은 제작진의 우두머리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을 거란 이야기였다.

책을 잡히지 않는 걸 떠나, 수상한 기미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이야기한 게 며칠이었다.

왠지 익숙한 이름을 보면서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어 봤다.

[한동준]

그리고 바로 녹화 전날인 어제저녁, 이 사람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뭔가 익숙한 이름이다 싶었는데, 유어돌 4를 진행하며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엔넷으로 넘어온 남현욱의 옛 후배이자, 그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남현욱 쪽이 방송계에서 급을 가진 사람치고 인성이 좋았던 이유 때문이었다.

한동준은 남현욱과 반대되게 권력과 돈을 광적으로 선호한다고 했었다. 남현욱이 가장 극혐하는 종류의 방송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때의 몇 가지 사연들을 종합해 봤을 때, 이번 프로그램 경연이 아주 힘들 거란 걸 예상했다.

의상 주머니에 잘 숨겨 놓은 녹음기가 긴장의 척도를 보여 줬다.

“해신아, 준비하자.”

“어, 얘들아. 알지?”

“응!”

“하아.”

잠깐 며칠 전 일을 되짚어 보는 사이, 먼저 나갔던 얼티밋 나인이 왼쪽 계단 좌석에 자리했다.

“하이사인, 스탠바이 하실게요.”

곁으로 다가온 스태프의 부름하에 세트장 스크린 속 새로운 영상이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타이틀 곡이 흐름과 동시에 스태프로부터 나가란 손짓이 이어졌다.

“밤하늘 떠오른 아름다운 별자리, 장르를 넘나드는 괴물 신인, 서바이벌의 강자가 돌아왔다. 하이사인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길게 펼쳐진 로드를 따라 걷자 중앙 무대를 사이에 두고 양 사이드에 앉아 있는 선배 그룹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안지하에게 인사한 후 3, 4으로 갈라서선 돌아가며 허리를 숙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손을 흔들거나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해 줬다. 대다수는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잇고 있었는데, 서바이벌이니 경연이니 밑밥을 까는 걸 보면 긴장감 넘치는 음악으로 딱딱한 편집을 내보내려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구호를 외치려고 몸을 돌리던 사이, 지원겸과 김환준이 여길 향해 손짓했다. 괜히 책잡히기는 싫어서 양쪽 모두에게 예의를 차리는 척했다.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정식 구호와 함께 MC에게서 간단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건 사전에 고지받았던 이야기라 최대한 겸손함을 잃지 않는 뉘앙스로 답했다.

“그럼 하이사인 여러분들도 자리로 들어가 주세요~”

뒤에 한 그룹이 더 남아 있던 터라 그리 긴 인터뷰는 진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지하의 손짓에 인클루가 있던 오른쪽 좌석으로 다가갔다.

“신!”

“멘토님, 안녕하세요.”

“몇 번을 인사하는 거야? 잘 지냈지?”

“네, 그렇죠.”

지원겸은 평소의 털털한 행동에 적당한 방송용 내숭을 곁들여서 나를 비롯하여 멤버들에게 반갑다는 듯이 말을 걸어 줬다. 저기에도 미리 제작진 측에 대한 정보를 넘겨줬으니까, 지원겸이 하는 행동에 맞춰 대응해 주면 될 것 같았다.

“얘들아.”

“민석이 형! 진짜 오랜만이다!”

“이야, 혜성이, 넌 여전하구나~ 다들 잘 지냈지?”

“…형, 안녕.”

“명아! …넌 그새 더 큰 것 같다?”

지원겸과 인사한 지 얼마나 됐을까, 같은 오른편 좌석 쪽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우리 앞 순서로 얼티밋 나인보다도 연차가 빨라 먼저 등장한 원더보이즈의 이민석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움이 앞섰다. 유어돌에서 경쟁하던 걸로 모자라, 여기서 또 마주친 인연이 웃기다.

이민석도 그걸 느끼고 있었는지 웃음 너머로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보였다. 카메라가 있어서 적당히 무마한 듯했지만, 멤버 모두 그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그룹. 뒤처지지 않는 실력과 똘똘 뭉친 패기의 주인공.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겠다는 포부의 블릭투입니다!”

시작이군. 블릭투의 이름에 이정원을 슬며시 쳐다봤다. 사전에 대화한 보람이 있었는지 동요는 잘 감춘 모습이었다.

스크린 속 영상에 데뷔곡으로 추정되는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다. 묘하게 송신 시간이 긴데? 전직 스태프로서의 촉이 발동했다.

혹시 여기도 뭔가 있나? 안지하의 블릭투 소개 멘트를 곱씹으며 알아봐야 할 부분에 대해 추가로 확인했다.

그사이,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을 입은 5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중앙까지 다가와선 카메라가 놓인 정면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블릭투입니다!”

큰 목소리로 외치는 이름을 들으며 흐름에 맞춰 박수를 쳐 줬다. 양쪽으로 갈린 좌석으로 몸을 돌리며 인사하는 블릭투의 멤버들이 보인다. 개중에는 김찬규에게 들은 인물, 최한성이 섞여 있었다.

…방금 나랑 눈이 마주쳤지? 최한성은 꽤 잘 웃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눈이 웃지 않은 순간을 발견했다. 그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우리를 본 타이밍이었다.

내 옆에 있는 이정원을 보더니 허리를 숙여 얼굴을 숨기며 조용히 눈을 치켜떴다. 입꼬리는 생글생글 올라가 있어서 카메라엔 잡히기 힘들 장면이었다.

머리 좀 쓰는 자식이네. 사전에 세팅된 카메라의 동선을 알고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정원아.”

“응.”

“열심히 하자.”

“…그래.”

최한성을 보고 순간 표정이 굳을 뻔한 이정원에게는 허벅지를 토닥이며 정신을 차리란 뜻을 전했다.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의 뒤에는 뭔가 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서도경이나 김환준 혹은 지원겸보다 내가 알아보는 게 빠를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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