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05화 (204/328)

205화

오프닝 촬영이 종료된 이후였다. 대면 퍼포먼스 촬영에 들어가고자 사방이 분주해졌다. MC인 안지하가 단상에 나타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각 팀의 공연이 시작됐다.

첫 순서는 등장과 반대되게 거꾸로 들어가는 듯했다. 가장 늦게 나왔던 블릭투가 자신들의 데뷔곡으로 무대를 꾸렸다.

파워풀하고 현란했지만, 신인이어서 그런가 묘한 풋풋함이 남아 있었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들어가는 블릭투를 지켜보며 우리도 대기실로 돌아가 의상을 갈아입었다.

간단한 스테이지 재정비 시간을 확인하며 프로그램 출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우리가 오늘 선보일 퍼포먼스는 멤버들과 오랜 기획하에 나온 것이었다.

* * *

서도경이 엔필름 측에 뒤통수를 맞은 이후, 급히 모인 미팅룸이었다. A&R 팀을 비롯하여 무대 관련 각 담당자들만 모인 비상 대책 회의의 일종이었다.

조진만네 패거리에겐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진행하기로 한 작전에서 총력을 기울이겠단 직원들의 비장함 아래 여러 의견이 오갔었다.

‘대면식이면 기본적으로 화려한 게 먹히지 않을까요? 동작 난이도도 있고 칼군무처럼 보는 맛이 있는 공연이 좋을 것 같아요!’

‘나도 권혜성 말에는 동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런 요소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팀 내 포지션으로 댄서를 맡고 있어서 그랬는지 권혜성과 강태오는 안무에 대한 중요성을 제시했다. 맞는 말이긴 했으나 선뜻 그쪽으로 가 주겠다곤 답을 할 수 없었다.

과거 스태프 시절 맡았던 프로그램이 서바이벌이긴 했으나 이런 팀 경연 계열은 처음이었기에 나로서도 여러 정보가 부족했다. 조금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며 고민하는 사이, 이정원과 이유준에게선 곡에 대한 선택부터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 다른 측면부터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선 곡이요. 기존 저희 노래를 할 것인지, 아니면 특수 인트로를 깔아서 퍼포먼스에 집중할 것인지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정원이 형 의견에 한 표입니다. 베이스를 정하고 안무 방향을 트는 게 낫지 않을까?’

굳이 따지자면 나도 저 둘과 생각이 같았다. 노래에 따라 흐름이 갈리는 게 퍼포먼스였으니까, 큰 틀부터 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곡부터 정한다에 한 표.’

‘…나도.’

‘형들이 그렇다면 저도요~’

‘에이, 뭐야. 그럼 노래부터 정합시다!’

‘뭐, 그러든가.’

이정원과 이유준의 말 뒤에 손을 들자 윤명을 비롯하여 문채민까지 우후죽순으로 거수했다.

‘그럼 우선 곡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 계십니까? 윤 팀장님 의견은 어떠세요?’

‘우선 기존에 많이 했던 곡들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리믹스나 버전을 바꾼다 하더라도 참신함은 줄 수 없을 겁니다. 퍼포먼스적으로 대중들에게 보인 적 없는 쪽을 택하는 게 유리할 것 같은데.’

윤재희의 고민하는 듯한 얼굴에 과감한 질문을 던져 봤다. 그건 다른 출연 그룹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구간이었다.

‘그럼 기존 타이틀은 전부 배제하고 가면 어떨까요?’

‘타이틀을 제외하고요? …도박이라면 도박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재밌네요.’

데뷔한 지 1년 남짓인 우리와 블릭투를 제외하면 나머지 선배 그룹들은 연차가 최소 몇 년이었다. 근래 연말이나 컴백했던 앨범이 아니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잔여 곡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쪽에선 기존 팬덤과 대중들이 알고 있는 타이틀을 퍼포먼스 곡으로 뽑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는 아예 그 노선을 틀어서 다른 쪽으로 눈에 띄어 보자는 계획이었다.

‘하아~ 타이틀을 배제하고 퍼포먼스적으로 강세인 곡이 뭐가 있더라……. 1집 커플링은 밝은 편이었고…….’

‘우리 Evening 하자, 형들,’

고민하는 뉘앙스의 권혜성 뒤로 테이블을 치고 있던 문채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Evening? 저거는 분명 이번에 새로 컴백한 Rule (도취) 앨범 4번 트랙에 있던 수록곡이었다.

컴백한 이후 본 활동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Evening’은 우리 팬들은 제외하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노래였다.

무대에 올라가 본 적도 없으니 다른 의미로는 신선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곰곰이 문채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재희가 박수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Evening, 좋은 선택 같습니다. 미디엄 템포인 건 퍼포먼스적인 부분을 위해 BPM을 올리는 리믹스를 강행하면 될 것 같은데, 다들 어떠십니까? 기존 하이사인 여러분이 해 보지 않았던 장르라 참신함은 충분히 느껴질 것 같습니다만…….’

‘BPM을 올려요? 그럼 전 찬성! 리듬 타기 좋은 곡이긴 했으니까요. 2절 싸비 구간 이용하면 댄스 적용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저기, 저도 의견이 하나 있는데요.’

좋다는 권혜성을 지켜보던 이유준이 슬쩍 미소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쟤가 저런 얼굴을 했을 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였다. 그래도 나쁜 생각은 아닐 것 같아서 말해 보라며 고개짓을 했다.

이유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시선을 틀어 한 방향을 바라봤다.

‘이 노래면, 아주 잘 어울리는 센터가 하나 있잖아요?’

그건 바로 강태오였다. 모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느라 조용히 있던 강태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대꾸하려던 찰나, 이유준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근데 하나로 그치지 않고, 둘을 이용해 보는 거죠. 다들 잊지 않았지? 유어돌.’

‘…야, 유준아. 너 설마.’

‘빙고.’

강태오를 지긋이 바라보던 모두는 곧 눈을 돌려 내 쪽을 훑었다.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니 곁에 있던 권혜성이 좋다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이정원은 팔짱을 낀 손을 풀고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니 이유준과 한 편을 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부탁한다? 리더.’

‘…채민아, 너, 아이디어 잘 냈다.’

‘뭘. 그럼 태오 형, 해신이 형, 잘 부탁해.’

‘야, 야… 잠깐만, 이렇게 막 정해도 되는 거야? 윤 팀장님이나 대표님 의견은…….’

다급히 팀 내 최고 책임자들을 돌아봤다. 거기엔 재밌다는 듯이 마저 이어 보라는 서도경과 벌써 준비에 들어가려는 듯 퍼포먼스 관련 팀과 미팅을 잡으려는 듯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윤재희가 보였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강태오를 살피니, 뭐가 됐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예전과 달리 약간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해야지. 형도 생각있잖아.’

‘…그렇긴 하지. 맡은 바 책임이 무거워졌네.’

이렇게 되면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왕 독한 마음을 먹은 거 잘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 * *

우리가 탈의를 끝마치고 대기실을 나가려는데,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지 지원겸이 나타났다. 인클루의 멤버 몇을 단 상태로 손을 들어 인사를 해 보인다.

“뭐야? 오늘 포스가 남다른데?”

“어? 멘토님!”

“야, 경쟁하러 와서 저 소리 들으니까 무진장 민망하네.”

저거 또 말로만 저러지. 전혀 민망하지 않다는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선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지원겸이었다. 그 뒤에 있던 공태서가 오랜만에 본다며 손을 들자 신기하단 듯한 다른 멤버들의 시선이 이어졌다.

“와우~ 겸이 형이랑 태서 제자님들, 장난 아니네~ 무섭다, 무서워~”

“여기 컨셉이 뭐야? 옷 그라데이션 쩐다!”

리더 때문인지 제법 자유로워 보이는 멤버들이다. 개중 몇은 직접 와선 이유준의 옷을 보며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유준은 긴장도 되지 않는지 태평한 얼굴로 대답해 줬지만 말이다.

“아직 비밀입니다. 무대에서 확인해 주세요.”

“오……. 카리스마. 형, 나 방금 좀 밀렸다.”

“내가 보기엔 많이 밀린 듯.”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공태서는 래퍼인 문채민에게 조언을 해 주는 듯한 광경을 보이고 있었다. 인클루에서 리드 보컬을 맡고 있던 멤버 하나도 이정원을 데려다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원겸의 오지랖 넓은 호구 기질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그냥 팀 전체의 특성이란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제작자가 난감한 사태에선 출연진 그룹 대다수가 괜찮은 인물들이란 건 불행 중 다행처럼 느껴진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 시름이 보였는지, 지원겸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야, 신해신. 너희 아직 스탠바이까지 시간 있지.”

“네? 네, 그런 것 같은데요…….”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지금 애들 정신없어서 슬쩍 빠지면 모를 거야.”

지원겸의 물음에 알겠다며 응대하고선 멤버들 몰래 발걸음을 움직였다. 대기실에서 조금 떨어진 코너를 돌아 구석 너머로 자리한 이후였다.

패치가 여럿 달린 봄버 재킷을 입고 있던 지원겸이 덥다는 듯이 외투를 반쯤 벗어 팔에 걸쳤다.

“여기, 복도는 카메라 안 달았겠지?”

“제가 확인해 봤어요. 설치된 건 없는 것 같던데요. 비하인드를 이쪽에서 당길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아, 대기실은 모르겠지만요. …여기 PD님 좀 걸리는 게 있으니까, 긴급하게 할 말이 있으면 핸드폰 문자 쪽으로 추천드릴게요.”

지원겸이 고개를 저어 주변을 휘휘 돌아보는 행동에 안심해도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오늘 아침 녹화장에 들어서자마자 할 일을 위해 움직이는 척 주변 동선에 설치된 카메라가 없는지 전부 확인해 놓은 상태였다.

제작진이 정해 놓은 구간들은 포맷처럼 있었는데, 거길 제외하면 각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찍어 봤자 쓰지도 못할 장면 때문에 배터리를 낭비할 리는 없을 테니까. 나름 과거 경력을 살려 머리를 굴린 점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내 이야기에 지원겸이 제법이라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야, 그건 또 언제 알아봤냐? 너 카메라도 다룰 줄 알아?”

“…예, 뭐…….”

그걸로 전에 밥 벌어먹고 살았다.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적당히 뭉개며 답변했다.

“그나저나, 뭐 때문에 부르신 건데요? 디레스트 쪽이라면 저도 이제 모르겠어요. 요즘 MXP 하는 짓 봐선 완전히 갈라선 것 같던데……. 아, 저희 쪽은 책임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전 멘토님 편이에요.”

“자식, 선택과 집중 하나는 마음에 드네. 거기 일로 너희한테 책임 물을 생각은 없어. 중간에 낀 거면 중간에 낀 거지. 편 먹고 나 물 먹였단 생각은 안 하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그냥 좀 애매모호해서 확인차 물어보려고 불렀다. …걔네, 진짜 통수 칠 것 같진 않지? 괜히 너희도 휘말릴까 봐.”

지원겸의 진지해진 얼굴이 의외였다. 다른 것 때문에 불렀나 했더니 거기로 인해 우리가 피해를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쪽으론 안심하라며 어깨를 두들기자 그제야 평소처럼 껄렁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발등을 세워 바닥을 두 번 톡톡 치곤 걸치고 있던 재킷을 제대로 입는다.

“아~ 그럼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버린 건가? 크라운 게임인지 뭔지만 아니었어도 그 자식 들들 볶았을 텐데. 김환준 보면 나중에 얘기해 줘라. 재수 좋게 빠져나갔으니까 나중에 다시 붙자고.”

“예, 예. 알겠습니다~”

등을 돌려 다시 멤버들에게 돌아가려는 듯 움직이던 지원겸이었다. 슬쩍 고개만 틀어 내가 있던 곳을 보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내뱉고 발걸음을 옮긴다.

“야, 경쟁이긴 하지만, 잘해라.”

“…네, 감사합니다. 멘토님네도 조심하세요.”

“오냐.”

그렇게 멀어진 지원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몸을 일으켜 복도를 빠져나갔다. 멀리 있는 멤버들의 뒤론 스탠바이를 위해 다가온 스태프가 보이고 있었다.

“하이사인! 무대 스탠바이 들어가시겠습니다!”

“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 보자. 사실 우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엔필름의 귀찮은 방해 공작도, 그전부터 껄떡거리던 MXP도 모두 눌러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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