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헐떡이는 숨을 들이쉬며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무대에선 보인 적 없는 미공개 곡이었기에 남다른 긴장감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중들이 알던 우리와는 조금 다른 형식을 노린 퍼포먼스였다. 그게 잘 통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현장 반응을 봐선 나쁘진 않은 듯하다.
안지하의 놀랍다는 코멘트를 들으며 의상을 갖추고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다음 차례인 얼미팃 나인과는 엇갈리며 이동했는데 얼핏 손제완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아전체에서 한 팀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어 그랬는지 대다수의 멤버가 친근감을 내비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리더인 류정이었다.
“와~ 오늘 제대로 준비하고 왔나 본데요? 어떡하지. 큰일 났네~”
“하하, 감사합니다.”
“해신아… 너네 짱이야…….”
“씁, 손제완, 방송 중이다.”
이걸로 한 표는 획득인가. 대면식에서 투표권을 통해 1차 경연의 순서를 정한다는 룰을 떠올렸다. 앞 타임에 먼저 선보였던 만큼 빠른 판단이 필요해 보였다.
손제완에겐 고맙다며 손을 한 번 휘적이자 특유의 오버스러운 행동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일단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세트장 내 자리에 착석했다.
바로 앞자리엔 강태오가 앉아 있었다. 이번 무대에선 주인공으로 밀어 넣은 녀석이었다.
처음 문채민이 이 곡을 하자고 했을 땐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했는데, 이유준이 강태오를 센터로 밀어 넣은 순간,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이 자식들, 분위기로 밀어 버리려는 거였구나. 다른 팀에 비해서 연차가 떨어지더라도 성숙한 무대를 보여서 압도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스타일이기도 하니까. 첫 대면식에선 강한 인식을 남길 수 있을 방법이었다.
실력도 실력인데 머리가 잘 굴러가는 멤버들이었다. 강태오에겐 고생했다며 등을 두들기고 눈을 돌려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유준과 문채민을 돌아봤다.
“왜, 형?”
“아니, 잘했다고.”
내 말에 이유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채민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음부턴 이유 좀 알려 주고 말해.”
“에이~ 태오 형, 결국 이렇게 잘할 거면서~”
“…맞아. 센터 멋있었어.”
강태오의 무던한 한마디에 권혜성과 윤명이 아부를 떤다. 이런 걸 보면 안 그런 척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듯했다.
사실 강태오의 비주얼과 타고난 끼를 이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하는 말에 조용히 따랐던 바이다.
저 강태오에 이어 나도 엮어 넣은 건 유어돌 때를 떠올려 팬들의 마음을 독려하려는 거였겠지. 1위로 데뷔한 강태오와 7위로 데뷔한 나였으니까. 우리 팬이 아니더라도 유어돌을 봤던 사람이라면 그때의 추억을 되짚어 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성격을 배제하고서라도 외관적인 느낌은 비슷한 우리였으니 곡과 시너지를 따졌을 땐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런 걸 보면 엔필름이나 조진만이나 MXP같이 귀찮은 놈들이 있더라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안심하며 정면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한 곳이 아닌 두 곳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굴리자 맞은 편과 측면에 앉아 있던 아는 얼굴 둘이 비슷한 타이밍에 말을 건다.
“야, 신해ㅅ…….”
“신해신 씨, 무ㄷ…….”
사실 둘 다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여긴 보는 눈이 많은 세트장 한가운데였다. 카메라도 이 장면을 찍고 있는 게 보여서 고개를 돌리며 양쪽 모두를 돌아봤다.
“예?”
“네가 먼저 얘기해.”
여기서도 투닥거릴까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데 의외로 잘 참는 지원겸이었다. 김환준은 특유의 무던한 성격으로 지원겸에게 먼저 대화하라며 양보했다.
그걸 보고 지원겸 쪽으로 몸을 돌리니 뭔가 씹다 만 것 같은 표정의 지원겸이 보였다. 역시나, 잘 참는다 싶었는데. 본 성격은 죽이기 힘들었나 보다. 그래도 데뷔 짬밥은 어쩔 수 없다고 카메라가 보이지 않도록 타 멤버의 위치를 통해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왜 부르셨어요. 멘토님?”
“넌 여기 나와서도 멘토님 타령이냐…….”
“그렇게 부르라면서요.”
“…됐다. 그나저나, 너…….”
“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풀렸는지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지원겸이다. 얄궂은 얼굴에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몸을 틀어 김환준을 바라봤다.
“야, 아직 내 말 안 끝났거든~”
“왠지 다 들은 것 같아서요.”
“저게 멘토님 알기를 길가의 돌멩이처럼 구네.”
“방금 전엔 멘토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더니…….”
“어쭈, 다 들린다?”
장난이라도 치려는지 벌떡 일어난 지원겸이었다. 지원겸의 옆에 있던 공태서가 그런 지원겸의 옷자락을 잡아 다시 앉혔다.
그걸 확인하곤 다시 눈을 굴린 사이, 정면에 있던 김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젠 내가 말해도 되나? 무대, 잘하던데요?”
“…감사합니다.”
여기랑은 딱히 할 말이 없는데. 그래도 이젠 적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무던한 선후배 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물론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얼티밋 나인의 무대를 기다리면서 묘하게 조용했던 멤버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정원이었다.
오프닝 초창기부터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을 보이더니 무대가 끝난 이후로도 영 말이 없었다. 김환준과는 적당히 대화를 끝내고 이정원을 살펴보니 뭔가 굉장히 바쁜 상태였다.
“정원아.”
“알아.”
이정원은 자신을 힐끔거리는 타 그룹의 멤버 하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맞은편 디레스트의 옆 좌석에 자리해 있던 블릭투의 최한성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긴 했으나 기운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약간 시비를 거는 느낌이랄까. 이정원도 비슷하게 맞대응을 하려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하고 웃음을 내비쳤다.
슬쩍 양쪽을 살피자 이정원의 웃음을 본 최한성의 얼굴이 굳었다. 이걸로 한 가지 확실해진 건 이 둘에게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썩 좋은 방향은 아닌 것 같다.
“너, 괜찮은 거 맞지?”
“응. 카메라 있다. 표정 관리하자.”
촬영 사실을 잊지 않은 이정원이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찬규와의 만남 때보다 능숙하게 넘기고 있는 건 방송 때문이었던 듯하다.
내가 나서서 적당히 끊으려고 하는데, 최한성 쪽에서 먼저 도발하는 듯한 멘트를 던졌다.
“정원이 형, 잘 지냈죠?”
이 둘을 잘 모르는 사이라면 그냥 안부를 물어보는 정도로 느껴질 질문이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있던 이정원에겐 그리 반가운 뉘앙스는 아니었다.
“어, 잘 지냈지. 한성이, 너도 얼굴 좋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이정원이 아니었다. 예전의 그 당황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살가울 정도로 환히 미소 지으며 최한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이게 최한성에겐 카운터펀치였나 보다. 최한성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곁에 있던 블릭투의 멤버 하나가 최한성의 허벅다리를 때려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무대 잘 봤어요.”
“고맙다. 나도 무대 잘 봤어. 멋지던데요.”
“네? 네… 감사합니다.”
이정원이 최한성을 때린 또 다른 블릭투 멤버에게 말을 걸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한 멤버를 보며 나도 잘 봤다는 제스처를 취해 줬다.
우리가 이렇게 나오니 결국은 먼저 시비를 걸었던 저쪽에서 유야무야 마무리를 짓는 듯했다. 최한성이 고개를 까딱이더니 몸을 틀어 디레스트 쪽으로 말을 걸었다.
“…이겼군.”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좋냐.”
마이크에 소리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 이정원이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여길 알아봐야겠는걸. 이정원은 멘탈을 추스린 것 같았지만 저쪽이 영 싸하게 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지니 미리 선수를 쳐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동자만 굴려 최한성을 바라보니 하필이면 디레스트의 김환준에게 대화를 걸고 있었다. 대충 보이는 흐름을 봐선 김환준에게 완전히 말린 듯 끌려가고 있다.
조금은 고소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 무대를 위한 세트 정비가 완료됐다.
꺼지면 조명을 바라보며, 프로그램의 앞날을 걱정해 봤다.
* * *
“자, 이렇게 첫 대면식의 모든 무대가 공개되었습니다.”
MC인 안지하가 가운데로 등장했다. 그 옆으론 작은 패널과 출연 그룹의 이름이 적힌 태그가 나열되어 있다.
“지금부터 각 그룹은 대면식에서 봤던 다른 선, 후배 그룹들에 대한 평가를 진행합니다. 모든 그룹은 1위부터 6위까지의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1위는 70점, 2위는 60점 식으로 점수가 매겨지며, 종합 점수를 통해 최종 순위가 발표되겠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1위에겐 1차 경연에서 순서를 정할 수 있는 베네핏이 부여됩니다.”
안지하의 말에 일부 멤버들에게서 핏기가 사라졌다. 시청자 투표가 없는 1화라 조금은 약소하게 넘어가나 싶었더니, 역시 초장부터 경쟁 심리를 부추겨 왔다.
나야 이 PD가 그럴 걸 알고 있었으니 생각보단 타격이 적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아서 팬들 기도 좀 살려 주고, 우세한 위치를 가져가는 게 좋은 법이다.
안지하의 말을 듣자마자 멤버들을 한곳으로 모아 불렀다. 미리 배부받은 평가표와 펜을 든 채 어떻게 적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물어봤다.
“어떻게 할까?”
“해신이 형, 오늘 왜 이렇게 강해?”
“오, 진짜, 난 대박 간 떨리는데. 이걸 어떻게 정해?!”
“…난감하다.”
이유준으로 시작한 반응은 곧 권혜성과 윤명으로 이어졌다. 강태오도 이런 내가 신기했는지 의아하단 얼굴로 여길 돌아본다. 아무 말 없이 팔을 들어 옆에 있던 이정원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곤 놈을 흘낏 쳐다보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겨야지.”
블릭투를. 그리고 우릴 괴롭히는 다른 사람들을. 내 이야기를 알아들은 이정원이 맞받아쳤다.
“그렇지.”
그런 우리 둘을 살펴보던 문채민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형들 의견이라면 따라야지. 좋아, 그럼 내가 생각한 1위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졌다. 무대 구성, 퍼포먼스의 종류, 연차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스타일이 나와서 뭐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갈지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이라면, 6위는 누구인지 보인다는 점이었다.
“미안하지만, 여긴 이분들이지?”
“일단 나도 한 표.”
“죄송합니다~!”
카메라를 신경 쓰는 권혜성이 손을 모아 합장하듯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들 눈치는 기똥차서 한마음 한뜻처럼 움직인다. 6위에 적힌 그룹 이름을 보며 티가 나지 않게 미소 지었다. 다른 그룹들은 어떤 생각일진 모르겠으나 지원겸이 속한 인클루나 김환준이 속한 디레스트에선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6위]
블릭투
블릭투. 연차가 가장 낮기도 했으나, 무대 구성적인 측면에서 6위로 뽑게 됐다. 사실 얘네에겐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일하게 라이브 AR 팀이었지?”
“응.”
대면식 퍼포먼스라고 한들, 가수에겐 가장 중요한 노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단 점이었다. 말 그대로 퍼포먼스에 치중하여 화려한 구성의 연출을 밀어 댔다. 그것도 어느 정도 적당히 했어야지.
그 결과로 보컬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함이 문제가 된 게 분명하다. 그걸 보완하고자 라이브 AR을 택했던 모양인데. 그게 도리어 큰 취약점이 되어 버렸다.
블릭투를 제외하면 모든 그룹이 MR을 통해 무대를 선보였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건 나도 신기해하던 것 중 하나였는데, 모두 짜 맞춘 것처럼 대면식 퍼포먼스에서 라이브를 강행했다.
다른 그룹도 이런 선택을 했을 줄은 몰랐는데. 모두 머리를 잘 굴렸는지 그럭저럭 빠져나가는 모습이다.
사실 나는 미리 들은 게 있어서 이걸 택한 거였다. 원래도 라이브를 고수하는 우리였지만 이번엔 사전 조사와 과거 기억이 큰 힘을 발휘했다.
‘맞아, 한동준. 그 사람, 예전에 어떤 프로그램에서 그룹 하나 죽였었지. MR이 아닌 라이브 AR 깐 걸 음향 실수로 내보내서…….’
선배들과 함께 본 연말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이야기였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니 이번 무대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다.
결론을 말하자면 최대한 약점으로 삼을 수 있는 걸 배제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