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08화 (207/328)

208화

“자, 그럼 투표 결과를 발표해 보겠습니다.”

텅 빈 패널 옆 안지하가 긴장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어떤 함정을 깔아 놨을지 모를 제작진이기에 머리를 잘 굴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전체 순위 오픈해 주세요!”

안지하의 외침과 동시에 배경에 있던 스크린 위로 6개의 그룹 이름이 나열됐다. 함성과 각종 리액션 사이에서 우리의 이름이 적힌 위치를 살펴봤다.

[크라운 게임 대면식 순위]

1 – 디레스트 (D’rrest)

2 – 인클루 (INCLUE)

3 – 하이사인 (HISIGN)

4 – 얼티밋 나인 (Ultimate’9)

5 – 원더보이즈 (WONDER_BOYS)

6 – 블릭투 (BlickToo)

“헉!”

“대박~”

“헉 우리 3위! 3위! 감사합니다!”

…리액션 쪽은 걱정 안해도 되겠군. 윤명의 어깨를 쥐어 잡은 채 앞뒤로 뒤흔들고 있는 권혜성이 보인다. 문채민과 이유준도 잘됐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해 냈다.

“다행이다.”

“그러게. 다들 잘 봐주셨나 보네.”

이정원과도 책잡히지 않을 만한 멘트를 이어 갔다. 조용하던 강태오가 우리에게 몸을 기대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걱정했냐, 잘해 놓고서.”

“…어.”

3위면 딱 안정권 리스트였다. 사실 우리의 연차가 조금만 더 있었어도 이보단 높은 순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제약이 걸려서 투표를 주저한 것이겠지. 알게 모르게 오가는 눈빛들을 확인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아…….”

공개된 모든 순위에 일부 팀에게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 방향 쪽에 있던 이민석네도 꽤 충격을 받았단 표정이다. 보컬을 위주로 무대를 꾸려서 그랬을까, 일부 그룹들이 저길 낮게 측정했던 모양이었다.

안되긴 했지만, 경쟁이었으니까 나중에 다시 대화를 나눠 보기로 하고 다른 팀들이 어떤 구성을 뽑았을까 확인해 보기로 했다.

“1위는 대망의 디레스트가 차지했습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볼까요?”

안지하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김환준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꺼냈다. 슬쩍 지원겸을 돌아보는데 웃곤 있지만 셔츠 깃 너머 목덜미에 핏대가 솟아오른 게 보인다. 클로즈업을 따지 않는 이상 티가 나지 않은 장면이라 운도 좋다며 웃어넘겼다.

아마 저기가 1위를 받은 것은 무대도 무대였으나 연차 탓이 컸을 것이다. 인클루랑 비등비등하게 잘했지만 안 그런 척 선배 그룹 팬덤의 눈치를 살핀 것이겠지.

“그럼 지금부터 그룹들의 자세한 속마음을 오픈해 보겠습니다!”

이런 것 때문이다. 화면 위론 여섯 개로 분할된 칸이 나타났다. 거기엔 멤버들이 작성한 순위표가 기재되어 있었다.

일단 나는 알고 있었으나 놀란 척 사방을 돌아봤다. 다들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진짜 오픈할 줄은 몰랐던 듯하다. 크게 확장된 눈과 벌어진 입을 보며 저 사람들도 한 번은 당하겠구나 싶어졌다.

예상대로 블릭투는 가장 많은 그룹에게 6위를 받은 상태였다. 우리를 포함해서 총 네 그룹에게 6위를 받았고 나머지 한 그룹도 5위로 택했다.

라이브 AR에 대해선 기재하지 않고서 좋게 돌려 표현한 반응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슬쩍 돌아본 블릭투 진영은 생각보다 암울해 보이지 않았다. 표정 관리는 할 줄 알아서 그런 건가 기가 막히게 카메라를 피해 미간을 구긴다.

뭔가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은데……. 한 PD의 교묘함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으니까 여기서 쉽게 끝낼 것 같지는 않았다.

MXP에게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다른 쪽과 커넥션이 오갔는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정확한 윤곽을 드러냈다.

1차 경연 미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였다.

“대면식 1위에겐 첫 경연의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와~!”

“그 전에! 1차 경연에 대한 주제를 먼저 봐야겠죠? 경연 주제 오픈해 주세요!”

안지하의 외침에 따라 스크린 위로 커다란 글자가 나타났다.

[크라운 게임 1차 경연 주제]

트레이드 커버곡

“1차 경연의 주제는 바로 트레이드 커버곡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자신이 아닌 타 그룹의 곡을 커버합니다. 그룹 곡을 선택하는 방법은? 바로 이 순위표입니다! 경연 순서는 1위인 디레스트가 정할 수 있었죠? 그러나 커버곡 순서는 그 반대 방향으로 넘어갑니다. 즉 6위인 블릭투부터 5위 원더보이즈 그리고 4위인 얼티밋 나인이 커버하고 싶은 그룹을 먼저 선점하시겠습니다. 선택받은 그룹은 서로의 노래를 트레이드하여 커버합니다.”

경연 순서보다 더 중요한 곡 매칭권이 6위인 블릭투에게 우선으로 넘어갔다. 여기였구나, MXP를 제외하고서 한동준이 엮인 곳이.

6위를 받고서도 담담해 보이던 블릭투가 환호성을 지르며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되면 저기만 라이브 AR을 깐 것도 사전에 작당해 놓은 짓일 수 있었다. 당했다는 생각에 지원겸을 돌아보자 필사적으로 블릭투와는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 광경을 확인했다.

가장 연차가 적었던 신인인 만큼 최악의 선택지인 건 확실해 보였다. 일단 우린 안 뽑을 것 같으니까. 디레스트나 인클루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적중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저희는 디레스트 선배님들을 고르겠습니다!”

[디레스트 ↔ 블릭투]

떠오른 화면을 보고 디레스트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일부 멤버가 반갑다는 듯이 블릭투의 멤버를 안아 주는데 카메라 앞이라 저러는 게 분명하다.

뭐, 그건 쟤들 사정이고. 같은 소속사가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지금까지 당한 게 사라지진 않았다. 멤버들도 공감했는지 자기네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저렇게 바뀌는구나.”

“형들, 우린 어느 그룹이랑 할까?”

아슬아슬하게 저길 피한 인클루가 소리 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 지원겸이 자신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한다.

“야, 야. 교환, 오케이?”

…우리랑 바꾸자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다음 순위인 원더보이즈가 어딜 뽑을지를 지켜봐야 했다.

“저흰 얼티닛 나인을 선택하겠습니다.”

[원더보이즈 ↔ 얼티밋 나인]

여기서 대이변이 발생했다. 영락없이 인클루를 뽑을 줄 알았는데 이민석이 얼티밋 나인을 호명한 것이다. 하긴, 저긴 워낙 밝은 곡이 많아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려면 딥하고 다크한 얼티밋 나인이 눈에 띄었을 것 같았다.

잠깐, 그럼 우린 자동으로…….

“잘 부탁한다?”

“이렇게 되면 하이사인과 인클루가 곡을 트레이드합니다!”

[인클루 ↔ 하이사인]

가장 하단 새로 떠오른 명단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나쁘지 않은 선택임은 확실하지만 묘하게 걱정스럽다.

그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유준이 조용히 말해 온다.

“이거 유어돌로 엮인 인연이 있어서 못하면 제대로 욕먹겠는데.”

“그러게. 멘토님네 곡을 커버할 일이 생길 줄이야.”

“우와~~ 인클루 선배님네 곡 댄브 엄청 복잡한데.”

“음역대 큰일 났네. 나 혼자론 커버 안 된다. 해신아, 무조건 너도 붙어라.”

입을 떡하니 벌린 권혜성과 음역대의 이동이 자유로웠던 인클루의 무자비한 작곡가 멤버 둘을 떠올린 이정원 역시 아찔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악은 아니었지만, 최선도 아니란 생각에 표정 관리를 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세트장 내부로 웅장한 음악이 깔리며 스크린이 변화했다. 기존에 보여 준 경연 주제에 대한 화면이었다.

“여기서 숨겨진 히든 트랙이 오픈됩니다!”

[크라운 게임 1차 경연 주제]

트레이드 커버곡 + …….

히든 트랙? 모두가 당황하여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블릭투의 최한성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걸 확인했다. 거기서 한동준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크라운 게임 1차 경연 주제]

트레이드 커버곡 + 매칭 퍼포먼스

“1차 경연은 매칭 퍼포먼스와 트레이드 커버곡 두 가지로 진행됩니다! 매칭 퍼포먼스는 두 그룹이 화합하여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으로 곡 선정은 해당 그룹의 곡들 중 하나로 진행됩니다! 트레이드 커버곡 60%, 매칭 퍼포먼스 40%의 비율로 점수를 책정하니 두 무대 모두 잘해 주셔야겠죠?”

블릭투는 애매모호한 자신들의 포지션을 여기서 가장 연차가 길고 팬덤도 큰 규모이던 디레스트로 커버 치려는 속셈이었다. MXP의 입장에선 자신들을 빠져나간 디레스트에게 큰 짐덩이를 안겨 준 것인 데다가 같은 소속사인 우리가 결탁하여 힘을 내지 못하도록 한 것도 있었다.

하나 예상 밖의 일이라면 대면식 4위와 5위가 한 팀으로 매칭된 거겠지. 아마 둘 중 한 군데에선 우리를 뽑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으악!”

“여~”

계단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온 지원겸이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러곤 멤버들 사이에 파묻혀서 잘 부탁한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지원겸을 살피던 다른 인클루 멤버들도 하나둘씩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된 이상, 기깔나게 리믹스해 주겠어.”

“야, 서은휘. 방송 중이잖아.”

진짜 괜찮은 건가. 아무튼 이렇게 서바이벌이 시작됐다. 열받는 인물들을 대거 정리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 * *

[당했네요.]

대기실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김환준에게서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발견했다. 단 네 글자로 보인 심경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뭐, 그거야 댁들 사정이고……. MXP가 첫 타깃을 디레스트로 잡은 탓에 우린 조금이나마 숨을 돌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도 엔필름이 어떻게 누를지 모르니 경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인클루 선배님들이라니… 무진장 엄하시겠지…….”

윤명이 유어돌 때의 기억을 더듬는 듯 좋지 못한 안색을 보였다. 당시에는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하드한 트레이닝이 벅찼었나 보다.

그때의 기억에 권혜성도 제 머리를 헤집었다. 문채민과 이유준은 래퍼 멘토였던 공태서가 반가웠던 듯하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며 낯익은 얼굴들이 등장했다.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의 주인공, 인클루였다.

“안녕하세요~”

“와! 드디어 이렇게 엮이는구나. 우리 진짜 묘하다, 그쵸?”

분위기 메이커로 보이는 멤버 셋이 왁자지껄하게 격려했다. 거기에 휩쓸린 강태오와 이정원을 확인하곤 슬쩍 지원겸과 대화를 나눴다.

“당한 거죠? 디레스트.”

“어, 김환준 걔, 제대로 물렸던데? 대신 거기가 그렇게 묶이면 우릴 눌러 보겠단 뜻이니까 여기도 골치 아프지.”

“1타 2피네요.”

“그런 것 같아. 아, 신해신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지원겸에게 이끌려서 몰래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등을 지니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온다.

“야, 얘네 뭔가 더 속셈이 있을 것 같지 않냐.”

지원겸은 귀신같은 촉을 지닌 사람이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럴걸요.”

“그럴걸요? 그게 아니잖아!”

“당장은 모르니까 문제죠.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네가 뭘 어떻게 알아보게?”

“그, 방법이 있어요.”

미심쩍단 표정의 지원겸이었다. 차마 여기다 대고 내가 과거 방송사 스태프였으며, 이제부터 한동준과 수상한 결탁에 대해 알아볼 거란 걸 말할 순 없었다.

무대 쪽은 지원겸과 멤버들 쪽에서 큰 힘을 내줄 테니까, 내가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저지하면 가능성 있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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