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10화 (209/328)

210화

“기자재 어딨어!”

“제작부! 미술 팀 전부 불러 모아!”

엔넷 크라운 게임의 세트 제작 현장. 정신없어 보이는 제작진과 스태프들을 보며 긴급으로 모집된 알바 무리에 껴 있었다. 혹시 몰라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까지 걸쳤는데 정말 날 알아보지 못해서 신기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오늘 세트장 제작 보조 알바 오신 분들이죠?”

“ㄴ, 네!”

연출부로 보이는 말단이 다가와선 명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긴장된 얼굴로, 또 일부는 신기하단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차례대로 불리는 이름을 듣다가 귀에 박힌 세 글자에 손을 들었다.

“조동현 씨?”

“네.”

조동현, 그건 오늘 내가 임의로 배정받은 역할이다. 한동준 PD와 배후의 속셈을 알기 위해 ‘섀도우 이레이져’란 아이템을 사용하기로 했다. 적당히 묻혀 들어가서 정보를 캐낼 계획이었다.

공식 앨범 활동도 종료된 마당에 이 정돈 직접 해 볼 생각이었는데.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도경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해 놨다.

‘방송국 아르바이트요? 크라운 게임 말하는 거죠?’

‘네, 기왕이면 적당한 신분도 하나만 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절차가 복잡하진 않아서 이름이랑 연락처 정도만 있으면 충분할 겁니다.’

그건 바로 탈바꿈할 수 있는 사람의 신분을 준비해 놔 달라는 거였다. 처음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의 서도경이었지만, 온갖 일들을 같이 해 온 사이에 이 정돈 쿨하게 해 주겠다며 허락했다.

신분도 회사 직원 중 방송과 상관없는 신분의 지인에게 사정을 구하고 빌려 온 상태다.

친구를 데려와서 하기도 하는 방송국 도급 업체의 일일 노동 인력은 생각보다 더 허술하게 뚫리는 편이었다.

사생들이 종종 들이닥칠 정도로 관리가 단순했으니까. 그걸 이용해서 오늘 현장에 침투했다.

아침 일찍 숙소를 빠져나와 출발 전부터 아이템을 사용하여 신분을 숨기고 방송국에 도착했다. 적당히 어리바리한 얼굴을 연기하며 연출부원에게 업무 지시를 받은 상태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더 쉬운걸.”

본녹화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손이 부족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특히 현장 관련 디렉터를 제외하면 항상 일손이 모자랐으니까. 추가 동원 인력이 많을 거란 생각으로 쉽게 파고들었다고 봐야 한다.

어려운 업무가 아닌 단순한 잡일 파트여서 현장에선 윗선이라고 볼 수 있는 인력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끽해야 조명과 카메라 동선을 다뤄 보는 기사들과 하급 조연출 정도가 전부이다.

어차피 오전 업무에선 크게 노린 것도 없었으니까. 간단한 잡무를 해치우며 주변 동태를 살폈다.

특히 물건을 나르고 운반하는 일들이 잦았기에 움직임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 도, 동현 씨! 길 되게 잘 찾으시네요?”

“아까 1층 로비에서 지도를 외워 놨거든요.”

나와 같이 파트를 맡은 일부 아르바이트생들에겐 관심을 받아 부담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수레를 밀며 이동하는데 같은 일을 맡은 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따라왔다.

차마 거기에 대고 3년도 넘게 다닌 직장이라서 지리는 훤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괜히 겁을 준다는 시늉으로 윽박지르는 제작진을 살피며 적당히 일을 해치우던 시간이다. 처음엔 눈매가 날카롭더니 어느 정도 알아서 착착 해내자 서서히 누그러드는 표정을 확인했다.

음, 예상보다 단축된 작업 시간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렇게 된다면 담당자에게서 나올 멘트는 뻔하다.

“예상보다 빨리 끝났네. 나머진 오후나 되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자재를 나르고 운반하는 일이 끝나도 전문가들의 제작 속도는 당겨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작업까지 기다릴 시간을 보면 우리는 중간이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송국 입장에선 돈을 주고 부른 사람들을 정해진 시간 외 편하게 놔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높은 직급도 아닌 현장에 나와 있던 사람이 담당자였으니 쉽게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휴식을 줄 순 없었다.

“선배님, 오전 잡무가 빨리 끝나서 그러는데…….”

“그럼 다른 쪽으로 돌려. 기자재 빠진 자리 정리하는 곳으로도 보내고. 아, 제작부에서 사무실 쪽으로 전달할 거 많다고 하지 않았나?”

“네, 몇 분은 창고로 배치하겠습니다. 제작부 전달 물품은 저분들이 방송국 지리를 아실까 싶어서…….”

나왔다, 사무실. 현장이 이렇게 바빠도 윗선들은 중요한 날이 아니면 굳이 체크하러 오지 않았으니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여긴 모두 맡은바 일이 있어서 잡무로 빠져 나올 확률이 컸다.

염려하는 듯한 연출부원의 말에 아르바이트생 일부가 날 힐끔거렸다. 오전 내내 방송국 지리가 익숙하다는 듯이 굴었으니 어지간해선 이런 시선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는 듯한 리액션을 취하니 연출부원과 대화 중이던 사람도 여길 쳐다본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 줄까 말을 고르는 사이에, 아침부터 주절주절 말이 많던 알바생 하나가 손을 들어 설명했다.

“저기, 저, 동현 씨? 방송국 로비에 있던 지도를 외우셔서 잘 다니시더라고요…….”

어디든 있지. 저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 도움이 될 걸 알아서 적당히 친절을 베풀었는데. 역시나 바로 은혜를 갚아 온다. 연출부원의 환해진 얼굴 너머로 스태프가 잘됐다며 고개를 까딱이곤 그대로 사라진다.

“됐네, 저기 쟤한테 맡겨라. 나 이제 바쁘니까 나머진 알아서 해!”

“네!”

멀어져 가는 스태프를 보며 아직은 미숙해 보이는 연출부원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이건 방송국에 아르바이트를 명목 삼아 잠입한 뒤 4시간 만에 얻은 자유 이동권이었다.

* * *

“어째 안무 연습보다 이게 더 힘드냐……. 내가 배가 부르긴 했나 봐.”

손수레 가득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끌면서 복도를 거닐던 중이었다. 기존 세트장과 적당히 멀어지자마자 실실 웃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달리 목에 걸린 임시 통행증이 오늘 나의 신분을 증명해 줬다.

스케줄로 방송국에 왔을 때보다 훨씬 보는 시선이 적은 최적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권혜성이나 윤명이 있었으면 두근거린다고 난리 쳤겠지.”

인적이 드문 복도를 거닐며 어딘가에 있을 멤버들을 떠올렸다. 일부는 여타 스케줄로, 또 일부는 연습 등의 개인 사유로 뿔뿔이 흩어져 하루를 보내고 있을 놈들이었다.

나는 서도경과 날짜를 조율하여 통으로 일정을 비워 놨다. 적당히 개인 사유가 있다며 빠져나왔다고 봐야 한다.

이러고 있을 거란 건 예상 못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단은 저 수레 위의 서류를 반 정도 날리고 진행해 볼 작정이다.

“하여간에 방송국 놈들, 정도를 몰라요.”

한동준 PD가 있을 사무실의 주축 파일만 전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알바생 하나가 잡무로 사무실 쪽을 오간다고 들은 다른 팀들에게서 이런저런 일들이 몰려왔다.

어차피 가야 할 거 여기 것도 부탁한다며 수레 위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떠넘긴 것이다.

그래, 차라리 이게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일한다는 핑계로 빠져 있을 시간을 벌 게 된 것이다.

“저기, 현장에서 스크립터 자료 가져다드리러 왔는데요…….”

“어?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거 저기 책상 위에 올려놓으세요!”

“네~”

익숙해진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서비스 스마일을 흩뿌렸다. 임시 통행권을 목에 걸고 익숙한 서류들을 건네 오니 아무도 내 신분을 의심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몇 차례 사무실들을 옮겨 다녔을까, 드디어 크라운 게임의 메인 본부인 팀 순서가 다가왔다. 서류 오케이, 녹음기 오케이.

옷 여기저기 분산해서 넣어 둔 녹음기를 확인한 뒤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사무실로 접근했다.

“아, 안녕하세요……. 현장에서 심부름 왔는데요.”

수더분한 척 어색하게 눈을 굴리자 내부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힐끔 여길 돌아본다. 당황한 모습으로 목에 걸고 있는 명찰들을 확인했다.

여기엔 한동준 PD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기 보이는 테이블 위에 올려놔 주세요. 3부 맞죠?”

“네? 네. 맞는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따 갈 때 저 방 안에 들어가 보면 녹색 파일이 하나 있거든요? 그것 좀 챙겨서 김철민 촬영 감독님께 전달해 주실래요? 어차피 이따 복귀하실 거죠?”

“네~”

대략적인 인원을 파악한 후 방으로 이동했다. 안쪽으로 가까워지니 작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문을 열고 서류를 챙기는 척 조용히 귀를 기울여 봤다.

“네, PD님. 언제쯤 올라오시나요? 30분 정도요? 네, 아… 방청객 모집을요? 네, 네. 블릭투 쪽 비중을 70% 정도로 높이란 거죠? 아, 네. 근데 그러면 현장 투표의 공정성이……. 넵,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네, 네.”

일단 한 건 접수 오케이. 지금 통화하고 있는 저 사람은 PD를 보좌하는 조연출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재수 좋게 한동준과 전화하던 타이밍을 잡은 것 같은데 내용으로 보아 1차 경연에서 어떤 수법으로 다른 팀을 밀어줄지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일부만 죽이면 눈에 띄니 차라리 한 그룹을 올려 치기 하는 거군. 현장 투표 반영도가 높은 편인 경연 프로그램이었으니까. 이런 식의 꼼수를 사용하려고 했었나 보다.

밖에 있던 직원이 가져오라 시킨 파일을 챙기고 숨죽여 그 방을 빠져나갔다. 악의적인 편집은 1차 경연 이후 지시가 내려올 테니 지금 저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인사를 하고 크라운 게임 사무실을 탈출했다.

“분명 방송국 안에 있어.”

올라오는 데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으니까, 분명 한동준 PD는 여기 어딘가 있다는 소리였다. 현장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사무실도 비운 상태라면 지금은 누군가와 만나고 있거나 통화 예정이란 뜻이었다. 잘하면 더 큰 건을 건지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척 부지런히 복도를 거닐었다.

“내가 당사자라면… 무조건 인적이 드문 곳.”

순간 머릿속으로 몇 군데의 장소가 스쳐 지나간다. 그중 여기서 가장 멀지 않은 곳을 찾으니 코너를 돌기 전부터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빙고.”

끌고 있던 수레를 들어 올린 채로 코너 너머의 자판기 옆에 주저앉았다. 유어돌 같은 방송을 촬영하던 시기도 아니니까 복도에는 카메라가 있을 리 만무하다. 마음껏 엿들어 볼까 싶어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방송국의 가장 깊은 장소, 신분이 없으면 올라오지 못할 장소라 그랬는지 꽤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가고 있는 듯하다.

어라?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되는 음성인 듯하다. 적어야 둘, …많으면 셋. 아무래도 상대방과는 직접 만남을 가진 듯하다.

이러면 나야 좋은 일이라며 사전에 무음 설정을 해 놓은 핸드폰을 꺼냈다.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르고 코너 너머로 슬그머니 들이민 순간이었다. 액정에 찍혀 오는 얼굴들에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1차에선 디레스트는 누를 수가 없었다니까요. 여기 안 부장님도 생각하셔야죠.”

“허허, 미안합니다. 우리 애들이 참 괜찮은데 아직 연차에서 밀려서.”

“그럼, 하이사인이라도 건들던가요. 한 PD님, 저희가 PD님께 드린 돈이 얼만지 아시면서 그렇습니까?”

“…후, 알겠습니다. 안 부장님께서도 원하셨었죠?”

“예, 대면식에서 그런 쪽을 당했으니 얼마나 원통합니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1차에선 블릭투와 디레스트를 연계해서 위로 끌어올리고 다른 그룹들을 눌러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이사인 쪽은 여론 조작에 들어가시는 거죠? 김 팀장님?”

“거기 리더 한 놈 가정사를 좀 찾아 놓은 게 있습니다. 시기 맞춰서 부풀려 풀 테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안 부장에 김 팀장. 대화 내용을 봐선 MXP과 블릭투가 있는 소속사의 인간이었다. 앞으로 움직일 방향까지 알게 되니 금상첨화의 순간이었다.

…뭐, 그 방향 중 하나는 내가 걸려 있는 것 같았지만.

아, 애들한테 다 들키겠는데. 내가 보육원 출신이란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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