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11화 (210/328)

211화

다시 찾아온 크라운 게임의 경연 날이다. 녹화장 내부는 묘한 긴장감으로 들떠 있었다.

촬영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내내 서로를 힐끔거리는 눈길이 오가고 있다. 서로가 어떤 무대를 준비했는지 과정을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순서, 저렇게 나왔구나.”

강태오의 말에 세트장 센터를 확인해 봤다. 거기엔 대면식 1위로 뽑혔던 디레스트가 고른 경연 순서가 적혀 있었다.

조작을 위해서인지 제작진은 출연진에게 정보를 오픈하려 들지 않았다. 보통 같았으면 경쟁 심리를 위해 써먹을 법한 저런 소스조차 은밀히 진행했다.

[매칭 퍼포먼스]

1. 원더보이즈/얼티밋 나인

2. 인클루/하이사인

3. 디레스트/블릭투

[트레이드 커버곡]

1. 얼티밋 나인

2. 원더보이즈

3. 하이사인

4. 인클루

5. 블릭투

6. 디레스트

결과물을 보아하니 디레스트가 블릭투를 상대로 고전을 한 모양이다. 같은 소속사이자 이젠 한편인 우리를 중간까지 당겨 주려고 제법 많은 노력을 한 듯하다.

눈치 보면서 할 수 있던 건 저 정도라 이건가? 간간이 소통해 온 김환준의 노고에 슬쩍 반대편 자리를 쳐다봤다.

블릭투 녀석들이 붙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차단 중인 모습이다.

“선배님, 그 이번 무대에서…….”

“싸비에 들어가는…….”

그걸 확인한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곁에 있던 이유준이 몸을 숙이며 조용히 속삭여 왔다.

“철통 보안이네.”

“혹시라도 우리랑 정보 공유가 될까 봐 막은 것이겠지.”

“상관없어. 이기면 그만이야.”

“야, 이정원.”

초반의 흔들리던 모습은 던져 버린 이정원이 덤덤하게 말해 온다. 그때,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문채민이 내 옷깃을 흔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긴장된 얼굴로 심호흡을 하는 게 아직은 미성년자인 멤버다웠다.

“…형, 근데 진짜 괜찮은 거야? 내가 센ㅌ…….”

“쉿.”

방청객 진입 전 오프닝을 먼저 찍는 장소라지만 비밀에 부쳐야 하는 사항이었다. 권혜성과 윤명이 인클루의 멤버와 대화하는 척 문채민을 가로막는 장면이 보였다.

권혜성과 윤명 너머로는 지원겸이 이쪽을 향해 손짓하는 중이다. 입을 뻥긋거리는데 자세히 읽으니 사전에 나눠 둔 지시를 하고 있었다.

‘알지?’

‘네.’

작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프로그램의 MC인 안지하가 등장했다.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이다.

* * *

“오, 저 이런 건 처음이에요.”

어쩌다 보니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에 오게 된 날이었다. 직장 동료이던 한다은과 최정윤의 꼬임에 넘어가서 방청 신청을 한 것이 우연히 당첨되었다.

한다은 쪽은 이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다지만 예상외인 최정윤의 행보에 흥미 반 기대 반으로 자리한 곳이었다.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니 어려 보이는 학생들 및 저와 비슷한 연배의 직장인들도 많아 보인다.

“현진 쌤도 넘어와 줄 줄은 몰랐지~ 박 선생님, 오늘 입덕해서 가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내가 선생님들 때문에 케이 팝을 듣기 시작한 건 맞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한다은의 너스레에 손을 내젓다가도 무대로 보이는 저편을 쳐다봤다. 최정윤은 옆에서 ‘신해신’이란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진짜 적응 안 된다……. 한 쌤은 그렇다 치고, 최 쌤까지 이럴 줄이야.”

“박 선생님도 보면 아실 거예요.”

고개를 내젓는 내 모습에 최정윤이 작게 웃어 보였다. 이과 감성 무감각 인간까지 사로잡은 아이돌 세계가 두렵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크라운 게임의 MC를 맡은 가수 안지하입니다.”

본격적인 스테이지에 들어가려는 듯, 갈라지는 무대 위로 안지하가 나타났다. 대중 인지도가 높은 인물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라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1차 경연부터 2개나 보여 주네. 녹화 시간 꽤 길겠는데요?”

“엑, 진짜요?”

“네~ 저기 매칭 퍼포먼스랑 트레이드 커버곡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트레이드는 6그룹이 한 무대씩 하는 거고, 매칭은 두 팀이 묶여서 총 3개의 공연이 더 있단 소리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녹화로만 9곡? 세트장 치우고 다시 정리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열 시간은 잡아야 할걸요?”

“헉…….”

한다은의 부가 설명에도 최정윤은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점검했다. 슬쩍 보인 무릎팍 위론 오랜 녹화를 감당하기 위해 준비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놓여 있었다.

아, 나만 이런 걸 모르고 온 거구나. 암담한 심정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그사이 안지하의 소개에 의해 매칭 퍼포먼스의 첫 팀이 등장하고 있었다.

* * *

“이민석,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확실히 유어돌 이후로 능숙해졌어요. 그쵸?”

“그러게요. 파이널 때 애들이랑 같이 No limit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고함과 비명으로 아픈 귀를 누르며 한다은과 최정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미 저긴 다른 세계로 들어가 있는 듯하다.

사실 처음 보는 아이돌 공연이 퍽 재미있긴 했다. 화려한 동작과 빵빵한 사운드에 케이 팝 특유의 컨셉까지 합쳐지니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닌 듯하다.

“그나저나 인클루랑 콜라보라~ 오늘 이거 기대하는 사람들 엄청 많던데.”

“은근히 친분 자랑했잖아요. 스승과 제자의 만남 서사도 꽤 먹히는 편이었죠.”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번에 등장하는 게 그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하이사인.’ 직장 동료 둘의 본진이자, 데뷔 앨범의 티저를 함께 보게 됐던 그 사람들 말이다.

풋풋한 티가 났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경연에 나온다고 하니 그저 재밌었다. 대충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유어돌인가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당시 멘토를 맡았던 사람과 함께 무대를 꾸리게 됐다고 했다.

얼마나 잘할까 기대하며 등장하고 있는 아홉 남자를 바라봤다. 전부 나온 건 아닌 모양이네. 그들이 모습을 비춤과 동시에 사방에선 뜨거운 함성이 이어졌다.

“으악, 쩐다. 얘들, 지금 저런 거 처음 입었죠. 그쵸?”

“…인클루 팬들도 난리 났겠는데요. 데뷔 이후 안 한 무드 아니에요?”

한다은과 최정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서 있는 멤버들을 구경했다. 청바지와 흰색의 스니커즈에 후드 티를 입거나 모자를 쓰는 등, 제 나이다운 발랄한 코디를 하고 있었다.

믹스 앤 매치라고 해야 하나. 반은 청으로 이루어지고 반은 흰 면으로 이루어진 셔츠를 걸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그 무뚝뚝한 최정윤을 입덕시킨 신해신이라는 사람일 것이다.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채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릎팍이 훤히 찢어져서 살갗이 다 드러난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앞머리를 부스스하게 내린 얼굴이 희게 빛났다. 웃고 있는 표정하며 분위기가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그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상이었다.

“아, 미친.”

“최 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남자가 신해신에게 어깨동무했다. 청으로 된 반바지를 입은 채 캡 모자를 거꾸로 눌러쓴 개구진 얼굴의 멤버였다.

“아악! 혜성아! 얼마 만이야! 내 새끼! 장꾸룩!”

반응을 보아하니 저기가 한다은의 최애라던 권혜성인 것 같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고개를 돌리던 사이, MC인 안지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서 시간을 끌려는지 등 뒤에선 분주하게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팀 구호부터 들어 볼까요?”

“자, 다들 준비됐지. 하나, 둘!”

“안녕하세요~ 저희는 클루X사인입니다!”

가운데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던 남자의 외침에 맞춰 양 사이드로 2명씩 손을 겹쳐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

“어때요, 저희 잘 어울리나요? 워닝들 입 벌어진 거 너무 잘 보인다~”

“꺄악!”

“하이눈을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능글맞은 남자의 리드를 이어 신해신이 손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나는 한다은과 최정윤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저기, 저 사람이 인클루 리더이자 유어돌 때 애들 멘토였던 지원겸이에요! 방청석 난리난 건 인클루가 데뷔 초 이후에 절대 안 했던 컨셉이라서 그런 거고! 악, 그나저나 미쳤나 봐! 저희 애들도 연차 적은 거에 비해선 도전 안 했던 스타일링인데……!”

“한 선생님, 저기 곡 나왔어요!”

“헐, 헐, 어디요? 아, 미친. 인클루? Piece of cake?”

스크린 위로 떠오른 멘트에 사방에선 경악과 함성이 이어진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니 차분하게 제 핸드폰을 뒤적인 최정윤이 내게 무언의 화면을 하나 보여 줬다.

거기엔 많이 어려 보이는 다섯 남자가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 있어 살펴보니 일부는 저 무대 위의 남자들로 추정된다.

“Piece of cake. 인클루 1집 수록곡 중 가장 명곡이라고 불린 노래예요. 근데 얘네가 미는 컨셉이랑 너무 다른 방향이라서 무대에서 딱 한 번 보여 주고 봉인된 걸로 유명한 노래거든요. 팬들한텐 거의 치트 키? 라고 해야 할 거예요. 근데 그걸 지금 5년도 더 지나서 저희 애들이랑 한다니까 난리가 난 거고요.”

“아, 심지어 옷도 달라! 컨셉이 완전 바뀌었는데요? 내가 아는 피오케는 더 원색에 큐티 뽀짝이었는데! 돌았다, 우리 애들 피오케!”

확실히 사진 속에서 본 옷과 달리 지금 차림새는 다른 결이라고 해야 했다. 좀 더 까리한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미국 하이틴 영화 속 잘나가는 소년들의 집단처럼 보인다.

“아, 혹시.”

그제야 뒤에 있던 세트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서 나왔던 팀과 달리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철망과 파란색으로 깔린 코트에 노란색의 캐비닛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놓인 소품을 보아하니 저건 미식축구에서 이용되는 공이었다. 사이드로 드럼통과 이동 벤치로 보이는 좌석까지 마련되니 하이틴물에서 보이던 미식축구 그라운드와 선수들의 로커 룸이 꾸려졌다.

“미쳤다…….”

스크린 위로 떠오른 인공 잔디와 푸른 하늘을 보니 경기장에서 팀을 응원하는 듯한 구호가 이어진다.

[TEAM. CLUESIGN LET’S GO!]

삐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듯한 알림과 함께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든다. 때맞춰 낮아지는 조도와 함께 공이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 한 대는 캐비닛 앞에 서서 손으로 공을 굴리는 사람을 집중 촬영한다.

탕- 남자의 화려한 손놀림 아래 열려 있던 캐비닛의 문이 닫혔다. 각종 클립과 사진으로 화려한 배경을 등지고 공을 던지고 받던 남자가 벤치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제 공을 패스했다.

[READY?]

[OKAY.]

그게 무대의 시작이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남자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밝아지는 조명과 함께 화창한 날씨의 배경이 나타난다. 뒤쪽에서 등장한 여러 사람이 가운데로 모인 멤버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이름을 외쳐 왔다.

옆구리에 공을 끼고 있던 남자를 필두로 멤버들이 걷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지금 이건 미국 하이스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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