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놀랐다는 분위기는 간신히 가라앉았다. 다들 이상하단 기미를 보였지만 편집될 건 분명해 보였으니까. 사전에 언질을 들은 것인지 태연한 안지하에 의해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보상에 대한 설명이었다.
“매칭 퍼포먼스는 1위부터 3위까지 각 90점, 60점, 30점이 부여됩니다. 또한 트레이드 커버곡 역시 1위부터 6위까지 180점, 150점, 120점, 90점, 60점, 30점이 차등 지급되겠습니다. 그렇게 나온 최종 점수 오픈해 주세요!”
[1차 경연 순위]
1. 블릭투 (240)
2. 원더보이즈 (210)
3. 얼티밋 나인 (150)
3. 하이사인 (150)
4. 인클루 (120)
4. 디레스트 (120)
다들 방송이라고 제 나름 리액션은 하는 것 같은데 티가 많이 나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만 잡은 게 아니라 디레스트도 같이 눌렀군. 거기다 매칭 퍼포먼스로 우리와 엮인 인클루가 손해를 봤다. 연차랑 팬덤 라인이 있으니 사전부터 경계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럼 다음 주제를 오픈해 보겠습니다.”
어이없는 심경이 가라앉기도 전에 대형 스크린 위로 문구가 떠올랐다.
[2차 경연 주제]
체인지업 (Change-Up)
“2차 경연 주제는 바로 ‘체인지업 (Change-Up)’입니다. 지금 이 박스 안에는 제작진이 준비해 놓은 7개의 그룹 노래가 들어 있습니다. 자, 각 팀의 대표분들은 나오셔서 용지를 하나씩 뽑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걸 보면 이번 주제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두루뭉술한 내용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일단 나오라고 하니까 손을 들어 이정원의 등을 건드렸다.
“네가 나가 볼래?”
“내가? 그러지 뭐.”
블릭투 놈들이 신경 쓰여서 이정원을 내보내니 시원하게 안지하가 있는 단상으로 다가간다. 그러곤 우글우글 모인 사람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들었다.
일렬로 선 각 팀의 대표들은 안지하의 외침에 따라 종이를 펼쳤다. 거기 적힌 내용은 사람들이 앉아 있던 계단 형식의 좌석 바로 위 모니터에 떠올랐다. 아, 이런… 생각지도 못한 컨셉의 등장이다.
“네, 이번 경연의 주제 체인지업, 어떤 걸 체인지하느냐? 그건 바로 성별입니다! 여러분이 뽑으신 걸 그룹의 노래를 또 다른 스타일로 승화해 주세요!”
“걸 그룹? 헉, 진짜네! 우린 누구야?”
“어? 저 노래하는 거야? 우리가?”
사방이 난리통이었다. 저마다 머리 위에 적힌 곡을 확인하려고 계단을 내려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먼저 훌쩍 이동해 있던 권혜성이 양손으로 뺨을 되짚었다. 활짝 개봉된 눈과 입이 얼마나 놀랐는지 대변해 준다.
“대박… 형들! 채민아! 노래 확인해 봐!”
“뭐야, 왜 그래, 혜성이 형. …와.”
문채민이 혀를 내두른다. 우르르 내려가 천장을 올려다보니 나는 처음 보는 노래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원곡자를 확인하게 됐다. 저 사람들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런이프 - Catch Me Now]
아전체에 출연했던 걸 그룹이다. 혼자 어리둥절해 있으니 이유준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눌렀다. 그러곤 귓가에 대고 노래에 대해 설명해 준다.
“형, 저 노래 좀 끈적거리는 무브야.”
“뭐?”
거기서 권혜성과 문채민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이유준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골치 아픈 곡이 걸린 듯하다.
투표용지를 뽑은 이정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까 잊고 있었다. 이정원 얘, 운 스탯이 ‘D’였다.
* * *
“…큰일 났네.”
대기실에 돌아오자마자 한 건 다음 경연곡이라는 런이프의 노래를 들어 보는 일이었다. 강태오도 해당 곡을 모르고 있었는지 이유준이 틀어 준 음악 앞에서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멍한 표정의 윤명은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대기실을 빙글빙글 돌던 권혜성이 앉아 있던 문채민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어 댄다.
“우와악! 우리 이거 어떡해. 채민아, 이 노래 웨이브가 엄청 많다! 포인트 안무, 살려야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저기, 어차피 편곡해야 하는 거잖아.”
“맞아. 체인지업이라고 했으니까 원곡 그대로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정원이 형은 너무 담담한 거 아니야?”
“이렇게 된 거 이겨야지. 너희도 점수 봤잖아.”
“아아…….”
아까부터 유달리 침착하다 싶었는데, 정신이 경연 결과에 쏠려 있었나 보다. 녹화가 끝난 이후 다들 안 그런 척 블릭투 방향을 힐끔거리는 걸 확인했다.
개중 알차게 이용당한 얼티밋 나인과 원더보이즈는 해탈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마 본방송이 나가면 욕을 먹는 타깃은 저기가 될 가능성이 컸다. 블릭투 방패까지 준비하다니. 과감하지만 나름대로 머리는 쓴 모양이다.
디레스트는 말 그대로 버려졌기에 일부 멤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게 끼게 된 지원겸도 부글부글 속이 끓는 듯했다. 일단 스태프들의 눈을 피해 모두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대략적인 분위기라도 파악해 볼까 싶어서 멤버들을 데리고 다른 팀의 대기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얼티밋 나인을 마주쳤다. 손제완과 리더인 류정이었다.
“해신아~~~”
“어어, 왜…….”
친근감이 넘치는 녀석답게 보자마자 달려와 어깨에 매달린다. 류정은 굳이 막을 생각이 없었던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강태오는 그런 류정에게 뽑힌 노래에 대해 질문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얼티밋 나인은 평소 다크한 분위기와 반전되는 상큼한 걸 그룹 노래를 하게 됐다.
“거기도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하하, 그렇긴 하죠. 그것도 그렇고… 앞으로의 일이 좀 신경 쓰이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이거 인정 안 하시잖아요.”
류정은 트레이드 커버곡 경연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치곤 안색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성실한 성향이었는지 손제완도 어깨에 붙어 씩씩거렸다.
“걔네 도대체 뭐야? 이쪽 더러운 건 알았지만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쉿. 여기 듣는 귀 많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입을 틀어막으니 눈썹을 치켜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 손제완의 뒤에서 있던 윤명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걸 발견한 모양이다.
“…어, 민석이 형이다.”
“명아, 얘들아.”
지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는 건 원더보이즈의 이민석이었다. 옆에는 멤버 둘을 단 채로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는지 터덜터덜 다가오고 있다. 이민석의 등장에 얼티밋 나인 이인방이 이만 가 보겠다며 말을 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류정에게 뒷목이 잡힌 손제완이 우리를 보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조심하세요.”
“해신아, 채민아, 명아. 안녕~~~ 내가 전화할게!”
“어, 어… 그래라.”
“제완이 형, 해신이 형 엄청 좋아하네.”
“그러게. 저 사람이랑 형, 되게 친하다.”
이어지는 멤버들의 대화를 듣던 사이, 이민석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태오야, 너 이 자식, 여전히 무대 잘하더라.”
“뭘. 그나저나 거긴 좀 괜찮아?”
“하아, 글쎄~ 경연 나오면서 각오한 일이긴 한데. 그때랑 흐름이 너무 다르네.”
“나쁜 방향으로지.”
“정답.”
강태오에게 반갑다며 말을 거는데 등 뒤에 서 있던 멤버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까, 제대로 소개할 틈이 없었구나. 얘들아, 여긴 너희도 유어돌 봐서 알고 있지? 이름 알려 주기엔 인원이 너무 많다. 그리고 여긴 우리 애들. 성유랑 시몬이.”
“제대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무대 잘 봤습니다. 이성유예요.”
“시몬입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권혜성과 윤명은 그 둘과 대화를 나눴다. 이민석은 나와 이정원 그리고 이유준을 손짓으로 부르며 손날을 세워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방금, 얼티밋 나인 사람들도 얘기했지. 이번에 우리랑 저기가 독박 쓴 거.”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민석에게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아아, 난 정말 서바이벌이랑 안 맞나? 아니다, 차라리 그땐 나았지. 뭐, 불만하기도 뭐하네, 너희도 끌어내려진 것 너무 잘 보이니까. …인클루 선배님들이랑 디레스트 선배님들 쪽은? 가 봤어? 우리보단 너희가 친하잖아.”
“아직이긴 한데…….”
내 얘기를 들은 이민석은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골치 아프다고 하는 것치곤 연예계에 단련이 되어 있던 듯 무던해 보인다. 추가로 알게 되는 정보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며 이민석과 그 일행들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개방이 된 복도라서 몸을 사리는 듯했다.
인클루와 디레스트라……. 남들 눈에도 우리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성이 보였나 보다. 그럴 때 붙어 있는 건 위험한 일이니, 오늘은 만남을 피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건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이유준이 어깨를 붙여 조용히 의견을 덧붙였다. 팔짱을 낀 이정원은 벌써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리로 보이는데. 안 그래, 형?”
“그래, 차라리 회사에서 만나자.”
“멘토님 쪽은 형한테 부탁 좀 할게.”
“…하아, 결국 나냐.”
“신해신, 너만큼 원겸 멘토님이랑 친한 사람이 없잖아. 리더, 부탁한다? 우리도 나름의 머리는 굴려 볼 테니까.”
이정원의 거친 언행에 알겠다며 권혜성과 윤명의 등을 떠밀었다. 강태오와 대화를 나누던 문채민은 눈치껏 돌아가는 무리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복도 너머에서 낯익은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이 복도가 문제였군. 쉴 새 없이 사람이 나타나는 신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들 저기까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상대방이 다가오자 이정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누구야, 정원이 형 아니야. 그동안 제대로 인사를 못 했지?”
“…어.”
“여전히 쌀쌀맞네. 대면식 때랑 좀 반대 분위기인가?”
그건 블릭투의 최한성이었다. 이정원을 시선으로 훑어 내린 최한성이 이정원의 뒤에 서 있던 멤버들을 쳐다봤다. 눈빛이 영 불량한 것이, 귀찮은 일에 휘말렸단 걸 깨달았다.
다른 멤버들은 이정원이 블릭투의 멤버 하나와 악연이 있단 걸 눈치챈 듯했다. 권혜성이 한발 앞장서서 이정원을 가로막듯 팔을 뻗었다. 윤명도 얌전히 손을 뻗어 이정원의 뒤에 찰싹 붙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에 이정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얘들아, 고맙긴 한데. 권혜성, 너 때문에 앞이 안 보이잖아. 그리고 윤명, 무거우니까 내려와.”
이정원의 말에 둘은 얌전히 지시를 따랐다. 그사이 최한성은 삐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이는 꼴을 보니까 귀찮은 인간한테 걸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풀은 안 죽었네.”
“어, 뭐, 그럴 이유가 있나. 무대 자체는 꽤 훌륭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고, 멤버들도 그렇고 다들 나름 만족하거든. 아, 다른 그룹들도 잘 봤다고 하더라.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이지.”
“…대박, 정원이 형, 짱 세다.”
“쉿, 혜성이 형, 다 들려.”
이정원의 전투력 게이지가 오르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구경했다. 강태오는 골치가 아픈 듯 속삭이는 문채민과 권혜성을 끌어당겼다.
최한성은 이정원의 말을 듣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것 같았다. 하긴, 방금 저 얘기는 블릭투가 조작으로 1위를 먹었다는 사실을 돌려 깐 거였으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씩씩거리던 최한성이 눈을 굴려 이쪽을 쳐다봤다. …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묘하게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기사 났던데. 신해신 형? 맞죠? …혹시 아직 못 보셨나?”
“…저요?”
“네~ 정말 모르나 보네……. 응원할게요. 그럼 전 이만.”
영문을 몰라 하는 이정원을 앞에 두고 최한성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깨까지 으쓱이는 제스처를 한 뒤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올 게 왔구나. 나는 지금 저 얘기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야, 신해신. 무슨 소리야.”
“형, 뭐 알고 있는 거 있어? 방금 그 얘기는 뭔데.”
몸을 돌린 이정원이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세운다. 옆에 있던 이유준까지 합류하니 이거 원, 갇힌 꼴이 되었다.
“어… 예상되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아, 얘들아. 아까 내가 말한 거 잊지 않았지?”
“뭐?”
“대기실에서 말했잖아. …너무 놀라지는 말라고.”
아마도 그건 그거일 거다. 내 가정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