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들어오라며 부른 것치곤 오랫동안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얼마 전 터진 기사를 신경 쓰는 것인지 묘한 침묵도 섞여 있었다. 애써 주제를 돌리는 게 빤히 보여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적당히 장단에 맞춰 웃어 주자 자연스레 크라운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 우리가 하이사인 후배님들이랑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거기 딱 빼앗겨 버렸네.”
“빼앗겼다고 하기도 뭐하지 않아? 우리가 먼저 잡혀간 거지.”
“…하아.”
윤형이라고 했던가. 꽤 쾌활해 보이는 인상의 멤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디레스트도 크라운 게임 내부의 조작으로 크게 덴 상황이었다.
김환준이 있으니까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그룹이 통으로 소속사를 이적했을 정도라면 흘러가는 흐름 정도는 파악했을 게 분명했다.
이걸 모르는 척해 줘야 하나.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니 내 눈치가 보였는지 외국인 멤버가 능수능란한 영문 발음을 자랑하며 괜찮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이사인, 무대 잘 봤어요. ‘Piece of cake’이랑 ‘Code' B’ 할 줄은 몰라서 나도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Code' B’는 추천받아서 했던 건데.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음? 추천? 혹시 지랄겸… 아니, 아니, 취소. 이건 못 들은 걸로 하고, 지원겸이 추천해 준 거예요?”
…지랄겸. 거기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 인간의 성질은 디레스트 멤버들에게 유명했었던 모양이다. 한 귀로 듣고 흘려 넘기는 척하며 대충 맞다는 뉘앙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추천 리스트를 유도하긴 했지만, 반은 정답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좀 더 이어진 이야기에선 판을 뒤집어야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방해 공작이 있을 게 뻔해 보안에 힘을 써야겠다는 대화도 오갔다.
아직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하기도 전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연습실이 들어차 있었던 거구나.
슬슬 회의 비슷한 걸 해야겠다며 디레스트의 멤버들이 몸을 일으켰다. 회사 직원들이 큰 방향은 잡아 줄 텐데, 연차도 있으면서 먼저 나서려고 하는 열혈 경향이 있었다.
뭐, MXP로 사이가 꼬이지만 않았더라도 나름 괜찮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닌가? 저기서 흐뭇하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환준을 보자 그런 마음도 전부 사라지는 듯하다.
여기도 연습에 들어갈 기미가 보이고, 피팅하러 간 애들도 나올 시간이 되었으니까. 실례가 많았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지금 가는 거예요? 에이~ 더 있다가 가지.”
“비밀 보안이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해신 씨는 어디 가서 막 말하고 다닐 것 같지 않단 말이에요~ 게다가 이제는 한편이잖아요?”
김환준을 제외하고 디레스트에서 인연이 있는 도민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비밀 유지를 해 달라는 엄수일 것이다. 하여간에 성격 더러운 인간들이 너무 많아.
피곤함이 몰려들어 알겠다고 응답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로 쫓아 붙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뭡니까.”
“마중이요.”
아까부터 줄곧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김환준이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푸는 멤버들을 뒤로한 채 인근까지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다섯 살배기 애도 아니고. 또 무슨 말로 내 복장을 뒤집어 놓을지 찜찜하기만 하다.
…애들이 이걸 보지 말아야 할 텐데. 다 아는 복도를 거닐면서도 괜히 사방을 경계하게 됐다. 믹싱실에 간 두 놈에게 보인다면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얼른 하시죠.”
“어떤 거요?”
“하고 싶은 말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본론은 빠르게. 저도 숙소 가 봐야 하거든요.”
“안 그러는 척 성격 진짜 급하다니까.”
서운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김환준은 무시했다. 할 말 없으면 먼저 가 보겠다고 하니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 온다.
“…그, 괜찮아요?”
“네?”
“…하, 괜히 나도 책임이 있는 것 같고 막 그러네. 나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닌 거 알죠? 근데 나도 사람이긴 한가 봐요. 뻔뻔하게 나가려니 영 신경이 쓰이네.”
예상외의 내용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저 인간, 나한테 사과한 거야? 아마도 이번 가정사 폭로 사태에 대한 책임을 김환준이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MXP측에서 했다는 확신도 없는데. 매번 얄밉게 굴다가 이렇게 나오니 뭐라고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보다 담담한데, 주변에서 더 난리인 듯하다. 됐다며 손사래를 치고 나서야 김환준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온다.
“걱정할 건 없었나 보네요.”
“걱정하긴 했어요?”
“날 너무 사이코처럼 보는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쪽이 했던 것 좀 생각하시죠…….”
틱틱거리는 내 행동을 보던 김환준이 복도 벽에 기대서선 팔짱을 꼈다.
“진짜 괜찮은가 보네. 흐음, 그럼 다른 얘기를 해 볼까요? 2차 경연, 어떻게 할 거예요?”
“…염탐은 사절인데요.”
“왜요, 좀 알려 주지. 우리 불쌍하지 않아요?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하물며 이를 드러낸 적까지 코앞에 있는데……. 우리가 거기 대신 1차 방어선도 해 주고 있잖아요. 디레스트가 무너지면 다음은 하이사인일 텐데. 힘 좀 합쳐 봅시다.”
뻔뻔한 인간 같으니라고. 느물느물 미소 짓는 김환준의 얼굴에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인간도 전 회사에 이용당한 입장이라 마냥 쓴소리만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편을 먹기에도 애매모호한 감이 있었다. 소속사별로 하는 싸움이 아니니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 하기도 했다.
“저희도 진행 상황은 비슷하거든요. 얘기해 주고 싶어도 없으니까 좀 더 나중에 찾아오든가요.”
“…어? 진짜?”
“은근슬쩍 반말하지 마시죠.”
내 이야기에 김환준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말해 봤자 이렇다 할 내용도 없을 것 같으니 몸을 돌렸다. 김환준은 더 이상 나를 쫓아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까 있던 곳에 서서 여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애들이랑 마주칠까 서두르는 걸음 뒤로 김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서 고개를 틀어 보니 씨익 호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환준이 보였다.
“잘 가요, 후배님. 조만간 나랑 밥이나 한번 먹죠.”
내가 왜 너랑 밥을 먹냐. 입 밖으론 꺼내지 않은 채 한숨을 내뱉었다.
* * *
그렇게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이후였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맞춰 의상 피팅을 끝낸 윤명과 문채민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믹싱실에 가 있다던 둘에게도 연락을 넣어 5명 먼저 귀가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근래 너무 바빴기에 저마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까 믹싱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이정원은 이유준과 문채민의 방에 가 있었다.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나도 해야 할 일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워드 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1회
강렬함: 100%
이건 아주 오랜만에 보는 키워드 룸이었다. 수치를 채운 건 한참도 전의 일이었지만 연달아 터지는 사건 사고와 활동 때문에 반강제로 묵혀 두고 있던 것이었다.
하, 숨기고 있던 비밀도 폭로되었겠다. 이제는 슬슬 다시 시스템의 목적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버그가 풀려도 도움이 되겠지만……. 저번 활동에선 초동을 채우지 못해 미뤄진 이후였다.
우선 키워드 룸을 열어 시스템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뒤 다음 앨범으로 이벤트도 성공하여 한 단계씩 밟아 나가 보기로 했다.
“기억 키워드 열어 줘.”
[‘강렬함’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합니다.]
어지럽게 비틀어지는 시야를 확인하다가 아득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 * *
‘이 배경인 건 바뀌지 않네……. 아, 하긴, 내가 여기 말고 어딜 가 있었겠어.’
앞서 봤던 기억 키워드 너머로 확인했던 보육원의 복도였다. 대낮인 듯 창밖으론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는데, 운동장 너머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광경이 목격됐다.
주말인가? 놀고 있는 애들이 적지 않은 걸 보아 학교에 등교하지 않은 날인 것 같았다. 수시로 변화하는 시간대에 맞춰서 아는 얼굴들이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쟤네, 이지우랑 윤소정 맞지?’
그때, 운동장 구석에 있는 화단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 둘을 발견했다. 나보다 2살 정도 어린 애들이었는데. 초등학생은 지난 듯 꽤 성장한 모습이다.
특히 왼쪽에 있던 이지우가 단발머리를 한 것이 눈에 띄었다. 늘 긴 머리만 고집하던 애가 저렇게 머리를 친 것은, 내가 알기로 딱 한 번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했구나.’
학교에 들어가는 기념이라며 새 마음 새 뜻으로 살아 보겠다고 덜컥 머리를 잘랐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저 둘은 14살이라는 건데. 2살 많은 나는 16살, 즉 중3에 접어들었을 시기인가 보다.
‘…중 3이라.’
입 밖으로 꺼낸 말에 이어 머릿속으론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거기서 왠지 오늘 볼 장면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야, 시스템. 너, 진짜 너무 못된 거 아니냐. 모처럼 기억 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둔 거였는데.
괜히 키워드 룸을 사용한 것 같다며 낮게 혀를 차곤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그 일이 맞다면 내가 지금 있을 곳은 한군데였다. …원장실 바로 옆에 있던 작은 방.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역시나 그곳을 찾아가니 제법 머리가 큰 내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과 함께 옆 방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면 대화라기보단 통화하는 말소리였다. 원장 선생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뇌리에 박혀 들었다.
‘아, 갑자기 이러시면……. 그럼 처음부터 말씀하셨어야죠. 해신이에겐 그렇게 헛바람 넣어 놓으시고,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니세요? 아뇨, 저흰 저희 애들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화를 듣던 중학생 시절의 내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이날, 아주 잘 알지. 내가 가족을 만드는 것을 영원히 포기했던 날이기도 했다.
갓난쟁이 때 보육원에 들어왔던 터라 간간이 입양 기회가 있던 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에서 하나, 둘씩 떠나갈 때까지 나는 홀로 이 보육원을 떠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러 와 잘 대해 주고 부모가 되어 주겠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한 적은 수두룩한데. 희한하게도 최종 단계에 접어들 때쯤엔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때의 나는 굉장히 많이 들떠 있었다. 열여섯이나 된 큰 아이를 데려가 주겠다는 양부모가 나왔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결국 그들도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직접 말을 하지는 못하겠는지 기관을 통해 의사를 표현해 왔다.
아마 지금 저 통화가 바로 그것일 것이었다.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봤었는데……. 당시에는 길을 잃은 기분까지 느꼈다.
‘…훌쩍.’
고개를 푹 숙인 내가 손을 들어 팔뚝으로 얼굴을 비볐다. …내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날. 회귀한 이후 페널티의 통증으로 인해 눈물을 보였던 게 어언 10년 만의 일이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은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속이 갑갑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지금과 달리 힘들어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다가갔다.
어른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세상의 속세에 절망하여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이날 이후 나는 입양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했었다.
혼자서 이 세상을 꿋꿋하게 헤쳐나가 보겠다며 마지막으로 울자고 다짐했던 게 바로 다음 날 일이다.
‘울지 마. …넌 다 괜찮아지니까.’
저당금이 걸려서 강제로 시작하게 되긴 했어도 아이돌이라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직업을 갖게 되거든. 기가 세서 가끔은 버겁긴 하지만 좋은 녀석들도 멤버로 두게 될 거야.
은사님은 여전히 널 가족처럼 끝까지 아껴 주실 거고, 주형이는 친동생보다 더 나를 신경 써 주고 있어.
열여섯의 신해신에겐 들리지 않을 위로가 혀끝에서 맴돌았다.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니 등 뒤의 버그가 번쩍거렸다. 처음으로 키워드 룸 내부의 대상과 접촉하여 그랬던 걸까.
‘저게 뭐야.’
[Bug] △※◇▷○□…….
물음표 형태를 띄고 있던 문자들이 이상한 도형으로 변했다. …혹시 나중엔 읽을 수 있으려나.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나를 넘어 버그를 향해 팔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손끝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건 나도 잘 알고 있는 현상이었다. 원래의 세상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은 포기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진정했는지 코를 훌쩍이며 창밖을 보고 있는 어린 자신이 보였다.
‘…힘내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피식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