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20화 (219/328)

220화

다시 눈을 떴을 땐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시공간을 이동한 후유증인지 저릿거리는 손끝을 주무르다가 새롭게 떠오른 상태 창을 발견했다.

[키워드 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0회

청량: 0%

청량이라, 이전의 키워드 룸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하여 사용하고 나니까 새로 열린 항목이 있다. 혹시 다음 앨범의 타이틀과 관련된 건가? 묘하게 미래의 일을 잘 짚어 내는 시스템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곡들과 키워드 룸의 소스를 맞춰 봤다.

“…몽환은 Night(한밤의 동화), 감성은…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내면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Pandora, 그럼 마지막 강렬함은… Rule(도취)?”

얼추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저 청량이란 것은 다음 타이틀이 될 노래의 메인 컨셉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뭐, 그건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시스템에 대한 갈피를 잡아 가는 것 같다는 기분으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처음엔 단순히 과거 기억을 헤집어 혼란을 야기시킨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들어가 보니까 내게 뭔가 말하는 바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엔 갓난아기 시절의 나였고, 그다음엔 조금 더 유아 시절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버그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 생긴 것이 아닌 태초부터 갖고 있던 특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보고 온 청소년기의 나……. 읽을 수는 없었지만, 물음표이던 예전과 달리 무언가의 형상을 띈 글자체로 바뀐 걸 확인했다. 이런 순서라면 몇 번 안 되어 버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키워드 룸, 계속 확인해 봐야겠어.”

여기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 봤다. 가장 신경 쓰던 과거사도 얼추 공개됐으니 어찌 보면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 * *

흐르는 시간 속에서 크라운 게임의 2차 경연에 대한 준비가 시작됐다. 여전히 여론은 말이 많았고, 주변 시선은 따가웠지만 흐름이 변동된 탓이었는지 마냥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조진만과 그 패거리가 낀 미팅 룸은 살벌한 진풍경을 만들었다. 팀장급들만 참가하곤 했던 자리였는데, 독을 품은 것인지 자연스럽게 제 인력을 심은 조진만이었다.

윤재희와 프로듀싱 담당자는 불편한 티를 내며 표정을 구겼다. 서도경은 대표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잘 감추고 있는 듯했다.

…아닌가. 사실 슬쩍 웃고 있는 것에 반해 분위기는 흉흉하다고 해야 했다. 돌아보니 다른 멤버들도 어색하게 웃는 사람 반, ‘나 저기압이요.’를 외치는 사람 반으로 갈려 있었다.

전자에 속한 문채민과 권혜성 그리고 강태오가 나를 쳐다봤다. 뭐라도 해 보라는 눈짓이었는데 나도 저놈들과 같은 을의 입장이었다.

“게스트를 추가로 부르는 게 어떨까? 예를 들면 원곡자라든가. 그 여자애들 있잖아.”

“런이프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사님.”

“소속사도 그리 크지 않으니 공문 한번 내려 보는 게 어떻겠어, 서 대표.”

저 인간들이 단체로 돌아 버렸나. 걸 그룹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말이 많을 게 뻔한 판에서 아예 원곡자들을 불러 무대를 꾸리자는 제안을 해 왔다.

조진만이야 나이도 있고 감이 없는 인간이란 걸 알고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넘기면 되겠는데, 밑으로 딸려 온 조꾸라지들이 저 인간의 말에 힘을 실어 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진짜, 다들 엔터가 아닌 다른 쪽 기업에서 넘어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리를 엿 먹이기 위해 알면서도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밀어주는 건지 헷갈린다.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손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 서도경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설 수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저번 핸드폰 사건 이후로 조진만이 내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고소라도 먹일까 봐 무서웠나. 한 대 맞아 준 것치곤 효과가 오래가서 제법 흐뭇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우선 런이프 선배님들은 지금 해외 투어 중이십니다.”

나이스 타이밍, 런이프. 얼마 전 유럽 장기 투어를 떠난 원곡자들이 떠올랐다. 편곡 분위기나 컨셉을 상의해 보려고 이유준과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가? 그럼 다른 걸 그룹이라도…….”

그놈의 걸 그룹 타령. 이번엔 조진만이 아닌 조꾸라지 1이 말을 얹었다.

말이 안 통한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삼키자 싸늘하게 식은 얼굴의 이정원이 입을 열었다.

“원곡자가 떡하니 있는데, 타 그룹을 부르는 자폭을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아, 하하, …물론이죠. 아무래도 하이사인 여러분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이정원, 오늘은 유달리 전투력이 200%인걸. 이상함에 눈을 굴려 확인해 보니 옆자리에 있던 권혜성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여 온다.

“…해신이 형, 저기 저 사람~ A&R 팀 사람인데…….”

“아, 그 정원이 보컬 프로듀싱할 때 목 망가지는 창법 들이민 사람?”

“엉.”

이제야 이정원의 날카로운 행동이 이해됐다. 철천지원수로 삼았구나……. 나는 놈의 적이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오가는 공방 속에서 오랜 시간 대기한 윤재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프레젠테이션 좀 해 봐도 괜찮을까요.”

사실 지금 이 미팅은 A&R 팀이 큰 기반을 정한 뒤 그걸 듣기 위한 자리였다. 서도경의 느긋한 끄덕임과 동시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의 윤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편곡 방식과 멤버들에게 추천하는 무대 컨셉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 * *

그렇게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한 어느 날이었다. 안무가로부터 트레이닝을 받고 휴식을 전달받았다.

“악… 죽겠다. 딱 두 배로 힘들ㅇ…….”

“…쉿.”

“읍, 으읍.”

권혜성의 입을 틀어막은 윤명이 무게를 실어 놈을 누른다. 땀에 절어 연습실 바닥을 뒹구는 꼴을 보자 이젠 다들 괜찮아진 건가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도하고 있었다. 속였다고 내게 화를 내면 어쩌지. 이런 마음이 커져 있었다고 봐야 했다. 놈들에겐 정이 들어서일까, 계속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겼으니.

차마 밝히지 못한 속마음에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연습실 벽 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니 옆으로 털썩하고 앉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유준?”

“괜찮은 거 맞지?”

“…뭐?”

바닥을 굴러다니며 장난을 치는 권혜성과 윤명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휘말려 소리를 지르는 문채민을 보던 이유준이 슬쩍 눈을 굴리며 작게 말해 왔다.

“형은 항상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거면 어쩌지 싶어서.”

“…….”

“남들 일엔 앞장서면서, 정작 자기 일엔 무던하다니. 이거 완전 그거잖아. 주변 사람들 환장하게 만드는 모먼트. 안 그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입꼬리를 당겨 씨익 미소 짓는다. …나만 불안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유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관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며 달래 줘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을 고르는 시늉으로 시선을 떨구니 이번엔 반대쪽 바닥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해신 특기잖아, 제 일엔 땅파기. 남 일엔 희생하면서까지 해결하기. …하여간에 이건 착해 빠진 건지, 미련한 건지.”

“…이정원.”

“뭐, 그러니까 나도 얘네도 너를 좋아하는 거겠지만 말이야. 리더, 항상 믿고는 있는데, 제발 네 걱정도 좀 하자. 우리만 사람이고, 우리만 아이돌이냐. 네가 제일 아슬아슬해.”

바닥에 앉아 있던 이정원이 팔을 뻗어 뒤로 몸을 젖히며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얼얼해진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동감이야. 자기 자신한텐 너무 무던해, 형은.”

“강태오… 너도…….”

안 그러는 척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강태오가 철부지 삼인방에게서 발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팔짱을 낀 자세로 나를 바라보는데 잠잠한 표정에 비해 눈동자 안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다들 표현하지 않아서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건 나를 생각하여 참고 있던 거였나 보다. 입안이 건조해지는 기분에 물통을 찾자 장난을 치고 있던 녀석들이 팔을 뻗어 물통을 굴려 보냈다.

“…….”

“혀엉~ 이거 마셔~ 악! 윤명, 몸에 힘 빼지마! 무거워!”

“…권혜성 거보다 내게 더 많은데. 나 입 안 대고 마셨어……. 파란색 통…….”

“형들, 좀 제대로 앉아서 얘기하면 안 돼? 해신이 형, 놀랐잖아.”

바닥에 엎어져 턱 밑으로 팔을 괸 권혜성이 싱글싱글 웃으며 브이자를 그린다. 그 위 반쯤 몸을 겹친 윤명은 자신의 물통을 함께 굴리고 있었다. 문채민은 무릎을 세워 다리를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올린 채 둘을 향해 타박을 내뱉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멤버들이 나를 신경 쓰고 걱정해 주고 있었다.

“…야, 너희…….”

“바보, 너 걱정하는 애들이 이렇게 널려 있어. 우리만 그러냐? 여기에 팬들 있지, 아마 곧 연락이 갈 것 같은데, 지원겸 멘토님 있지. 좀 찜찜하긴 하지만 김환준, 그 사람도 신경 쓰고 있을 것 같고. …음, 대표님도 너 걱정? 하려나?”

“정원이 형, 대표님은 너무 안 어울린다!”

“맞아, 걱정이라기보단 굳이 따지자면 작당?”

“…유준이 형, 그렇게 말하면서 웃으니까 악당 같아…….”

화기애애한 녀석들을 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털어 버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땀으로 흥건한 차림새에서 벽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얘네라면. 내 인생을 전부 보여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얘들아, 너희 나랑 어디 좀 안 다녀올래?”

“뭐? 어디? 어디 어디? 뭐 재밌는 곳 있어?”

“혜성이 형, 지금 분위기에 재밌는 곳을 가겠어?”

“문채민, 너 이리 와! 아까부터 초치는 게 장난 아니다!”

시끌벅적한 놈들을 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내 핸드폰을 바라봤다. 양해를 구하긴 해야 할 것 같지만, 왠지 이게 정답이라고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길래 그래.”

“뭐, 해신이 형이 데려간다고 하는데 지옥 불구덩이 이런 건 아니겠지.”

“…이유준, 넌 용케도 농담이 나온다.”

“강태오, 네가 너무 딱딱한 거야. 해신이 형은 좀 살살 풀어 줘야 이실직고한다고.”

사방에서 투닥거리는 음성을 들으며 작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자란 곳은 보여 줄 수 없지만.”

첫 번째로 오랜 시간을 보내 온 보육원에 아이돌인 우리가 가면 피해가 막심할 테니 이 녀석들을 데리고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을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은 하나 더 존재했다.

“내 두 번째 가족. …은사님네 댁. 거기, 너희를 데려가고 싶어.”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세 번째 가족인 너희를 은사님과 주형이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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