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여기야? 해신이 형이 자란 곳?!”
“…바보, 형이 자주 온 곳이라고 했지, 자란 곳이라곤 안 했어…….”
“윤명, 넌 꼭 이 좋은 날까지 나한테 시비를 걸어야겠냐!”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아니, 없다고 하기도 뭐한 게 나 때문에 일정을 조율한 날이었으니까.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자 오병은이 밴의 문을 열어 줬다. 자세한 사정은 설명 들었는지 잘 다녀오라며 웃어 보였다.
“그럼, 전 저쪽 큰 대로변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그, 오 팀장님…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주춤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나중에 보자며 밴을 끌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경기도에 이렇게 한적한 곳이 있었구나.”
“동네가 예쁘네. 조용해서 주변 시선 신경 쓸 일도 없겠다.”
이정원과 이유준의 대화를 들으며 눈앞에 보이는 대문을 바라봤다. 우리가 와 있는 이곳은 은사님 댁 바로 앞이었다.
“야, 그… 같이 와 줘서 고맙다.”
“다들 온다고 하는데 나만 빠질 순 없잖아. 게다가 나도… 형 덕분에 아버지랑 관계 개선했고.”
민망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곁에 있던 강태오가 눈에 띄었다. 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이상하여 팔을 치며 고맙다 전하자, 쑥스러워하는 건지 시선을 회피한 강태오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멀뚱히 우리를 보고 있던 문채민이 소리 죽여 웃는다.
“형들, 무슨 신파 찍어? 얼른 초인종부터 눌러.”
“어, 어……!”
띵 동-
문채민이 초인종 위에 올려 둔 내 손을 꾹 내리눌렀다. 크게 눈을 뜨고 놈을 돌아보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씨익 짓고 있었다.
익숙한 차임벨 소리와 함께 달칵이는 알림 음이 들렸다.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멤버들이 일순간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해신, 왔냐? 지금 문 열어 줄게.]
“야, 야, 윤명… 은사님 목소리가 되게 젊으시다~ 말투가 우리 또래 같네~”
“…너, 진짜 바보 아니야? 방금은 남자였잖아, 멍청이…….”
“…오해 좀 할 수도 있지,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권혜성의 엉뚱한 발언에 피식 미소가 터져 나왔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뒤로 붙어 온 이유준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주형이? 그 친구 맞지? 게시글 써 준 동생이라는.”
“어, 최주형, 오늘은 집에 붙어 있었나 보네.”
익숙한 풍경에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장독대와 물을 머금은 작은 정원, 바닥에 깔린 돌길을 밟으며 뒤따라오는 놈들에게 설명해 줬다.
“여기야, 내가 어릴 때부터 종종 찾아오고 했던 곳.”
“사진에서 봤던 거랑 똑같네.”
불쑥 끼어든 이정원이 넝쿨이 걸린 담벼락을 가리킨다.
“사진? …아, 혹시 너도 그 게시글 봤냐.”
쟤가 지금 말하는 것은 최주형이 올렸던 게시글 속 나와 함께 찍었던 유년 시절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 리더 일인데. 보지, 안 보냐. 과장 좀 보태서 50번은 봤어. 여기가 이젠 우리 집 갔다, 야.”
머쓱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는 이정원을 보니,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신기하다는 듯 휘휘 고개를 내젓는 문채민과 천천히 눈을 굴려 걸음을 옮기는 강태오를 확인하던 찰나, 멀리 있는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쾅!
“야! 신해신!”
조용히 문을 열어 주시곤 하던 은사님과 다르게 힘이 넘치는 청소년, 최주형이었다. 그대로 몇 칸 안 되는 돌계단을 훌쩍 뛰어 내려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왔다.
놀란 멤버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 있는 것은 무시한 채 황소처럼 돌진해 올 뿐이었다.
“어, 최주……! 윽!”
“…바보야, 잘 지냈어?”
“…어, 아프잖아. 청소년 씨.”
정신을 차렸을 땐 최주형이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단 좀 큰 것 같네. 한 살 더 먹었다고 제법 의젓해진 모습을 보인다.
오랜만의 만남에 회포를 풀려 하니, 이상하게 뺨과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손을 들어 최주형의 등을 토닥이던 자세에서 슬쩍 눈을 굴리며 멤버들을 확인해 봤다.
“…오, 해신이 형, 진짜 형 같네.”
“형이 형이지, 그럼 뭐야…….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해, 권혜성.”
“야, 강태오, 너도 형 있댔지. 친형님이랑 오랜만에 보면 저렇게 안아 주냐.”
“…미친 소리 하지 마, 징그럽게.”
“독일에 살아도 형제는 형제인 거구나. 그럼 해신이 형네가 별종인 거로 하지 뭐.”
…멤버들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 버렸나 보다. 최주형 역시 귀는 있었는지 민망하다는 얼굴로 몸을 물렸다.
주춤주춤 물기 어린 잔디가 슬리퍼에 의해 짓이겨졌다. 어찌나 급히 나온 것인지 맨발인 상태가 눈에 띄었다. 서로 딴짓하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다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 간단하게라도 소개해 줄게. 여긴 주형이, 최주형, 미리 얘기해 놔서 알지?”
“안녕하세요, 최주형입니다. 해신이 형 동생이에요.”
“이럴 때만 형이라고 하냐.”
“그럼 신해신 동생이에요. 이렇게 말해?”
금세 틱틱거리는 얼굴로 돌아와선 발을 들어 내 종아리를 친다. 이번엔 멤버들을 소개해 주고자 반대쪽으로 손을 뻗자 초롱초롱한 얼굴의 문채민이 어깨를 펴곤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올해 18살?”
“예? 아, 예. …그런데요.”
“흐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슴을 편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짓는 문채민을 보고 곁에 있던 이유준이 귓가에 속삭여 왔다.
“채민이,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알게 돼서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그래 봤자 쟤네 1살 차이 아니냐.”
“정원이 형이 뭘 몰라서 그러네. 문채민 쟤는 항상 형들만 있었잖아. 맏이들은 막내의 고충을 너무 몰라줘~”
“…그런 것치곤 문채민 쟤, 할 말 다 하는데……. 너도 자주 당하면서…….”
이젠 이정원과 권혜성 그리고 윤명까지 다가와 문채민의 이상 행동을 말했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강태오에게선 익숙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네. 그, 주형아, 여긴 우리 멤버들. 너도 대충 알고 있지?”
“너 때문에 프로필 달달 외웠다. 그러니까 따로 이름은 안 알려 줘도 돼. 안에 할머니 계시니까, 할머니한테만 인사해 주세요.”
무뚝뚝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 녀석이 민망하다는 듯이 나를 끌고 앞장섰다.
멤버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최주형의 성격을 파악했는지 작게 웃으며 우리를 쫓아왔다.
* * *
“해신아, 왔니?”
“…은사님.”
“얘도 참, 할머니라고 하랬지.”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부엌에서 다과를 준비하고 계셨는지 앞치마를 입은 은사님이 나오신다. 최주형이 터덜터덜 앞장서는 가운데 따라 들어온 멤버들이 공손한 자세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얘네가 이러니까, 진짜 적응 안 되네. 제각기 성격에 맞춰 망나니처럼 굴던 멤버들이 어른 앞이라고 순한 양이 되어 자기소개 하는 게 신기했다.
가장 먼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은사님께 인사를 드린 건 이정원이었다.
“안녕하세요. 해신이랑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정원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뵀는데 반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요, 해신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서들 앉아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요.”
공손하게 손을 뻗어 은사님과 악수까지 끝마친 이정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착석했다.
그걸 보던 멤버들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여 왔다. …기왕이면 안 들리게 이야기하던가.
“…정원이 형, 왜 저래?”
“내숭 장난 아니다.”
“형들, 저런 걸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거야.”
“태오야, 저 정도면 내가 좀 더 낫지 않아?”
“…너나 저 형이나.”
여기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최주형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야, 신해신.”
“왜.”
“너희 멤버들, 좀 이상한 것 같아.”
“…그건 조금 공감했다. …그래도 좋은 애들이야.”
“뭐, 그건 안 봐도 알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시간이었다.
* * *
배가 고프다는 윤명의 말에 한바탕 소란이 일은 이후였다.
다과만으로는 녀석의 배를 채우지 못할 거란 걸 알아 배달 앱을 켜려던 순간이었다.
‘됐거든, 할머니가 너랑 저 형들 밥 한 그릇은 먹이고 보내겠다고 다 준비해 놨어.’
‘…뭐? …아니, 왜 그러셨어요. 주문해도 충분한데.’
‘어머, 해신이 너는 날 뭘로 보고, 아직 건강하니까 그런 생각 안 해도 괜찮단다.’
은사님께선 윤명의 위 크기를 모르셔서 저러는 게 틀림없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염려하기도 잠시, 처음 보는 잔칫상을 대접받았다.
‘와, 윤명 얘, 계 탔네.’
‘윤명, 작작 …먹어.’
‘유준이 형, 방금 나만 저 먹으라는 말 사이에서 ‘처’라는 단어를 들은 걸까.’
‘하하! 아니, 채민아, 나도 들렸어.’
‘…하아, 죄송합니다.’
느긋한 얼굴에 반해 쉬지 않고 밥을 먹는 윤명과 그런 윤명을 보며 경쟁하듯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계를 탔다며 고개를 내젓는 권혜성이 보였다.
나름 내숭은 부리면서도 윤명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던 듯이 복화술로 욕설을 내던지는 이정원도 있었고, 그런 이정원을 보며 귓속말하는 문채민과 문채민의 이야기에 웃음을 참지 않는 이유준도 희한해 보였다.
거기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것은 나도 최주형도 아닌 강태오였다. 한 무리에 속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표로 사과해 왔다.
은사님은 그저 잘 먹어서 보기 좋다며 내게도 더 먹으란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아이돌치곤 과한 식사를 끝낸 이후 다시금 거실의 소파 자리에 모여 앉았다.
최주형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할 생각으로 앨범을 들고 나왔다.
“신해신 친구들이 왔으면, 이걸 빼먹을 수 없지.”
“야!”
“나도 오랜만에 보네~ 친구들은 해신이 어린 시절 한 번도 본 적이 없죠? 사진 많으니까 한번 봐 봐요.”
“그, 말씀 편히 해 주세요…….”
“어머나, 고마워라.”
강태오의 안절부절못하는 손짓에 은사님이 미소를 지으셨다. 펼쳐진 앨범을 방어하랴, 멤버들의 시선을 차단하랴,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 최주형의 손길이 빨라졌다.
“우와! 이것도 해신이 형이야? 옆은 너?”
“응, 아마 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일걸. 이때 신해신 참 귀여웠는데…….”
“그건 내가 할 말 아니냐.”
엄청난 친화력을 자랑하는 권혜성은 벌써 최주형과 편히 말을 나누고 있었다. 최주형이 보여 준 사진을 구경하며 신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은 나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최주형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은사님 댁에 놀러 온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불에 누워 있는 갓난쟁이 최주형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 역시도 어린 나이였지만 동생이 생겼다는 마음 하나로 훌쩍 큰 것처럼 굴려고 들었었다.
“신기하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윤명.”
권혜성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윤명이 눈을 끔뻑거리며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평소 같았으면 무겁다며 떨어지라고 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 걸 알아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형이랑, 주형이라는 저 애, …많이 닮았어.”
“…그러냐.”
거기서 나온 말은 너무도 예상외의 것이었다. 다들 안 그런 척 듣고 있었는지 윤명과 나를 보며 간지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놈들은 아까부터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구는 이정원이나, 더 활발한 모습을 보이며 분위기를 푸는 권혜성, 안 그러는 척 자주 미소 짓는 강태오, 짓궂은 멘트는 자제한 채,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하는 이유준과 문채민까지.
거기서 오늘 얘네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비밀을 갖고 있다는 무거운 마음을 벗어 던져도 될 것 같았다. …시스템은 빼고. 이건 아직 밝히기엔 너무 대형 비밀이다.
* * *
그리고 며칠 뒤, 지원겸에게 연락이 왔다. 일상을 보냈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생긴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게 느껴졌다.
[신해신, 나 지금 입수한 게 하나 있는데. 어느 팀에서 너희가 2차 경연 때 한다고 했던 컨셉이랑 너무 비슷한 걸 얘기한다?]
그래, 다시 사건의 시작이었다.
“괜찮아요.”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결법이 있는 상황이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