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22화 (221/328)

222화

2차 경연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녹화를 며칠 앞둔 아슬아슬한 시점이라고 봐야 했다. 지원겸의 다급한 연락에 복도로 나왔다. 내 가정사가 터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반응을 안 보인 사람이었는데. 난처하다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굴렸다.

“음, 그러니까 지금 멘토님 말씀은 저희가 하기로 한 2차 경연이랑 너무 흡사한 컨셉의 무대가 나올 것 같다는 거죠?”

- 그래! 이 미친 새… 아니, 이 돌아 버린 블릭투 자식들이! 크라운 게임 사전 스포 불가능 아니었어? 잔대가리 써서 실수한 척 케이 앱에서 슬쩍 흘렸어. 브로드웨이풍 뮤지컬로 갈 것 같은 냄새가 줄줄 난다고……. 야, 이거 너희가 준비했던 거랑 똑같지. 편곡도 다 했다며, 무대 며칠이나 남았다고 이러냐. 잘못하면 너희가 베낀 게 되겠는데.

지원겸의 목소리가 커졌다. 1차 경연에서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우리로 인해 피를 본 일도 있으니까. 안 그런 척 우리 쪽의 상황은 자주 전달해 줬었다.

그래서 지원겸은 2차 경연에 대한 컨셉을 알고 있었다. 빠른 비트의 노래를 bpm은 바꾸지 않은 채 웅장한 오케스트라풍으로 돌려 뮤지컬식으로 할 것 같다고 얘기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블릭투라… 지원겸의 입에서 나온 그룹의 이름에 옳다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어디서 입수한 자료를 통해 자기네가 원조라는 식으로 밑밥을 깔고, 당일 우리에게 엿을 먹이려 했던 게 분명해졌다.

“흠, 그렇구나…….”

- 그렇구나? 그렇구나아~? 너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경연 며칠이나 남았다고, 새치기당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 …혹시 너, 지금 너무 당황해서 패닉 온 거 아니지? 그렇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며 말꼬리를 늘이자 상대방에게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음, 슬슬 말해 줘 볼까. 사실 내가 이렇게 느긋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욕먹지는 않겠지? 지원겸이 알게 된다면 길길이 날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스친다.

“그, 멘토님, 화 안 내실 거죠?”

- 뭔 개소린데, 아~ 그래서 어떡하실 거냐고요, 제자님~!

거, 되게 성격 급하네. 이젠 완전히 한편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를 내뱉는 지원겸이었다. 그래, 이 정도로 걱정해 주니까. 이젠 괜찮을 거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화내시면 안 돼요? …그 컨셉, 저희 필요 없어요.”

- 하?

내 말을 들은 지원겸에게서 어이없다는 듯한 외침이 나왔다. 사방을 살피며 복도 벽에 몸을 기대곤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

“그 컨셉, 저희한텐 필요 없다고요.”

- 뭔 개소리야, 2차 경연 코앞인데. 너희 무대도 연습하고 있었다며, 동작이랑 다 외웠다고 한 케이 앱 나도 봤……. 야, 너, 설마…….

“눈치채셨어요?”

- 진짜냐? 너희 진짜 이거 미끼용이었어? 연습했다는 건? 그거 엄청 힘들다고 말하던 권혜성 봤는데, 케이 앱에서 얘기한 내용, 너무 생생했다고. 안 춰 본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니까?

지원겸의 반응엔 조용히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실 이건 미끼용 편곡이었다. 우린 애초부터 2차 경연 전에 이런 일이 터질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생생했죠? 그렇게 하려고 고생깨나 했어요. …두 개 준비했으니까요. 안 해 본 건 아니거든요. 지금도 하고 있었어요.”

- 미친놈…….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이렇게 또라이 같은 생각 하는 사람이 드문데. 너지, 너랑 너네 그 대표라는 인간이지.

“…또라이. 음, 어, 설명하자면 긴데요…….”

그렇다. 우린 2차 경연 관련 무대를 두 개나 연습하고 있었다. 외부로 유출되어 당할 걸 예상하고 표면적으로 보일 가짜 컨셉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로 알지 못할 진짜 컨셉, 두 개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 * *

블릭투의 소속사와 MXP를 견제하는 걸 떠나서 엔필름이 서도경을 누르기 위해 외부 인력을 끼워 넣은 걸 잊지 않고 있던 날이었다. 1차 경연과 방송국을 오고 가며 들었던 사실들을 조합하여 서도경에게 긴급 만남을 요청해 놨다.

늦은 밤, 멤버들과 서도경 그리고 A&R 팀의 수장인 윤재희가 함께 모인 방이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서도경에겐 생각해 둔 문제점을 밝혔다.

‘슬슬 한 번은 당할 타임이 온 것 같아서요.’

‘…신해신 씨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당하다니? 뭘 말하는 거야?’

‘쉿…….’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일부 멤버들은 어리둥절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권혜성과 문채민은 주변 분위기를 탐색하느라 바빠 보였다.

내 요청으로 조용히 끌려온 윤재희 역시 의문스럽단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나 보다. 그리 나쁜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도 예상하고 계셨잖아요. …내부에 적이 많다는 거요.’

‘그렇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서도경에 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 입으로 말하게 할 속셈이구나. 체념하며 고민해 뒀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것도 알고 계시죠? …가까운 시일 안에 내부 자료 유출 위기가 찾아오리란 거.’

‘…눈치가 점점 빨라지는데요?’

‘알면 좀 먼저 얘기해 주세요.’

서도경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윤명이 입을 벌렸다.

‘…아.’

‘뭐야, 뭐야. 윤명 너, 뭐 좀 알아냈냐?’

윤명의 시선이 내게 닿았을 무렵, 궁금하다는 듯 이정원의 재촉이 이어졌다. 이유준과 강태오의 심각한 얼굴을 보자 이젠 본론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힘 받아 왔었잖아. 학폭이나, 가정사 같은 난감한 문제도 많았고, 사내 왕따나 괴롭힘 같은 예민한 주제도 걸려 있었지. 하지만 매번 잘 빠져나갔으니. 이번엔 뭘 건드리려고 하겠어.’

이정원이 심각한 얼굴로 턱에 손을 올렸다. 내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노래나, 무대?’

‘정답.’

한숨을 내쉬며 맞았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추측했던 것들을 설명해 줬다.

‘경연 프로그램만큼 유출로 뒤통수 맞았을 때 수습하기 어려운 게 없거든. …특히나 바로 코앞에서 뺏겨 버리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야. 내부 스파이라고 할지언정 인근 시선은 조심할 테니까, 타이틀이나 앨범에 들어갈 수록곡 쪽은 스케일이 커서라도 피할 테고. 유출 관련 사건이라 하면 이런 단발성 경연이나 연말 무대가 최선이겠지.’

‘그러니까 형 말은 우리한테도 곧 그런 일이 있을 거란 얘기야?’

‘…어, 아마도. 아니라면 좋겠지만.’

‘네, 맞습니다. 예상대로라면 2차 경연. 뭐, 근래 사내 PC 기록에서 이상한 메일이 오가는 걸 확인한 적이 있으니까. 80%의 확률로 곧일 겁니다. 늦어 봤자 3차? 파이널은 자체 제작곡이라 주목도가 높아서 피할 걸 염두에 둬도 2차일 가능성이 크네요.’

이어지는 서도경의 이야기에 윤재희가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이 인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니.

배신감에 이를 악물자 서도경의 눈길이 이쪽을 향했다.

‘저도 안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들로 정신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신해신 씨가 방법을 구해 올 줄도 알았고. …그럼 한번 들어 볼까요?’

하지만 저 인간을 이길 방법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이후 생각해 둔 방법을 설명해 줬다.

‘이건 저희도 저희지만, 힘을 써 주셔야 할 분이 따로 계세요.’

서도경의 이야기에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돌렸다. 멤버들과 서도경 역시 나를 따라 한 인물을 돌아봤다.

‘…저 말입니까?’

윤재희가 놀랐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미간이 찡그려진 걸 보자 드디어 제 나이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미안한 마음 반, 하지만 반드시 해 줘야 한다는 고집 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을 낚으려면 미끼가 필요해서요. …물론, 저희도 쉬고 있진 않을 겁니다. 얘들아.’

‘…형, 나 무서운데.’

‘으악! 해신이 형, 저 표정, 유어돌에서 본 적 있어. 안 쉴 때……!’

‘하아, 또 뭘 하려고.’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인지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는 녀석들이었다.

‘저희 2차 경연, 두 곡을 준비합시다.’

‘뭐?!’

‘…야, 결국 그거였냐.’

‘형이 사서 고생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도 그게 가능했구나. …뭐, 뒤에 일 터질 거 생각하면 미리 힘든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우와~ 죽었다…….’

‘…1차에서도 두 개 했는데. 2차는 다른 방향으로 두 개 하게 생겼네… 아아…….’

벌써 힘이 들었는지 어깨가 축 처진 윤명의 등을 토닥이며 윤재희에게 제안했다.

‘윤 팀장님께서 괜찮으시다면, 편곡을 두 개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대외적으로 사내 사람들과 대중 그리고 외부의 적을 속일 가짜 곡과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진짜 편곡, 두 개를요.’

‘…그 말은 즉 경연 당일 드라이 리허설 전까진 밝히지 않겠다 이건가요?’

‘…네, 물론 여기엔 대표님도 힘 좀 써 주셔야 합니다. 의상이나, 무대 소품도 모두 두 배가 들 테니까요. …괜찮으세요?’

‘…흐음, 나중에 일 터져서 수습할 걸 생각하면, 그 정돈 일도 아니긴 하죠. 게다가 무작정 버릴 건 아니잖아요? 방법 있죠?’

‘네, 생각해 둔 컨셉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나중엔 반드시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서 잡아 놓은 컨셉이 있었다. 메인 디렉터인 윤재희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으나, 해야 하는 미션곡과는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연해 보이는 내 모습에 윤재희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내리깔고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더니 팔짱을 끼곤 턱을 들어 올렸다.

…거절당하려나. 솔직히 이건 연습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큰일이었지만, 팀원들을 비롯하여 회사 사람들을 속여야 한다는 윤재희의 부담도 큰 편이었다. 거기다가 한 번으로도 벅찬 편곡과 디렉팅을 두 번이나 좋은 퀄리티로 뽑아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게 안 먹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며 고민하던 중이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좋아요. 해 보죠. 신해신 씨가 이렇게 호쾌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마음에 들었어요.’

‘꽤 재밌죠?’

‘예, 대표님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이유가 다 있었네요. 두 분, 많이 닮으셨습니다.’

지금 저 사람, 내 욕하나? 귀찮은 거 시켰다고 서도경과 닮았다는 망언을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내가 을의 입장. 볼에 경련이 이는 것을 참아 가며 사회생활 스마일을 지었다.

그나저나 윤재희는 서도경과 제법 큰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직접 데려왔다고 했을 때부터 어련히 알고 지내던 사이겠거니 했는데.

윤재희를 불러 달라며 요청한 내 말에 믿을 수 있겠다며 곧장 불러낸 서도경도 재밌는 인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