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23화 (222/328)

223화

‘감사합니다, 팀장님.’

‘뭘요. 저야말로 믿어 주신 거 아닙니까. A&R 쪽에선 제가 가장 믿음이 가신 모양인데,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서 저희 쪽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인력이 몇 더 있습니다. 리스트 추려서 보고 올릴 테니 대표님께서 좀 알아봐 주세요.’

‘그래요. 한 실장님한테 부탁해서 사내 움직임 좀 확인해 보죠, 뭐. 아~ 이렇게 직원들을 믿지 못하는 대표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치곤 충분히 숨기는 게 많은 인물이었다. 미심쩍단 눈으로 흘겨보니 어깨를 으쓱거린다.

‘자, 그럼 남은 건 하이사인 여러분의 각오뿐이겠죠?’

‘…네.’

‘하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죽었다. 진짜 죽었다…….’

‘남들은 한 번만 한다는 무대 두 개 준비, 왜 우린 두 번 하게 된 걸까.’

서도경의 번뜩이는 눈빛에 멤버들이 죽상을 지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한적한 복도에서 지원겸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만 봐도 여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지원겸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했다. 고요한 숨소리를 보아 통화를 끊은 건 아닌데.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간헐적인 바람 소리가 이어졌다.

- 허, 참나……. 진짜냐, 이거?

“꽤 괜찮지 않아요? 매번 당하고 수습하다가 이젠 지겨워서 먼저 함정을 파 봤는데.”

- 너희 회사 인간들 다 제정신 아닌 것 같아. 아, 물론 너랑 대표가 제일 심해.

“…그거 너무 심한 욕 같은데요. 멘토님이라고 해도 그 말은 못 참아요.”

근래 들어 서도경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들은 게 가슴 아팠다. 인터넷에 올라간 악플보다도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말이었다. 구겨지는 미간에 이마를 짚자 지원겸에게서 호쾌한 웃음이 쏟아졌다.

알게 된 사실을 바로 보고하는 것부터 이 사람은 호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랄겸은 무슨, 호구겸이네. 아무것도 모를 디레스트 멤버들이 안타까웠다. 제 편이면 이렇게 먼저 나서는 인간인데. 무슨 원수를 져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 으하학! 블릭투 개자식들, 크게 한 방 먹겠는걸. 아, 나 벌써 녹화 날이 기대된다. 야, 나 더 자세한 얘기 듣고 싶어! 너 오늘 저녁에 뭐 해!

“…예?”

- 밤에 뭐 하냐고! 나랑 만나자! 내가 밥 사 줄게!

간단한 보고 겸 지원겸이 신경 써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겸 장단을 맞춰 주고 있던 때였다. 슬슬 연습실로 돌아가 보려는데 상대방에게서 이상한 제안이 들어왔다.

밤에 일이야 없지. 연습을 제외하면 스케줄도 비어 있는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뜸 만나자고? 나갈까 말까 고민이 들었다.

- 됐으니까 나와~ 내가 차 끌고 너희 숙소 앞으로 가기 전에.

“예? 그건 절대 안 돼요.”

팬들 사이에서 무슨 논란을 만들려고. 식은땀이 흐르는 상상 속에서 당사자는 보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내저었다. 양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사정하자 지원겸이 작은 목소리로 거절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 …야, 이것도 이건데, 솔직히 나도 너 좀 신경 쓰였거든? 그냥 밥 한번 사 주려는 거니까. 거절 말고 나오지?

“아…….”

이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내 가정사……. 비록 지금은 얼추 무마됐지만, 아직까진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사건이었다.

지원겸에게선 큰 연락은 없어 배려해 주고 있단 걸 알았다. 하지만 신경은 쓰였던 모양인지, 머쓱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통수라도 긁고 있는 걸까 부시럭 거리는 머리카락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나오니까 안 나가기도 뭐하잖아.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 저도 거기 케이 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니까요.”

- 자식, 변명하기는……. 야, 그럼 내가 문자로 장소 남겨 놓을게. 픽업 필요하면 연락해라. 일일 매니저 대행해 줄 테니까.

“예, 그럼 이따 뵐게요.”

- 오냐~

성격답게 뚝 하고 끊기는 통화를 보며 묘한 감상이 들었다. …이 인간도 제법 정이 들었나? 서로를 이용하려고 맺어진 관계치곤 꽤 돈독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멘토님은 이런 식당 되게 많이 아시네요.”

“너랑 내가 자주 만나기는 했나 보다? 이래 봬도 나 연예인 8년 차인데.”

“그런 것치곤 신비주의가 없는 것 같아서요…….”

미끼용 곡 연습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진짜 경연곡 안무까지 맞춰 본 이후였다. 숙소로 돌아가 땀에 전 몸을 씻고 나선 개인 약속이 있다며 지원겸이 알려 준 식당으로 찾아갔다.

저번부터 느낀 거였는데 주변 시선은 없는 프라이빗 한 공간을 참 많이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한정식이 아닌 양식집에서 사방이 막힌 걸 처음 보아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모자를 벗자 서버로 보이는 직원이 주문을 받아 사라졌다.

미닫이문이 열린 틈 사이론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렸으나, 다시 문이 닫히자마자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때, 방음 괜찮지. 여기 소문을 잘 막아 줘서 연예인이나 공인들도 자주 와. 물론 그만큼 예약이 좀 빡세지만 말이야. 아, 나는 예외. 사장님이 잘 아는 사이거든. 어때, 이제 좀 존경스러워?”

“…예, 뭐…….”

잘하지 않았냐며 턱을 괴고 창밖을 보는 지원겸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진 정리나 해 보자며 뭐부터 물어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블ㄹ…….”

“넌 도대체 뭐가 그리 고생ㄱ…….”

동시에 오디오가 물려 지원겸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지났을까 웃음을 터뜨리는 지원겸을 보다가 나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 저 신파 만들지 마세요. 하나도 문제없다니까요.”

블릭투 사건을 묻기 전에 이것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해서 물어봐 준 게 뻔하니, 사정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눈매는 빼쭉해서 영 사납던 애가, 어째 묘하게 처연하더라.”

“처연이요?”

살면서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본 지원겸이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얼굴 보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네. 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너희 멤버들이 잘 보듬어 줬겠지. 걔네, 하나같이 캐릭터가 특이해서 그런 것 빼면 널 무진장 아끼잖아?”

“…그래요?”

“어휴, 둔탱이. 이 각박한 연예계에서 아이돌, 그것도 리더까지 해내고 있는 게 용해요~”

지원겸은 더 이상 이 건으로 말을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걱정한 부분에 맞춰 내가 괜찮은지 확인 정도만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안 그런 척 묘하게 다정한 구석이 있네. …좀 짜증 나는걸.

나도 더는 이런 얘기로 시간을 보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블릭투 사건에 대한 개요를 파악해 보고자 했다.

“그나저나 블릭투… 걔네 케이 앱은 뭐예요? 거기서 소스를 흘렸다고요? 무슨 미끼용 곡에 맞췄던 컨셉을 한다고요?”

“어~ 너 아직 안 찾아봤냐?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할 거면 티라도 안 나게 잘하든가. 나 코미디 보는 줄 알았잖아. 걔넨 나중에 웹드도 못 찍겠더라. 연기할 만한 멤버가 없어요, 없어~”

지원겸의 신랄한 평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지원겸의 말은 듣지 않기로 정한 이후였다.

핸드폰을 꺼내 블릭투의 케이 앱을 켜자 졌다는 듯이 혀를 찬 지원겸이 말했다.

“32분.”

“네?”

“32분 40초였나… 거기서부터 봐. 괜히 시간 버린다.”

1시간을 훌쩍 넘는 영상에 지원겸이 알려 준 좌표를 찍어 들어갔다. 32분, 40초……. 여기다. 회사 연습실에서 켠 케이 앱인지 트레이닝복을 입은 블릭투 녀석들이 나타났다. 땀에 전 얼굴이었는데, 생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화장하고 저렇게 땀이 날 정도로 춤을 추면 녹고 난리가 나야 하는데. 딱 예쁘게 촉촉이 젖은 머리칼을 보며 저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어후, 아주 쇼를 해요. 저놈들, 연습은 개뿔. 분무기 친 거 웃겨 죽겠네.”

“…분무기요?”

“너 못 느꼈냐? 드라마에서나 쓰는 방법이잖아. 예쁘게 꾸며 놓고 칙칙, 알지?”

“아, 그래서…….”

“뿌릴 거면 리얼하게 뿌리든가. 나 쟤네랑 같은 프로그램 나가고 있는 거 좀 수치스럽거든.”

지원겸의 수위 높은 비난에 말을 하는 블릭투의 멤버들을 쳐다봤다. 그중 가운데에 있던 최한성이 손을 들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아, 안 그래도 저희 지금 무대 준비하고 있거든요. …맞다, 이거 스포성 발언 하나도 안 되지? 쉿, 그래서 저희도 말할 수가 없어요.]

[형, 형, 이거 혼난다…….]

옆에서 부추기듯 카메라 바깥을 돌아보는 듯한 멤버까지. 대충 봐도 뚝딱뚝딱 정해진 각본에 맞춰 움직이는 게 티가 났다. 음, 사정을 모르는 팬들은 알 수 없으려나.

그때 비밀이라던 최한성이 카메라 각도가 이상하다며 받치고 있던 삼각대를 돌리는 시늉을 했다.

[어? 뭔가 센터가 안 맞는데. …이거 조금 더 돌린다?]

[어, 어……! 형! 형!]

[으악!]

비틀비틀 흔들리던 화면이 일부러 잘못 누른 게 분명한 손길에 의해 각도를 달리하며 다른 장면을 비췄다. 연습실 특징상 외벽에 거대한 거울이 붙어 있는 광경이었다. 퍼포먼스 대형과 안무 및 연출을 위해 소품으로 가져다 놓은 물건들이 보였다.

거기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브로드웨이풍의 바처럼 놓은 테이블과 의자였다. 일반 사무용 탁자이긴 했으나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칵테일 쉐이커와 잔들이 뭘 하려고 했는지 훤히 알게 했다.

“아…….”

“내가 말한 게 뭔지 알겠지? 이게 어떻게 우연이냐. 연기라도 잘하면 몰라.”

[화면, 화면!]

[쉬이이잇- 이거 진짜 큰일 나요. 비밀, 비밀!]

다급한 멤버들과 최한성의 말에 채팅 창은 난리가 나 있었다. 얘네도 공식 활동이 끝난 이후 예능이나 화보같은 소소한 스케줄만 돌고 있었기에 이런 각 잡고 꾸미는 무대는 크라운 게임 말고 없을 일이었다.

- 2차 경연????

- 방금 그거 칵테일 쉐이커지 미쳤나 바텐더인가봐 ㅠㅜㅠㅜㅠㅜㅠㅜㅠ

- 헐 이런 거면 딱 떠오르는 컨셉 있는데. 뮤지컬 풍 아니야??? 약간 배치가 되게 자유분방했지

- 앜ㅋㅋㅋㅋㅋㅋㅋㅋ한성이 귀여워 ㅋㅋㅋㅋㅋㄱㅋㄱㅋㅋ 절대 안 된다고 도리질 친다 ㅋㄱㅋㄱㅋㅋㅋㅋ

- 얘들아 스포 비밀로 해줄게 ㅎ 벌써 무대 너무 기대된다 무쳤다 ㅜ

- 2차도 어디 한번 가보자고

- 응응 블릭투가 다 잡아먹어 어일블 어차피 일위는 블릭투

이어진 코멘트들에 최한성의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들 수습하기 정신없다는 시늉을 하면서도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훤했다. 원하는 내용이 나와서 만족스러웠나 본데. 이 정도라면 지원겸이 길길이 날뛸 만했다고 본다. 뭐, 물론 우리에겐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허, 되게 웃기지? 야, 이제 꺼라. 밥 먹기 전에 입맛 다 떨어지겠다.”

지원겸의 말대로 핸드폰의 영상을 종료한 이후였다. 서버가 오고 있나 귀를 기울인 지원겸이 고개를 숙여 내게 질문했다.

“그래서, 너희, 진짜 컨셉은 뭔데? …그리고 도대체 어느 경로로 빠진 거야?”

“으음, 그것도 얘기하자면 긴데요……. 컨셉은 둘째 치고 경로는요…….”

마찬가지로 몸을 숙였다. 2차 경연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