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2차 경연이 열리는 녹화장이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자리를 찾아가니 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잘 지나치게 잘 먹힌 모양이다. 아까부터 제작진을 비롯하여 출연진들에게서 무언의 안쓰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너무 잘 먹혀도 탈이구나.”
“…형, 신경 쓰여?”
걱정스럽다는 듯이 돌아보는 윤명에겐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애초에 이럴 걸 모르고 한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수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었다. 멤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밝힐 수 있었고, 역으로 버즈량까지 늘었으니 어떻게 보면 저 놈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해신아!”
아, 쟤를 잊고 있었구나. 건너편에서 울상을 지은 채 손을 흔드는 손제완이 보인다. 기사가 터진 이후 연락으로 귀찮게 굴더니 아직도 그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다 날 걱정해 주는 건데. 괜찮다며 슬쩍 마주 인사해 줬다. 곁에 있던 여타 멤버들도 여길 보곤 꾸벅 고개를 숙인다.
“하하, 하…….”
“형, 인기 많네?”
“이런 건 필요 없거든.”
“와우, 해신이 형. 완전 분위기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구나.”
양 사이드에서 물어 오는 이유준과 권혜성의 모습에 됐다는 시늉을 했다. 다 필요 없으니까 얼른 무대나 선보이게 해 줘. 오늘은 고대하던 블릭투에게 엿을 먹이는 날이었다.
지금이야 아주 의기양양하겠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여길 돌아보는 놈들을 확인했다. 주변 시선이 있으니 얌전한 척 굴고 있었지만 눈빛만 봐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최한성 저 인간은 대놓고 나와 이정원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 어리구만. 가정사 작전은 유야무야 넘어갔더라도 오늘 무대로 우리가 절벽까지 떠밀릴 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MC인 안지하가 등장했다. 간략한 설명을 통해 오프닝을 찍고 1차 경연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 1위를 차지한 블릭투로부터 정해진 무대 순서를 확인했다.
[경연 순서]
1. 원더보이즈
2, 얼티밋 나인
3. 디레스트
4. 인클루
5. 블릭투
6. 하이사인
“악, 우리가 첫 번째야?”
“흐음, 4위라…….”
처음 발표되는 타임 테이블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로 줄 줄은 알았지만 가장 마지막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찬스를 거머쥐게 된 하이사인이었다.
문채민은 조용히 눈을 굴려 내 쪽을 바라봤다. 잘못 걸렸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내젓던 중이었다.
* * *
관객들의 입장도 기다릴 겸 무대를 위해 대기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인파가 사라지자 이정원에게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핫! 이거 뭐야?”
그건 권혜성도 마찬가지였다. 내 어깨에 매달려선 어찌 된 일인지 질문했다.
“왜 우리한테 여섯 번째를 준거야? 형? 나 깜짝 놀랐네! 마지막이 제일 좋은 거 아니야? 왜지? 사실 착한 사람들이었다던가?”
“…바보, 그럴 리가 있냐. 다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뭐! 너도 지금 그거 모르잖아! 넌 알아?”
“…….”
“맞아, 해신이 형,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형은 이것도 눈치채고 있었지. 우리 순서가 뒤로 밀릴 거라는 걸.”
문채민의 물음을 마지막으로 생각해 둔 답변을 꺼냈다. 사실 나도 뒷 순서일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이 만들어질 줄은 모르고 있었다.
“뻔하잖아. 빼앗으려고 하면 무조건 먼저 해야 하지 않겠어?”
“그거 컨셉?”
“응, 케이 앱으로 슬쩍 흘렸어도 실질적으로 먼저 선보이는 거랑은 갭이 다르거든. 아마도 우리보단 앞에서 무대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그 뒤 우리가 비슷한 선상으로 무대를 꾸리면 객석 반응부터 엉망이 됐을 테니까. 처음엔 뭐가 어떻게 된 거냐며 말이 많았겠지. 그것도 곧 팬들에 의해 과거 케이 앱이 떠오르면서 우리가 배낀 게 아니냐는 여론으로 돌아갔을 걸?”
“와…. 취소, 착한 사람들이라는 거 취소!”
분개한 권혜성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순서에 대한 추측은 몇 가지 더 있었다.
“6번째를 줄 거란 건 나도 몰랐지만……. 이것도 본인들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투표에 대한 임팩트가 높은 편이니까. 자신들을 최대한 미루려면 우리를 마지막으로 배치하는 한이 있더라도 5위를 가져가야 했겠지.”
“따지자면 그거네. 우리한테 득 보일 거 하나도 없이 이득에 눈이 멀어 스스로 넘어진 거.”
“강태오, 너 웬일로 말이 매섭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속셈 있는 사람들한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잖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우리 대기실에 도착해 있었다. 앞 무대의 모니터링도 할 겸, 블릭투 녀석들이 빼앗은 컨셉을 어떻게 소화할지 구경해 보기로 했다.
“형! 나부터 옷 갈아입는다!”
“그래.”
대기실 구석 모니터를 확인하면서도 차례대로 의상을 탈의하는 멤버들이었다. 이것도 우리 작전 중 하나였는데, 마지막까지 놈들을 속이기 위해 무대 의상으로 보이는 착장을 두 벌 준비했었다. 오프닝 때 보여 준 이걸 보고 걔네는 안심하고 있겠지.
자고로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라고 했다. 선빵을 날린 건 거기였으니, 우리에겐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른 팀 무대를 구경했다. 원더보이즈와 얼티밋 나인은 블릭투 놈들에게 제대로 이용당하고 있었다.
“민석이 형…….”
“1차에서 자기네만 올리면 욕먹을 테니까, 저기 두 팀을 이용했잖아.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면 점수론 좋은 일을 해 준 거니까. 이번엔 앞 순서로 당겨서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버린 거겠지.”
“어쩐지 제완이 형네도 표정이 안 좋더라.”
“정원이 형, 나 물어볼 거 있는데. 그 최한성이란 사람, 원래 이렇게 적을 잘 만들어?”
“…음, 좀 막가파 구석이 있긴 했지만. 애가 데뷔하면서 맛이 갔나?”
이정원의 신랄한 평가를 듣다 보니 디레스트와 인클루의 무대도 종료됐다. 역시 경력은 무시 못 한다고, 노는 것 같더니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
“…저 배신자.”
지원겸, 뜬금없이 불러다 밥이나 먹자며 헐렁하게 굴길래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는데. 소화하기 어려운 걸 그룹의 노래를 완벽하게 인클루의 무드로 변화시켰다.
포인트 안무는 살리면서 남성미가 돋보이는 보이 그룹의 노래처럼 편곡된 멜로디가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아, 역시 저기는 저기라 이건가.”
이정원은 디레스트의 무대를 보고 질렸다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특히 권혜성과 강태오는 댄스 브레이크에 집중했다.
“우와……. 저기서 저걸 한다고? 보기만 해도 코어 아파.”
“안무에 쉴 틈이 없는데. 대충 봐도 엄청 빡빡하게 구성했어.”
“그렇지! 태오 형! 나 저거 했으면 백스테이지 가자마자 드러누웠어!”
김환준 저 인간도 능글거리는 타입답게 고민하는 척하더니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젠 그 누구도 믿지 않기로 다짐하고 까맣게 암전된 무대를 바라봤다.
내가 예상한 바가 맞는다면 오케스트라 세팅의 오프닝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긴 칵테일 바와 쉐이커, 다양한 스타일로 입은 멤버들의 등장에 녀석들은 모두 나를 돌아봤다. 역시나, 우리가 미끼로 던진 곡과 흡사한 노선을 타고 있었다.
쉐이커를 흔드는 직원을 뒤로 한 채 손님으로 가장한 멤버가 대형을 이끌었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모이고 단상 위에서 재즈 가수를 연기하던 메인 보컬이 싸비에 들어간다.
“…이거, 진짜 비슷한데?”
문채민은 무대 구성을 보고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윤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지금 저 무대는 거의 우리가 구상하고 있던 것의 카피본 같아 보였다. 의상이나 약간의 디테일, 원곡을 제외하자면 한날한시에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이 흡사한 진행이었다.
이정원의 헛웃음을 들으며 다음 안무의 방향을 예측했다.
“여기서 단체, 그리고 카메라 워킹 돌려서 래퍼 등장. …그렇지. 이다음은 테이블 위에서 탭댄스 퍼포먼스. 메인 댄스 브레이크는 의자와 테이블을 이용한 낙하형 안무 체인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내 이야기에 강태오의 시선이 여길 향했다.
“…형, 이쯤 되니까 좀 무서운데.”
“나도 좀 놀랐어. 70%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전체 유형이 비슷할 줄은 몰랐거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든든한 뒷배가 있던 것인지. 블릭투와 그 소속사는 대담해도 너무 대담했다.
“…팬들을 믿고 이렇게 한 건가?”
“대중이랑 여론이 넘어갈 걸 생각해서?”
“뭐, 그것도 일리 있지. 나중에 우리가 아니라고 공지 띄워 봤자 좋지 못한 반응만 이어졌을 테니까.”
“오히려 더 욕먹었을걸? 그럼 저기가 원하는 대로 됐던 거겠네.”
“완전~ 사면초가!”
이쯤 되니까 괘씸해서라도 쉽게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음… 근데, 형들, 채민아. …나만 뭔가 좀 그래?”
“뭐가?”
“…무대. 어색하지 않아?”
윤명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고 나도 깔아 둔 함정이 있었다.
“그러게, 카피를 할 거면 자기네 곡도 생각하고 했어야지.”
“야, 신해신, 너 설마…….”
“내가 얌전히 우리 것 도둑만 맞았겠어? 거기에 폭탄을 하나 붙여서 줬지.”
내 이야기를 들은 이정원이 배를 잡고 웃었다. 윤명은 눈치챘는지 눈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유준이 형, 저기 하는 원곡…….”
문채민의 질문에 이유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 사랑 노래였어. 꽤 들쩍지근한.”
“아,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그거였구나!”
그래, 서바이벌과 경연에서 원곡이 있는 노래를 다룰 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 그건 바로 기존 가사와 바뀐 편곡 및 무대가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분이었다.
“훔쳐 가더라도 완전히 못 가져갈 거라고 생각한 게 이것 때문이었거든. …조금만 눈여겨봤어도 전부 흡수하긴 불가능할 거란 걸 알 것 같았는데.”
“스스로한테 도취됐던 거였겠지. 우리를 완전히 눌러 버릴 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정원이 형이 센터로 섰던 타이틀곡 같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운명이었다. 이정원에게 악의를 가진 최한성이 이정원이 센터로 섰던 타이틀의 뮤비처럼 한 방 먹게 되는 일 말이다.
블릭투, 쟤네가 해야 하는 원곡은 이번 컨셉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억지로 누른 편곡과 무대 구성이 묘하게 들떠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이야 화려해서 눈길을 끌겠지만 조금 있으면 팬들도 대중들도 알 일이었다. …뭔가 아주 어색한 무대가 만들어졌다는 것 말이다.
완전히 종료되어 함성이 터지는 화면을 보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귀신 같은 타이밍에 맞춰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이사인, 무대 스탠바이 해 주세요!”
“네!”
“가자.”
의상을 탈의한 멤버들을 이끌고 무대 후미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당하기만 하던 나는 없어. 1차 경연에서 억울하게 밀린 것들을 되찾아 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