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크라운 게임 2차 경연이었다. 1차를 놓쳤던 원통함을 드디어 갚을 수 있게 됐다. 윤명의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흔들던 권소현을 보며 하이사인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진행됐던 블릭투의 무대가 종료된 지 제법 지난 시간이었다.
세트장이 치워지고 새로운 설비가 이뤄지는 동안 사방에선 앞서 있던 무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체인지 어쩌고라더니 결국은 걸 그룹 대전이었잖아. 나 이거 보고 엔넷 이 새끼들이 또 사서 욕먹을 짓 하는구나 했는데. 생각보단 전체적으로 잘하지 않았어?”
“어, 솔직히 연말 무대에서 이렇게 성별로 바꾼 무대는 잘 안 해 줬잖아. 난 라떼인간이라서 꽤 재밌게 봤는데.”
“원형 바뀐 거로 욕할 애들은 욕하겠지만, 경연으로는 재밌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접한 정보로는 그리 좋은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대를 봐서 그런가 제법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분위기 전환이 빠른 업계인 만큼 하이사인에게도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앞서 했던 블릭투 무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저번부터 이상하게 우리가 당하던 느낌이라 원한을 갖고 있던 나와 권소현 역시 귀를 기울였다.
“…근데, 나만 블릭투 뭔가 좀 걸려?”
“뭐가?”
“…그, 무대할 땐 화려해서 잘 몰랐는데. 곱씹어 보니까 가사가 너무 안 어울려서…….”
“야, …사실 나도 공감 중. 지금이야 현장 때문에 물들어서 그렇지. 나중에 후기나 본방 나온 후 커뮤 돌아 봐. 얘기가 다를 것 같지 않냐.”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진다. 권소현은 어딘가에 있을 블릭투의 팬덤을 걱정했는지 몸을 숙여 내 귓가로 속삭였다.
“대~박 공감. 블릭투가 저번에 총점 1위 먹었었지? …이번에 왜 우리 애들 순서를 이렇게 좋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한 게 있으니 갚아야지. 유인아, 알지?”
“…오냐.”
자세를 바로잡으며 함성을 쏟을 준비를 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무대의 세팅이 마무리되었다. 까맣게 암전된 현장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시작은 세트장 가장 후미에 있던 작은 단상에서부터였다. 탕! 하고 켜지는 핀 조명이 작은 아크릴 박스를 비추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받침대 위로 박스 안에 설치된 보석이 보였다.
…얘네, 런이프 노래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끈적이는 무브의 원곡을 떠올리며 호기심이 발동하던 찰나였다.
거대한 중앙 스크린 위로 흑백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치지직- 거슬리는 노이즈 음이 나오며 cctv 같은 프레임이 걸렸다.
빠르게 감긴 영상 속에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보석을 구경했다. 그것도 얼마나 됐다고 모두가 빠진 공간 위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보석 주인인가? …전시장?”
그 남자들이 나온 장면에서 그대로 화면이 정지됐다. 그러곤 그 위로 종이가 날아드는 효과가 이어졌다.
[Try to catch me]
그리고 모든 조명이 켜지며 무대 위의 장면이 드러났다. 영상 속에서 본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언제 나온 것인지 모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다이아몬드가 들어가 있는 박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뭐라고 하는 시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긴장감이 흐르는 전주가 나오며 본격적인 노래가 시작됐다. 끈적거리는 분위기는 제거되고 긴박한 전자음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bgm과 오마주되어 묘한 하모니를 이뤘다.
탕!
체인지되는 믹싱을 통해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라틴계 음악이었다. 원곡과는 다른 방향의 강렬함을 주장하듯 화려한 멜로디가 이어졌다.
언제 사라진 것인지 모를 남자의 뒤에 있던 정장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경을 쓴 채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인물은 멤버인 윤명이었다.
평소 인상과는 전혀 다른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발걸음을 물려 백댄서들과 안무를 췄다.
- Catch me, catch me if you can
쉿, 자 시간이 됐어
완벽한 Paradigm
Ready to go
대각선에서부터 시작한 대형으로 반이 갈리며 턴을 했다. 팔을 뻗어 교차시킨 모습에서 그걸 걷어 내며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윤명과는 비슷한 듯 다른 착장을 하고선 서류를 끼고 있던 일행 중 하나였다. 언제 내려놓은 것인지 모를 파일을 구두 굽으로 멀찍이 밀며 박자에 맞춰 재킷의 단추를 풀어 헤친다.
이정원의 미성과 바이올린의 전주가 합쳐지며 은근한 긴장감을 생성했다. 가는 소리에 맞춰 힘있게 받쳐 주는 보컬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지금 숨겨 둔 마음을 열어 봐
감췄던 걸음을 내디디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놀라울걸 Fantasy
그 상태에서 카메라의 워킹이 이동되며 새로이 등장한 멤버가 존재했다. 반대편에서 주변을 점검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강태오였다.
이정원이 굽으로 밀어낸 서류철을 발로 받아 냈다. 탁, 그러곤 그걸 들어 올려 가장 앞에 있던 종이를 넘겨봤다.
강태오의 얼굴 위로 결연한 다짐이 스쳐 지나가고 넥타이를 끌어 내린 강태오가 손가락 두 개를 부딪쳐 뒤에 있던 사람을 불러냈다.
개구진 인상을 싹 지운 채 눈을 굴리고 있던 권혜성이었다.
- 힐끔거리던 눈빛 너머로
너의 마음이 흔들리던 걸 봤는데
- 어린아이처럼 숨어선 뭐 하니
용기를 내 봐 이젠 Over time
둘의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을 내며 주고받는 형식으로 노래가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잡아 교차하듯 돌고선 동시에 보석이 담긴 단상을 돌아봤다.
윤명과 이정원은 다른 사람들의 지시하에 거대한 가림막을 이끌고 나왔다. 붉은 융단의 천이 걸려 가운데가 갈라져 있었는데 단상을 보호하듯 후면을 치며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던 사이, 융단 가운데에서 흰 손이 튀어나왔다. 정장 셔츠로 보이는 소매와 함께 손가락을 휘저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누군가가 거리를 돌아보니 나와 있던 손은 다시 안으로 들어간 이후였다. 아슬아슬한 공방을 보듯이 흥미로운 무대 연출이 진행됐다.
그때, 다시 모두의 눈길이 흩어지며 흰 손이 등장했다. 순식간에 장미 한 송이를 만들어 낸 마술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강태오와 권혜성의 의해 가림막이 분리됐다.
그 가운데에 서 있던 것인 앞머리를 넘긴 채 남들과 비슷한 듯 다른 형식의 정장을 갖춰 입은 이유준이었다.
오른팔은 앞으로, 왼팔은 뒤로 민 채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등 뒤에는 이유준과 반대로 꼿꼿하게 허리를 편 신해신과 문채민이 서 있었다.
원곡의 어반한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색채로 물든 노래였다. 전자음과 바이올린 소리, 그리고 새롭게 얹어진 기타 소리가 정열적이면서도 화려하게 폭발하던 순간이었다.
본격적인 싸비가 진행되며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단상 코앞으로 모여들었다.
- Catch me, baby (you can catch me)
Try to catch me 그 이상을 느껴 봐
당장 망설이지 말고 Hold hand
래퍼 둘이 주력으로 진행하는 특이한 형태의 보컬이 이어졌다. 멜로디는 남아 있지만 호흡이 짧아 흡사 랩처럼 느껴지는 파트였다.
신해신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음을 부르면 이유준이 저음의 래핑을 선보였다. 문채민은 중간중간 비는 부분에 맞춰 더블링을 넣어 풍성한 요소를 적용했다.
화려한 안무에 맞춰 이유준에게서 여러 가지 소품이 쏟아져 나왔다. 언제 연습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마술을 곁들인 동작이 이어졌다.
소매에서 튀어나온 트럼프 카드들을 곁에 있던 권혜성과 강태오에게 날렸다.
이정원과 윤명이 몸을 피해 대형을 움직이자 그 사이로 신해신과 문채민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호흡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못할 복잡한 대형의 안무였다.
삐끗하는 순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슬아슬한 무빙이다.
놀란 마음에 입을 벌리고 무대를 쳐다보자 가운데에 서 있던 이유준이 발을 굴렀다. 그러곤 훌쩍 단상 주변의 세트들을 뛰어넘어 한쪽 무릎을 꿇곤 고개를 들어 씨익 미소 지었다.
- (One, two, three! shhh, 자, 놀랍지?)
저음의 내레이션이 이어짐과 동시에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을 가린 이유준이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듣곤 다시 몸을 돌려 멤버들과 내부 직원을 연기 중인 백댄서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이유준에게서 트럼프 카드를 한 장 받은 권혜성이 카드의 뒷면을 돌려 봤다. 가벼운 무게에 비해 너무도 휙 하고 날아가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트럼프 뒷면에는 길죽한 쇠막대가 하나 붙어 있었다.
권혜성은 웃는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는 척 신중히 카드와 쇠막대를 분리했다. 그러곤 뒤에 있던 백댄서들과 춤을 추며 이정원에게로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 이젠 속일 수 없어 점점 더 빠져들어가
내밀어진 두 손을 펼쳐
품 안에 세상을 담아 봐
다리를 벌려 박자를 타며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무빙을 선보였다. 앞과 뒤로 몸을 돌리며 정확한 리듬에 맞췄다. 그대로 이정원의 바로 뒤까지 다가가 이정원의 양복 재킷 윗 주머니에 막대를 넣었다.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던 이정원이 행커치프 바로 아래 들어온 쇠막대에 주먹을 쥐어 입을 가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정원의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이유준에게 또 다른 카드를 받은 사람, 강태오였다.
강태오 역시 카드 뒤에 붙어 있던 새로운 형태의 쇳덩이를 들고 있었다. 구 모양으로 납작하게 눌려 있던 것이 이정원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곤 이정원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댄스 브레이크에 들어갔다. 쇠막대를 주고 반대편으로 가던 권혜성이 위트를 섞어 가며 둘과 합류했다.
- Look 보이니 가득 끌어안은 diamond
한 걸음 두 걸음 춤을 추며 나아가 Step
- 거기서 Turn left
In a past tempo
노래가 절정에 접어들었을 무렵 백댄서와 멤버들 사이에 몸을 숨기며 동선을 이동하던 이유준이 가장 앞으로 나왔다. 멤버 일곱 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문채민과 래핑을 주고받으며 다른 멤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 한계를 넘어 펼쳐진 이 세상
고민했던 게 의미 없는
담대한 행동에
그 선을 넘어 눈길을 던져
낮지만 힘이 깃든 이유준의 목소리에 리듬감이 좋은 문채민이 합쳐지니 절로 흥이 일어났다. 조명이 조도를 낮추며 보다 은밀한 분위기를 생성해 냈다.
격한 반주와 함께 쉬지 않고 동작을 이어 가던 멤버들이 한 방향을 돌아봤다. 거기엔 어느 순간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이유준이 있었다.
이정원이 바로 밑에 비어 있던 홈에 강태오와 권혜성에게 받은 쇠를 끼워 넣었다. 타이밍에 맞춰 단상을 다시 뛰어내린 이유준이 멤버들과 함께 2절 싸비를 불렀다.
- Catch me, baby (you can catch me)
Try to catch me 그 이상을 느껴 봐
당장 망설이지 말고 Hold hand
신해신은 1절보다 한 단계 높은 음으로 노래의 텐션을 끌어 올렸다. 핏대가 바짝 선 목과 찡그린 미간이 대형 스크린에 잡혀 나왔다.
긴박하고 아찔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이유준과 페어 안무를 췄다. 문채민이 이유준이 등을 진 단상 위에 유리 뚜껑을 열며 발을 물렸다.
멤버들의 화려한 안무 속에서 걸음을 옮긴 이유준이 박스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곤 정면을 향해 윙크하며 그대로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었다.
권혜성과 강태오 그리고 윤명을 기점으로 한 동작들이 이어지며 신해신과 이정원이 화음을 쌓아 가장 높은 피치의 음을 찍었다.
- 이젠 속일 수 없어 점점 더 빠져들어 가
내밀어진 두손을 펼쳐
품 안에 세상을 담아 봐
어느덧 일곱 명은 다시 한군데에 모여 있었다. 잠시 무대 아래로 내려가 있던 백댄서들과 가장 처음 등장했던 남자가 올라와 텅 빈 케이스를 보고 손짓했다.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백댄서들 사이로 흩어져 들어갔다. 저마다 갖고 있던 서류철과 안경 그리고 원래의 단정한 복장을 가다듬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점차 줄어드는 반주 속에서 등을 돌린 이유준이 힐끔 객석을 돌아봤다. 낮고 은밀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나오며 큰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 (One, two, three! shhh, 자, 이게 다 내 거야)
윙크를 하곤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댄 모습이었다. 스크린 위로는 처음의 영상이 나오며 새로운 카드가 날아들었다.
[Catch me now]
탕! 그대로 모든 곡의 엔딩이 이어졌다. 저마다 몸을 숨긴 자세에서 백댄서들을 뒤로한 채 흩어진 마무리였다. 객석을 향해 처음 등장 때와 흡사한 인사를 한 이유준을 끝으로 모든 무대 위의 조명이 암전됐다.
거기서부턴 그저 비명과 함성의 연속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너무도 높은 퀄리티의 무대에 입이 떡 벌어졌다.
비록 내 최애인 신해신도 권소현의 최애인 윤명도 센터가 아닌 무대였지만 저마다의 역할에 맞춰 완벽한 호흡을 보여 준 경연임은 틀림없었다.
“미쳤다.”
“대박…….”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돌아가며 센터를 세우는 그 구성엔 절로 박수가 나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