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26화 (225/328)

226화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현장이었다. 결과 발표를 위해 모두가 다시 모여 앉았다. MC인 안지하를 기다리며 주변 분위기를 살피니 묘한 시선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이의 관심을 받은 것은 1차에서 큰 이변으로 1위를 가져간 블릭투와 녀석들이 사나운 눈빛을 쏘아붙이고 있는 우리, 하이사인이었다.

“…오, 제법 살벌한걸?”

“혜성이 형, 형도 대단하다.”

“내가 뭐~”

“저것도 재능이지…….”

본녹화가 시작되지 않은 덕분인지 제법 자유롭게 대화가 이어졌다. 권혜성의 능청스러운 표현에 문채민와 윤명의 타박이 들린다.

그나저나 표정 관리들 좀 하지. 최한성의 표정에 옆에 앉은 이정원이 작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게 같은 팀이라지만 악당 저리가라였다.

“야, 정원아. 네가 그러니까 우리가 못된 사람 같잖아.”

“피해자는 우리인데, 뭐가 어때서. 신해신, 넌 좀 당당해도 돼.”

“…카메라만 조심해라. 아직은 녹화 전이라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언제 불시에 불이 켜질지 모르니까. 내 뜻을 알아챈 이정원이 자신만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흘깃 돌아본 제작진 무리 속 한동준 PD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한 게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까진 긴장을 풀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놈들 많이 당황한 것 같지? 보는 눈이 많은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최한성은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일부 멤버들 역시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는 게 회사 관계자들을 찾고 있는 듯했다.

이제 보니까 비슷한 애들끼리 뭉쳤군. 괜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단 마음으로 녹화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어깨를 건드는 손가락에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숙인 강태오가 넌지시 이야길 했다.

“…1차에서 당했던 거, 다들 속이 꽤 쓰렸던 모양인데.”

“어?”

“봐 봐, 인클루, 디레스트, 얼티밋 나인, 원더보이즈.”

강태오의 말에 맞춰 각자 자리에 앉아 있는 출연진들을 살폈다. 반대편에 있던 김환준의 묘한 미소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재밌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디레스트 멤버들을 비롯하여, 그 옆, 얼티밋 나인 역시 엄지를 치켜세우곤 고생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눈을 굴려 우리 라인의 원더보이즈도 확인하니 여기도 흡사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한숨을 내쉰 이민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뭐라고 설명해 왔다. 해독이 되지 않아 고개를 기울이자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터뜨린다.

지원겸이야 뭐……. 두말할 것도 없어 보였다.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특유의 시원스러운 행동을 해 보였다.

뭐라는 거야, 저 인간. 겉만 봐서는 열받은 느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법 호쾌한 태도로 보이는 리액션이 이어진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더라도, …저 녀석들,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입장에선 좋은 일인 거겠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강태오에겐 알겠다는 의미로 눈짓했다. 한동준이 카메라 감독에게 지시를 내리는 걸 보아, 곧 기습적인 녹화가 시작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멤버들을 비롯하여 주변의 인물들에게 눈치를 보냈다. 다들 경력은 무시 못 한다고 자세들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카메라 버튼의 색상이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대화를 멈추고 스테이지를 돌아보자 그 사이로 MC인 안지하가 등장했다.

2차 경연 관련하여 고생했다는 멘트와 동시에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1차 경연에서 선보였던 무대 점수에 2차 경연 점수를 더하여 순위가 바뀔 거라는 이야기였다.

“자, 그럼 ‘체인지업 (Change-Up)’이라는 주제에 맞춰 새로운 무대를 꾸며 주신 6 그룹에 대한 점수를 공개하겠습니다!”

안지하의 손짓에 따라 스크린 위로 새로운 결과물이 떠올랐다.

[2차 경연 순위]

1. 인클루 (180)

2. 하이사인 (135) / 디레스트 (135)

3. 얼티밋 나인 (90)

4. 원더보이즈 (60)

5. 블릭투 (30)

[도합 순위]

1. 인클루 (300)

2. 하이사인 (285)

3. 블릭투 (270) / 원더보이즈 (270)

4. 디레스트 (255)

5. 얼티밋 나인 (240)

“저게 뭐야?”

사방에선 놀랐다는 반응과 탄식, 그리고 풀리지 않은 궁금증에 의한 물음 등이 이어졌다.

진짜 저게 뭐지?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1위를 차지한 인클루의 이름이 아닌 2위에 적혀 있는 우리와 디레스트의 점수 칸이었다.

“135?”

“2등 점수는 150점 아니었어?”

“3위 점수는 120 아니었나…….”

술렁거리는 동요 속에서 안지하가 마이크를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설명드리겠습니다. 현장 방청객 투표로 이루어지는 크라운 게임은 점수 배당제를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초유의 사태로 이번 2차 경연에서 ‘하이사인’과 ‘디레스트’ 여러분이 동일한 표수로 2위를 차지하셨습니다.”

안지하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김환준이 눈이 마주쳤다. 수용이 빠른 것인지 예상했던 건지 김환준은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랬다네요, 후배님들?”

“아하하…….”

떨떠름한 얼굴로 반응해 주자 안지하가 부가적인 설명을 해 줬다. 들어 보니 왜 이런 점수가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1위부터 180, 150, 120, 90, 60, 30점을 드리는 시스템에 맞춰 크라운 게임 제작진은 공동 2위를 차지하신 ‘하이사인’ 여러분과 ‘디레스트’ 여러분께 2위와 3위의 점수를 합산하여 똑같이 반으로 나눈 ‘135점’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135점이 그렇게 나온 거구나…….”

“아.”

다들 카메라가 있어서 적당히 공감하는 리액션을 보내 온다. 하지만 속은 말이 아니겠지. 나도 겉으론 수긍하는 척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동준, 이 인간이 그새 머리를 썼군. 1차 경연에서 대놓고 블릭투를 치켜세웠다. 비록 다른 그룹들과 같이 엮어서 가렸지만, 우리와 디레스트가 손해를 본 건 조금만 있으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번은 우연이나 상황상 해프닝 정도로 넘겼겠지. 하지만 두 번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일 거다. 이번엔 점수 자체를 조작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이번엔 우리 무대의 컨셉을 빼앗는 작전을 썼던 것이겠고.

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자, 다른 방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걸 막은 것 같았다. 우리 같은 경우 150점을 받았다면 인클루와 더불어 공동 1위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디레스트도 150점을 받는다면, 블릭투와 같은 270점 선상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저 인간들 실력에 3차와 파이널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찬스였다.

공동 2위면 둘 다 150점을 줄 수 있었는데도 교묘하게 깎아내린 거다. 과연 PD는 PD라고 블릭투 놈들이 친 사고를 적당하게 무마한 모양이었다.

일단 이렇게 된 이상, 3차에서 확실히 점수를 뒤집어야 할 것 같았다. 도리어 이런 편법을 쓰자 승부욕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그건 나만 그랬던 게 아닌지, 우리 멤버들을 비롯하여 디레스트 멤버들이 투지를 내비쳤다. 5위라는 순위에도 아무렇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게 놀라웠다.

도리어 온갖 수를 쓴 블릭투 놈들만 초조해 보였다. 최한성은 이제 주변 신경을 쓸 정신도 없었는지 손가락으로 손톱을 갉작이고 있었다. 대충 봐도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라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럼 이제 다음 3차 경연의 주제를 발표해 보겠습니다.”

안지하의 외침에 맞춰 스크린 위로 새로운 멘트가 떠올랐다. 1차와 2차 모두 무대를 두 개나 준비했기에, 3차의 요건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3차 경연 주제]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

“랜덤 초이스?”

“무, 무슨 뜻이야?”

경연 프로그램 하는 놈들 종특인가. 랜덤이란 단어를 참 여러 번 보는 듯하다. 뭔가 알듯 말 듯 한 내용에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보였다. 유어돌에서 비슷한 걸 해 본 적 있는 우리와 이민석만이 불길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안지하의 말을 듣고 한동준과 남현욱이 알고 지내긴 했다는 걸 인정했다.

사이가 나쁘든 말든, PD 놈들 아이디어는 거기서 거기구나. 출연진 괴롭히는 걸 좋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뭐, 물론 한쪽은 지나치게 악질이지만 말이다.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 모두 기억하고 계신가요? 저희 크라운 게임 사전 미팅 진행 중 제작진이 건넨 이 카드를요.”

안지하가 큐 카드 속에 숨겨 뒀던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저건 나도, 멤버들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어? …랜덤 초이스, 혹시 그건가. 초이스 뭐라고 적혀 있던 문항. …근데 우리 저기에 뭐 적었었지.”

“…명이 형! 형이 기억 못 하면 어떡해! 그 부분은 형이 적었잖아! 얼른 떠올려 봐!”

“야! 윤명, 너, 거기 뭐 썼어!”

윤명의 멍한 목소리에 문채민이 놈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곁에 있던 권혜성도 제 머리를 헤집으며 윤명을 닦달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유준,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체념한 듯한 이유준의 웃음소리와 그를 타박하는 강태오의 대화를 들으며 제법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 프로그램 출연이 확정된 이후, 메인 제작진 일부와 갖게 된 작은 미팅 자리였다.

‘설문이요?’

‘네~ 보다시피 큰 내용은 없고, 그냥 간단한 포부나 즐겨 듣는 음악 리스트 같은 거예요. 추후 공식 사이트에 이벤트성으로 오픈될 수 있으니 상세하게까진 아니더라도 질문에 맞춰 작성해 주세요.’

눈앞에 나타난 작은 설문지를 확인했다. 방송 전 미팅을 핑계로 사소한 설문을 하게 된 날이었다. 빽빽하게 써진 글씨를 보아 오픈용 이벤트는 맞는 것 같은데.

한동준은 없는 자리였지만, 해당 프로그램이 엔넷과 모종의 협의를 했단 걸 알고 있었다. 적당히 성실하게 기재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내용으로 작성하자는 뜻을 공유한 이후이기도 했다.

하나, 둘씩 적어보다가 생각보다 흔한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하는 컨셉? 가장 애정하는 앨범의 노래? 커버해 보고 싶은 그룹? 함정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단순한 질문들이 반복됐다.

이 정도면 오늘 일로 사건이 터지진 않겠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그래서 멤버들이 돌아가며 작성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문채민, 권혜성, 윤명 등 막내 라인이 주도하여 빈 카드를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펜을 들고 있던 윤명의 입에서 이게 뭐냐는 뉘앙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오늘의 초이스 곡……?’

노래를 추천해 달라는 멘트가 많았기에 그중 하나인가 싶어 제작진을 살펴봤다.

‘아, 그것도 위랑 비슷한 맥락입니다. 아시다시피 팬분들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가 하는 것을 많이 따라 하잖아요. 리스트를 공개해서 케이 팝 산업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바,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여러 개 넣어 본 거예요. 큰 의미는 없으니까 아까처럼 편하게 기재해 주세요~’

‘아……. 그럼 이건 내가 쓴다?’

‘그래~ 위에선 나랑 채민이가 썼으니까. 형들, 형들도 문제없지?’

‘어.’

뭔가 수상쩍기는 했으나, 사건의 발단이 되기엔 너무 단순한 물음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존 가수의 노래 정도를 추천해 달라 한 거여서 의심하기는 애매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윤명이 유려한 글씨로 질문에 답을 적는 걸 구경했다. 오랜 시간이 걸린 항목도 아니었으니 먼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번 미션 곡과 관련이 있다고? 눈을 굴리며 고민 중인 윤명을 쳐다봤다. 골치 아픈 건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였는지 각자 펜을 들었던 걸로 추정되는 멤버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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