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27화 (226/328)

227화

“내가, 내가 뭘 썼더라…….”

혼란스러운 얼굴의 윤명을 뒤로하고 안지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소란스러운 주변 분위기를 정돈하고자 했는지 박수를 치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다들 눈치채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이번 3차 경연의 주제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는 사전 미팅에서 여러분이 작성해 주신 이 설문지 속 19번 질문. ‘오늘의 초이스 곡을 하나 추천해 주세요.’의 답변으로 진행됩니다.”

“으악! 너 뭐 썼어, 손제완!”

“나, 나도 몰라! 그냥 그날 밴에서 들은 거 적었단 말이야.”

“박선빈…….”

“겨, 겸이 형……. 살려 줘…….”

“대니, 너 설마 팝송 쓰진 않았지?”

“Umm……. I don't recall. (음, 나 기억 안 나.)”

점점 더 시끌벅적해지는 상황 속에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더는 이런 분위기를 이어 갈 생각이 없었나 보다. 안지하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자, 자, 기억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해당 질문의 답변은 모두 정리되어 있으니까요. 아, 여기서 한 가지 말씀을 덜 드린 것 같은데. …전 아직 초이스만 말했지, 랜덤은 얘기하지 않았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초이스해 주신 이 곡은 랜덤으로 각 그룹에 배정이 됩니다. 어떻게? 바로 이렇게! 제작진 여러분, 뽑기 가져와 주세요~”

1차 경연 종료 이후 한번 해 본 적 있는 뽑기 기계가 다시 등장했다. 우리가 무슨 노래를 썼는지 기억하기도 전에 타 그룹의 선택 곡에 대한 걱정이 추가됐다.

답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멤버들을 돌아봤다. 거기서 가장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이정원과 이유준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나갈까?”

“야, 윤명, 정원이 형 잡아!”

“뭐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위풍당당하게 손을 드는 이정원이었다. 그런 녀석을 보던 권혜성과 윤명이 조용히 이정원을 잡아챘다.

2차 미션 곡으로 우리가 하기엔 조금 난해한 노래를 골랐던 녀석이기에 이번만큼은 멤버들 모두가 한뜻을 보인다.

누굴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눈에 띈 인물이 하나 있었다. 천성이 그런 것인지 이정원과 쌍벽으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준이었다.

“유준아, 네가 나가 볼래?”

“그래도 돼?”

“너 이런 건 안 해 봤잖아. 이번 기회에 확인 좀 해 보자.”

똥손인지, 운이 좋은지.

“뭐, 그렇다면야~”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준이 안지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여러 개의 쪽지 속에서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안지하에게 반납하고 돌아오는데 팀 자리 위에 있던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우리가 아닌 다른 그룹의 이름이었다.

[얼티밋 나인의 선택 곡]

“…얼티밋 나인? …손제완?!”

아무래도 우리가 하게 될 노래는 얼티밋 나인의 설문지 답변이었던 모양이다. 아까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보아 그걸 쓴 건 손제완 같았으니까. 놈을 쳐다보니 당황한 얼굴로 양손을 흔들어 보인다.

“저거, 지금 미안하단 제스처지.”

“아무래도 유준이 형, 망한 것 같은데.”

“형, 나 사실 이런 거 잘 못 해.”

“…넌,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하냐. 적어도 나가기 전에 말했어야지.”

이유준은 담담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뽑은 거 어쩔 수 없기는 하나, 2차 경연에 이어 3차 경연까지 미션 곡을 가져온 놈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아 피곤이 몰려온다.

그 상태에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글귀들이 나타났다. 손제완이 적은 설문지의 답변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코코비 - Endless love]

“…Endless love? 코코비 선배님들? …내가 아는 그 Endless love?”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차마 모르는 시늉은 할 수가 없어 입을 쩍 벌린 문채민을 쳐다봤다.

이번엔 이정원과 이유준 역시 당황했다는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강태오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던 듯 주변을 훑어봤다.

…지금 나만 상황 파악이 안 돼? 눈을 굴리자 윤명이 고개를 숙여 작게 설명해 준다.

“형, 이 노래 모르지…….”

“어? …어.”

“이거, 20년 전에 나온 선배님들 노래야. …청순 계보 걸 그룹의 시초, 코코비 선배님들의 대히트곡.”

미친. 윤명의 이야기에 바로 손제완을 바라봤다. 거기엔 자기가 쓴 답변을 보고 이마를 감싸 안은 녀석이 있었다. 손제완뿐만 아니라 얼티밋 나인 전 멤버가 여길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왔다.

사죄다. 이건, 사죄하는 거야. 자신들이 우리에게 크나큰 역경을 줬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손제완, 저 망할 자식이. 시커먼 노래만 내던 얼티밋 나인의 멤버치고 너무도 살랑거리는 곡을 선정했다. 당시에 무슨 심정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녹화가 끝나면 놈에게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자, 모두들 해당 미션 곡을 잘 받으셨나요? 음, 당황하신 분들도 보이고, 좋아하시는 분들도 보이네요.”

안지하의 말에 다시 스테이지 정중앙을 살폈다. 우리가 적은 노래는 원더보이즈에게 가 있었다. 윤명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는지 이민석에게서 오케이 표시가 떨어진다.

…그래, 거기라도 나아서 다행이네. 현타가 온 걸 숨기며 안지하의 클로징 멘트를 들었다.

“…여기서 끝인 줄 아셨겠죠?”

…클로징 멘트가 아니었구나. 한바탕 이어진 소란에 뒤이어 새로운 소식들이 전달됐다. 이놈의 프로그램은 스크린 위로 뭔가 띄우는 걸 참 좋아했다.

[3차 경연 주제]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 + …….

아, 망할. 이건 저번에 본 적 있는 거다.

[3차 경연 주제]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 + 3종 유닛 미션

“이번 3차 경연 역시 두 개로 진행되겠습니다!”

안지하의 설명에 권혜성이 양 볼을 감싸 안았다.

“…해신이 형, 우리, 또 2개 해?”

저건 1차 경연과 남모를 작전을 펼치던 2차 경연에 이어, 이번 3차 경연 역시 두 개의 무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할 말을 잃고 있던 순간에, 이유준과 이정원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눴다.

“난 3개만 아니길 빈다.”

“설마~”

블릭투가 비슷한 일을 또 벌인다면 이번에도 미끼용 곡을 해야 하냐는 내용이었다.

“…그건 안 되지.”

내가 봐도 3개는 무리수다. 운명도 참 기구하지. 남들은 이제 5곡 할 걸, 우리만 6곡을 하게 생긴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3종 유닛 미션은 팀 전원이 참가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보컬, 랩, 댄스 부문 중 한 종목을 택해 세 분야가 싸워 추가 점수를 얻는 포맷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쪽지를 뽑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안지하가 숨겨진 내용을 밝혀 왔다.

“사실 아까 각 팀의 대표 멤버들이 뽑으신 쪽지 안에는 해당 유닛에 대한 내용이 함께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자, 그럼 곧바로 3종 유닛 미션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3종 유닛 미션]

보컬 - 하이사인, 얼티밋 나인

랩 - 인클루, 블릭투

댄스 - 디레스트, 원더보이즈

“한 그룹당 무대를 꾸려야 하는 멤버는 총 2인. 4인으로 이루어진 유닛을 통해 멋진 무대를 연출해 주세요!”

안지하의 진행이 이어질수록 눈앞이 캄캄해진다. 크라운 게임이 종료될 때쯤에는 무대를 몇 개나 해 봤을지 궁금했다.

* * *

“안녕하세요. 그, 인사도 드릴 겸, …손제완 찾으러 왔는데요.”

“허, 헉! 정이 형! 오셨다!”

녹화가 종료된 이후 대기실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얼티밋 나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노크 후 문을 여니 시끌벅적한 멤버에 의해 모두의 이목이 몰렸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사복으로 갈아입은 리더 류정이 한달음에 우리 앞으로 나타났다.

“그, 아,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이런 실례를.”

“아니에요.”

류정은 손제완의 답변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일부러 알고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멤버들도 당황은 했을지언정,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저 왜 하필 이 노래를 골랐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한 것인데. 식은땀을 흘리는 손제완을 발견하니 저도 모르게 해탈한 미소가 나온다.

“해, 해신아… 미안해!”

“나 사과받으려고 온 것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야, 제완아, 너 그날 무슨 일 있었냐.”

“어, 엉?”

“…뭔가 좀 센치한 기분이었다든가.”

내 물음에 뒤에 있던 이유준에게서 풋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걸 본 다른 멤버가 알겠다는 듯이 자세한 내막을 알려 줬다.

“아, 그, 해신 씨? 안녕하세요! 전 권민재라고 하는데요. 제완이 저 녀석, 완전 앞 세대 선배님들 노래를 잘 들어서요……. 걸 그룹, 보이 그룹 안 가리고 듣는데. 하필이면 그날 코코비 선배님들 노래를 듣고 있었나 봐요.”

“아, 그래서…….”

“예…….”

권민재라는 단정한 인상의 멤버의 이야기에 대강의 사정이 이해됐다. 어차피 주 목적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리더인 류정과는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 다른 멤버들 역시 얼티밋 나인의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며 유닛 무대 전 의기투합을 하고 있었다.

“보컬 유닛 때문에라도 먼저 찾아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게요. 아전체 때 이후로 또 이렇게 한 팀이 되어 보네요.”

“신기하죠?”

“네, …맞다. 그리고, 이번에 좀 속이 시원했어요.”

몸을 숙인 류정이 귓가로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이건 아마도 블릭투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그놈들은 얼마나 미움을 산 거지. 어쩐지 우리를 반겨 주더라니 돌아가는 사정이 훤히 보여서 더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류정과는 조만간 그룹끼리 다시 모여 자리를 갖기로 했다. 아까부터 여길 힐끔거리는 손제완이 부담스러워서라도 간단한 안부만 전하고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뒤에 있던 멤버들에게서 수상쩍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피곤한 얼굴을 한 강태오가 보였다.

“쟤네 왜 저래?”

“신난 거지, 뭐. 바로 회사로 가 볼 거잖아.”

“설마, 그거?”

“…어.”

강태오의 말에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우리 블릭투한테 한 방 먹였었지. 6위를 받은 놈들을 떠나, 걔네가 썼던 잔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었다.

거기다 하나 추가로 이번 일을 통해서 회사 내부의 귀찮은 인물 몇을 처단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밑밥은 모두 깔렸으니 본실행은 우리의 경연이 끝난 지금부터였다.

타이밍에 맞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도경]

회사로 와 주세요. 재밌는 건 같이 봐야 하잖아요?

별로 재밌다곤 생각 안 하는데. 내 문자를 훔쳐본 이정원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인간이었으면 좋겠는데.”

“정원이 너한텐 원한 사면 안 되겠다.”

“네가 너무 무른 거야.”

이정원이 뜻하는 바는 한가지였다. 이번 컨셉을 유출한 내부 스파이가 A&R 팀에 있는 조진만의 끄나풀이기를 바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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