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30화 (229/328)

230화

그렇게 큰 사건도 하나 해결하고, 3차 경연을 준비하기 위한 나날이 이어졌다. …사건이 해결됐다고 봐도 되는 건가? 겉으로는 해고 처리된 김현석을 끄나풀 삼아 서도경이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게 뭐일지 모르겠으니까 문제지만…….”

앞선 경연에 대한 피드백도 받을 겸 이런저런 잡무들도 처리할 겸 멤버들과 함께 회사에 출근했다. 저번처럼 여기저기에서 불려 다니는 놈들로 인해 거의 흩어졌다고 봐야겠지만, 오후부턴 본격적으로 무대를 구상해 볼 속셈이었다.

시간도 남았겠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자 조용한 복도를 거닐던 중이다. 1층 로비가 아닌 복도 구석의 자판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그러면 그렇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원겸]

“…받기 싫은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받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도움받은 것도 있고, 안 그러는 척 호구 잡혀 준 지원겸이 떠오르니 차마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액정을 터치하자 저번과는 또 다른 뉘앙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 야, 한 대 치면 인성 논란 나겠지? 그럼 내 아이돌 인생도 끝장이겠지?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편해진 건지, 아니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대상으로 낙점 지은 건지. 지원겸의 거친 언행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디레스트 그 자식들은 어떻게 버텼대. 독하다, 독하다 했더니 진짜 독종들이었구만, 새끼들…….

“저기, 멘토님. 무슨 소리신데요.”

홀로 있는 듯, 울리는 목소리에 의문이 들었다. 열받은 것만큼은 확실한데. 디레스트의 이름까지 나오니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다.

아, 그때 돌연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하니 역시나 싶은 반응이 이어진다.

“지금 3차 경연 준비하세요? 그 3종 유닛 미션…….”

- 뽑은 놈이 멤버 자식이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아! 김가온! (헉, 겸이 형, 나, 나 불렀어?!) 뭐야, 진재영 잔소리 벌써 끝났냐? 넌 가서 1절 더 들어. 머리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나 보다. 빽 소리를 지른 지원겸의 너머로 우당탕탕 문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인클루의 멤버, 김가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앞뒤 상황을 그려 보자면 김가온이 뽑은 쪽지로 인해 블릭투와 같은 종류의 포지션을 택하게 됐고, 그로 인해 유닛 무대를 함께 하게 됐다. 아무래도 이걸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던 것 같다.

인클루랑 블릭투는 랩이었던가……. 지원겸은 보컬이었으니까 본인이 나가는 종목이 아니었음에도 거기랑 엮일 생각에 분통이 터지나 보다.

하긴 블릭투가 못하면 피를 보는 건 인클루도 마찬가지였다. 1차에서 당한 수모를 2차에서 간신히 갚아 줬는데, 여차하면 다시 아래로 떨어질 형편이었다.

뭐, 그래도 우리랑은 상관없잖아. 지원겸이 들었으면 뒷골 잡을 만한 생각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기도 누르고 1위를 탈환해 볼 속셈이었다.

“멘토님, 혹시 그거 하소연하려고 전화하신 거예요?”

- 하소연? 하소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너 지금 회사지. 근처에 디레스트 놈들 있어? 있으면 걔네 좀 떠봐 줘. 이 새끼들 어떻게 어르고 달랬는지.

“…블릭투요?”

- 어! 아주 짜증 나서 죽겠어! 대면하긴 싫어서 합동 연습 전까진 온라인으로 소통하고 있는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태서 녀석이랑 선빈이 놈이 출전하니까 그나마 진행되고 있는 거지. 나나 진재영이었잖아? 가서 깽판 쳤다, 진짜.

아무래도 블릭투가 2차 경연으로 입은 데미지를 인클루에게 풀고 있었던 듯하다. 현장감으로 무디던 녹화 날과 달리 방송 이후 인터넷은 그리 좋지 못한 반응이 많았었다.

거기에 크라운 게임 룰을 은근슬쩍 어기며 어그로를 끌었단 걸로도 욕을 먹었다. 원래 한번 밉보이면 별게 다 싫어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는 수준이었다.

인클루에겐 조금 미안한데. 선곡도 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같이 죽자는 뜻밖에 더 되지 않는다. 물론 개인 무대에선 회생하겠지만 여기서 손해 보는 것이 전체 순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게다가 1차 경연 때 디레스트가 바로 팽당한 걸 보면 수가 있을 수도 있었다.

지원겸의 분노가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놈의 오지랖. 받은 게 있으면 어느 정돈 돌려줘야 할 듯하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성격이 그걸 용납지 못했다.

“…하아, 그, 회사니까. 한번 확인해 볼게요. 근데 저도 장담은 못 해요. 아시잖아요.”

디레스트도 블릭투한테 한 방 맞은 거. 돌려 표현해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지원겸이다. 물어봐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긴 했지만, 좋은 무대를 보이고 말겠다는 평소 마인드와 죽기보다 지기를 싫어하는 승부욕이 우위를 차지한 듯하다.

- …야, 미안하다. 이런 부탁이나 해서.

이 인간이 어쩐 일이지 싶은 마음이었다. 갑자기 전화해서 우다다 내뱉은 것치곤 태세 전환이 참 빠른 사람 같았다. 뭐, 나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까. 이런 말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피식, 헛웃음을 내뱉으니 거기까지 들렸는지 지원겸도 비슷한 소리를 낸다.

- 어쭈, 웃냐? 간이 커졌다?

“다 멘토님한테 배운 거죠. 빠르게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도 그만큼 도움받았으니까요.”

- 어, 진짜? 야, 그럼 너희는 유닛 때 무슨 노래 하냐? 그리고 ‘Endless love’ 그거 무슨 컨셉으로 ㅎ…….

“이만 끊습니다.”

이어지는 지원겸의 이야기엔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물에 빠진 거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인간임을 잊고 있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본격적인 미팅까지 여유가 있다. …그럼 지금 타이밍이지? 멤버들도 흩어져 있는 지금이 지원겸의 부탁을 들어줄 최적의 기회 같았다. 물론 들키면 얄짤 없겠지만, 한 입으로 두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해 준다고 했나.”

발걸음을 옮겨 디레스트가 있을 법한 장소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디레스트가 회사에 와 있다는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소속 연예인이 적으니까 밴 몇 대만 있으면 출석 체크가 되네.”

지하에서 봤던 차량을 떠올리며 연습실을 방문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걷는데 멀찍이서 들리는 음악에 정답임을 확인했다. …이걸 정답이라고 봐도 되나. 차라리 디레스트가 회사에 없었던 게 나았을 것 같기도 하고.

호랑이 굴에 스스로 찾아가는 기분이 들어 발이 떨어지지 않던 무렵이었다. 1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접근할 방법을 찾아보는데.

“음, 이게 무슨 일이지?”

“아, 깜짝아!”

뒤쪽 코너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 잘 놀라네요. 행동은 대담한 편이면서.”

그건 바로 김환준이었다. 물통을 든 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연습 중인 것 같은데, 홀로 나와 있는 꼴이 이상했다. 왜 여기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손에 들린 물통을 흔들어 보인다.

“나도 사람이라서요. 뭐, 힘들어서 도망칠 핑계로도 삼고.”

“아, 예…….”

거기까진 안 물어봤다. 시큰둥한 얼굴을 하니 김환준이 주변을 기웃거렸다. 정보를 얻으러 온 건 나였지만, 막상 마주하니까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숨을 삼키곤 김환준의 행색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1차 때보단 훨씬 화사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얘네도 블릭투랑 같이하면서 마음 고생을 했었나 보다. 이걸 지원겸에게 얘기해 주면 분통 터져 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신해신 씨가 웬일로 먼저 찾아왔지? 나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요? 우연이라곤 안 할 거죠? 누가 봐도 그건 아니잖아요.”

“화법이 특이하시네요. 퇴로부터 막고 보는 거.”

“하도 도망 다녀서 말이죠. 이렇게 안 하면 대화가 안 통하는걸요.”

솔직하다 못해 집요한 김환준의 태도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시간 끌면 위험한 나였으니까, 돌직구로 물어보기로 했다.

“1차 경연에서 블릭투 그 사람들 어떻게 다뤘어요?”

“음?”

“공동 무대 하셨었잖아요. 설마, 거기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준 겁니까?”

김환준은 내 질문에 한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너무도 의외의 주제가 나왔는지 신기하단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내겐 그런 게 필요 없었다. 원하는 답만 들으면 멤버들과 합류하러 갈 예정이었다.

“갑자기 훅하고 찔러오네요? 저 그때 꽤 힘들었는데.”

“아, 예…….”

그건 나랑 상관없다니까.

“근데 이걸 왜 궁금해하는 거지? 3차 경연, 하이사인은 얼티밋 나인이랑 하지 않아요? 아~ 지원겸. 벌써 연락했나 보네.”

하여간에 귀신같은 인간이다. 단답으로 툭툭 치고 빠지는 내 말 몇 마디에 지금 상황을 모두 파악해 버린다. 알면 답이나 해 달라고 재촉하니 도르륵 눈을 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거긴 우리보다 더 고생 중이겠구나. 와~ 조금은 속이 시원한데요? 나만 이런 걸 겪을 순 없지. 지원겸한테 안부 좀 전해 줘요. 우리도 했으니까 너희도 해 보라고.”

“저 중간에 끼기 싫은데요. 그냥 답만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김환준과의 대화를 통해 질문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런 말을 전달해 준다면 지원겸의 분노는 당연지사고, 나까지 저 둘 사이에서 고생할 수 있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여길 뜰 자세를 취하니까 김환준이 한발 양보해 줬다. 어깨를 으쓱이더니 나지막한 뉘앙스로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었다.

“신해신 씨는 참 냉정하단 말이야. …알았어요, 알았어. 알려 줄게요. 얘기는 듣고 가야지. 굳이 따지자면 애들이 생각보다 단순하더라고요. 마지막에 가서 뒤통수 맞은 건 조금 얼얼하긴 했는데, 진행하는 과정에선 순응하는 척 살살 달래 보라고 전해 주세요. 뭐, 우리 때랑 분위기가 다르다면 반박하는 걸 이용하라고 해도 괜찮겠네요. 아, 맞다. 참고로 이건 그쪽 때문에 얘기해 주는 겁니다. 아직 우리한테 좋은 감정 없죠? 이걸로 빚 좀 깎아 달라고요.”

유들유들한 김환준에 태도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MXP 때부터 당했던 일들을 모두 지워 주겠단 건 아니었고, 100 중에 1 정도는 잊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전달하면 알아서 하겠거니 싶은 마음에 이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댁도 연습으로 바쁘잖아. 나는 이 자리를 뜰 생각이 만연한 상태였다.

“아~ 허들이 높네~ 그래도 노력상 정도는 주세요?”

먼저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린 이후였다. 등 뒤로 들리는 김환준의 목소리에 미간이 구겨지려 한다.

답을 하기 전까진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아서 조용히 뒤돌아봤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곤 말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 드릴게요.”

노력상은 무슨, 앞으로도 백번은 더 구르란 의미였다. 단물이 빠질 때까지 이용해 주마. 크라운 게임에선 디레스트까지 이길 작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