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3차 경연 관련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2차에서 겪은 사건 때문인지 모두 날카로워 보인다. 검열의 검열을 통과한 인물만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윤재희를 주축으로 한 A&R 팀 내부에선 조진만과 그 패거리를 향한 적개심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럼 3차 경연 미팅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다룰 건 배점이 높고 단독 무대를 선보이는 ‘랜덤 초이스 (Random Choice)’ 주제입니다. 상당히 연차가 큰 앞 세대 그룹의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현재에 맞춰 촌스럽지 않으면서도 그 당시 감성을 살리는 걸 주력으로 삼고 싶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고민해 왔는지 프레젠테이션 페이지가 길어 보인다. 멤버들은 윤재희와 다른 사람들의 설명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제는 난제인지, 이렇다 할 메인 컨셉이 확고하지 않았다. 같은 걸 눈치챈 이유준이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다.
“편곡 방향이나 그런 것도 좋은데, 컨셉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신 건가요?”
“…네, 안타깝지만 아직까진 방향이 잡히지 않아서요. 혹시 멤버분들이 생각했던 게 있으시다면 편하게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그럼 저요! 원곡이 저희 데뷔곡 때처럼 신비주의에 부드러운 느낌이었잖아요. 그, 연말 무대에서 했던 것처럼 오르골 버전 같은 건 어때요?”
“아, 명이 형이 센터로 섰던 그 무대 말하는 거지? 뭐, 잘 어울리긴 하겠네. 화려하고 보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권혜성의 아이디어에 문채민이 수긍한다는 얼굴을 한다. 한밤의 동화 때 같은 무대라……. 굳이 따지자면 가사도 매치되는 느낌이 강하긴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걸 집어낸 것이 이정원과 강태오이다.
“좋긴 한데, 이미 한 번 보인 스타일이라 난 반대. 이런 경연은 최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보고 있거든.”
“나도 정원이 형 말에 공감해. 그렇게 오래된 무대도 아니고, 비슷한 컨셉으로 가면 분명 말이 나올걸. 무엇보다 그때보다 더 생동감 있는 연출은 힘들다고 보는데. …권혜성, 입 좀 집어넣지?”
“쳇…. 나도 공감해서 그러는 거거든. 둘 다 돌려서 말할 줄을 모른다니까. 그치, 윤명?”
“…으음, 넌 직구로 말해 줘야 알아듣잖아.”
“야! 넌 센터로 추천해 줘도 그렇게 나오냐!”
“…형들, 창피해.”
시끄러워진 멤버들에 의해 문채민이 고개를 숙였다. 이유준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는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 골치가 아팠다.
나도 이정원과 강태오와는 같은 생각이었다. 좋은 무대였긴 했으나 얼마 전에 했기에 비슷한 느낌으로 보일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한참 앞 세대의 유명 그룹의 히트곡을 커버하는 만큼, 성의 있는 무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됐다.
뭘 해야 임팩트를 살리면서 곡의 정취와 잘 맞아떨어질까.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나와 비슷한 뉘앙스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도경이 보인다.
“음, 그럼 노래를 한번 들어 볼까요? 이미 수십 번은 더 들었겠지만, 그래도 혹시란 게 있잖아요.”
서도경의 즉흥적인 선택에 윤재희가 플레이 리스트를 켰다. 갑자기 이어진 음악 감상 시간임에도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내가 여기에 적응하긴 했나 봐. 어이없다는 생각을 뒤로한 채 부드럽게 이어지는 전주를 감상했다.
피아노 소리로 시작되는 잔잔한 인트로가 풍성한 느낌이 드는 댄스곡이었다.
“…진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말이야.”
“응? 뭐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역시 익숙하단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는 게 그만 옆에 있던 이유준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
처음 녹화장에서는 정신이 없어 그랬는지 낯선 기운이 강한 곡 같았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부터 음악을 찾아 들어보니 예전부터 이 노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어디서 들어 봤더라. 멜로디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과거 어딘가의 한구석을 건드렸다. 이런 내가 이상했는지 이유준을 비롯하여 강태오도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는데?”
“아니, 그냥…. 뭔가 어디서 되게 많이 들어 본 것 같아서.”
“요즘 경연 준비한다고 반복 재생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근래에 들어서 알고 있는 기분은 아니고. 꽤 오래 전… 아주 옛날에 들어 본 것 같은…….”
옛날이라. 불현듯 예전에 들었다면 보육원 생활을 하던 당시일거란 생각이 스쳤다.
“아, 보육원.”
“뭐? 보육원이면 그, 형이 살던 곳?”
내 말에 목소리를 줄인 이유준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되묻는다. 그럼에도 인근에 있던 멤버들에겐 들렸는지 여기를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늘어났다. 의견을 나누느라 바쁜 직원들을 제외하면 서도경도 나를 보고 있었다.
“기억났어. 이거, 어디서 들어 봤는지.”
보육원 하니까 떠오른 장면이었다. 은사님,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노래는 은사님이 어린 시절의 내게 종종 들려주곤 하셨던 음악이었다.
잠이 들기 직전 자장가처럼 반복되던 피아노 소리와 인트로가 귀에 선하다. 거기서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 *
- …Endless love? 해신이 너, 아직도 기억하니, 그 노래?
“예, 그 곡 맞죠? 자기 전에 종종 들려주셨던…….”
번뜩이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중단한 미팅이었다. 좋은 컨셉이 나올 것 같아서 은사님에게 통화를 드렸다.
미팅 룸을 벗어나 복도 구석에서 전화하니 통화 내용을 듣고 싶은 것인지 따라 나온 놈들이 기웃거린다. 특히 권혜성과 윤명은 대놓고 내 핸드폰 반대편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야, 너희 이리 안 와?”
“아, 왜~ 정원이 형도 궁금하잖아……!”
“…쉿. 조용히 해, 바보야.”
한 걸음 떨어져선 벽에 기댄 이정원의 타박에 권혜성과 윤명이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문채민은 나름 체면치레하겠다며 강태오의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삐딱하게 기울어진 상체를 보니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궁금해하는데 비밀로 하기도 그렇고. 낮게 한숨을 내쉰 뒤 스피커로 돌려 주자 권혜성이 화색을 띈다.
“앗싸. 해신이 형, 짱~”
“쉿, 혜성아.”
- 어머?
“아, 죄송해요. 애들이랑 같이 듣고 있었거든요. 그, 사실 저희가 이번 경연곡으로 이걸 하게 돼서요…….”
- 웬일이야, 이런 우연이 다 있네? 나는 그럼 너무 좋지~ 아휴, 그때 생각난다. 해신이 네가 4, 5살쯤 되었을 때인가. 나도 어쩌다가 알게 된 노래인데, 누군가 피아노 버전으로 예쁘게 편집해 놓은 음원이 있더라고. 자장가로 딱이겠다 싶어서 종종 들려주곤 했던 건데. 해신이 너, 그 노래 들으면 참 잘 잤어. 어찌나 푹 잠드는지 고롱고롱 숨 쉬는 소리까지 음악의 한 부분 같았다니까.
“흐음~”
“…왜.”
은사님의 설명에 이정원이 길게 콧바람을 뿜어낸다. 그러곤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머리를 벅벅 긁는데, 강태오의 눈길이 내 얼굴에서 핸드폰으로 내려가는 걸 발견했다.
“뭐라고 말씀하시잖아. 형, 마저 들어 봐.”
“어, 어.”
- 경연곡이라고 했지? 그래서 그때 일을 물어보는 거였구나. 내가 알기론 봄에 나왔던 걸로 아는데……. 참 예쁜 애들이었거든. 지금은 다들 40대는 됐겠지만 말이야. 아, 이건 해신이 네가 더 잘 알겠구나. 넌 겨울에 많이 들었으니까 전혀 다르게 기억하려나?
“네? 겨울이요?”
은사님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모여들었다. 쉼없이 주절대던 권혜성마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 응, 거기까진 기억이 없나 보네? 그 당시엔 나도 아이돌 그룹 노래를 들을 연령대는 아니었잖니.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누군가 피아노로 편집해 놓은 곡을 알게 돼서 들었던 건데. 그게 아마 발매가 된 지 꽤 지난 이후였을 거야.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단다.
“…아! 그거다.”
- 내가 도움이 되긴 했나 보구나. 다행이네.
“은사님, 그, 감사합니다.”
- 얘는 무슨, 나도 오랜만에 들어 봐야겠는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그리운 느낌도 들고…….
은사님과 통화를 하니 번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티가 나서였는지 은사님께선 낮게 웃으시며 다음에 다시 연락하란 말씀을 하셨다.
대충 통화를 종료하자 문채민이 궁금하단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뭘 느꼈는지 알고 싶단 의미였다.
“해신이 형,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거야?”
“어,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뭐, 네가 그런 얼굴이면 통과겠지. 다 비슷하지 않아?”
“맞아~ 해신이 형의 저, 어라? 싶은 표정. 항상 문제 해결 포인트가 됐잖아.”
이정원과 권혜성의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민망해지는 듯하다. 일단 됐다며 다들 모이라고 손짓했다. 들어가기 전 멤버들에겐 가볍게 피드백을 들어 볼 속셈이었다.
* * *
“해결법이 나왔나 보군요.”
다시 모인 미팅 자리였다. 서도경의 말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다들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 내가 그렇게 티가 나나 싶다.
“그럼 길게 끌 것도 없이, 한번 들어 볼까요.”
서도경의 진행에 윤재희를 비롯하여 A&R 팀의 이목이 쏠렸다. 컨셉에 따라 편곡 방향이 갈리는 만큼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이고 있었다.
통과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의견이라도 피력해 보자는 마음이다. 손을 들어 의견을 말해 보겠단 뜻을 비치고, 생각해 둔 아이디어를 꺼내 봤다.
“사계절 어떠세요?”
“사계절이요?”
내 말에 윤재희가 눈을 빛냈다.
“네, 사계절. 원곡은 봄에 나왔던 노래잖아요. 하지만 가사로 봐도 멜로디로 봐도 사계절을 모두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사랑을 주제로 다루는 노래인 만큼, 계절이 지나도 영원히 너를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연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랑의 주체가 반드시 연인만은 아니니까…….”
가족애, 또는 자기 자신 그리고 친구 등에 관한 다양한 소재가 가능할 느낌이었다. 두루뭉술한 내 설명에도 윤재희의 머릿속엔 새로운 그림이 구상되었나 보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놀랐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확실히, 무대 스테이지 후면을 4분할로 나누고, 정면 가운데에만 단체 군무용 센터를 세우면 보이는 시각적 연출도 화려할 겁니다. 음악도 폭이 넓어질 거고, 때에 따라 멤버분들의 스타일링과 보컬 및 특색에 맞춰 파트 분배도 가능하겠죠. …이거 괜찮은데요?”
윤재희의 의견엔 서도경도 공감한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회사 사람들을 지켜본 멤버들이 흡족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 생각이 좋은 게 저나 혜성이 같은 톤은 둘 중 한 명을 치켜세우면 나머지 하나는 밑 사운드로 깔아 줘야 했거든요. 둘이 같이 놨을 때보단 그쪽이 시너지가 강해서 매번 그 선택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뉘면 공평하게 이미지를 구상해도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이정원의 설명에 권혜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로 세울 멤버까지 마음속에 짚어둔 상황에서 은사님과의 통화가 3차 경연의 핵심이 되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