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여긴 이렇게 생겼었구나.”
“소속 가수들이랑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
주변을 돌아보는 이정원을 데리고 낯선 건물로 들어갔다. 메이터스 사옥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항상 지나가기만 하고 직접 올 일은 없던 동네였다.
빛이 잘 드는 사옥과 다르게 조금은 차분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벽에 수놓인 가수들의 앨범 재킷을 살피니 누군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신 씨! 정원 씨!”
“오셨네.”
“그러게.”
로비에서 등을 돌리자 편해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손을 흔든다. 뒤에 서 있던 인물은 조금 뻘쭘했는지 우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금방 오셨네요? 밴은요?”
“주차장에 세워 뒀습니다. 매니저님은 인근에 계신다고 하셨고, 관계자분들은 정식 미팅 때만 참여하시겠다고 하셨어요.”
“흐음, 그럼 오히려 좋죠.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어색함을 물리치려고 그랬던 건지 생글생글 웃은 남자가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 이 사람은 얼티밋 나인의 리더이자 우리와 3차 경연을 함께 해야 할 유닛 멤버 류정이었다.
그 뒤에서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발걸음을 옮기는 저 사람은 막내인 오정오라고 했던가? 문채민보단 나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묘하게 앳된 티가 나서 슬쩍 마주 웃어 줬다.
움찔, 오정오가 어깨를 떨며 류정의 뒤를 쫓아 붙는다.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시크한 얼굴로 얼티밋 나인의 회사 사옥을 살피던 이정원을 건드렸다.
“야, 정원아. 우리 친해지는 데 좀 걸리겠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그, 유닛곡이라고 하니까 합을 맞추려면 어느 정도는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보거든.”
그런데 저기가 영 낯가리는 돌쟁이 타입 같아서 말이지. 단체로 어울릴 땐 그럭저럭 이야기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나뉘니까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겠지. 우리가 팀에선 맏형 라인이라지만 얼티밋 나인 선배님들이랑 같이 있으면 어리잖아. 스타일들이 잘 맞으려나. 이따가 한번 봐야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가 유닛 미션에서 하게 된 파트는 보컬 부문이었다. 자동으로 메인 보컬인 이정원을 비롯하여 이정원과 파트 합을 맞추는 일이 잦았던 내가 나서게 됐다.
다른 녀석들이 나와도 괜찮았을 텐데. 출전 멤버를 고르는 과정이 얼핏 떠오르려 한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떠밀려 나온 상태였다.
미팅 룸에 모여서 3차 경연 유닛 미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보컬이란 주제에 모두의 시선이 이정원을 향해 모여들었다.
‘뭐야, 난 자동이야?’
‘정원이 형이 나가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데. 어느 스타일이든 소화해 내잖아. 보컬이란 부문에서 메인 보컬이 빠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나도 공감해. 정원이를 기점으로 합이 맞는 목소리를 매치하는 게 게 좋지 않을까.’
‘형들 말에 한 표 더. 그럼 나랑 유준이 형은 자동으로 제외겠네?’
이정원의 덤덤한 불만에 이유준이 턱을 괬다.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 의견에 힘을 실어 줬다. 문채민은 자신과 래퍼 포지션인 이유준이 자동 사퇴임을 밝혔다.
근래 빡빡한 스케줄로 매번 2개씩 무대를 준비하다가 이번엔 하나만 할 수 있으니 부담이 적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저 녀석들인가. 아까부터 말없이 시선을 피하는 멤버들이 보였다.
‘권혜성, 윤명. 어딜 빠져나가려고.’
‘태오, 너도 후보군인 건 알지?’
‘어.’
나와 같이 리드로 노래를 받치는 일이 많았던 윤명과 댄스 브레이크 등 전반적인 연출에서 힘을 썼으나 실질적으로는 화음 같은 보컬도 가능한 권혜성과 강태오였다.
‘왜 해신이 형은 빠져나가! 형이 제일 강력하지 않아?’
‘…옳소. 정원이 형이랑 가장 자주 합을 맞추는 건 형이잖아…….’
‘빠져나간 거 아니거든. 나도 후보 중 하나야. 그나저나 너희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무대 하고 싶다고 방방 뛰어다녔을 거면서.’
대놓고 승부욕이 강하던 권혜성과 안 그런 척 지는 건 질색하던 윤명이 슬슬 몸을 빼려 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강태오야 제법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수상함을 느끼고 눈을 흘기자 무언가를 안다는 듯한 얼굴의 이유준이 웃음을 흘렸다.
‘형, 쟤네 정원이 형 때문에 그러는 거야. 유닛이면 우리 팀에선 둘이 붙어 다녀야 하잖아. 그런데 형이 없는 정원이 형, 얼마나 거침없겠어.’
‘뭐야, 권혜성, 윤명. 너희 진짜 그거 때문이야?’
‘아, 아닙니다……! 유준이 형은 왜 사람을 모, 모함하고 그래!’
‘…옳소.’
이정원의 고개가 돌아가자 권혜성이 어깨를 떨었다. 윤명은 아까부터 ‘옳소’를 제외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아직 애들은 애들이라니까. 성인 된 지 반년밖에 안 돼서 그러나. 적당히 이해는 해 주려고 했다.
‘래퍼라서 다행인 것 같네.’
‘문채민… 너 혼자 빠져나가고…….’
‘나만 빠져나간 거 아닌데. 유준이 형도 나갔는데.’
‘하하.’
정신없이 구는 녀석들을 보다가 진지한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강태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공감한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다 됐고, 그래서 누가 나가는 게 좋을까.’
‘곡 선정이랑 얼티밋 나인 측 출전 멤버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애매하긴 한데. 베리에이션이 큰 사람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정원이 형 의견은?’
‘나도 비슷해. 좀 걱정되는 게 있다면 태오 너라든지, 혜성이 녀석하곤 크게 맞춰 본 적이 없다는 것? 특히 권혜성.’
‘옙?’
‘쟤하고 내 목소리 탁성이 너무 갈리잖아. 중간에 잡아 줄 음색들이 없으면 너무 갈리지 않을까 싶어서.’
이정원의 이야기에 권혜성이 화색을 내비쳤다. 그러고는 냅다 손을 들어 자신도 비슷한 생각 중이라 말했다.
‘예! 맞습니다! 저는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해신이 형, 태오 형, 윤명, 셋 중에서 출전 멤버를 뽑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혜성이가 빠져나가려고 용쓰는 게 보이긴 하지만. 형들, 나도 저 말엔 동감이야. 혜성인 차라리 단체 쪽에서 활약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유준이 형, 짱……!’
자연스럽게 빠진 권혜성을 두고 나머지 셋이 오랜 대화를 나눴다. 윤명은 권혜성을 보며 치사하다는 둥 투덜거렸지만, 무대 자체는 좋아하는 놈이라 별 상관없어 보였다.
‘…근데, 형들, 나랑 정원이 형 둘은 너무 비슷한 라인이지 않아?’
‘아, 하긴 그렇긴 하네. 탄탄한 미성이라는 점이 흡사하긴 하지.’
윤명은 음역대를 제외한 전반적인 자신의 보컬이 이정원과 비슷하다며 사퇴하고 싶어 했다. 하기 싫다고 핑계를 대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마 진심일 것이었다. 이정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정도야 비슷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얼티밋 나인 측에서도 미성 라인으로 나와 버리면 화음이 단조로울 수 있을 거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이쪽에선 그걸 간과하지 말자. 그럼, 윤명, 너도 제외. 아쉽지만 다음에 같이하자.’
‘…넵.’
전혀 아쉽지 않단 얼굴의 윤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은 건 나와 강태오 정도인가. 놈과는 시선이 마주쳤다.
이정원과 더 자주 합을 맞춰 호흡이 안정적일 나냐, 아니면 드물어서 색다르게 느껴지는 강태오냐로 긴 공방이 이어졌다.
‘둘 다 정원이 형이랑 같이 있을 때 합도 괜찮고, 조금 결이 다른 걸 제외하면 느낌상 어울릴 것 같은데…….’
‘으음, 이러니까 더 고민이 되네. 어때, 당사자들? 뭐라도 말 좀 해 봐.’
‘갑자기 그래 봤자 우리가 뭘 얘기해.’
‘…나 말하고 싶은 거 있는데. 괜찮아?’
피장파장 비슷한 대화가 오가던 찰나, 강태오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녀석이었다.
이제는 다짐한 것처럼 손을 들어 모두를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공방을 마무리 지었다.
‘난 이번엔 해신이 형한테 한 표.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단 형 쪽인 것 같아서.’
‘어? 난 너도 좋은 것 같은데.’
‘아니, 보컬은 둘째 치고 무대 전체 그림을 봤을 때 내가 들어가 버리면 정원이 형이 너무 튀어 버려. 나보단 해신이 형 쪽이 합도 좋고, 3차인 만큼 중요한 경연인데 모험보단 안정적인 게 나을 거야.’
‘흐음, 뭐 그것도 괜찮지.’
이정원은 센 성격과 달리 외모만큼은 참 청순한 녀석이었다. 담백하게 생긴 것도 한몫하고 미성과 잘 어울리는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얼티밋 나인이 전반적으로 진한 인상들이었다. 거기서 누가 나오던 이정원을 중화해 줄 멤버가 필요하단 소리였다.
강태오도 나도 비슷한 계열이긴 했지만, 덩치가 좋은 저 녀석보단 내 쪽이 이정원과 합이 맞았다. 키도 그렇고, 날카로운 느낌만 좀 뺀다면 전체 그림상, 이쪽 밸런스가 나을 거란 이야기 같았다.
강태오의 말에 이정원도 긍정한다는 뜻을 밝혔다. 확실히 멤버들의 그림체를 중요시하곤 했었으니까. 이것 역시 무대 퀄리티를 올리는 데 필요한 부분이긴 했다.
‘신해신, 너도 뺄 건 아니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네요~’
이정원의 새초롬한 언행에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리더로서 이런 무대에서라도 다른 멤버들을 부각하려고 했던 거였는데, 모두가 저렇게 나오니 내가 안 나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단체 쪽에서 다른 방향을 강구하기로 하고, 그렇게 3차 경연 유닛 미션의 멤버가 정해졌다.
그 뒤론 속전속결 얼티밋 나인 측과 대화가 이뤄졌다. 이 사람들의 회사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넌 손제완 선배님이 없어서 아쉽겠다? 꽤 친해 보이더니.”
“아, 걔…….”
이정원의 질문에 회사 어딘가에 있을 대형견 같은 인간이 떠올랐다. 생긴 건 날카롭게 생겨서 헤죽거리던 바보 같은 동갑내기 아이돌 말이다.
뒤따라가던 우리 대화가 들렸는지 류정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며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제완이도 많이 아쉬워했어요. 해신 씨랑 같이 무대 할 기회를 놓쳤다나 뭐라나~ 근데 뭐, 방법이 있어야죠.”
“…제완이 형, 바보. 자기가 래퍼란 것도 잊었어.”
“아.”
류정과 오정오의 대화에 이정원이 깨달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손제완 그 녀석은 얼티밋 나인에서 래퍼를 맡고 있었다.
노래를 괜찮게 부르더라도 보컬이 주제로 나온 경연에선 애매하게 녀석을 내밀진 않을 것이었다. 류정은 꽤 머리를 쓸 줄 아는 리더 같았으니까.
연락을 폭탄으로 받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기니 연습실로 보이는 문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첫 자리인 만큼 편안한 상황을 이어 주려나 보다.
그런데 열린 문틈으로 시끌시끌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 주려던 게 아니었나?
“해신아!”
“야, 야! 손제완! 어딜 튀어 나가!”
“아, 형이랑 정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저 둘이랑 있는다고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쟤가 왜 여기 있지. 연습실 안에는 손제완을 포함하여 얼티밋 나인의 나머지 멤버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쪽수로 밀어붙일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