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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37화 (236/328)

237화

숙소로 돌아온 이후였다. 각자 흩어진 상태에서 이정원과 방으로 들어갔다.

불길하게 왜 저런데. 연습실에서 보인 모습 이후로도 밴 안에서 창밖만 바라보던 녀석이 떠오른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적당히 도망쳐 볼까 싶어서 문고리를 잡으려고 했다. 손을 막 얹은 타이밍에 맞춰 침대에 앉아 있던 이정원이 입을 열었다.

“아까 대표님이랑 면담할 때 말이야.”

“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피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예전 기억이 하나 스쳐 지나갔어. 내가 번앤유에 있을 때 일이었는데. 회사가 망하던 날, 연습실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거든.”

“어?”

“너도 안 믿기지? 나도 한참 동안 꿈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람 얼굴이 늘 떠오르지 않는 거야. 분명 내 기억 속에서는 이목구비가 모두 보였던 걸로 남아 있었는데 말이야.”

“아, 어…….”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지. 분명 얼굴을 봤었어. 심지어 마지막엔 내 이름을 부르며 사라진 것까지 생생해. 뭐, 이건 둘째 치고. 대표님이랑 얘기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해지더라? 누가 뭘 뿌린 것처럼 흐렸던 기억이 또렷해졌어.”

“…그, 나 나가 봐도 될까?”

적당히 말을 끊고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내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랑 신해신, 네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거야?”

“…….”

망했다. 아무래도 메모리 서칭 엔진의 동화 효과가 이정원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던 모양이다.

강태오는 어물쩍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저긴 그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이정원이 확신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일단은 잡아떼 보기로 했다. 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없었으니 말이다.

“…무슨 헛소리냐. 너, 꿈꿨어?”

“흐음, 그렇게 나오시겠다?”

“…뭐가.”

“분명 너야. 아주 잠깐이었지만 들었던 목소리도 똑같았어. …너, 금방 보자고 했던 게 이런 의미였어?”

할 말이 없었지만 말리면 안 될 노릇이었다. 메모리 서칭 엔진은 어떻게 설명하며, 시스템의 존재는 어찌 보여 주냐는 문제가 있으니까.

먼 훗날 모든 걸 클리어하고 난 뒤 멤버들이 안정을 되찾으면 설명해 줄 마음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런 식으로 알리는 건 계획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정원이었다. 그 선을 더욱 철저히 지켜야만 했다. 지금도 허구한 날 위험한 짓 하지 말라며 사람을 훼방 놓는데.

아이템이니 스탯이니 코인이니 하는 걸 알게 된다면 사사건건 태클을 걸 게 분명했다.

정신 차리자. 지금까지 겪었던 위기들을 떠올리며,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뻔뻔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내가 평소에 자잘한 것 해결을 잘하니까 무슨 슈퍼맨처럼 보이기라도 했나 봐. 미안한데 그런 능력까진 없거든. 그리고 그런 귀신이 있으면 내가 다 불러보고 싶다. 적어도 그 사람은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정돈 알 거 아니야.”

“…진짜 네가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야, 내가 어딜 봐서 귀신이냐. 나 주민등록번호도 멀쩡하게 존재하는 사람이거든. 등본 떼어 줘? 그리고 너, 웃긴다. 너랑 나랑 만난 지가 얼마나 됐는데.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잖아. 나였으면 유어돌 때 복도에서 만나자마자 얼굴을 떠올렸겠지. 하도 붙어 다니니까 그 기억 위로 덧씌워진 거 아니야? 쯧, 우리도 떨어져 있을 때가 되긴 했나 봐, 이정원이 이런 헛소리하는 걸 보니까.”

“…….”

…통했나? 내 말을 들은 이정원이 고개를 숙였다. 혼란스럽단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틈을 타 손에 고인 식은땀을 닦아 냈다.

적당히 우기면서 그때그때 떠오른 일들로 앞뒤 문맥을 채워 넣은 것이었는데. 그간의 사건들로 위기 대처 능력이 상승했는지 나름의 타당성은 부여한 듯하다.

여길 빠져나갈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무엇보다 저런 상태의 이정원은 혼자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놈을 배려해 주는 척 쉬다 나오라며 문고리를 돌렸다. 닫혀 있던 방 안의 텁텁한 공기가 아닌 거실의 탁 트인 광경이 보이자 속이 다 시원해졌다.

“아무래도 머리가 복잡할 것 같은데, 일단은 쉬고 있어. 그리고 저녁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려 줘. 대표님이랑은 나도 한번 만나 볼 테니까. …뭐, 방법은 있겠지. 생각보단 그 녀석, 구멍이 많아 보였잖아.”

“어, 그래…….”

그렇게 홀로 남은 이정원을 두고 방문을 닫았다. 탁- 등 뒤로 가로막힌 벽 하나에 긴장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 큰일 날 뻔했네.”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머리를 헤집으니 위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간에 여긴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큰일인데?”

새로 터진 사건으로 당이라도 떨어졌는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지나가던 윤명이다. 됐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으니 호기심이 담긴 멍한 눈이 나와 내 뒤쪽의 방문을 쳐다본다.

“정원이 형……. 형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던데…….”

“별거 아니었어. 그리고 잘 끝냈으니까 네 방에 가 있어, 명아.”

“흐음…….”

다들 안 그러는 척 예민해서 틈을 보이면 안 됐다. 그냥 숙소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 요소였다.

어차피 해야 할 것도 있었는데. 분위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던 권혜성과 이유준이 모자를 챙겨 쓰는 나를 돌아본다.

“형? 또 어디 가?”

“회사. 아까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그거 아직 다 못했어. 마저 하러 다녀올게.”

“해신이 형이 우리 중에서 제일 바쁘단 말이야.”

“됐네요.”

권혜성의 능청 아닌 능청에는 손사래를 치며 숙소 바깥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이 비는 매니저 한 명을 호출해 놓은 뒤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나갔다.

가장 먼저 할 건 서도경을 만나서 알아낸 정보들을 알리는 것이었다.

* * *

박재민이 운전해 주는 밴을 타고 회사에 도착해 서도경과 긴급 미팅을 가졌다. 이젠 사건이 터지든 말든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서도경이 보인다.

“이건 또 어디서 알아낸 겁니까?”

“출처는 서로 안 물어보기로 합의된 거 아니었나요?”

“흐음. 신기해서요. 정보원을 붙인 나도 아직 여기까진 못 들어갔거든요. 누굴 쓰는 거예요, 도대체? 신해신 씨만 쓰지 말고 저한테도 좀 소개해 주시죠.”

미안한데 댁 앞에 앉아 있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는 형편이었다.

“드러나길 원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 그렇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에요. 전 합법만 씁니다.”

…아마도. 시스템과 코인 그리고 아이템이 불법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냥 법에 들어가 있지를 않겠지. 나는 전부 대가를 치르고 쓰고 있었다. 과거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쫓아다닌 기억이 떠오르지만 그건 애써 넘기며 부정했다.

여태까지 알게 된 사실들을 전달하니 서도경이 재밌단 표정을 지었다. 서류라고 준비할 것도 없어서 아무 종이에 볼펜으로 휘갈겼던 상황으로 지렁이처럼 흩날리는 글자들을 보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정원 씨가 블릭투의 최한성이란 사람이 했던 짓들을 덮어쓴 거다? 이건 당사자에게도 들었으니까 넘긴다 치고. 문제는 그 증거를 잡는 거였는데,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있다, 이거죠? 그것도 연애했다던 상대방?”

“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닐 것 같아서요. 전 회사 대표나 관계자들, 혹은 같이 연습했다던 연습생들은 찾아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여기가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서도경이 뒤에 서 있던 한지헌을 불렀다. 한지헌은 들고 있던 노트북을 펼쳐서 내 쪽으로 보여 줬다.

“그새 뭘 알아보셨어요?”

“신해신 씨한테는 못 당할 바지만요.”

한지헌이 보여 준 화면에는 이정원의 전 회사, 즉 번앤유 관련 자료가 담겨 있었다. 논란이 터지자마자 회사부터 알아봤던 건지, 사업장 관련부터 대표와 기타 관계자 라인까지 꽤 꼼꼼한 내용들이 이어져 있었다.

“대표는 현재 연예계에 종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관계자라고 해도 극소수인데 대다수가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것 같고요. 데뷔조라고 했던 연습생들도 뿔뿔이 흩어진 걸로 추정됩니다만, 일부는 타 회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이쪽은 영 그른 것 같죠.”

“번앤유 대표는 현재 해외에 거주 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음, 그래서 증언으로 일을 해결하겠단 기대는 전혀 없던 상태였는데, 신해신 씨가 재밌는 인물을 하나 알아 왔어요.”

서도경의 말 뒤로 한지헌이 추가적인 사실들을 알려 줬다.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저 사람이 조사한 거니까 사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라면 모를까 현재 상황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로선 기겁할 일이다.

여기는 시스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초능력이라도 있었지. 서도경 이 사람은 평범한 인간일 텐데. 굳이 따지자면 귀신보다 더 귀신같은 인간이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어요?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둘 다 놀란 거로 치죠. 이럴 시간도 없어요. 정원이 녀석이나 3차 경연 생각하면 서둘러야 합니다.”

“좋아요. 곧바로 조사 들어가 보죠. 혹시 그 여자분 인적 사항은 없겠죠?”

“…거기까진 저도.”

과거의 이정원과 만나느라 놓쳤던 유일한 부분이었다. 다소 방대한 규모에 서도경이 입을 가렸다.

이정원을 만나지 말고 최한성이나 쫓아갈 걸 그랬나? 아니, 그 어린 녀석이 아이돌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계기가 되었다면 다시 돌아가도 이정원과의 만남을 선택했을 거다.

정보를 주긴 줬으나 뭔가 애매한 것 같아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번뜩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핸드폰. 분명 대표의 방에서 최한성의 사고 서류를 촬영했었다. 돌아와서 그 파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미뤘던 게 떠올랐다.

아직도 있으려나. 한지헌에게 지시를 내리는 서도경을 훔쳐보다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패스워드를 누르고 갤러리에 들어갔다.

…있잖아? 최근 촬영한 파일 위로 처음 보는 폴더가 생성되어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제약이 있던 건지 파일이 전부 깨졌단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서도경을 불렀다. 한지헌과 대화를 나누던 서도경이 의문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 또 재밌는 게 나왔나 보네요?”

“재밌다기보단, 도박입니다.”

깨진 이미지 파일을 클릭한 후 서도경을 향해 내밀었다.

“이 파일, 데이터 복구가 가능할까요.”

버그니 로딩이니 업데이트니 하는 걸 보면 시스템도 결국은 데이터 중 하나였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는 데이터 복구라는 기술이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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