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다른 팀의 무대를 위해 세트 정비에 들어간 시간이었다.
크라운 게임은 무대를 보는 타 그룹 멤버들의 리액션을 별도로 선정하여 촬영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스태프가 해당 그룹을 부르면 녹화를 위해 세팅해 놓은 장소로 이동하여 무대를 보는 형식이었다.
덕분에 대기실에서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서 좋았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가 있는지 살펴봤지만, 스태프 경험이 있던 내 눈에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박재민이나 오병은 혹은 회사 스태프들에게 확인을 요청해 놨었다. 뭔가 수상한 기계가 보인다면 신호를 보내 달라고 말해 놓은 것이었다.
별말이 없는 걸 보니 여기가 안전지대임은 확실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작전을 짜는 데 이곳만 한 공간이 없었다.
“무대랑 리액션 촬영까진 두 타임 정도 남네.”
전달받은 스케줄에 따라 다음 일정을 확인했다. 멤버들은 세트가 지어지고 있는 현장 모니터를 보거나 팬들의 반응을 살피는 등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해야 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원겸]
지원겸,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해 놔야 했다. 아침부터 귀찮게 군 것도 있는데, 앞서 유닛 미션에서 실수가 나온 것까지 생각하면 미리 어르고 달래 놔야 했다.
“나중에 귀찮아질 바에야…….”
미리 힘들고 말지. 멤버들의 관심사가 멀어진 걸 확인하며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다.
[멘토님, 아까 무대 봤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대 엄청 좋았다고 멤버들이랑 얘기했어요. 그럼 본무대도 응원할게요.]
당장 답이 오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수위의 코멘트를 보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지원겸을 완전히 파악 못 하고 있었나 보다.
지이잉- 내려놓으려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누가 봐도 지원겸, 그 사람이었다.
[야, 신해신, 너네 지금 자유롭지. 복도 가장 왼쪽 구석에 있는 화장실. 거기로 와라.]
아, 괜히 보냈다. 천하의 지원겸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선 주변 시선 정도는 신경 쓸 줄 알았는데. 만남을 요청하는 문자 메시지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다.
“…얘들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온다.”
만남을 거절하면 보일 뒤끝이 블릭투 놈들에 대한 것보다 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착잡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응~ 다녀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권혜성을 보자 속이 쓰렸다.
나는 지금 잔소리와 더불어 하소연을 들으러 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 * *
“왔냐.”
“네.”
대기실과는 제법 거리가 떨어진 복도 구석의 화장실이었다. 스태프들은 녹화로 인해 모두 현장에 가 있었던 터라, 인근 몇십 미터 내외로 사람이 안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면대에 기대 서 있는 화려한 차림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나를 불러낸 원흉, 지원겸이었다.
왔냐며 말을 걸면서도 내 뒤로 손을 뻗어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곤 자연스레 몸을 돌려 화장실 칸을 하나씩 열어 봤다.
탕- 탕- 탕- 탕- 모두 텅 빈 걸 보고 나서야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철저하기는. 저 거친 성격으로 연예계에서 문제없이 살아남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마이크는?”
“떼고 왔어요.”
“역시, 내가 제자 하난 잘 뒀지.”
“아, 예…….”
팔짱을 낀 지원겸을 보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혹시 모르니까 목소리는 좀 줄인다? 문이 잠긴 걸 알면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낮게 깔린 지원겸의 목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괜찮아요.”
“뭐?”
“이럴 거 같아서 문 앞에 청소 중이라는 팻말 세워 뒀어요.”
화장실을 들어오기 전, 옆에 있던 청소용품 전용 사물함 속에서 발견했던 물건이었다. 청소 중이라고 하면 쉽게 다가올 생각을 못 할 것 같아서 문 바로 앞에 펼쳐 두고 왔다.
“…오, 신해신. 제법 한다?”
별로 칭찬 같지는 않아서 기쁘진 않았다. 그저 본론부터 얘기해달라며 재촉하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부르신 이유 좀 알 수 있을까요. 참고로 전 미리 이실직고했어요. 그러니까 좀 봐주세요. 멘토님이라고 해도 이러셨을 거잖아요.”
“야! 내가 그런 걸로 널 불렀을 만큼 속 좁은 사람처럼 보였냐!”
“쉿, 쉿……!”
“아, 괜히 너 때문에 욱해서…….”
목소리가 커진 지원겸이 머리를 헤집으며 벽에 기댔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화풀이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너희 일이랑 우리 무대랑은 상관없지. 그 자식들이랑 같이하게 된 건 우리가 운이 나빴을 뿐인 거고. …김가온, 진짜 이 똥손.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거나 좀 들으려고 불렀어. 그리고 우리 무대 괜찮았냐? 객관적인 평가도 좀 필요했거든. 나도 대충 상황 파악은 해 가면서 경연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보아하니 지원겸은 이번 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이 궁금했던 것 같았다. 거기에 내가 무대를 잘 봤다고 말하니 전반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거야 내가 벌여 놓은 일에 비하면 약소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아주 조금은 성질을 낼 줄 알았는데. 지원겸의 호구력에 대해선 다시 한번 인정했다.
그러곤 이거라도 사실대로 말해 주자며 입을 열었다.
“인터넷에 게시된 거 전부 진실이에요. 정원이가 뒤집어썼던 겁니다. 둘이 잠깐 같은 소속사에 있었다나 봐요. 크게 악연이랄 것까진 없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정원이를 안 좋아한 것 같던데요? 또 사측으로 얽히니 겸사겸사 여길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처음엔 증거가 없어서 좀 난처했는데, 운 좋게 관계자를 구했어요.”
블릭투 최한성의 전 여친. 서도경이 직접 알아봐 준 거였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거길 통해 자료를 풀고 여론을 살살 돌렸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거죠.”
너무 생략했나? 하지만 이보다 자세한 건 말해 봤자 믿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내가 시스템을 통해 이정원과 최한성의 과거를 봤고, 거기서 자료를 얻어 현실에서 풀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만 바보 되는 거겠지. 차라리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앞뒤도 맞고 이해시키기도 좋았다.
“그거 순 머저리 아니야? 보니까 일 벌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던데. 어떻게 아이돌 할 생각을 했대?”
“집에 돈이 좀 있던 것 같던데요.”
“하긴, 1년 넘게 안 들켰으면 세탁한 거겠지. 근데 양아치 근성은 못 버려서 지가 지 무덤 판 거였군.”
짧게 줄인 설명에도 지원겸은 만족스러워했다. 진짜 궁금해서 날 불렀던 건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내겐 잘된 일이었다. 영락없이 한동안은 눈치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데에서 마음이 관대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됐어, 그럼. 나름 내가 너희 멘토였잖아. 제자들이 억울한 일에서 해방됐으면 만족해. 어때, 나 좀 존경스럽냐?”
“…어, 약간요.”
“앞에 그 공백은 뭔데. 그리고 약간? 여기서 약간이란 말이 왜 나와.”
화려한 얼굴로 저렇게 껄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니 신뢰가 팍팍 떨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힘들어지겠지. 이미 충분히 지쳐 있던 나로선 주제를 돌려야만 했다.
“평가 듣고 싶으시다면서요.”
“맞다, 그거 중요해. 우리 지금 무대 두 개 중 하나가 가관이거든? 태서랑 선빈이 자식이 잘하면 뭐 하냐. 한쪽에서 이미지고 무대고 난리를 쳐 놨는데. 아무리 지네 그룹 멤버가 논란이 터졌어도 무대는 제대로 했어야지. 나 멘탈 무너졌어요~ 티를 이렇게 낼 줄은 몰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랩 포지션 경연에서 가사를 절어? 그거 그냥 점수 포기하겠다는 뜻 아니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원겸은 꽤 열받은 것처럼 보였다. 삐딱하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보아 달래는 척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1위를 받자마자, 바로 떨어지게 생겼네. 내가 티를 내서 애들이 가만히 있을 뿐이지, 지금 무대 나간 두 놈도 스팀 올랐어. 안 할 수 있던 실수였는데 난 거라 열받는다더라.”
“안 할 수 있던 실수요?”
“어, 경연 중간에 다른 생각한 것 같다던데. 훤히 보였대. 선빈이 놈 그런 건 기똥차게 맞추니까 아마 맞는 말이었을 거야.”
아무래도 블릭투의 유닛 출전 멤버는 최한성 사태로 혼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원겸의 말이 맞는 거였다.
팬덤이고 인터넷이고 다른 건 제쳐 놓은 뒤 경연에 집중했어야지. 실력만 제대로 보였더라도 최한성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과 기타 그룹 이미지 정도는 회생이 가능했을 것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회사 탓인가. 숲을 보지 못한 나무들이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음, 일단 죄송합니다.”
“야, 너한테 사과받으려고 불러낸 거 아니랬잖아. 내 말 뭐로 들었냐!”
블릭투에겐 미안한 점이 없었지만, 괜히 우리 사건에 끼어 손해를 입은 지원겸에겐 미안하다고 말했다. 당사자는 됐다고 했으나 나도 나름 양심은 있는 인간이었다.
“평가 말씀하셨잖아요. 진짜 솔직히 말하면 실수 빼고 인클루 선배님들 무대로는 팬덤도 네티즌들도 문제 제기 안 할 것 같은데요. 유준이 녀석 반응만 봐도 그건 확실해요.”
“뭐야? 지금 나 달래 주는 거야? 그나저나 이유준, 이 자식……. 장한데?”
이건 아부가 아닌 진실이었다. 블릭투 걔네가 흙탕물 튀겨서 그렇지, 인클루의 출전 멤버들에겐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공태서는 아이돌 서바이벌에서 멘토까지 했던 실력파였고, 박선빈은 보컬과 랩 모두가 가능한 인클루 대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적지 않은 연차로 롱런하는 그룹은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라이브를 고집한 자존심도, 인클루의 대담하면서 획기적인 연출도 한참 후배인 내가 봤을 땐 아쉬운 점이 없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지원겸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앞으로 흘러갈 방향을 예상하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해 줬다.
“우린 3위일 가능성이 크니까. 아마 유닛에선 너희 아니면 김환준 그 자식네가 1등 하겠지. 태서랑 선빈이가 잘했어도 팬덤 상관없이 실수가 나온 무대는 이겨 내기 힘든 법이고. 그럼 남은 건 본경연인데…….”
지원겸은 유닛 점수를 과감히 포기한 것 같았다. 본경연에서 판을 뒤집겠다며 다른 팀의 무대들을 추측했다.
“얼티밋 나인이 이번에 이를 갈았더라. 하긴 걔네랑 원더보이즈 그 두 그룹, 초반부에 무진장 치였으니까. 재수 없으면 영락없이 우리랑 디레스트 놈들이 끌려 내려가게 생겼는데. 야, 신해신. 이쯤 되면 우리 불쌍하지 않냐.”
“…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래. 성큼 걸음을 내디딘 지원겸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얘기 좀 해 달라고. 너희 도대체 무슨 컨셉이냐? 그 노래를 어떻게 할 건데?”
눈에 담긴 장난기를 보고 깨달았다. 이 인간, 진짜 목적은 이거였구나.
지원겸이 나를 불러낸 이유는 하소연도, 사태 파악도, 객관적인 평가도 아니었다. 그냥 지가 궁금해서 시간 때울 겸 나를 불러낸 것이었다.
낚였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두통이 일었다. 어느새 지원겸은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