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정소윤 [은비야, 유닛 무대 애들이 부셨다. 티위터 봤어? 진짜 장난 아니야.]
박은비 [ㅁㅊ]
박은비 [역시 나도 갔어야 했는데 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박은비 [나를 광탈시킨 엔넷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박은비 [크라운 게임 제작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박은비 [그래서 뭐 했는데 어떻게 햐ㅐㅆ는데 소윤아ㅏ 말 좀 해줘 ㅠㅜㅠㅜㅠㅠ]
유닛 무대가 모두 끝난 이후였다. 은비에게 간단한 사정 설명을 해 주자 연락이 밀려 들어왔다. 실시간으로 티위터를 서칭해 보고 있었는지 이런저런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사이 새로운 무대에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박은비 [소윤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애들 안지하 노래했다는 거 진짜냐고!]
박은비 [소윤아 소윤ㅇㅏ ㅜ 나 피말라~~~~]
박은비 [얼티밋 류정이랑 오정오 나왔다던데 해신이랑 정원이랑 합 좋았어? 보컬 부셨다던데 리얼 퍼포도 같이 했다던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ㅠㅜㅠㅜㅠ]
박은비 [블루스 풍이라니 비라니 물이라니! 무슨 소린데 ㅠㅜㅠㅜㅠㅠㅠㅠ]
정소윤 [어…. 그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보다 일단 본경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간단한 답신만 남겨 놨다.
정소윤 [은비야, 미안한데 지금 녹화 다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내가 쉬는 시간 되면 바로 연락해 줄게. 미안해!]
박은비 [어? 어, 어…! 재밌게 보고 와 ㅠㅜㅠㅜㅠㅜㅠㅠ]
미안한 마음으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스태프의 외침을 들은 찰나였다. 새로 꾸려진 세트장을 보며 본경연에 대한 추측을 해 봤다.
커다란 3면의 스크린 앞으로 4개의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중앙을 비워 놓은 상태에서 뒤쪽으로 배치된 상황이다.
첫 번째 구역에는 흔들의자가 있었다. 흰 꽃의 줄기가 의자 주변을 타고 올라가 화사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바닥에 깔린 꽃잎들과 의자 뒤로 세워진 나무 한 그루까지. 전체적으로 포근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었다.
두 번째 구역은 초목으로 꾸며진 숲처럼 보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이어지고 있었다. 가지마다 끝에 달린 종이 몽환적이다.
세 번째 구역은 조명으로 인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색의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천이 휘날리며 단풍나무를 가렸다.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마치 노을 같기도, 불꽃 같기도 했다.
마지막 네 번째 구역은 온통 새하얬다. 세 번째 구역보다 훨씬 하늘하늘한 재질의 천이 사방으로 깔려 있었는데, 천장에 매달린 흰색의 조형물과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눈가루가 마치 한겨울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사계절 같네.”
가운데의 단상을 제외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 마치 계절이 변하는 시간처럼 보인다.
“분위기가 되게 밝다. 원더보이즈인가?”
“세트 화려한데? 돈 좀 쓴 듯.”
주변에서 이어지는 말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전체적으로 출연진들은 딥하거나 파워풀하거나 영한 컨셉을 자주 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신비로운 느낌도 들기는 하는데. …잠깐, 신비로움? 거기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우리 애들, 감성적인 것도 잘할 것 같은데.”
하이사인이 새로운 컨셉에 자주 도전한다는 점이었다. 그때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다급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 구석에서 해당 무대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애들이다! 아무래도 내 추측이 정답이었나 보다. 데뷔 때가 떠오르는 흰색의 의상을 입은 해신이와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간단한 인사를 통해 본격적인 경연 준비에 들어가고, 각자 흩어진 멤버들이 정해진 자리에 위치했다. 단체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던 하이사인답게 이번에도 뭔가 재밌는 모습을 보여 줄 것 같았다.
시작은 어둑한 무대 위 중앙의 스크린이 빛을 발하는 것부터였다. 낡은 도화지 위로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과 글귀들이 떠올랐다.
[Endless love]
무언의 종소리와 함께 첫 번째 구역의 조명이 켜졌다. 마림바가 화음을 쌓아 가고 흔들의자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청명하면서도 깨끗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보컬, 이건 윤명이다. 리드미컬해지는 음악에 따라 몸을 돌리며 안무를 췄다.
그 앞으로 어디선가 튀어나온 남녀 무용수 둘이 춤을 췄다. 꽃잎을 밟으며 뱅글뱅글 도는 듯한 몸짓이었다.
여자 무용수의 스커트가 퍼지는 광경 뒤에서 윤명이 한 걸음 내디뎠다. 이제 보니까 윤명은 무용수들처럼 맨발로 스테이지 위를 걷고 있었다.
- Endless love
믿니 영원한 사랑이란 것
Endless love
너와 나 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첫 번째 구역을 한 바퀴 돌아 사라진 무용수들 너머로 권혜성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나무 뒤에서 남자 무용수가 하던 동작을 이어 윤명에게 손을 뻗는다.
- 용기를 내 봐
그 숨겨둔 마음을 꺼내 줘
고이 아껴 둔 예쁜 선물을
내게 전해 줘
둥, 둥, 탁- 일정한 박자로 떨어지는 리듬에 맞춰 선이 부드러운 안무를 췄다. 남녀 무용수 둘의 춤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길게 이어지는 팔 너머로 어깨를 돌린 윤명이 권혜성과 반대되는 동작을 한다. 거울을 보는 것같이 움직이던 둘은 이내 같은 곳을 돌아봤다. 두 번째 구역이었다.
팟- 새롭게 켜진 조명 아래엔 흐드러지는 그림자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렁이는 햇볕에 따라 얇은 가지가 흔들린다.
그와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종들이 일제히 엷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나무 아래의 남자, 이정원이 스텝을 밟으며 독무를 췄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밟으며 턴을 하는 사이, 첫 번째 구역에서 합류한 윤명과 권혜성의 이정원의 뒤로 붙었다.
윤명의 고음과 권혜성의 저음을 받아 풍성한 하모니가 만들어진다. 힘이 있는 미성이 신비로우면서도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면
그 한걸음 앞에 나타나는 건
지금보다 더 큰 행복
I want you to be happy
그런 이정원에게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하나 있었다. 초목 사이를 걸어가며 싱잉 랩을 하는 멤버, 이유준이었다.
특유의 저음을 살짝 끌어올려 화음을 맞추고 있는 윤명과 권혜성의 보컬 사이를 파고든다.
- Endless love
기다리고 있어
네 마음을 보여 줘
영원히 함께할래
그러고는 그대로 셋과 합류하여 넷이 된 대형을 선보였다. 원래라면 싸비였을 파트를 기본 벌스처럼 편곡했다. 원곡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왜 좋은 거지? 낮게 깔리는 신디사이저의 멜로디가 이유준의 목소리와 어우러진다. 귀로 박혀 드는 미디엄 템포의 비트가 고개를 까딱이게 만들었다.
부드럽게 뻗어지는 팔다리와 길게 이어지는 천 장식을 단 의상이 펄럭이며 스테이지를 가득 채웠다. 사부작사부작, 맨발이 바닥에 깔린 나뭇잎들을 흩어지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그때, 핸드 마이크를 든 이유준의 흰 팔이 한 곳을 향해 손짓했다. 저건 세 번째 구역을 가리키는 동작이었다.
- Endless love
부정하지만 말아 줘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는걸
내게 다가와 I trust you
주홍빛 조명 아래에서 의상이 물든 강태오가 천개를 걷으며 등장했다. 등장과 동시에 높게 치닫는 파트를 부르며 안무를 춘다.
평소의 진성이 아닌 가성과 진성을 이어 가며 본래라면 싸비였을 구역을 이어 간다.
손가락을 펼쳐 얼굴 훑어내리는 동작 이후로 측면에서 엇갈리듯 나타난 문채민과 합류했다. 핸드 마이크를 든 차분한 얼굴의 문채민은 객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Endless love
널 기다리고 있었어
Endless love
내 인생의 반은 너니까
서로의 파트에 더블링을 깔아 주며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데, 그사이 세 번째 구역에서 이동한 멤버 넷이 강태오와 문채민의 뒤로 나타났다.
어느덧 여섯이 된 멤버들은 군무를 선보였다. 구역 위로 쏟아지는 단풍잎을 맞으며 동선을 변경하는 중이었다.
- 시간이 흐르고 지나도
너의 그 사랑은 빛바래지 않아
- 불안하다면 기다려 줄게
그게 바로 내 사랑이니까
허밍을 까는 윤명과 강태오의 보컬 아래로 권혜성이 중간중간 애드리브를 넣었다. 계절로 치면 가을이 막 끝나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전체 멜로디의 변주가 진행됐다. 종소리가 들리며 중앙 스크린에 있던 화면이 번쩍거린다.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이 이어졌다. 온통 새하얗게 물든 설원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네 번째 구역 위의 조명이 밝혀졌다.
- Endless love
기다리고 있어
네 마음을 보여 줘
영원히 함께할래
쏟아지는 눈을 맞은 신해신이 객석 앞으로 손을 뻗으며 나타났다. 평소 허스키하다고 생각한 음색이었는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처연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무언의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은 씁쓸한 얼굴이었다.
어느덧 중앙 스크린을 비롯하여 스테이지 3면을 감싸고 있던 모든 스크린이 희게 물들었다. 신해신은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딛는 중이었다. 그대로 스테이지의 중앙까지 걸어들어왔다.
네 번째 구역에서 내리던 눈이 전체로 쏟아진다. 딸랑- 딸랑- MR 너머 깔린 종소리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음악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모든 멤버가 모여들었다.
- Endless love
부정하지만 말아 줘
-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는걸
내게 다가와 I trust you
(la la la la la)
윤명과 이정원의 성량이 무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문채민과 이유준은 보컬에 맞춰 더블링을 깔아 주며 몸을 움직였다.
둥글게 선 상태에서 펄럭이는 의상에 맞춰 턴을 한 멤버들이었다. 나풀거리는 천과 손동작들이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는걸
왜 모르니 겁먹을 건 전혀 없어
내가 너를 모를 리 없잖아
강태오와 권혜성의 주도하에 순식간에 이뤄진 대형 이동이었다. 양쪽으로 3명씩 갈라진 상태에서 가운데에 서 있던 신해신이 팔을 들어 올렸다.
어느덧 무대 중앙의 흩뿌려지던 눈은 그친 상태였다. 무대 뒤편 설치된 네 개의 구역에선 각 컨셉에 맞는 모티브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윤명과 권혜성이 나타난 첫 번째 구역에선 흰 꽃잎, 이정원과 이유준이 나타난 두 번째 구역에선 초록빛의 나뭇잎이었다. 강태오와 문채민이 나타난 세 번째 구역에선 붉은 단풍잎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신해신이 있던 겨울의 풍경에선 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그 꿈에 발을 실어 내게 다가와 줘
우리 둘은 함께야
Endless love
점점 잔잔해지는 멜로디 위로 신해신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계절을 표현한 무대 앞에서 마지막 포즈를 취한 멤버들 위로 새하얀 조명이 반짝거렸다.
거기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크라운 게임의 최대 수혜자가 하이사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애들의 실력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