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관객이 모두 빠진 녹화장이었다. 열댓 시간은 훌쩍 넘긴 녹화로 모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메인 MC인 안지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스탠바이 하고 있는데 대각선 방향으로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눈만 돌려 확인하니 김환준이 여길 보고 있다.
“되게 부담스럽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정면을 응시한 이정원이 속삭이듯 말을 건다. 귀신같은 놈. 이젠 완전히 페이스를 찾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너, 저기에 말 안 해 줬구나? 우리 무대?”
“내가 그걸 왜 알려 줘.”
“의외네.”
순간 이정원의 이야기를 듣고 욱할 뻔했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를 악물자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이유준이 웃음을 터뜨린다.
고개를 내젓는 문채민과 멍한 얼굴의 윤명까지. 좋은 녀석들이지만 이상한 구석으로 피곤한 감이 있는 듯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척 고개를 까딱이던 강태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제발 얌전히 좀 있어. 분위기 보니까 아슬아슬한데. 특히 정원이 형, 저기 도발하지 마.”
“예, 예~”
이정원의 무성의한 대답을 들은 강태오가 한숨을 내쉰다. 도발? 이제 보니까 이정원 저 녀석, 아까부터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싶었더니.
최한성이 속해 있는 블릭투 진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섞여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표정들이 좋은 타 그룹에 반해 참담하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카메라의 불이 들어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억지로 짓던 미소마저 그친 채 당장의 상황에 대한 막막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너무 그러진 마. 저 사람, 꽤 욱하는 것 같던데.”
최한성 말이다. 안색이 좋지 못한 멤버들과 대비해 유달리 눈빛이 매서웠다.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놈들이 섞여 있긴 했으나, 특히 건들면 터지는 활화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강태오와 비슷한 조언을 남겼다. 그럼에도 이정원은 어깨를 으쓱이곤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짓는다.
“도리어 그게 더 잘 먹힐 수도 있지.”
“뭐……?”
“도움만 받았으니까. 끝마무리 정도는 내가 한번 해 보려고.”
영문 모를 이정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하다.
나는 굳이 저기가 아니더라도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재밌다는 얼굴로 줄곧 여길 보고 있던 김환준이나, 어이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선 헛웃음을 내뱉는 지원겸, 유닛 무대를 함께한 얼티밋 나인의 류정이 있었다.
류정은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어 보였다. 저건 괜찮은 무대를 한 아이돌로서의 만족감과 짧게나마 나름의 복수를 도와준 동지로서의 동질감처럼 느껴졌다.
블릭투 놈들한테 치여서 경연 초창기에 고생했으니까. 블릭투의 몰락을 구경하는 것이 제법 유쾌한 것 같았다.
대충 수고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그럼 일단 한 놈은 된 것 같고. 류정이 속한 얼티밋 나인이 있던 방향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바로 옆 칸에 있는 건 디레스트였다.
지겹지도 않나, 저 사람. 우리가 대화하든 말든 줄곧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던 김환준이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건지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됐든 알려 줄 이유는 없지만. 사실 이번 3차 경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저기였다.
디레스트, 1차와 2차에선 주변 상황 때문에 고전하는 것 같더니, 대충 문제로 보이는 조건들이 정리되자마자 본실력을 뽐내 온 강자였다.
얼티밋 나인과 마찬가지로 블릭투와 엔넷에게 당하며 치였던 원더보이즈와 유닛 무대를 꾸렸다. 독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 서로는 좋은 지원군이 되어 상당히 좋은 무대를 펼쳤었다.
유닛으로 호감 어린 반응을 이끈 상태에서, 디레스트는 상당히 훌륭한 팀 무대를 보여 줬다.
특히 김환준의 타이트한 래핑과 대니얼이라는 멤버의 쏟아지는 영어 랩은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우리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디레스트가 엄청 치고 올라오겠는데.’
‘나도 같은 생각. 아~ 위험하다, 위험해~’
대기실에서 나눈 윤명과 권혜성의 대화에는 백번 공감하는 바였다. 지금까지 우위를 차지한 팀들을 밀고 올라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내가 이래서 저기에는 힌트 같은 걸 안 줬던 거였는데. 굳이 따지자면 김환준도 내게 자기네 상황을 알려 주지 않았다.
뱀 같은 인간……. 방심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태에서 김환준의 시선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은 지원겸인가. 허, 참나, 하, 따위의 말을 내뱉고 있는 지원겸을 봤다. 팔짱을 낀 자세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저 인간……. 어느 날은 수를 쓰는 데 기가 막힐 정도로 능숙하더니, 또 어느 날은 초등학생만도 못한 짓을 했다. 따지자면 지금 지원겸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래. …저긴 지금 삐졌다. 이유는 내가 이번 무대에 대한 컨셉을 언질 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진짜 초딩인가? 솔직히 말해선 지금까지 동맹처럼 지낸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있었다지만 크라운 게임은 경연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한테 엿 먹은 게 열받아서 도와주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현재는 각자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지원겸은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신기하다는 듯, 또 시작이냐는 듯한 얼굴의 멤버들을 데리곤 불만스럽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사계절? 세트를 네 개로 나눴다고?’
‘정확히는 다섯 개요.’
센터까지. 유닛 무대가 끝나고 불린 장소에선 이젠 괜찮겠다는 마음에 이실직고했었다. 손제완이 뽑은 곡은 난해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한 컨셉이었다.
그런데 지원겸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당곡과 사계절의 연관성에 대해 찾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Endless love, 그거 사랑 노래 아니던가. 그것도 꽤 오래 전에 있던 걸그룹 노래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근데 그걸 계절이랑 어떻게 엮는다는 거야. 거기다가 다섯 군데? …너희 대표, 돈 많은가 보다?’
‘뭐,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고요.’
이번 컨셉 선정에는 많은 공을 들였었다. 아니, 사실 처음엔 컨셉에 대한 방향을 아예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얻어걸린 게 은사님과의 기억이었지.
은사님과 통화를 하며 들은 이야기로 이번 무대에 대한 틀을 정했다. 그게 바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이었다.
가사만 보자면 연인 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우린 그걸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나중에 팬들이 알게 되면 좋아할 만한 포인트였다.
‘…시간 여행?’
‘네, 아마 관객들이 바로 알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 본방송으로 보면 알게 되겠죠.’
우리가 깔아 놓은 복선을.
‘그러니까 네 말은 편곡이랑 무대 세트장 사이, 사이에 소스를 넣어 놨다고?’
‘네.’
‘거기에 그 곡을 정하는 과정을 카메라 앞에서 말했었다고?’
‘네.’
멤버들과 논의하다가 ‘Endless love’에서 말하는 사랑을 연인 간의 사랑만으로 단정 짓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은사님과 통화하던 내용을 모두 알았던 탓이었을까. 이 곡이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본 듯했다.
그래서 정했던 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이었다. 그건 연인 간의 사랑을 제외하고서도 친구 간의, 동료 간의, 또 가족 간의 사랑도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가족이라. 은사님과의 기억을 통해 눈이라는 소재를 추가한 이후였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가사에 맞춰 사계절이라는 흐름이 이어졌다.
거기서 다른 아이디어를 낸 게 강태오였다. 조심스러운 어투로 나를 보며 내 추억을 담는 게 어떠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로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과거사가 밝혀진 이후, 은사님과 주형이 그리고 이모와 이모부에겐 고마운 마음을 표하지 못했던 게 걸렸었다.
간접적으로나마 감사함을 담기로 한 것인데. 솔직히 대중들에겐 감동 포인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약간의 사심도 얹어 편곡을 맞춘 상태였다.
‘…시작할 때, 인트로에 종소리를 넣었거든요.’
‘뭐?’
‘제가 보육원에서 지냈던 건 아시죠? 은사님 책상 위에는 작은 종이 하나 있었는데, 어린 시절 제가 그 소리를 참 좋아했대요. 딸랑거리는 소리만 들으면 울다가도 그쳤다며 아직도 그 종을 갖고 계시는데, 그걸 빌려서 사운드 녹음했어요.’
‘…….’
‘신디사이저 아래로 굳이 클래식 피아노 사운드를 또 깐 건, 어린 시절 은사님 댁에 가면 이모가 곧잘 피아노를 쳐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니더라도 무대 곳곳에는 과거 내 기억과 연관이 있는 소품들이 깔려 있었다.
봄을 뜻하는 세트의 흰 꽃은 보육원 화단에 가장 많이 심긴 꽃을 뜻했다. 봄이 되면 화단이 온통 화사하게 빛났는데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은사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기억이 있었다.
여름을 뜻하는 세트의 숲은 은사님 댁에 놀러 가면 주형이 녀석과 함께 뛰어놀곤 했던 공원 너머의 작은 나무 길이었다. 이모부가 뛰지 말라고 외쳐도 주형이 녀석의 손을 잡고 바닥에 깔린 나뭇잎을 밟으며 달리고 또 달리곤 했다.
가을을 뜻하는 세트의 붉은 조명은 집에 돌아가기 직전 이모부와 함께 보곤 했던 노을이었다. 하늘을 보며 신기해하는 우리에게 노란색과 주홍색으로만 이루어진 무지개 같지 않냐며 말을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거기서 그라데이션이 걸린 천을 걸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 겨울을 뜻하는 세트는.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던, 어느 눈 내리던 겨울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나의 첫 과거.
‘제가 보육원 앞에서 발견된 날, 이름을 지어 부르자마자 눈이 내렸대요. 기상 일보에서도 예정에 없던 눈이었다고, 은사님이 제게 눈과 같이 내려온 선물이라고 해 주셨어요.’
‘…야, 너.’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의 지원겸이었다. 뭐야, 왜 저래? 사실 그렇게 신파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게는 나름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무대였는데. 이걸 같이 꾸려 주기로 한 멤버들에 대한 고마움도 깔려 있었다.
어린 시절 사계절을 함께 보내 준 가족이 은사님과 주형이 그리고 이모와 이모부라면.
‘이제 저랑 같이 사계절을 보내고 있는 또 다른 가족들은 그 녀석들이거든요.’
멤버들. 동료를 넘어선 가족과도 같은 녀석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뭐, 걔네는 여기까진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스테이지인 정중앙을 훤히 비워 놓은 것도 알 수 없겠지. 그건 내 뜻이었다. 앞으로 알 수 없는 미래에서까지 멤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형?”
“아까부터 저기서 무진장 널 보는데?”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지원겸과의 일을 회상하다가 저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새어 버린 듯하다.
…너무 센티멘탈했어. 삐진 것 같으면서도 울컥한 것 같으면서도. 하여간에 좀 복잡해 보이는 지원겸에게는 손 인사를 건넸다.
전부 털어 놨으니까 봐 달라는 신호이기도 했는데, 그렇게 얼마나 더 대기를 하고 있었을까. 드디어 MC인 안지하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결과가 담긴 큐 카드를 쥔 채 모두에게 소리쳤다.
“3차 경연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결과 발표만을 남기고 있는데요.”
자, 이제 어떻게 되려나. 경연은 끝났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나는 이번 프로그램에서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