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며칠에 걸쳐 확인한 본경연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앞에서 유닛 무대로 너무 호의적인 여론을 얻어 이쪽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걱정은 모두 기우라는 듯이 등을 돌렸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이정원이 덮어쓴 억울한 누명이 풀리며 시너지가 배로 터진 모양이었다.
- 하이사인 얘네가 찐이긴 하구나 이 노래면 애들 전부 어릴 때 아니야? 소화 잘해서 개 놀랐네;
- 엄마랑 같이 봤는데 나보다 엄마가 더 좋아하셨음 그때 추억된다고 쟤네 이름 뭐냐고 하셔서 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 강태오가 엄마 첫사랑이랑 닮았대 태오야 보고 있니? ㅎ…
- 어머님 끝내주는 첫사랑을 하셨구나
- ㅁㅊ 부럽습니다
- 나 선곡 보고 놀랐는데 진짜 이걸 해내네; 엔들레스 러브 십년도 전의 노래인데 센스있게 편곡치고 특유의 분위기는 살려서 어른들도 다시 듣더라
- 하이사인 대중픽 가능성 여기서 본 거 나뿐이냐?
- 아니 나도 봄 엔들레스 러브 차트인했더라 ㅋㅋㅋㅋ 그 시절 그 감성 못 이긴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음
- 하이사인 버전 노래도 나왔으면 좋겠다 ㅠㅜㅜㅠㅜㅠㅠ
- 생긴 건 상남자 냉장고 문짝이지만 감성으론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일곱 남자입니다 ㅠㅜ 여러분 어서오십쇼~ 하이사인 많관부 많관부
- 주식 상장 전에 사둔 나 장하다
- 근데 나는 얘네 왜 이렇게 짠하지 ㅜ 무대 준비하면서 앞에선 억까들 상대하느라 진짜 힘들었을 것 같음 뻑하면 까들이 루머 들고 와서 욕하는데 보니까 맨날 조리돌림이더만
- 슈스라 그래 버텨내라 이게 메이저의 맛tv다
- ㅅㅂ 그래도 좀 작작해
- 매번 풀려서 다행이지 솔까 제대로 해결 안 나면 돌 인생 쫑 나는 수준으로 까이잖아;
- 그래서 내가 열심히 피뎊따고 있다고 ㅠㅜㅠㅜㅠㅠㅠㅠㅠ
- 그나저나 진짜 신해신 서사킹이긴 하다 얘 컨셉질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대 기획하는 머리 장난 없음
- 뭐냐 경력직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윗윗익이 존나 나쁘네 넌 가족으로 컨셉질 할 수 있냐
- 이걸로 밀고 나갈 거였으면 유어돌에서 깠다니까 얘들아 우리 생각이란 걸 하고 살지 않을래
- 앞으로 하이사인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욕으로 간주한다. 신해신은 나와 한 몸으로 간주하며 어쩌고 저쩌고
- 근데 진짜 실력으론 못 깜 서바이벌 또 내보낸 이유 있다니까?? 이렇게 잘하는데 맨날 서바 빨이라고 욕먹으면 내가 대표였어도 내보냄 ㅋㅋㅋㅋㅋㅋㄱㅋㄱㅋㅋ
- 포지션 분배 정확한데 멤마다 다 개성 있으면서 팀 화합이 끝내줘 얘네가 어떻게 서바이벌로 모인 팀이지? 그림체 다른 듯 모아놓으면 어울리는 게 쾌감 미침
- 애들 점점 실력 발전하는 것도 보이고 신인 때는 없던 여유 생긴 것도 개좋음 진짜 성장 서사로는 하이사인 돌아버린다니까 영업아니고 찐임
게다가 우리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서사가 담긴 컨셉의 무대를 했었다. 지금까진 조금 도전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엔 기승전결을 담아 연출을 꾸렸던 바였다.
어쩌다 보니 팬들에겐 내가 아픈 손가락 비슷한 포지션이 된 모양이다. 딱히 그 정도로 심각한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쁜 반응은 아니라서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개인 사연을 이용하여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은 있었다. 그래도 굳이 따지면 이걸 먼저 오픈한 것은 블릭투 놈들이었다.
그러게, 누가 멋대로 남의 가정사 들쑤시래? 나야 그렇다 치고 넘기겠는데 은사님네 가족까지 건드린 건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한 이후였다.
와이튜브에 올라간 영상의 조회수도 출연진 여섯 팀 중 상위를 웃도니 이젠 정말 안도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무렵이었다.
본격적인 파이널 준비에 들어가기 위해 회사로 호출받았다.
2차 경연 이후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극소수만이 비밀 회동을 갖곤 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진행이 이뤄지려는지 각 팀에서 믿을 수 있는 소수 정예 인원들이 출동했다.
특히 곡 유출 경험이 있던 A&R 팀은 윤재희와 다른 책임 프로듀서 단둘만이 참석했다.
이번에는 앞의 경연처럼 원곡이 있던 노래를 편곡하는 방식이 아닌 팀 내 자체 제작이라 더욱 경계가 삼엄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총괄인 서도경의 뒤로 항상 보이던 한지헌이 보이지 않았다. 근래 바쁜 것 같긴 했는데. 일단 서도경에게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서 넘기기로 했다.
“자, 그럼 파이널 경연을 앞두고 본무대 준비를 들어가 볼까요?”
서도경의 느긋한 인사로 시작된 회의였다.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내내 멤버들에게선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후보군으로 수급해 뒀다는 노래들의 샘플링을 확인해 보니 각자 자기가 생각해 둔 컨셉과 맞아떨어지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번쩍 손을 들어 올린 권혜성이 꽤 밝은 모티브의 음원 타임에서 눈을 빛냈다. 본인이랑 잘 어울리는 게 뭔지 알고 있는 놈다운 선택이었다.
“저, 이거요! 예전에 윤 팀장님께 말씀드렸던 거랑 딱 어울려요!”
“혜성이, 너. 윤 팀장님이랑 대화한 적이 있었어?”
이건 나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회사에 오면 빨빨거리면서 여기저기 잘 다니는 건 본 적 있었다. 그래도 그 대상에 윤재희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유준의 신기하단 반응을 본 윤재희가 재밌다는 얼굴로 일축했다.
“기가 막히게 캐치하셨네요. 이 곡은 예전에 혜성 씨에게 들었던 의견을 바탕으로 수급했던 노래이긴 합니다. 그런데 파이널에 일회성으로 보이기는 조금 아깝지 않아요?”
“…네? 뭐가요?”
윤재희의 얼굴을 본 권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던 표정 그대로 눈을 깜빡거리는데 거기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안 그러는 척 머리는 잘 쓴다니까.”
“명이 형, 너무 대놓고 공격하는 거 아니야?”
그래, 권혜성. 저 녀석은 지금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이었다. 권혜성이 얘기했던 주제에 맞춰 곡까지 수급해 놨을 정도라면, 윤재희가 말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다음 앨범에서 차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네.”
강태오가 정답을 말했다. 일단 확정 샘플은 아니라서 오늘 파이널 미팅에 들고 오긴 한 것 같다. 그런데 권혜성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니 미리 언질해 주려고 했나 보다.
권혜성 저놈은 그게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밝히기도 애매하다고 느꼈기에 은근슬쩍 발을 빼려 했던 것이고.
하여간에 안 그러는 척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강태오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턱을 괴는 권혜성이었다.
윤재희는 권혜성을 비롯하여 여기 있는 모두가 내용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혜성이, 저 녀석. 언제 그런 걸 해 뒀대.”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길 줄 아는 거겠지. 좋은 일 아니야?”
“그렇긴 하다만, 좀 치사한걸?”
이정원과 이유준의 대화는 무시하기로 한 이후였다.
들리는 음악에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문채민과 윤명과는 눈이 마주친다.
허, 고개를 들어 올린 건 우리 셋뿐만이 아닌 듯했다. 옆에 있던 이정원과 이유준 그리고 강태오까지 비슷한 타이밍에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모두 윤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완성으로 느껴질 만큼 뭔가 허전하게 들리는 음원이었다. 가사도 없고 가이드 녹음도 없는 정말 생 MR이 이상하리만치 모두의 귀를 사로잡았다.
서도경은 윤재희에게 언질을 받았던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마지막 후보군이었던 것인지 멤버들을 훑어본 윤재희가 미팅 룸의 형광등 버튼을 눌렀다.
“다들 마음이 가는 곡이 있으신 것 같던데요.”
“마음이 간다기보다는……. 팀장님, 마지막 곡, 너무 미완성인 것 같습니다만.”
이정원의 질문을 들은 윤재희가 그거라는 듯이 손가락을 펼쳤다.
“이 곡은 그게 핵심입니다. 도전적인 경향이 강해서 여러분의 반응을 살피고 의견을 제시해 보려고 했던 건데. 여러분, 이걸 들으시자마자 뭔가 확 끌렸죠?”
“…저기, 이거 혹시 매시업이에요?”
손을 든 윤명을 본 문채민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 그거였구나!”
“윤명, 쟤. 이럴 땐 눈치가 엄청 빠르네.”
“그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
이정원과 강태오의 혼잣말에 의문을 품은 건 나뿐인 모양이다. 매시업? 매시업이라고 하면 원곡의 노래들을 섞어 새로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완전히 결이 같은 노래가 없었는데. …혹시. 머리를 스치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려 주겠다는 듯이 옆에 있던 이유준이 말을 덧붙였다.
“Night의 코드에 판도라 때 비트를 변환해서 깔고 Rule의 세션을 적용한 거죠? 그런데 중간이 많이 빈 것 같은데요? 혹시 일부러 이렇게 하신 거예요?”
이유준의 입에서 나온 노래들은 전부 우리가 거쳐 온 타이틀들이었다.
“네, 맞습니다. 사실 음악적으로 같은 코드를 사용하되 장르나 악기 조합을 바꿔서 다른 곡이 탄생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게 바로 각 곡의 작곡가들과 협업하여 자체 제작곡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소스는 따오되 메인 멜로디 라인을 통으로 비우고 새로 채워서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무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만. 애초에 이건 모험적인 부분이 컸던 터라 멤버 여러분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이벤트성으로 진행하려 했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거의 만장일치인 것 같네요. 다들 얼굴만 봐도 이게 마음에 드신다는 걸 알겠습니다.”
윤재희의 대담무쌍한 발언에 서도경도 흥미롭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확실히 파이널 무대와는 궁합이 좋은 작전이긴 했다.
소재와 음악적인 색깔도 잘 맞고, 우리가 크라운 게임에 출연하여 얻어 갈 수 있는 혜택과 가장 적합했다.
강제로 출연하게 된 것이긴 했지만, 목표를 하나 갖고 있었으니까.
그게 바로 서바이벌과 회사발로 성장한 그룹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대중들에게 제대로 실력을 각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팬들이 원하는 니즈까지 챙길 수 있는 좋은 선택지가 나왔다. 파이널에서 이 곡으로 무대를 꾸린다면 지금까지 성장해 왔던 과정을 한 곡에 담을 수 있었다.
멜로디 라인을 비운 건 느낌만 가져가되 완전히 새로 만들 생각이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형평성은 맞춰야 하니까 적정선에서 수위를 조절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윤재희, 서도경이 데려와서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고는 보고 있었다. 그런데 2차 경연 이후로 제대로 각성한 모양이다. 투지를 보여서 안심이 됐다.
그때 윤재희가 조금은 파격적인 멘트를 덧붙여 왔다. 여긴 나도 예상하지 못한 구간이라 놀라웠다.
“대신 이곡을 선택하면 여러분이 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정원 씨, 작곡에 관심이 있으셨죠?”
“네? 네, 일단 그렇습니다만.”
“메인 멜로디 작곡 팀에 정원 씨가 참가해 주세요. 그리고 작사는 정원 씨를 제외한 모두가 함께 진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폭탄선언이었다. 그러니까 파이널 자체 제작곡은 하이사인 전원이 참가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될 거란 소리였다.